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6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1-8 )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remains in me
and I in him will bear much
fruit, because without me you can do
nothing.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가 선교
여행에서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다음, 교회는 할례 논쟁에 휩싸인다. 그가 다른 민족들도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전하자 그 소식을 들은 일부 유다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논의하려고 사도들과 원로들이 예루살렘에 모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포도나무시며 아버지는 농부시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라.” 하고 말씀하신다. 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제 독서에서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하느님께서 ……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이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을 열어 주셨으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일은 계속될 것이고 또한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난관에
부딪힙니다. 일부에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바오로는 지금까지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분명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중심으로 하는 대표단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바오로였지만,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기보다는 예루살렘의 원로들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의 겸손하고 아름다운 태도를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로부터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예수님과 일치하여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된 생명의 유대 관계를 계속 이어 가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기도나 소원도 들어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주님과 우리를
영원히 묶어 줄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으며, 온갖 유혹으로 시달리는 세파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길도 우리의
믿음과 그에 따른 기도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개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같은 본당, 같은 단체 안에도 분파와 분열의 움직임이 보여 마음고생을 하고 계시다면, 이제부터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극복하는지 차분히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한 거울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신과 인간은
필연관계
-이기정신부-
필연의 관계라는 게
있습니다. 자녀와 부모, 나무와 열매입니다. 살아있는 씨앗이라야 싹을 틔워 순을 내고 나무되고 씨를 또 냅니다. 생(生)의 필연은 생(生)이
생(生)을 내는 순환 고리 안에 있는 겁니다.
이런 고리에서
떨어져 나가면 다 죽고 무생물 즉 광물만 남지요. 신과 인간(육체의 주체)과 영혼들의 관계도 이런 연계로 봐야겠습니다. 영(靈)이 죽어 광물이
되는 증거가 없는 한 신과 인간은 필연관계지요.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 성경
해석의 울타리를 정하는 주체는 교회 >
-전삼용신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미군 병사 한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시체를 전쟁터에 그냥 방치해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식
장례를 치러 주기로 했는데,
전투가 벌어지는
일선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흰 울타리를 친 작은 공동묘지가 딸린 성당이 있던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친구의 시체를
공동묘지로 옮겨가기 위해 상사의 허락을 받은 병사들은 해가 지기 전 겨우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허리가 굽고 야윈
신부가 그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깊은 주름이 팬
햇볕에 그을린 신부의 얼굴은 지혜와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번쩍이는 두 눈이 자리 잡고 있는 집처럼 보였습니다.
한 병사가 정중하게
말을 꺼냈습니다.
“친구가 전쟁터에서
숨졌습니다.
우리는 그를 교회
묘지 에 묻어주고 싶습니다.”
신부는 병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지만 아주 서투른 영어로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이곳에 묻어 줄 수가 없습니다.”
수개월에 걸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은 서운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은 채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 신부가
그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그렇지만 울타리
밖에 묻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 말에 화가 나긴
했지만 병사들은 하얀 울타리 밖에 땅을 파고 친구를 묻어 주었습니다.
그 일을 다 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지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전선(戰線)을 옮기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그 작은 성당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친구를 묻은
자리를 찾을 수 가 없었습니다.
지치고 어리둥절해진
병사들은 성당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묻은
자리를 알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어젯밤 지치기도
했고 어두워서 그랬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 말에 노 신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어젯밤 댁들이 떠난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내가 울타리를 옮겨 놓았습니다.”
성체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같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일까요?
아닙니다.
오직 성변화가
일어남을 믿는 가톨릭 신자들만이 밀떡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성사의
특징입니다.
성사(聖事)는 거룩하게 된
것이지만 거룩하신 분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성사도 거룩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성경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문자들로 된 책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은
물론이요,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의
특징은 성경을 먼저 들이밀고 그것이 진리인 양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도
성사이기 때문에 각 종교의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가 다르게
보이는 기준 가지고 무슨 논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각자 자기 주장만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성체를
가지고 논쟁을 해봐야 그 안의 본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론이 날 수 없고 각자의 주장만 남을 뿐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처음 발생했던 논쟁은 바로 ‘할례’에 관한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할례에 대해 논쟁하면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먼저 피고 연구했을까요?
아닙니다.
오늘 독서는 교회가
소집되었다고 나옵니다.
위의 예화에서
병사들이 동료의 시신을 교회 안에 묻기 위해 성경을 펴들고 자신들의 주장을 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당은
그들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영역을 내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는 각자가 다르게 해석하는 성경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의 주체의
재량에 맡겨진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인 할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성경을 펴 놓고 자신들끼리 논쟁하기보다는 교회에 건의를 하고 교회의 구성원들이 소집되어 그 결정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가차 없이
울타리를 넓혀서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할례규정을 폐지해 버렸습니다.
이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도 성령을 충만히 받은 교회에 달려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강림을 통해
세워진 교회의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교회는 가톨릭교회 외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쓰셨다면
성령께서 가장 완전한 해석을 해 주실 수 있는데,
그 성령께서
가톨릭교회 안에서 활동하게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체처럼 그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판단 규범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성경을 펴 놓고 자신들의 교리에 끼워
맞추는 설명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를
가져다놓고 코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
용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만든 사람뿐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은 교회 안에 계십니다.
교회가 모여 정하면
그것이 곧 해석의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먼저 믿으면
밀떡 모양이지만 성체로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체성사가 이루어짐을 먼저 믿어야 성체를 통한 구원에 이릅니다.
물론 이것도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성경에 쓰여 있는 데도 다른 그리스도교에서는 믿지 않습니다.
각자의 해석의
울타리가 있는 것이지 성경 자체를 연구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먼저 울타리를 칠
수 있는 교회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 울타리
안에서 성경이 오류 없이 완벽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주일에 서초동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성소 후원회 회원 모집을 위한 강론을 부탁하셨습니다.
2012년에 본당을
떠났으니 3년 만에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 것입니다.
성가대,
제대
봉사자,
안내
봉사자,
주차 안내
봉사자,
커피
봉사자,
성찬 봉사자들을
보았습니다.
본당에서 주일
미사는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이
있어야 자유롭게 살 수 있듯이,
오랜만에 신자들과
더불어 주일미사를 봉헌하였고,
그것이 제게는 또
다른 기쁨을 주었습니다.
성당 입구에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의 자세’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독서와
복음은 미리 묵상하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10분 전에는 성당에
와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성가는 기쁜
마음으로 함께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성수는 성당에
들어올 때만 찍으라고 하였습니다.
미사참례를 통해서
거룩해 졌기 때문에 나갈 때는 찍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몇 가지 더
있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합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서 미사의 은혜는 더욱 풍요로워지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나 내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소통과 공감의
도구인 스마트 폰입니다.
저도 늘 스마트
폰을 곁에 두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몇 번의 손동작으로 답을 찾기도 합니다.
각종 약속과 일정은
스마트 폰에 저장을 해 놓았습니다.
각종 티켓을 예매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책을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원하는 음식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물론 통화는
기본입니다.
그러니 스마트 폰이
없는 하루를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스마트 폰도
전원이 꺼져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전원이 켜져 있어도
인터넷과 연결이 안 되면 병따개 없는 콜라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 곁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의
식탁에 자주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성제를
통해서 말씀의 양식을 받을 수 있고,
성체를 모실 수
있습니다.
말씀의 양식을 잘
받기 위해서는 미리 오늘의 성서 말씀을 읽고 미사에 참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 것입니다.
내가 몸을 가꾸는
만큼 나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세수하고,
화장을
합니다.
그런 시간만큼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몸은 깨끗한데
영혼은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피정이나
교육에 자주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성경공부,
피정,
특강에 자주
참여하는 분들은 주님 곁에 머물 수 있으며 알찬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한 방울 씩
떨어지는 물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곁에
머물면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청하여라
-반영억신부-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기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 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라는 기도에 익숙해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서 한 차원 더 높은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서문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드리게 해 주시고……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 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 안에 머물고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과 일치할 때 효과적인 열매를 맺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빌면 무조건 이루어지리라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신앙논리를 펼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의 일치의 마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하기 때문에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다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이수철신부-
개인적
체험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첫 구절에서 착안했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1)-
우리
'여행용 시간전례서' 3시경 시편 첫 구절입니다.
바로
이 시편구절이 2000리 산티아고 순례여정에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이
시편구절을 짧은기도 삼아 끊임없이 되뇌이며 걸었습니다.
정말
전혀 어렵다거나 지겹다거나 하는 느낌없이,
하나
다친 곳이나 아픈 곳 없이 그 긴 여정의 순례를 기적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집을 상징하는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대 성당에 가까워질수록
새힘이
솟는 느낌이 신기했습니다.
평생
인생 순례 여정을 압축하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입니다.
제
경우 산티아고순례는 33일로 끝났지만 하느님 향한 인생순례는 죽어야 끝납니다.
그러니
순례여정의 햇수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평생순례여정을
대략 80세로 예상했을 때 산 햇수를 빼보니 남은 햇수는 13년 이었습니다.
요셉수도원에서
27년 산 햇수를 생각하면 13년은 금방 지납니다.
갈수록
체력도 기억력도 떨어지고 아픈데도 많아 질 텐데
'아,
13년을 어떻게 계획하여 살아야 하는가?'어제는 많이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루하루 죽음을 준비해 간다는 것이며
순간
아버지의 집에 귀가할 날이 가까워진다는 생각과 더불어 홀가분한 자유와 기쁨도 느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문제는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답을 줍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자공동체는 제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포도나무가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모두 예수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한 몸 공동체의 가지들이요,
예수님의
사랑이 큰 둥근 원을 상징한다면
우리
모두는 그 둥근 원 안에 있는 한 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더 좋은 죽음 준비도 없습니다.
이런저런
규칙이나 규범을 지키는 부수적인 일보다,
주님
안에 머물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인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루고 규범을 잘 지켜도
예수님
안을 벗어나면 모두가 열매없는 헛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아버지의 집에 귀가했을 때
주님이
보시는 것도 얼마나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관계를 깊이했는가,
'관계의
깊이'를, '사랑의 열매'를 보실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 바로 정주요 관상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와 더불어 일치와 평화의 열매들이요, 자유와 기쁨의 열매들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지엽적인 문제의 해결은 바로 오늘 복음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유다인 신자들은 이 점을 몰랐기에
모세의
관습에 따른 할례를 고집하며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네 안에 머무르겠다.'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 구원의 말씀인지요.
바로
이 말씀이 진정 복음이요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규범을
잘 지켜서 구원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러야 구원입니다.
예수님
사랑 안에 형제들로 머무를 때 무엇을 하든 자유롭습니다.
무엇
하나도 걸림이 없습니다.
유일한
분별의 잣대는 규범들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안에 머무르는 우리 모두를 깨끗하게 하시고 당신과의 관계를 깊게하시며,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아멘
친교의
공동체
-안융신부-
해마다 연초가 되면
관구의 모든 공동체들이 ‘공동체 건설’을 통하여 사목적이고 공동체적인 그리고 봉헌생활의 정신에 입각하여 한 해 동안 삶의 길잡이가 될
‘교육사목계획서’를 작성합니다.
하루나 이틀 길게는
사흘 동안 공동체의 모든 성원이 함께 모여 의견을 교환하고 지혜를 나누며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계획함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고취하고,
축성생활자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오늘 복음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처럼 형제들과 공동체 사이에, 또 각 형제들 간에 깊은 유대관계를 고취할 수 있기에
공동체 건설은 분명 은총의 시간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가 생명을 잃어버리듯, 공동체를 벗어난 수도자가 그 정체성의 위기를 맞듯이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이루지 못하는 교회는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에서 복음이라는 영적 수액을 받으며 성장하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통해 교회는 자녀로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라는 은총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
15,7)
-오상선신부-
여러분이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나요? 그것을 꼭 이루고
싶나요?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꼭
기억하세요.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법 1) 주님 안에
머문다(기도) 2) 말씀 묵상을
한다 3) 바라는 것을
청한다.
참
쉽지요?
그런데 순서를 잘
지켜야 하고 너무 급하게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충분히 주님 안에
머무십시오. 내가 그분 안에 푹
안겨있다고 느낄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그분의 현존을
느끼도록 가만히
기다리십시오. 마치 흙탕물이 맑게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내 안에 고요가
찾아올 때까지 그분 앞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맑고 고요한
상태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제야
제대로 잘 들릴
겁니다. 그분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자연스레
바라는 것을 청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한 것을 청하지
않고 그분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을 내가
청하기에 그 바램과 청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오늘 그렇게 한번
해 보실래요?
모든 것을 가능케 해 주시는 주님
-기경호신부-
많은
현대인들이 과학과 정보의 발달로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허구이다. 포도밭이 많은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늘나라를 선포함에 있어 자연스러운 비유였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곤
하였다. 성서에서 포도나무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을 가리킨다. 아버지께서 심으신 포도나무인 예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그 가지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생명의 수액을 받아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말한 하느님의 참 포도밭은 당신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누어주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은
수난사화로 들어가기 전에 15장과 16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 또 제자들끼리의 일치를 말하고 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15,1-2) 하느님께 충실한 포도나무로 불림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따랐기에 참 포도나무이시며 아버지께서 심으시고 돌보시며 풍성한 열매를
맺으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15,5) 참 포도나무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를 가리킨다. 교회의
구성원이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15,5). 왜냐하면 참 포도나무인 그분만이 포도밭
주인이신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고 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친교가 없으면, 우리는 포도나무에서 잘라진 가지처럼 수액은
끊어지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어 잘려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 포도나무의 가지인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일치할 때 형제애와 섬김의 정신에 따른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포도나무는
아무리 잘 가꾸고 오랜 세월 동안 키우더라도 나무 자체로서는 아무 쓸모도 없다. 또한 주인이 가꾸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도 없고 가지끼리
엉켜서 어느 정도 자라고 더 이상 자랄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우리도 포도나무인 주님을 떠나서, 주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참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하겠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화만이 오늘을 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네 인생은 전도서가 말하듯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돈이나 명예, 권력, 지혜마저도 헛되고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일을 행하면서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은 채 살아간다. 현세적인 것들에 너무나 깊이 맛들이고 길들여져서 내 삶에 하느님 없이는 절대 안
된다는 절박함이 없다. 그분의 사랑에 대한 갈증도 말씀에 대한 간절함 기다림도 없이 살아간다. 이런 상태야말로 진정 물도 생명도 없는 죽음의
광야요,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소유없이’(sine proprio)의 삶과는 무관한 삶이다. 주님은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의식이
있는가? 그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분 없이 이루어지는 그 어떤 것도 가치 없는 것임을 인정하는가? 혹시 나는 언제 불에 던져질지
모르는 잘려나간 포도나무가지는
아닐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이영근수사-
주님!
오늘도
십자나무에 붙어
사랑을 수혈 받게
하소서.
제
삶에
사랑의 피가
흐르게
하고
그 사랑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처럼
십자나무에
붙어
자신을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은
골고타 언덕에
심어진
참
포도나무.
당신만이
저의
혈관
저의
숨통입니다.
아멘.
-한상우신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홀로있음과 함께있음은 머무름을
통해 가장
충만한 사랑이
됩니다.
머무르는 그
자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머무르는 사랑의
순간순간만으로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기쁘고 가장 생명력
넘치는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생명력
넘치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열매
맺게 합니다.
우리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스스로의
노력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무름을
통해 주님과
우리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견하기에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며 자유로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안에
머무르는 사람이
주님안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가장 훌륭한
선물은 머무름이라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머무름을
통해 성숙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머무름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놓치고 사는
우리에게 머무름의
지혜야말로 가장 큰
지혜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머무름의
영원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중심에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머무름의
시작입니다.
머무름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우리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머무름이 곧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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