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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4일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마태오 1,1-25
다 받은 사람이 되게 하시려 오신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은 천사들의 알림을 통해 예수님 탄생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성탄은 무엇이었을까요? 삶을 바꿔주는 놀라운 기쁜 소식이었을까요?
그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고통이고 여전히 어둠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어쩌면 이전보다 더욱 혹독한 박해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는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외부 환경을 변화시켜주지는 못하지만, 이 환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줍니다.
만약 어둠이 없다면 빛을 볼 수 있을까요? 어둠 속에서만 빛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둠이 감사함으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내가 미운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것이 사람이건 사회이건 나라이건 세상이건 상관없습니다.
내가 용서하려면 그것들이 나에게 와서 용서를 빌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럼 계속 미워하며 살아야 할까요? 이 어둠을 어떻게 극복할까요?
더는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됩니다.
최보기 작가의 ‘국수가 우습니?’란 글입니다.
엊그제는 서울과 인천 사이에 끼어있는 부천시에 취재하러 갈 일이 있었다.
오후 2시 가까운 시각이었는데 약속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는 데다 마침 점심을 거른 터라 간단한 분식 정도로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40년 전통 온달 할매국수’란 조그만 간판에서 왠지 모를 내공이 느껴져 그 집으로 향했다.
간판에 쓰인 대로 80세가 넘은 것 같은 백발의 할머니가 주방에서 국수를 끓이고 있었는데
텅 빈 홀임에도 불구하고 손길이 무척 바쁜 게 이상했다.
주방에 주문을 전달한 사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손님, 죄송한데요. 잠시 후면 예약된 단체 손님들이 몰려오실 텐데 괜찮을까요?”
“뭐 어때서요? 식당에 단체 손님 오면 좋은 것 아닌가요?”
“그게요…. 식사를 하시는 분들이 그냥 드시는 분들이라서….”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얼른 이해가 안 갔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잔치국수 한 그릇 먹는데 뭐 이거저거 따질 필요는 없으니까.
가벼운 생각으로 후룩후룩 국수를 먹는데 주방의 할머니가 사내에게 “이제 들오시라고 해”라고 하자 사내가 문밖으로 목을 내밀더니 “들어들 오세요!”라며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일군의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그들은 잠시 전 식당에 들어올 때 봤던, 빈터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
모두가 중장년과 어르신들이었는데 살기 넉넉한 사람들은 아닌 것이 남루한 행색들에서 금방 드러났다.
눈치가 9단이라 절에서 새우젓 얻어먹을 위인인 내가 척 보기에 노숙인이나 가난한 분들에게 제공하는 무료 급식임이 분명했다.
‘아, 그래서 그런 질문을….’
카운터에서 국숫값을 계산하던 나는 기자다운 호기심이 생겨 사내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무료 급식을 하시는 건가요?”
“아, 네…. 정확히 말하면 무료는 아닙니다.”
“그럼 돈을 받는 건가요?”
“그게…. 후원을 받는 거라서….”
“아, 독지가가 계시군요. 날마다 이렇게 하시나요?”
“네, 일요일은 저희도 쉬어야 해서 일요일은 닫습니다.”
“누가 후원을 하는 거예요?”
사내가 잠시 나를 쳐다봤다. ‘누구신데 이렇게 질문을 꼬치꼬치 하시는가?’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저, 실은 제가 신문사 기자예요. 이런 일을 보면 꼭 사정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 직업병이라서요.”
“아, 기자분이세요? 전 또….” 사내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한 10년 전쯤 일이었어요. 그때는 어머니 혼자서 이 식당을 했었죠. 지금은 제가 식당을 물려받기 위해 같이 있고요.
어느 추운 날 오후 늦게 옷을 반듯이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와 칼국수를 시켰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국수를 다 먹은 후에 냅다 도망을 쳤대요. 골목 입구에 파출소가 있으니까
더 다급하게 도망을 치더랍니다.
어머니는 젊은 사람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럴까 싶어 오히려 저러다 넘어져 다치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한 달 후쯤 행색이 초라한 남자가 오후 늦게 들어와 칼국수를 주문하는데 딱 봐도 그때 그 남자였답니다.
어머니는 모른 척하며 칼국수를 내주었죠.
국수 양도 곱빼기로 푸짐하게 넣고, 김치도 큰 사발에 담았답니다.
가만히 보자니 국수 먹는 모습이 몹시 불안해 보여 이번에도 또 도망칠 것이 뻔해 보였답니다.
어머니는 그 남자가 국수를 거의 다 먹었을 때 사내 눈에 안 띄도록 주방에 앉아
‘이번에는 뛰지 말고 그냥 걸어가, 괜찮아. 살다 보면 다 그럴 때가 있어’ 하시고는 화장실 가는 척 주방 뒷문으로 나가셨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들어오니 사내가 안 보이더랍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8년도 지난 재작년 어느 날 풍채가 눈에 띄게 좋은 남자가 양복을 번듯하게 차려입고 들어와 칼국수를 주문했답니다.
국수를 다 먹은 사내가 주방에 계신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여기 막 나올 때라 잘 알죠.”
“어르신,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지요?”
주방에서 나온 어머니는 ‘이 사람이 누군고?’ 하는 표정이셨습니다.
“글쎄요. 모르겄는디라?”
“제가 실은 8년 전 겨울에 여기서 칼국수를 먹고 두 번이나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오늘 국숫값 갚으러 왔습니다.”
“아…. 허허허, 그런 분들이 한둘이어야지라…. 뭐 그럴 수도 있는 건데….”
“제가 그때 두 번째 왔을 때 어르신께서 국수를 다 먹기를 기다리시다가 ‘뛰지 말고 걸어가라. 몸 다칠라.
그럴 때가 있지’라고 허공에다 말씀하시며 자리를 슬쩍 비우셨던 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날 그 말씀 때문에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아들의 말에 따르면 인천에서 가구공장을 하던 그 사내는 뜻밖의 부도를 크게 맞아 경찰과 채권자들을 피해 도망 다니던 신세였는데 그날 하도 배가 고파 어머니 혼자서 운영하는 식당을 골라 들어왔다고 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부도 문제가 해결이 잘 돼 다시 재기할 기회를 얻었고, 죽을힘을 다한 결과 오히려 부도 전보다 회사를 키우는 데 성공을 거둬 어머니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어르신, 비용은 제가 능력 되는 날까지 매달 댈 테니 십 년 전 그때 저처럼 배고픈 사람들에게
국수를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돈까지 대신 낸다는데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걸 거절하겄소.
나도 이제 죽으면 극락에 가고 싶소. 재료비 원가만 대시오.”
그런 인연으로 시작해 오후 2시가 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배고픈 사람들에게 국수를 끓여준 지 벌써 2년이 됐는데, 오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순번을 정해 하루 서른 명 선을 유지하는 질서까지 생겨났다고 했다.
[출처: ‘국수가 우습니?’, 최보기 작가, 블로그 ‘최보기의 책보기’]
하루에 같은 죄를 490번 용서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가 저지르는 잘못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용서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 용서는 어떤 힘으로 이루어질까요? 바로 자신도 부모로부터 용서받으며 자란 사람이고
자신이 부모로서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국수를 먹고 도망쳤던 그 사람은 세상에 대한 원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당연히 그렇게 해도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용서를 받고 나서는 이제 용서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용서받은 것입니다.
오늘 목자들에게 세상은 비정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을 만나게 해준 은혜로운 곳이 됩니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변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이고 성탄을 맞는 자세입니다. 믿음의 변화.
하느님을 받으면 다 받은 것입니다.
다 받은 사람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구유의 그리스도를 만나고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 그분께서 우리 것이 되러 오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4일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마태오 1,1-25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밤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성덕이 출중했던 프란치스코 보르지아가 여행 중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너무 늦은 시각에 머무르기로 약속한 수도원에 도착했답니다.
때마침 세찬 눈보라까지 몰아치니 이빨이 자동으로 딱딱 마주칠 정도였습니다.
너무 늦게 도착했기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는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누구 한사람 문을 열어주러 나오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수도원의 높은 담은 그의 목소리를 가로막았고, 아무리 수도원 주변을 뺑뺑 돌아 다녀봐도 철옹성 같은 수도원 담벼락으로 인해 내부로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는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지새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나긴 밤이 지나고 첫새벽이 되어서야 문 앞에서 꽁꽁 얼어있던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를 발견한 수사들은 너무나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한평생 지난밤만큼 기쁘게 지낸 날도 없었습니다.
지난밤 제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 높은 하늘에서 하느님이 눈송이를 하나씩 제게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길고 긴 밤을 얼마나 포근하게 지냈는지 모릅니다.”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의 일화를 묵상하면서 오늘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아기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자신을 낮춰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신 하느님께서도 허름한 여인숙 방 하나 잡지 못해
찬바람이 만만치 않은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밤, 또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밤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추위에 오들오들 떠시면서 간절히 문을 두드리시는데, 정신없이 잠만 자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또다시 성탄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가장 최종적이자 구체적인 표현인 육화강생(肉化降生)을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성탄의 핵심은 한없는 자기 낮춤이며 겸손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조건 없는 헌신이며 극진한 사랑입니다.
성탄 시기는 생명의 빛, 구원의 빛이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극도로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겸손의 영성, 마구간의 영성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이 은혜로운 시기, 우리 주변을 한번 주의 깊게 둘러보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주변에 아기 예수님께서 홀로 추위에 떨고 계시지는 않는지 살펴보길 바랍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미소하고 가난한 이웃들, 문전 박대당하는 이웃들, 소외된 이웃들,
외로운 이웃들, 가슴 아픈 이웃들, 심한 상처받아 속울음 우는 이웃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더욱 허전하고 쓸쓸한 탈북자 형제들,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되어도 마땅히 오라는 곳 한 군데 없는 출소자 형제들. 살을 에이는 추위를 겨우 박스 한 장으로 막아내며
‘오늘은 어디에 머리를 눕혀야 하나?’ 고민하는 노숙자 형제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성탄 선물(조광호 신부님)
드릴 선물은 없사오나
첫눈이 오면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만발한 우리들의 죄가
흰 꽃잎으로 떨어져 쌓이는
엄동의 빈터에
천도의 열기를 지닌
당신 숨결과
우리들의 눈물을 간직한
눈사람을 만들어
황금과 유향
몰약이 녹아 흐르는 양지 곁에
팔도 다리도 없는
눈사람을 만들어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조광호 신부님)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24일 [성탄 밤미사]
복음: 루가 2,1-14: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나셨다
호구조사의 상황은 요셉과 마리아를 왕도 베들레헴으로 가게 한다. 이곳은 다윗의 왕권이 시작된 곳이다(루카 2,1-5; 참조 1사무 16,1-13). 여기서 마리아, 시온의 딸인 그리고 성령의 거룩한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영원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루카 2,6-7)이 사람이 되어 탄생하신다.
들에서는 “주님의 천사”가 “주님의 영광”과 함께 깨어있는 목동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복음을 전한다.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부활의 명칭). 그 표지는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아기”가 구유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합창이 이어진다. “지극히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여기서 말씀이 전해졌다. 즉 복음화되었다. 목동들이 알아들었고, 아기에게로 달려갔다. 이것이 “오늘”(11절) 모든 사람에게, 가시적으로 영원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령과 함께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참으로 거룩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 위에 죽으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시며, “하느님의 일”을 행하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사셨고, 그러므로 그분은 참으로 탄생하셨다.
성탄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깊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해 생각해 볼 것이 있다.
* 무덤에서 옛 시간의 날이 끝나고, 새로운 “날”, “낮”, “오늘”이 시작된다. 탄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날은 무덤에서 지지 않는 날로 시작되며, 탄생에서도 그렇다.
* 같은 인격(위격)이 “살아 계신 분”으로 무덤에서 나오셨다. 때문에 탄생에서도 “살아 계신 분”으로 태어나셨다.
* 수의로 싸여 무덤에 모셔졌다. 탄생에서도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우셨다.
* 무덤에서 인간으로서 신적 생명으로서 나셨다. 때문에 그분의 탄생은 즉 인간이 되신 것은 무덤을 위한 것이다.
생명에로 태어나기 위하여 죽으셨다. 진정 부활로서 아버지는 성령의 복되신 영원 안에서 영원한 아들의 인성을 낳으셨다. 바오로 사도가 시편 2,7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바로 죽음을 위해 태어나셨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십자가는 탄생을 위한 것이며, 탄생은 십자가를 위한 것이다.
* 마리아와 아리마태아의 요셉은 무덤에 묻기 위해 수의로 싸는데 있었고, 그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포대기에 쌓아 구유에 모신 것이다.
* 주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무덤이 없었기에, 짧은 시간이지만(요한 19,41), “3일” 때문에라도 사랑으로 내어드려야 했다. 똑같은 모습으로 그분을 위해서는 탄생할 자리가 없었다.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여관은 모두 예약이 되어 있었다.
*몰약은 무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위해 쓰였다.(요한 19,39). 그 몰약은 박사들이 아기에게 바친 예물이었다(한 번만 쓰였다).
* 하늘의 천사들은 부활에도 있었으며, 탄생에도 있었다.
* 초자연적 신적 빛이 부활에도 빛났고, 같은 것이 탄생에도 있었다.
* 부활 사건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신현) 앞에서 두려움은 탄생에서도 나타난다.
* 제자들 사이의 부활에 대해 놀라움은 탄생에서의 목동들의 놀라움과 같다.
* 두려움에 대해 부활에서 천사들의 안심시키는 “두려워 말라!”는 말이 탄생에서도 같이 나타난다.
* “큰 기쁨”은 무덤에서 여인들에게 힘을 주었고, 같은 기쁨을 목동들도 맛본다.
* “표지”로서 무덤에 있던 얼굴을 싸맸던 수건과 끈이 표지가 되었으며, 같은 표지로서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있다고 하였다.
* 부활 사건에서 제자들이 달려가는 것, 미래의 “하느님 양 떼의 목자들”, 탄생하신 곳으로 달려가는 목동들이 나타난다.
* 제자들에게 여인들을 통해서 전해진 부활, 탄생에서는 목동들의 주님의 찬미와 찬양을 볼 수 있다.
* 위대한 왕의 도시, 예루살렘(시온)에서 부활하셨고, 인간적인 왕의 도시, 메시아적 왕의 도시, 다윗 왕의 도시, 예수께서는 인성으로 그리스도의 선조인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부활의 “표지”는 탄생의 “표지”이다. 이것은 기쁜 소식(복음)이며 살아있는 표징이다.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이분이 바로 “오시는 분”이시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나셨다. 그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분은 평화의 왕자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아기로 태어나셨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분이 바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시며 모든 이의 구세주이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가르치고 계시다.
복음에 나타난 성탄 사화가 바로 부활을 통하여 본 것임을 알 수 있다. 성탄의 신비는 바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성탄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십자가와 죽음의 신비, 부활의 신비가 모두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비는 우리 자신이 사랑을 위하여 죽는 것을 말하며, 부활의 신비는 거기에서 오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성탄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