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시겠네요?"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네, 아니오,
부분 긍정과 부정 중 무엇을 어떻게 대답할지 곤란해진다.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다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될 터이지만 언제나 오리무중 알쏭달쏭하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즐겨한다.
우리의 몸과 뇌가 하드웨어이고 우리의 정신과 사고가 소프트웨어라고 하면 우리의 영혼이나 영성은
어디에 해당할까?
컴퓨터가 고장나서 수리를 해본 사람이라면 경험이 있을테지만 간혹 수리공이 지우개로 메모리의
때나 먼지를 닦거나 그래픽 카드를 빼서 슬로트에 다시 꽂아보면 다시 멀쩡히 동작하는 경우를 안다.
하드웨어의 오작동이나 접촉불량 같은 미세한 원인에도 컴퓨터가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 정신은 우리몸과 뇌의 기반 없이는 낫씽에 가까울 정도로 아무것도 작동되지 않는다.
어떤 병이나 죽음이 다쳐오면 그걸로 끝장이나는 셈이다.
정신은 절대적으로 물질이란 몸에 의존한다.
간혹 바이러스나 버그와 같은 소프트웨어적 결함도 있다.
이는 정신분열증 등에 해당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컴퓨터 사용중에는 CPU와 메모리 그래픽 카드가 어떻게 동작한다거나 복잡한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메카니즘 또한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이나 사고는 표층의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만 간신히 인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최상위의 결과값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드어웨어적으로 밑으로 내려갈수록 어떤 재료적 소자나 전기의 물리적 법칙에 직면할 것이고
소프트웨어적으로 밑으로 내려갈수록 우리는 프로그램 언어나 기계언어의 번역같은 복잡성을 만날 것이다.
지나치게 환원적 풀이가 아니라면 몸과 정신, 마음과 물질의 관계는 대충 이런 식으로 풀린다.
영혼, 영성, 창조, 윤회, 육감.... 이런 것은 어디에 배치해야 할까?
이 부분 만큼은 사람들마다 다른 견해를 가질 것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초월하는 그 어떤 무엇'이라고 해보자.
인간이 기계나 컴퓨터와 다른 한 가지 측면이 자기재생적이고 자기진화적이며 자기조직적인 측면이 있다.
생명이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고 결정하고 조합한다,
따라서 "초월하는 그 어떤 무엇"은 알고보면 새로운 창조나 링크, 하이퍼텍스트, 기발한 알고리즘의 출현
같은 것들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이 자체는 이미 형이상학적 주제이다.
이 마음 자체를 알기위해 참선, 명상, 연구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마음 자체가 마음 그 자신을 알아내기 위해 그것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거울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되어버린다.
결국에 반영일 뿐이다.
"이 뭘꼬?"하는 물음, 질문 자체만이 존재하고 답변이나 해답은 애시당초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참선이나 명상, 심리 또는 정신분석의 한 면만을 들여다보고 그것에 비친 대상의 그림자를 두고서
왈가왈부하는 것이고 우리는 종교나 명상, 심리분석에서 꾸며대는 허다한 구렁텅이에 더이상 깊이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방식이나 궁극적 의미를 찾아내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은 99% 사기꾼이거나 자기도취자일 뿐이다.
그들이 알아내었다는 방법이나 내용을 따라가보면 언제나 허무를 발견한다.
결국 그들도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경전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하는 걸 본다.
우리가 가진 모든 종교적, 철학적, 존재론적 질문은 "나란 무엇인가"에 포렴된다는 말처럼 허황된 것도 없다.
이는 인간이 가진 개체성, 존재성에 대한 본능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빈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말을 신봉하는 힌두교 신자나 불교의 화두선 수행자는 여기에 반대할 수 천 가지의 명분이나 반론을
펼쳐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핵심을 끄집어내어 본다면 결국은 그들이 믿고 신봉하는
정신과 물질의 근원인 아트만이나 氣나 참나 같은 걸로 마감될 뿐 그다지 내용이 가득찬 것도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마나 마하리쉬가 찾아낸 자기는 힌두교의 본질, 신의 분광, 신의식의 화현일 뿐이다.
달리 힌두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뜻도 아니고 힌두교 신자에게는 모든 뜻이기도 하다.
All or Nothing 이란 결론은 사실상 그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는 표시이다.
"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수많은 종교신자와 명상가들을 광란으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요인이자
원인인 것은 나라는 본래적 실체라는 질문 자체가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 치는, 무한루프에 뺑뺑이 도는
사고의 함정이란 트랙에 깊숙히 빠져들어 오히려 그 자신을 망각하는 병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가 무엇인지' 밤낮으로 그것만 생각하는 진풍경을 상상해 보시라.
오히려그는 그 자신과 멀어진다. 그 질문에 빠져 있는 동안, 따라서 그는 자신이나 자신의 현실을
서서히 망각하고 그 끈이 사라진다. 따라서 생각만이 남은 생각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관념만이
머리 속에서 뱅글뱅글 돌게 된다.
"이 우주 속에 그 질문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라는 미사어구는 멋져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한 가지 반복되는 꿈을 열심히 꾸고 있는 심리상태나 마찬가지이다.
또 그것을 "꿈 속에서도 그것만을 지켜보았다"라는 경전의 문구를 읽고서 자신이 대단한 명상의
경지에 도달했구나 하고 진단한다.
역으로 그것이 얼마나 병적인 착락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회의하는 사람이 나중에 제 정신으로
돌아올 가능성이라도 잇는 것이다.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창안한 사람은 그 질문에 걸려드는 사람은 창안자 자신이 설정한
감옥으로 사람들이 자진 입목하여 영원히 그 쇠창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한 사람이
만든 일종의 메트리스 수용소 역할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자신만이 그 감옥을 출옥할 열쇠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질문을 추종하는 사람은 영원히 자신의
포로가 되어 돈을 가져다 바치고 그 를 추종하고 따르며 하인이나 비서처럼 부려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스승이나 제자라는 구도를 만들어.
더 깊은 지하 감옥(던전)으로 스스로 내려가겠다는 사람은 갈수록 폐쇄적으로 되고 나중에는
완전히 자신이 선택한 자폐의 누에고치 안에서 갇혀 한 걸음도 세상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자신과 세상의 처절한 단절이 되어 버린다. 차단된 감옥 속에서 그는 결코
그 자신이 참나의 실체, 궁극의 자신을 보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 사람은 교묘하게
그 인식 만이 실재하다는 암시를 듬뿍 넣어주고 다음에는 인가를 내리고 다른 사람들을 그것과
같은 길로 걸어가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것이 종교 시스템과 명상 시스템과 컬트적 뉴에이지
교단이 굴러가는 체계가 동일한 법칙에 따라 유사한 효과를 내는 이유이다.
단지 기성종교에는 사단을 막는 안전장치가 있고, 사이비에는 "갈때까지 가보자"는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차이 뿐,
"마음이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의 질문에서 명쾌한 대답이나 해법은 없다.
그 결말이나 근거조차 없다.
따라서 이걸 물고 늘어진다면 이상하게 광란하는 우주를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