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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포도나무요(2)
예수님 안에, 내 안에
요 15:1-16 / 이윤재 목사
우리 교인중의 한 분이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름은 허용선집사님(그림1), 허 집사님은 몇 년전 간암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그 후에 나빠져 간경화가 되었습니다. 의사는 상태가 중하기 때문에 간이식을 받지 않으면 1년밖에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땅한 간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 데 어느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제 간을 아버지께 이식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들은 아직 대학생이고 취업준비도 해야 할 나이입니다. 그 바쁜 와중에 간을 이식하면 혹시 건강이 잘못되지 않을까 학업에 지장이 있을까 부모는 염려가 되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수술했고 아들과 아버지는 3개월의 회복기간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이 소식을 듣고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아드님, 아버지께 간을 이식했다고 들었습니다. 참 장합니다. 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한 모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잘 회복하세요”. 아버지께 간을 제공한 아들이 마치 제 아들인양 , 모든 대한민국의 아들인양 자랑스럽고 감사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 젊은이들은, 우리의 자녀들은 너무 착하고 예쁩니다. 그들에게 이 나라의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요15장을 읽었습니다. 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리고 5절,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장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묵상하고 있는 데 허집사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했다. 그래서 몸은 허집사지만 그 안에 아들이 있다. 아버지안에 아들이 있고 아들안에 아버지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아닐까?”
간 이야기는 허집사만이 아닙니다. 제가 전주에서 목회할 때 장윤혁집사라고 있었습니다. 이 분의 아내가 어느날부터 얼굴이 까매지고 몸이 붓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보니까 간경화입니다. 서둘러 간을 이식해야 했습니다. 간은 구하는 것도 큰 돈이 들고 꼭 맞는 간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남편이 조기퇴직을 하고 자기 간을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남편의 간이 다행히 아내에게 맞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간뿐 아니라 퇴직금의 거의 대부분을 수술비로 썻습니다. 제가 병원에 심방갔는 데 둘이 나란히 누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보고 울고, 남편은 아내를 보고 울고. 아내는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울고 남편은 아내가 살아줘서 감사해서 울고, 이 부부처럼 아름다운 부부가 있을까? 이들은 가난했지만 행복했습니다.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그렇다. 장집사안에 아내가 있고 아내안에 장집사가 있다. 최고의 사랑은 서로 안에 있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믿고 따르는 교주와 신도의 관계? 배우고 가르치는 선생과 제자의 관계? 복을 주고 복을 받는 축복의 관계? 조언하고 도와주는 멘토, 멘티의 관계? 요15장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관계”.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생명은 무엇이고 생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특징은 곧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물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생물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존재와 관계를 갖고 동화하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살아 있다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다른 존재와 관계를 갖는 내적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결코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존재와 끊임없이 접촉하며 교섭하면서 자신을 확장합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어윈 슈로딩더(Erwin Schrodinger)이 말과 같습니다. “생명의 특징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존재가 계속적으로 다른 물질과 상호교환하며 움직이고 무엇인가 일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있다고 말한다”.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생명의 동화작용 혹은 신진대사라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밥을 먹기 때문에 산 것이 아닙니다. 숨쉬고 걸어다니기 때문에 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말은 어떤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생명의 본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생명의 본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요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우리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와 관계를 맺고 그 분과 주고 받으면서 움직이고 살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의미에서 살아 있습니까? 지금 숨을 쉬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상호 관계를 맺고 그 분으로부터 공급받고 그 분과 끊임없이 교섭하면서 그 분 때문에 자라고 성장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한 주간동안 요15장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또 묵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는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의지하고, 둘째 교제하고, 셋째 연합하는 것입니다.
첫째 의지입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의 첫 번째는 의지입니다. 의지란 한 쪽에서 다른 쪽에 전적으로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잠3:5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여기서 “의지한다”는 말은 몸을 벽에 지대는 것입니다. 벽에 지대면 편하고 쓰러지기 않습니다. 그것이 “의지”입니다. 오늘 말씀 5절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다같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슴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첫 번째는 우리가 예수님 떠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 떠나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포도나무의 원리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를 보면 나무에 줄기가 붙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줄기가 너무 약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도 나무 가지를 나무라고 부르지 않고 넝쿨이라고 말합니다. 나무냐 넝쿨이냐의 기준은 가지가 줄기에 항상 붙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결정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 가지는 겨울이 되면 말라 죽어 없어졌다가 봄이 되면 다시 살아납니다. 겨울까지 죽지 않고 붙어 있어야 가지인데 거울에는 떨어지고 새봄이 되면 나왔다가 여름에만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붙어 있는 사이에만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포도는 나무가 아니라 넝쿨이라는 것입니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데 어떻게 가지가 스스로 열매맺겠습니까? 여름에만 붙어 있다가 겨울에는 떨어지는 데 어떻게 그 넝쿨이 열매맺겠습니까? 그러니까 5절이 맞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슴이라”.
이스라엘에 가면 포도나무가 많습니다. 요즘은 대부분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포도를 재배하지만(그림2), 시골로 가보면 아주 옛날 방식으로 재배합니다. 나무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 기어 갑니다(그림3). 우리 눈에는 익숙치 않는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포도나무 밑에 돌들이 놓여 있습니다. 왜 돌이 있나 하고 보면 포도나무 줄기가 땅에 닿지 않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받쳐주면 어떻게 됩니까? 이슬을 받습니다. 광야에서 가장 많이 이슬이 맺히는 곳이 돌멩이 밑입니다. 땅으로 기어가는 포도나무 가지를 돌멩이로 받쳐 놓으면 이슬이 내려 포도가 그것을 먹고 자랍니다. 그래서 옛날식으로 재배하는 포도밭에는 돌이 많습니다. 혹시 예수님시대에도 포도를 그렇게 재배했을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스스로 서지도 못하고 겨우 땅밑으로 기어가는 포도나무, 그렇게 해서 겨우 땅의 이슬을 먹고 살아가는 포도나무를 보면서 주님은 4-5절을 말씀했는지 모릅니다. 4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나니”. 5절, “너희도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라”.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 예수님 떠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 도움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믿습니까? 어릴 때 누구나 한번쯤 수영을 배워본 경험이 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삼촌이 냇가로 데리고 가서 수영을 가르쳤습니다. 삼촌은 나를 물위에 누이고 발을 뻗게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자, 고개들지 말고 가만히 누어. 그리고 발을 쭉 뻗어“. 그러나 그렇게 했더니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제가 소리 소리 치면서 바둥대자 삼촌이 말합니다. ”가만 있어. 내가 너를 붙잡고 있잖아. 나만 믿어“. 그때 저는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삼촌을 믿고 가만히 있든지. 삼촌을 제치고 물속에서 나오든지. 다행히 삼촌은 군인이었고 힘이 셋습니다. 또 나를 사랑했고 나도 삼촌을 좋아했습니다. 물속에 가라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삼촌을 믿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삼촌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물에 빠뜨리지 않는다. 내가 물속에 빠지면 삼촌은 반드시 나를 건져낸다”. 이렇게 믿기 시작하자 발을 쭉 뻗고 손을 움직여도 물에 빠지지 얺았습니다. 삼촌은 제 몸을 붙잡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기에 몸을 맡겼습니다. 지금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 삼촌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나를 안전하고 붙잡고 있었고 나는 삼촌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의지”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그렇게 의지합니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슴이라”. 어떤 경우에도 주님은 우리를 붙잡고 있고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그를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그림입니다(그림4). 중세의 성자 성 버나드가 예수님께 몸을 맡기는 장면입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과 관계가 시작됩니다.
둘째 교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그 의지는 교제로 발전합니다. 의지는 내가 예수님을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말하면 짝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만 받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는 순간, 그와 교제가 시작됩니다. 교제는 쌍방적입니다. 오고 갑니다. 주고 받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교제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 “친구”입니다. 14절입니다. 요15:14,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절입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요15두 번이나 그가 우리의 친구라고 말씀했습니다.
친구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속에 있는 것을 다 털어 놓은 사람입니다. 부모에게는 말 못할 고민도 친구에게는 털어 놓습니다. 우리는 너무 하나님을 무서운 분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하늘에 떠 있는 부채도사정도로 생각합니다. 가끔 손오공처럼 천둥과 벼락을 치는 분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형사요 검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처럼 만드시기 위해 사람처럼 되셨습니다. 사람처럼 오신 하나님이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세리 마태, 탐관오리 삭개오,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까지도 이것을 인정해서 말했습니다. 마11:19,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가 그의 친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다시 보십시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종은 주인이 부리는 사람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다릅니다. 친구는 서로의 마음을 나눕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 상처, 미래의 꿈, 다 내어 놓습니다. 모든 것을 공개합니다. 친구가 누구입니까? 지동차 왕 헨리 포드가 말했습니다. “친구는 내 안에 있는 최고의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주는 사람이다”. 좋은 친구를 만나면 자신감을 얻습니다. 친구는 누구입니까? 서로 도와주고 붙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전4: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이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친구는 붙잡아 주고 일으켜 줍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친구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친한 것입니다. 잠18:24,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가장 좋은 친구는 친밀한 친구입니다. 잠17:17도 말합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친구 삼아 그와 도란 도란 교제합니까? 15절, 요15:15,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슴이라”. 친구간에는 못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들은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모두 말합니다. 존 라이스라는 사람이 좋은 말을 했습니다. “친구란 도움을 청할 때 아무런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람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친구입니다.
여러분은 마리아를 아십니까?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실 때마다 들른 곳이 있었습니다. 베다니입니다. 베다니에는 마르다, 마리아 두 자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방문하자 마르다는 바쁘게 일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가 하도 일은 안하고 예수님 말씀만 듣자 마르다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눅10:40, “주여,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불평했듯이 오늘날도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지금 바쁜데 그렇게 한가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합니다. 눅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만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일이 있으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일은 그 많은 일중의 하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와 예수님과 관계는 노동적관계가 아닙니다. 노동해서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노동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와 예수님과 관계는 물질적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드려 주님을 기쁘게 한다면 얼마나 많은 물질을 드려야 하겠습니까? 다 필요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한 가지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과 교제하는 앞에 것입니다.
2천년 교회사에는 예수님과 교제하는 많은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요약하면 네 가지입니다. 읽기(렉치오), 묵상하기(메디타치오), 듣기(오라치오), 보기(콘템푸라치오)입니다. 먼저 읽기입니다. 읽기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거나 예수님과 대화할 때 빼놓아서는 안되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예수님께 안내하는 문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말씀을 사용하지 말고 말씀을 수용해야 합니다. “사용”과 “수용”은 다릅니다. 사용은 성경을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고 수용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여기는 으것입니다. 또 하나는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계시합니다. 요5: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모든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에게서 모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읽기는 묵상으로 이어집니다. 묵상은 되새김질 하는 것입니다. 시119:97절입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종일 읊조리는 것입니다. 묵상은 반복하는 것입니다 소나 낙타처럼 말씀을 되새김질 하는 것입니다. 읽는 것이 성경의 문자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묵상은 성경의 하나님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읽기가 내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면 묵상은 하나님쪽에서 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묵상은 듣기로 이어집니다. 묵상에서 마음 문을 열고 말씀에 집중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않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안 들립니다. 마음이 바쁘면 안들립니다. 하나님을 목적 삼지 않고 수단삼으면 안들립니다. 말이 많으면 안들립니다. 배가 부르면 안들립니다. 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앞에 서지 않고 착한 모습으로만 서려고 하면 안들립니다. 잡생각이 날 때 잡생각에 빠지면 안들립니다. 언제나 기도할 때 잡생각이 날 수 있습니다. 유혹이 올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금식할 때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마다 무시해야 합니다. 자기가 기도를 주도하려고 하면 안들립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하지 않고 내 노력으로 하려고 하면 안들립니다. 기도를 말로만 하고 듣지 않으려고 하면 안들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예수님을 바라 봅니다. 예수님 바라보는 것이 묵상의 최종 목적입니다. 성경과 기도의 최종목적은 예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원리가 있습니다. 바라보면 동화됩니다. 바라보면 전염됩니다. 바라보면 닮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면 예수님과 같은 눈으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병자를 봅니다. 그때까지는 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랬더니 불쌍합니다. 나를 미워하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서원하고 미웠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그를 보자 불쌍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태양을 볼 때 예수님의 눈으로 봅니다. 아름답습니다. 일을 볼 때 예수님의 눈으로 봅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눈으로 봅니다. 이것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하기 원합니까? 과정은 이렇습니다.
읽기(예수님의 말씀) - 묵상(예수님 생각)- 듣기(예수님의 음성) -보기(예수님의 눈)
셋째 연합입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통해 이르는 최종적인 목적지는 예수님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시겠습니까? 요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포도나무가 있는 것은 열매맺기 위함입니다. 열매맺는 것이 포도나무의 최종 목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열매는 가지에 맺힙니다. 그렇다고 가지가 혼자 열매맺나요? 아닙니다. 줄기에서 진액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혹시 가지가 시원찮다고 줄기가 혼자 열매맺습니까? 아닙니다. 가지 없이는 줄기도 열매맺지 못합니다. 열매맺는 원리는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지와 줄기, 줄기와 가지가 함께 연합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열매가 나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다 중요한 것을 한 가지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듯이 예수님도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내가 예수님없이는 못살 듯이 예수님도 나 없이는 못사시는구나. 예수님이 나무의 소중한 줄기라면 나도 나무의 소중한 가지다. 줄기만 있고 가지가 없는 나무가 없듯이 나도 예수님에게 소중한 존재다. 물론 가지는 줄기보다 못하다. 줄기는 항상 있지만 가지는 있다가도 없기 때문이다. 가지는 여름에는 있고 겨울에는 없다. 그래서 가지와 줄기는 같지 않다. 그러나 가지가 없이 줄기가 어떻게 혼자 열매맺을 것인가? 불가능하다. 아, 나에게 예수님이 중요한 것처럼 나도 예수님에게 중요하다”. 혹시 나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자책하고 계신 분은 없 습니까? 나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고 스스로 자기를 비하하는 분은 있습니까? 믿으십시오. 줄기가 나무에서 중요한 것처럼 가지도 나무에서 중요합니다. 열매는 줄기와 가지의 연합을 통해서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열매맺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열매맺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맺는 원리는 이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이 열매맺으신다. 둘째 나를 통하여 열매맺으신다. 다같이 “나를 통하여”.
“예수님과 내가 한 생명안에 있다”. 이것을 성경은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연합은 상호침투하는 것입니다. 연합은 공존입니다. 연합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거한다”라는 말이 반복되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요15:1-10절에서 무려 10번이나 “거하라, 거하면, 내 안에 거하라”고 말합니다. 5절 중간, “저가 내 안에 내가 저안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6절,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10절 중간,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신약성경 전체에 “예수님안에, 그리스도안에”라는 말이 262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아십시오. 우리만 예수님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안에 거하십니다.
성경 최고의 신비는 우리는 예수님안에 있고 예수님은 우리안에 있다는 신비입니다. 촛불을 보십니까? 초가 둘이라도 합치면 하나입니다. 그리고 다시 떼면 둘입니다. 각자의 촛불은 따로 있지만 그러면서도 하나입니다. 고염나무를 아십니까? 고염나무가 감나무에 접붙이면 고염은 사라지고 감이 됩니다. 그러다가 감나무가 죽으면 고염도 죽습니다. 연합의 원리입니다. 저는 섬진강 상류지역에 살았습니다. 언젠가 강을 따라 며칠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다. 강은 남해로 이어졌습니다. 강이 바다에 이르자 강은 사라지고 바다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강이 없이는 바다도 없습니다. 믿으세요. 예수님안에 우리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안에 예수님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에게 소중합니다. 예수님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없이 예수님도 아무 것도 못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한 포도나무입니다. 모든 능력, 모든 힘, 모든 비전, 모든 좋은 것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16절이 결론입니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많은 열매를 맺으십시오. 열매맺기 위해 사십시오. 그러나 비결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예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십시오. 예수님과 하나되십시오. 당신은 예수님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포도나무의 비밀
요 15:1-8 / 김태환 목사
제가 몇 년 전 한국에 가는 비행기 안에서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챨스 스탠리 (Charles Stanley) 목사가 쓴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The Wonderful Spirit Filled Life, 1995)”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성령충만한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책입니다. 이 책을 읽어 가다가 점점 이 책의 내용에 빠져서 나중에는 그냥 읽지 않고 메모를 해 가면서 이 책을 정독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조금만 더 말씀 드리면, 이 책은 찰스 스탠리 목사가 갈라디아서를 강해하다가 5장에서 난관에 부딪쳤던 경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으로 충만한 사람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착함과 성실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찰스 스탠리 목사의 고민은 “나도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 말씀을 설교할 수 있는가?” 하는 설교자로서 피할 수 없는 정직한 고민 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던 찰스 스탠리 목사는, 문득 오래 전에 그의 아내가 읽어 보라고 하면서 준 책 한 권을 발견하고 그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 책은 레이먼드 에드먼 (V. Raymond Edman)이라는 사람이 쓴 “그들이 발견한 비밀 (They Found the Secret, 1984)”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20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는 일종의 간증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책의 첫 장에는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1832-1905)라는 영국 선교사의 간증이 실려 있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간증을 읽으면서 찰스 스탠리 목사는 허드슨 테일러도 정확하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허드슨 테일러를 변화 시키기 위해서 존 매카시 (John McCathy)라는 선교사를 사용해서 허드슨 테일러에게 편지를 쓰게 합니다. 이 편지 한 장이 결국 허드슨 테일러를 변화 시킵니다. 찰스 스탠리 목사는 그의 책에 허드슨 테일러의 간증을 이렇게 옮겨 실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햇빛과 공기를 얻고자 부단히 노력한 결과도 아니고, 꽃에는 아름다움을, 잎에는 푸르름을 주는 생명의 기운을 얻고자 노력한 결과도 아니다. 단순히 나무의 본체 (本體)에 순종해 그것과 하나가 된 결과이다. 꽃이나 열매는 자연적인 성장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과 싸움을 해야 하는가? 그런 방법으로는 결코 열매는 맺지 못한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한다. 주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항복해야 한다. 주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서 자리를 잡을 때, 비로소 나는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삶에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너희가 나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y this is My Father glorified, that you bear much fruit, and [so] prove to be My disciples.” 직역하면.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나의 제자라는 것이 증명되면 그것으로 나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뜻 아닙니까?
문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열매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열매라는 말은 성경에 참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저에게는 당장 생각나는 말씀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있느냐?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느냐? 마찬가지로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잘려서 불 속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16-20절)”는 말씀입니다. 나무를 판단할 때 그 나무가 맺는 열매로 판단하는 것처럼, 사람도 그 사람이 맺는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때 당연히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당연히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는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말씀이 갈라디아서 5:19에 이렇게 나옵니다. “When you follow the desires of your sinful nature, the results are very clear.” 육체의 열매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냥 보통 사람들,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고린도전서 2:14에 나오는 자연인들 (natural men)이 맺는 열매들을 육체의 열매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신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곧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라고 했습니다. 이런 열매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 사람이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구나! 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구나! 그리스도의 제자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시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똑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아주 알아 듣기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정원사이시다. 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아버지께서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다듬으신다.....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Abide in Me, and I in you. As the branch cannot bear fruit of itself, unless it abides in the vine, so neither [can] you, unless you abide in Me.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He who abides in Me, and I in him, bears much fruit; for without Me you can do nothing., 1-2, 4-5)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포도나무의 비밀”이라고 오늘 설교 말씀의 제목을 붙였습니다. 포도나무의 비밀은 설명하자면 아주 간단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저 포도나무에 건강하게 잘 붙어 있으면 포도나무로 뿌리로부터 수액(樹液, sap)을 공급 받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원리 속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매를 맺는 삶의 비밀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입니다. 이 원리를 아는 사람들은 열매 맺는 삶의 비결을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으려고 치열하게 투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열매를 맺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지 않아도 됩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냥 건강하게 잘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포도나무의 수액이 뿌리로부터 가지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런 가지는 저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찰스 스탠리 목사의 책을 읽으면서 아주 인상 깊었던 것은, 그가 “produce”라는 단어와 “bear”라는 단어를 구별해서 쓰는 것입니다. “produce”라는 말은 “to make or manufacture (만들다, 생산하다)”라는 뜻 아닙니까? 하지만 “bear”라는 말은 사전에서 찾아 보았더니 “to produce by natural growth (자연적인 성장으로 만들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나무가 잘 자라서 가지에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bear”입니다.
이제 포도나무의 비밀이 거의 다 풀렸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 풀어야 할 문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잘 붙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Abide in Me and I (abide) in you”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쉬운성경에는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라고 했고, 개역성경에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라고 했습니다. “abide”라는 말에는 “remain” “stay” “dwell” “reside”라는 뜻이 있지만, “to continue in a particular condition, attitude, relationship (어떤 특별한 조건이나 태도,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Abide in Me and I (abide) in you”라는 말은 예수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 (intimate fellowship)를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방법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7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If you abide in Me, and My words abide in you)” 우리는 말씀 안에서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따름으로써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경험을 합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두 번째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 (dialogue)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기도의 핵심은 나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 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른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때로는 밤 늦게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은밀하고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포도나무 속에 숨겨져 있는 마지막 비밀은 이것입니다.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에게로 포도나무 뿌리로부터 수액 (sap)이 전달되어서 가지가 건강하게 자라고 열매가 열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과 기도로 잘 붙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흘러들어 옵니다. 포도나무의 수액이 가지에게 생명을 공급하고 살리는 것처럼, "성령의 수액 (the sap of the Holy Spirit)"이 그 사람에게로 흘러 들어와서 그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그리고 그 점차 사람의 삶을 온전히 지배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포도나무의 비밀은 우리의 잘못된 신앙생활의 오류가 무엇인지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의 비밀을 무시하고, 전혀 다른 방법으로 열매를 맺으려고 합니다. 열매는 맺는 것 (to produce)이 아니라 저절로 열리는 것 (to bear)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무시하고 여전히 우리의 힘으로 열매를 produce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자기의 의지와 노력으로 열심히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열매가 열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입니다. 결국은 거기서 포기하고 맙니다.
꼭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그렇게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꼭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는 나무는 아무 의미가 없듯이, 열매가 없는 제자의 삶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제자의 삶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는 내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증명하는 마크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내가 맺는 열매입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포도나무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찰스 스탠리 목사가 포도나무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포도나무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찰스 스탠리 목사는 포도나무의 비밀을 깨닫고 나서,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1964년 6월 23일. 지난 두 주 동안 나는 영적으로 대단히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시작했다. 요한복음 15:1-8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7년 간 나는 승리하는 삶의 비결을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이제 나는 그 진리를 찾았다. 그 비밀이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나는 그 가지이다. 성령은 나무로부터 가지로 흐르는 수액이다. 가지가 살아 성장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노력이나 투쟁이 아니라 주님께 온전히 붙어 있는 순종이다. 나는 전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평안과 고요함을 느꼈다. 나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런 관계를 받아들였다. 포도나무 가운데 흐르는 수액은 가지까지 흘러 가지 전체를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나는 그리스도께 순종했고, 그의 영은 나의 마음을 채워 주었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열매, 즉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의 능력을 내개 부어 주셨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요 15:1-5 / 김병삼 목사
성품은 관계에서 출발한다.
좋은 성품을 만들기 위해 첫 번째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관계”입니다.
먼저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로 들어 선 자만이 성품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알고,
우리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하나님을 알 때,
타인(他人)은 믿어주고 신뢰하는 성품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가 중요하겠죠. 좋은 성품은 “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계속적인 관계의 “채움”을 통해 만들어 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경은 우리들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가 그 가지에 붙어 있는 가지이지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므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할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원리를 말씀하고 있지요.
즉, 우리들 삶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이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분명하게 나와 있지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여기서 구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익숙함”인지 “친밀함”인지의 차이입니다.
익숙함은 우리로 편안하게 만들어 줄지는 모르지만, 피상적인 관계로 인해 건조하게 말라비틀어 집니다. 결국 편안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짐” “죄책감”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요.
여러분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무관심해 보이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깨어진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된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누구의 문제일까요? 요한 계시록 3장 20절을 보세요.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삭개오의 삶의 변화가 일어난 순간에 어떤 일이 있었나요? 예수님께서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되겠다.” 결국 예수님과의 관계의 형성의 삭개오의 성품을 바꾸어 놓았지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던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예수님이 그 길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삭개오가 예수님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삭개오 자신이 스스로의 문을 열지는 못했지만, 삭개오의 눈이 예수님께 갈급하게 무언가를 요청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문을 여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편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신앙인의 고백이 있습니다. 시편 46편을 보세요. 시인은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시편 말씀을 보면서 얼마 전에 잠깐 키웠던 진돗개 ‘’온유‘가 생각나네요. 결국은 키우지 못하고 다른 곳에 보냈지만, 일주일 만에 집이 개판이 되었습니다. 개 냄새가 뒤덮고.
그런데 참 예뻤습니다. 어린 개가 새벽이 되면 낑낑댑니다. 그러면 나와서 얼굴을 보여줘야 하지요. 신기하게도 그 개는 함께 나와 있으면 조용히 잠을 잡니다. 편안하게 잡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를 얼마나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여유를 찾을 수 있는지 아시나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성품이 어떻게 변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의 가장 큰 변화는 성품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인정하고 부르셨다는 사실, 끝까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어떤 삶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셨습니까?
그럼 자신과의 관계는?
우리는 흔히 관계를 양자(兩者)간의 문제로 정의 합니다. 그런데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로 자신 스스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성품을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 자신을 얼마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내 마음을 나도 몰라!”라는 것이 솔직한 대답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의지를 믿을 수 있던가요?
우리는 수없이 “할 수 있다!”라고 반복해 보지만 실패를 경험할 때 마다 지신에게 실망합니다. 이런 실패를 경험하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불만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 원수를 만나 함께 수용하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나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원수가 된다면 얼마나 수용하기가 어려워지겠습니까?
중요한 사실은 나의 대한 생각,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 늘 다른 사람에게 투사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믿고 신뢰하지만,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도 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들의 과거의 경험이 얼마나 여러분들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지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학창시절에 놀았던 부모들이 자녀들을 더욱 믿지 못합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내가 저 사람을 보며 분노하고, 왜 저 사람이 용서가 되지 않고, 왜 저 사람을 믿지 못하는지, “내 마음을 나도 몰라!" 라고 말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여러분들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문제는 어떻게 나 자신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나요? 2절에 보니까,
무룻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아하!
내가 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잘못된 것들을 제거하고 계시는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과실을 맺기 위해 일하시는구나!
그래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있지요.
우리의 삶의 고통의 흔적들이 상처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신앙의 흔적, 즉 “훈장”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혹시 이런 찬양을 들어보셨나요?
힘들고 치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못자국난 그 손길 눈물 닦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에게 실망하고 내 마음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조용히 다가와 내손 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 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언제나 변함없이 너는 내 아들이라
십자가 고통 해산의 그 아픔으로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내 아들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내가 나 지신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내 모습과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고린도 전서 15장 1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2007년 3월호 낮은 울타리의 주제가 재미있습니다. [동문서답 하십시오.]
한 달의 모든 이야기가 자신의 인생에서 동문서답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 지금까지 닦아온 자신의 전문성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며, 마치 동문서답을 하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들,
언젠가 우리 교회에서 간증을 했던 평양과기대의 정진호 교수의 이야기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을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
정진호 교수는 서울 공대를 나와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포항 공대 교수로 있던 사람입니다. 그의 부인은 오르간을 전공하고 연주를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풀려가기 시작합니다. 연변과기대 교수로 올갠을 연주할 수 없는 곳으로 그의 삶이 인도하심을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중국에서의 삶이 안정을 찾았을 때, 다시 평양과기대 부총장이라는 직책으로 떠나게 된 것이지요.
왜 그가 준비한 대로 삶이 가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깨달아 지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삶을 계획한다는 것 믿을 수 없는 일이구나. 인생은 내가 계획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여기까지는 비 신앙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나를 보게 될 때, [동문서답]하는 나의 인생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아직 아무것도 아닌 때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내가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보면 가능성이 없습니다. 내 자신이 나의 삶의 원수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나에게 있어 나 자신은 다른 대답을 얻습니다. 내가 계획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삶 앞에서 우리는 다른 나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나를 신뢰하게 되고, 나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 앞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참으로 의미 있는 사람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까지. . .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생기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본문 말씀 5절을 보세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와야 우리는 비로소 “성품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용평가’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무디스,’ ‘스탠더드 앤 푸어스’ 같은 곳에서 각 나라의 신용등급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이 평가에 의해 국가 간의 상거래와 은행거래를 하는 데 있어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합니다.
우리나라가 IMF 위기를 지나면서 이 신용등급에 대하여 무척 민감했지요. 이 등급이 개선 되어야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신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신뢰는 그 사람을 대하는 상대방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인생들, 그들의 삶에 기대를 걸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옛 생활로 돌아가 있는 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신앙인 다윗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하는 순간에도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기를 끝까지 기다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을 향해 출발 했을 때에요, 그리고 계속되는 그의 실수, 때로는 불신앙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어주시고 신앙인을 만들어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의 방법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의 말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을 보세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것이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생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신뢰 관계가 형성된 사람의 가장 품성의 특징은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형제자매들에 대한 기대가 충만하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신뢰하시는 것만큼 우리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아 주시는 것만큼 우리도 참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을 다른 눈으로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나바는 사도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던 시절, 아무도 그를 신뢰해 주지 않을 때 그를 바울로 보았던 사람이며, 그가 그의 인생을 보장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위대한 사람 바울은 성품의 사람 바나바에의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런 사도바울에게 영적아들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사실 육신적인 나이로도 얼마나 어린 사람입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누구에게 디모데를 보내든지 신뢰하도록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 전서 16장 10절에서도,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사도바울이 사람들에게 부탁합니다. 디모데를 나의 동역자로 생각해 주십니다.
사실 우리들이 잘 아는 사람, 특히 장점과 단점을 모두 아는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뢰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좋은 사역자들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심하게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그 아이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나고 있다는 신뢰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만나 교회의 목사가 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 ‘신뢰’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우리 만나교회의 장로님들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담임이 됐을 때, 만나교회에는 40여분의 장로님들이 계셨습니다. 다 우리 아버님과 같은 목회 세대요, 그 중에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의 모습을 아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저를 담임목사로 신뢰하고 믿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만나교회의 담임목사인 저를 자랑해 주셨습니다. 오늘 제가 목회를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한 성품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품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성품은 하나님의 옳고 그른 기준에 따르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타인에 대한 나의 평가와 나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 앞에 내 기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나의 기대는 우리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실망을 줍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나에게 임했던 은혜가 필요함을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잘못할 때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실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복수심에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복수심은 나의 잘못된 성품을 드러내게 하고, 내 영적 자원을 고갈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내 필요를 채워주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저버린 것 때문에 그렇게 실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나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기대한다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좋은 성품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저에게 있는 상처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를 믿어준 교인들과 장로님들 때문에 제가 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죠.
가만히 보니까,
저희 아버님을 보면서 참 힘들어 했던 목회 현장이 저에게 다 상처가 되었던 것이죠.
요즘 그렇게 기도합니다. 제 마음에 드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보게 하시고, 지금 저에게 보내주신 사람들을 동역자로 보게 하여주십시오!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하여 주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위에 성품의 사람들이 넘치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 신뢰를 받고 있는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끝까지 믿어주고 신뢰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세상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뿐입니다.
저에게 꿈이 있다면, 제가 먼저 사람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지 않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 그런 동일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 15:1-8 / 김광일 목사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1~8
19세기 중국선교의 비전을 갖고 중국대륙의 문을 두드린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헌신하기 위해 중국에 왔고 자신을 바쳐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많아지면서 협력자와 선교비가 필요했으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신적 부담은 밤잠을 설치게 했고 마침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테일러 선교사가 요한복음 15장을 읽어 내려가다가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말씀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빛이 비취는 것처럼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주는 나무이신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스스로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니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설교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진액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성도들은 예수가 포도나무인 것을 기억하고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됨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자원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신앙을 가질 때 이미 그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할 일은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일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뜻을 성취하는 방법도 깨닫게 되며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급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테일러는 성경을 읽는 생활과 기도 생활을 중요시했습니다. 기도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을 지속해주는 힘이 되었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더욱 깊게 해주었습니다. 기도로 간구 할 때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확신했으며 그대로 실행 한 것이 선교사역 성공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환경이나 형편을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가지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붙어있는 가지인 한에 있어서 모든 환경과 여건을 이길 수 있으며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포도는 수박이나 오이처럼 넝쿨성 식물입니다. 포도나무 넝쿨에는 많은 가지들이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포도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의 번성을 가리켜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다’고 노래하였습니다. 무성한 포도나무 넝쿨에는 두 종류의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이며 다른 하나는 ‘과실을 맺는 가지’입니다. 원예용어로는 열매 맺는 가지를 ‘결과지’, 맺지 못하는 가지를 ‘도장지’라고 부릅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열매 맺지 못하는 도장지의 처리부터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는 열매 맺는 것 외에는 쓸모가 없기에 영양만 빼앗는 과실이 달리지 않는 가지를 단호하게 제해 버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불행합니다. 또한 결실하지 못하는 가지는 더욱 쓸모가 없습니다. 잘리든지 찍히든지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무릇 성도들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처럼 천한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는 의미는 과연 무엇을 뜻합니까? 가지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내게 붙어 있으라
장기려(張趙呂)박사는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반드시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기도를 하고 시작했습니다. 의사로서의 성실함과 신실함이 인정되어 1948년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가 시무 하던 평양 산정현 교회의 장로가 되어 주님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월남 후 부산에 산정현 교회를 설립하고 충성되이 섬겼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 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주님만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무덤에도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 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장 박사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평생을 제물로 바치는 삶을 살다가 1995년 성탄절 새벽 1시 45분에 85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언론은 그를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 라고 불렀습니다.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으며 현재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장기려, 그는 평생 예수께 붙어 일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가지가 못된 가지가 아닌 깨끗한 가지라도 나무를 떠나면 끝장입니다. 가지가 도장지가 아닌 결과지라도 그것이 열매를 내놓을 수 있는 절대의 조건은 끝까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보통 포도열매는 송이를 이룬 다음에도 100일은 견디며 붙어 있어야 열매로 성숙됩니다. 잘 익은 열매가 되려면 수확의 때까지 잠시도 나무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붙어 있기만 하면, 가지는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을 공급받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는 하나됨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습은 예수와 하나 되는 삶을 시작해 놓고도 홀로 헤매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분별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가지는 나무가 모든 것을 공급해주기 때문에 그저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으로 붙어 있기만 하면 나무이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소망이 없다해도 주님께 붙어있는 믿음으로 열매 맺는 가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의 안에 거하라
이용규 선교사는 저서 ‘같이 걷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아파트의 어두운 계단을 아들 동연이의 손을 잡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날씨였던지라 동연이의 손을 잡아서 내 주머니에 넣고 함께 걸었습니다. 아이의 손에서 온기가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새 집이 있는 8층에 도달했습니다. 문을 열기 전 왠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이와 같이 좀 더 걸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전에 혼자 짐을 들고 올라 다닐 때는 8층이 멀게 느껴졌는데, 아이와 걷는 동안 8층은 너무 가까웠습니다. 갑자기 하나님과 같이 걷는 우리의 인생길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몽골에서의 사역 기간 동안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과 같이 걷는 동안 7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혼자 걸었으면 길고 지루했을지 모를 그 길이지만 고비마다 하나님과 함께 나눈 추억들이 있기에 감사의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그분이 같이 가시는 한 비록 사막 가운데 걸어가고 있을지라도 결코 혼자 걷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장 친밀한 동반자, 주님이 내 곁에서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얻어서도 아니고 무엇을 해서도 아니고 무엇을 성취해서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기뻐하십니다. 삶의 목적을 주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같은 내용을 명령형과 서술형으로 번갈아 말씀하신 데는 주목해야 할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가지 노릇을 제대로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의 거한다(abide)는 단어는 지속적으로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번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믿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 안에 있을 때 질병도 이깁니다. 벌레도 이깁니다. 가뭄도 궁핍도 물리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열매 맺는 가지가 되어 주 안에서 많은 열매를 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열매 없는 마른 가지가 된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열매 맺는 나무이신 예수의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가지된 이들은 방심하지 말고 믿는 중에 더 잘 믿어야 합니다. 힘써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친밀함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내게 영광 돌리라
18세기경 구두 만드는 실습생이었던 죤 워(John Warr)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밑으로 다른 한 실습생이 고용되었고 죤은 그에게 반복하여 영적인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온 견습생은 귀찮아했습니다. 어느 날 실습생이 위조 화폐 일 쉴링을 진짜와 바꾸려다 붙잡혔습니다. 수치스런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죤 워는 그를 찾아가 기도 해주고 마음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죤 워를 통해 견습생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헌신적인 제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 견습생은 후에 인도의 선교사로 놀랄만한 결실을 맺은 윌리엄 캐리가 되었습니다. 캐리의 생애와 선교 사업은 세계복음화 전도사업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료 직원에 대한 존 워의 영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왜 주님은 열매 맺기를 요구합니까? 잎도 아름답습니다. 꽃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꽃은 예쁘고 향기롭습니다. 꽃은 보는 사람에게 감동과 환희를 선사합니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꽃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꽃은 재생산하지 않습니다. 꽃을 심어 꽃이 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꽃은 열매를 위한 과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씨가 들어 있는 열매 맺음에 있습니다. 제자의 생명은 열매 맺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지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혀져야 합니다. 가지가 존재하는 목적은 단 한 가지, 나무가 바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지로서 포도나무이신 주님이 열매 맺도록 헌신을 다함이 그 본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요 제자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도레(Gustave Dore)라는 유명한 프랑스 화가가 있었습니다. 화가에게 제자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제가 예수의 얼굴을 그렸는데 한 번 봐 주세요” 구스타프가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그분을 더 사랑한다면 더 좋은 그림이 나왔을 걸세!” 주님을 더 사랑했다면 더 멋진 그림이 나왔을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의 봉사는 더 향기 나는 봉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한다면 우리는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부디 주님을 깊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깊이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열매 없는 실패 말미암아 괴로워합니까? 약함과 부족함으로 고민하십니까? ‘주님이 포도나무이시오 우리는 가지’라는 말씀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가지이지만 포도나무이신 예수와 하나가 될 때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가지인 것 같지만 우리와 하나이신 포도나무이신 예수 때문에 강한 자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의 본분을 다하리라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붙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언제나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문기태 목사
요한복음 15장 1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비유를 말씀하시며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말라 죽을 수 밖에 없고 내 안에 거하게 되면 열매를 많이 맺고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으며 구하는대로 다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고 말슴하십니다. 예수님안에 거하는 것이 단순히 예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자유로운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푹 젖어 그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맛보며 행복해하고 사랑을 누리며 감동받고 감격에 젖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랑의 기갈을 느끼지 않습니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려는 사람도 없으며 나를 위해 소중한 것을 희생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든 세상이 아닙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찾아 헤메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은 풍성하나 참 사랑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고 하십니다. '내가 너를 참으로 사랑하니 내 품에 안겨 나의 사랑을 느껴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 안에 거하는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체험한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기쁨과 행복을 예수님 자신이 먼저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으며, 풍요롭고 완전한지 헤아릴 수 조차 없지만 최고의 것이었슴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행복한 체험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내 사랑 안에 거하
라. 그것이 최고니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품에 안으시기 위해 먼저 그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9).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우리를 향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인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충분하고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원수인 우리의 생명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보여주신 후에 우리를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초청합니다. "내 사랑안에 거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습니까? 단지 지식적으로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에 여러분 자신을 맡기고 그 사랑안에 거하며 사랑받는 감격에 젖으십시오. 사랑받는 행복을 만끽하십시오. 예수님의 품에 푹 안겨서 주님의 체온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살아가시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하면 주님이 주시는 두 가지 중요한 약속이 있습니다.
1. 기쁨이 충만해집니다.(11)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예수님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우리안에도 있게 하려고 그래서 언제나 그 기쁨이 넘치게 하려고 주님은 우리를 그 사랑안으로 초청하십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기쁨의 한 근원입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을 염려해 주며, 자신을 받아들이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돌보거나, 걱정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끼는 것, 그리고 자신은 아무하고도 상관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기쁨을 말살하는 파괴적 감정일 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
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 것”(요3:16)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 무한한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습니까?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3:7)
우리의 마음의 기쁨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상태가 자연스럽게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늘 어두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나 얼굴이 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환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하고 작은 호의에도 크게 감사하고 아주 낙천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확신이 가득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랑안에 거하므로 행복합니다.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사랑안으로 들어가면 이처럼 기쁨이 충만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14)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데 있어서 일반적으로 익숙한 관계는 주종관계입니다. 또는 사제관계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친구관계로 설명합니다. 어색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감히..... 예수님이 아주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과의 사이에서 그렇게 경직되어 있는것은 그 크신 사랑안에 거하지 못하고 잇는 증거입니다. 사랑안에 거할 때 모든 벽이 허물어 집니다. 나이의 벽도, 언어의 벽도, 국경의 벽도, 편견의 벽도, 이성의 벽도, 이념의 벽도 다 허물어집니다.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너희는 나의 친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에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예수님과 친구를 해? 나하고 예수님은 하늘과 땅차인데..."라고 말합니다. 그 생각을 앞세우면 절대 주님과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벽을 허물고 가까와지려고 다가가시는데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하며 자꾸만 도망가는데 어떻게 사랑안에 거할 수 잇습니까?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깨고 주님의 사랑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십시오.
예수님과 친구 관계가 성립되었기에(14) 그 분과 나 사이에 아무런 비밀도, 거리감도 없어야 합니다. 오직 친밀함만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 여러분의 모든 고민을 상의 하십시오. 비밀을 나누십시오. 여러분 혼자 감당하기 힘든 짐을 예수님과 함께 나누어 지십시오. 예수님도 이제 여러분이 친구이기에 하나님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온갖 좋은 일을 함께 나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하므로 예수님과 친구관계를 맺고 외로움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비밀을 다 듣고 확신을 갖고 살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위기의 시간에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달려와 도우시는 은혜를 만끽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본문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안에 확실하게 거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5:10)'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만이 예수님의 사랑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잇습니다. 과거에 나에게 잘못한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하여야 합니다. 어딘가 부족하고 시시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사랑하여야 합니다. 나와 의견이 다르고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사랑하여야 합니다. 내가 잘 모르고 대하기 거북한 사람도 사랑하여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대해주신 것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한다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내가 부끄럽지 않도록 다시 그것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좋은 선물 즉 은사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기도하면 귀찮아 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 주셨습니다. 낙심하고 넘어져 있을 때 다가오셔서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게서 하셨던 것처럼 하십시오. 어려우면 흉내라도 내십시오.
가정에서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십니까?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끼리 사소한 일로 미워하고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면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반면 서로 사랑하며 이기적인 마음을 접고 서로 배려하기를 힘쓰고 있음을 보신다면 얼마나 흐뭇하시겠습니까? 얼마나 여러분이 사랑스럽겠습니까? 여러분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예수님의 크신 사랑안으로 들어가 거하는 비결임을 알고 굳게 붙들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생 주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사는 황홀한 삶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비전
요 15:1-7 / 배의신 목사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금 어떤 비전(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비전(vision), 꿈, 소망’ 좋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말. 사람의 눈동자를 빛나게 하고, 삶의 이유와 의욕을 갖게 하며, 활기차게 하는 약이 되는 말입니다. 잠언 29:18절에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이 말씀을 흔히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거니와’로 번역합니다. KJV 에서는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라고 번역했는데 ‘꿈이 없는 백성은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NIV 에서는 “Where there is no Revelation, the people cast off restraint”라고 번역했는데, ‘묵시가 없는 백성은 속박을 내던져버린다.’는 말입니다. 즉 ‘꿈이 없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방자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비전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비전을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비전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비전에 대하여 오랫동안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비전이 왜 고민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 자신의 꿈을 가지고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그 때는 어떻게 꿈을 이루느냐는 것이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고민도 시작되었습니다. 나를 고민하게 했던 말씀은 제가 영적 파수꾼처럼 여기는 말씀인 마태복음 7:21-23절과 로마서 10:2-3절의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리고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나 자신의 비전 사이에서 고민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어떤 것이 나 자신의 비전인지, 아니면 내 비전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까? 오늘은 이 말씀을 하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하여 선포하신 비유적 말씀입니다. 즉 “나는 …이다.”라고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로, 성부 하나님을 ‘농부’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고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명확하게 밝혀주십니다. 포도나무와 가지가 하나이듯이 예수님과 그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인 요한복음 17:21절을 봅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리고 본문 6절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이 비전을 이루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비전이 어디에 속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먼저 무엇을 비전이라고 하는지 정의해봅시다. 미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재즈 음악가였던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어떤 사람이 ‘리듬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불었을 때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리듬을 가지고 있다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고, 리듬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정의도 도움이 안 될 거요.” 이 엘링턴의 말을 인용해서 비전을 정의해 보면 “만일 당신에게 비전이 있다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고, 비전이 없다면 어떤 정의도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그래도 비전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몇 가지 정의가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는 “비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그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고 했고, 또 다른 지도자는 “비전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다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목회자는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거룩한 꿈이다.”고 했습니다. 즉 도입부에서 말씀드린 잠언 29:18절의 말씀인 “꿈이 없는 백성은 멸망하거니와”에서처럼 ‘비전’ ‘묵시’ ‘꿈’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는 거룩한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는 어떤 종류이든지 추구하는 비전이 있습니까? 세상에는 어떤 종류의 소망이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비전이 어디에 속했는지가 중요합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봅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별개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의 비전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는” 비전의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가진 비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6:33절을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비전을 이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시면서, 동시에 ‘비전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즉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삶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라면 나의 비전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내가 하나님을 구하는 삶이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빌립보서 2:12-1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소원을 두고“라는 말을 헬라어로 qevlw(thelo)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선택하다’ ‘결정하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번역할 때에는 \'to will\' \'to determine\'이라고 했는데, ‘결심시키다’ ‘결정하다’등의 뜻입니다. 즉 ‘내가 주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행하도록 결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비전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글은 공산주의를 위해 일하다가 구속되었던 남자 성도에게서 받은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을 테러하라는 지령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북에서 영웅칭호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영웅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를 받은 지금은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변화 받은 지금 저는 명예와 부귀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로마서 8:5-9절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따르던 옛사람은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 안에서 산다고 하면서 옛사람의 일들을 따라가면 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만 때때로 세상적으로 기울게 되고 고민하게 되는 것은 성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고민들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전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확인해봅시다. 마태복음 7:21-23절과 로마서 10:2-3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리고 로마서 말씀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두 말씀에서 지시하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기 위함’입니다.
오늘의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많은 일을 하고, 열심히 일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예수님께서 앞의 두 말씀으로 경고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28-29절을 봅시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리고 17: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구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두 딸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혼기가 되어 딸들을 결혼시키면서 맏딸은 야채 농사를 짓는 사람과 둘째 딸은 옹기를 굽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아버지는 딸들이 잘 사는지 알아보려고 딸의 집들을 차례로 방문했습니다. 먼저 맏딸 집을 방문하여 살펴본 후 원하는 것이 있으면 기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딸은 ‘야채가 잘 성장하여 좋은 상품이 되도록 적절하게 비를 내려 주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딸을 방문해서도 역시 같은 질문을 했는데 딸은 ‘옹기그릇을 잘 만들 수 있도록 햇볕 좋은 날이 많은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고민이 되어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럼 나는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하지?”
만일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했는데 누구를 더 소중하게 여겨 기도하겠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하는 것이 실제로 더 좋은 것인지도 모르면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나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나의 비전이 되게 해주시고, 그 비전을 위하여 기도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리고 이사야 48:17절입니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구하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비전들을 보이시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처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삶의 열매로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19세기 중국선교의 비전을 갖고 중국대륙의 문을 두드린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헌신하기 위해 중국에 왔고 자신을 바쳐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많아지면서 협력자와 선교비가 필요했으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신적 부담은 밤잠을 설치게 했고 마침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테일러 선교사가 요한복음 15장을 읽어 내려가다가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말씀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빛이 비취는 것처럼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주는 나무이신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스스로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니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설교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진액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성도들은 예수가 포도나무인 것을 기억하고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됨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자원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신앙을 가질 때 이미 그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할 일은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일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뜻을 성취하는 방법도 깨닫게 되며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급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테일러는 성경을 읽는 생활과 기도 생활을 중요시했습니다. 기도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을 지속해주는 힘이 되었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더욱 깊게 해주었습니다. 기도로 간구 할 때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확신했으며 그대로 실행 한 것이 선교사역 성공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환경이나 형편을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가지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붙어있는 가지인 한에 있어서 모든 환경과 여건을 이길 수 있으며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포도는 수박이나 오이처럼 넝쿨성 식물입니다. 포도나무 넝쿨에는 많은 가지들이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포도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의 번성을 가리켜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다’고 노래하였습니다. 무성한 포도나무 넝쿨에는 두 종류의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이며 다른 하나는 ‘과실을 맺는 가지’입니다. 원예용어로는 열매 맺는 가지를 ‘결과지’, 맺지 못하는 가지를 ‘도장지’라고 부릅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열매 맺지 못하는 도장지의 처리부터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는 열매 맺는 것 외에는 쓸모가 없기에 영양만 빼앗는 과실이 달리지 않는 가지를 단호하게 제해 버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불행합니다. 또한 결실하지 못하는 가지는 더욱 쓸모가 없습니다. 잘리든지 찍히든지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무릇 성도들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처럼 천한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는 의미는 과연 무엇을 뜻합니까? 가지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내게 붙어 있으라
장기려(張趙呂)박사는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반드시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기도를 하고 시작했습니다. 의사로서의 성실함과 신실함이 인정되어 1948년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가 시무 하던 평양 산정현 교회의 장로가 되어 주님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월남 후 부산에 산정현 교회를 설립하고 충성되이 섬겼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 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주님만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무덤에도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 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장 박사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평생을 제물로 바치는 삶을 살다가 1995년 성탄절 새벽 1시 45분에 85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언론은 그를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 라고 불렀습니다.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으며 현재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장기려, 그는 평생 예수께 붙어 일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가지가 못된 가지가 아닌 깨끗한 가지라도 나무를 떠나면 끝장입니다. 가지가 도장지가 아닌 결과지라도 그것이 열매를 내놓을 수 있는 절대의 조건은 끝까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보통 포도열매는 송이를 이룬 다음에도 100일은 견디며 붙어 있어야 열매로 성숙됩니다. 잘 익은 열매가 되려면 수확의 때까지 잠시도 나무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붙어 있기만 하면, 가지는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을 공급받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는 하나됨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습은 예수와 하나 되는 삶을 시작해 놓고도 홀로 헤매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분별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가지는 나무가 모든 것을 공급해주기 때문에 그저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으로 붙어 있기만 하면 나무이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소망이 없다해도 주님께 붙어있는 믿음으로 열매 맺는 가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의 안에 거하라
이용규 선교사는 저서 ‘같이 걷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아파트의 어두운 계단을 아들 동연이의 손을 잡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날씨였던지라 동연이의 손을 잡아서 내 주머니에 넣고 함께 걸었습니다. 아이의 손에서 온기가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새 집이 있는 8층에 도달했습니다. 문을 열기 전 왠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이와 같이 좀 더 걸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전에 혼자 짐을 들고 올라 다닐 때는 8층이 멀게 느껴졌는데, 아이와 걷는 동안 8층은 너무 가까웠습니다. 갑자기 하나님과 같이 걷는 우리의 인생길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몽골에서의 사역 기간 동안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과 같이 걷는 동안 7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혼자 걸었으면 길고 지루했을지 모를 그 길이지만 고비마다 하나님과 함께 나눈 추억들이 있기에 감사의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그분이 같이 가시는 한 비록 사막 가운데 걸어가고 있을지라도 결코 혼자 걷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장 친밀한 동반자, 주님이 내 곁에서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얻어서도 아니고 무엇을 해서도 아니고 무엇을 성취해서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기뻐하십니다. 삶의 목적을 주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같은 내용을 명령형과 서술형으로 번갈아 말씀하신 데는 주목해야 할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가지 노릇을 제대로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의 거한다(abide)는 단어는 지속적으로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번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믿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 안에 있을 때 질병도 이깁니다. 벌레도 이깁니다. 가뭄도 궁핍도 물리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열매 맺는 가지가 되어 주 안에서 많은 열매를 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열매 없는 마른 가지가 된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열매 맺는 나무이신 예수의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가지된 이들은 방심하지 말고 믿는 중에 더 잘 믿어야 합니다. 힘써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친밀함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내게 영광 돌리라
18세기경 구두 만드는 실습생이었던 죤 워(John Warr)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밑으로 다른 한 실습생이 고용되었고 죤은 그에게 반복하여 영적인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온 견습생은 귀찮아했습니다. 어느 날 실습생이 위조 화폐 일 쉴링을 진짜와 바꾸려다 붙잡혔습니다. 수치스런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죤 워는 그를 찾아가 기도 해주고 마음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죤 워를 통해 견습생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헌신적인 제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 견습생은 후에 인도의 선교사로 놀랄만한 결실을 맺은 윌리엄 캐리가 되었습니다. 캐리의 생애와 선교 사업은 세계복음화 전도사업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료 직원에 대한 존 워의 영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왜 주님은 열매 맺기를 요구합니까? 잎도 아름답습니다. 꽃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꽃은 예쁘고 향기롭습니다. 꽃은 보는 사람에게 감동과 환희를 선사합니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꽃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꽃은 재생산하지 않습니다. 꽃을 심어 꽃이 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꽃은 열매를 위한 과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씨가 들어 있는 열매 맺음에 있습니다. 제자의 생명은 열매 맺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지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혀져야 합니다. 가지가 존재하는 목적은 단 한 가지, 나무가 바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지로서 포도나무이신 주님이 열매 맺도록 헌신을 다함이 그 본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요 제자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도레(Gustave Dore)라는 유명한 프랑스 화가가 있었습니다. 화가에게 제자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제가 예수의 얼굴을 그렸는데 한 번 봐 주세요” 구스타프가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그분을 더 사랑한다면 더 좋은 그림이 나왔을 걸세!” 주님을 더 사랑했다면 더 멋진 그림이 나왔을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의 봉사는 더 향기 나는 봉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한다면 우리는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부디 주님을 깊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깊이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열매 없는 실패 말미암아 괴로워합니까? 약함과 부족함으로 고민하십니까? ‘주님이 포도나무이시오 우리는 가지’라는 말씀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가지이지만 포도나무이신 예수와 하나가 될 때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가지인 것 같지만 우리와 하나이신 포도나무이신 예수 때문에 강한 자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의 본분을 다하리라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붙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언제나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요 15:1-10 /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들을 보면 이렇습니다.
(요6:48)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6:49-53)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간단히 말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8:12)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을 의미하고 어둠은 죽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그는 곧 ‘어둠’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빛의 자녀’이고 믿지 아니하면 그는 ‘어둠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고, ‘어둠의 자식’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10:7)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10:11)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들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선한 목자의 양이 아니어서 그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14: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이 가야 할 참된 길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참 종교요 예수만이 참 진리되심을 확증해 주는 말씀들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종교라면 그것은 인생이 가야할 길이 될 수 없고, 따라야 할 참된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어두에서 “(요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참 포도나무”는 예수 자신뿐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과실을 맺을 수 없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인생의 참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2. 인생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는 가라지 같은 인생은 추수 때에 거두어 불에 태워지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3:10-12)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때문에 인생은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땅에 떨어진 씨 비유 말씀을 통해 100배, 60배, 30배의 좋은 열매를 맺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13:3-8)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좋고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여기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좋은 땅’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대로 행하여 결실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13:23)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거나, 들어도 깨닫지 않는다든가, 듣고 깨달았어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되지 못하여 열매가 없는 가라지같은 인생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4-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15:4-6)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깨닫고 그 말씀대로 행하여 인생의 많은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3.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두고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고 유대인들, 그리고 모든 인생들을 두고 포도나무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는 나무 가지에 맺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찍히워 버리워지게 됩니다. 가지는 열매를 스스로 맺을 수 없고,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그 나무에 붙어있어야만 합니다.
(요15:4-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 포도나무, 또는 포도원 등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시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사5: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사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사5: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사5: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사5: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사5:6)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사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렘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포도나무를 심거나 포도원을 두시게 된 이유는 좋은 포도 열매들을 맺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좋은 포도 열매를 거두기 위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좋은 포도 열매를 맺지 아니하고 먹을 수 없는 나쁜 포도, 즉 들포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오히려 아무데도 쓸데없는 들포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포도나무는 목재로서는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에 불에 태워버릴 뿐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15:1-8을 보겠습니다.
(겔15:1-8)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4)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5)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수풀 가운데에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같이 할지라 (7)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8) 내가 그 땅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위의 말씀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옮겨 심으셨는데, 그 포도나무가 악한 가지를 내고 들포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베어서 땔감으로 사용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고, “들포도를 맺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포도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좋은 열매, 좋은 포도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징계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사생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친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생자를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아들을 징계하십니다.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12:5-11을 보겠습니다.
(히12:5-11)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이 혹 징계를 받을지라도 원망불평하거나 그 징계를 경히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아들되시는 성도 여러분에게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이심을 믿고 더욱 더 하나님을 공경하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4. 좋은 포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 가지가 반드시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요15:4)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여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는 말씀에서,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결코 인생의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어야만 좋은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유대인이든 아니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만 인생의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가지가 되는 모든 인생들은 참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님과 연합할 때만이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 줄기에서 떨어져 나가면 곧 말라버려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타락한 포도나무입니다. 참 포도나무는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오직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생명)에 이르는 길은 이제 타락한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니라 참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뿐입니다. 아무리 정통 유대인이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정통 유대인의 혈통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아무리 권력이 높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참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님과의 친교만이 하나님(농부)과 바른 관계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친교)를 가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가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수액과 영양분을 줄기를 통해서 공급받듯이 성도들 역시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생명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생수를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5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식의 열매, 사업의 열매, 권세의 열매, 명예의 열매, 선한 일의 열매 등 등 많은 열매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가라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많고 큰 열매를 맺었다 해도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지 않으면 좋은 열매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참 포도나무이시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마3:10-12)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알곡’, 즉 ‘열매’들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 즉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곳간”은 천국을 말하고,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는 말씀은 가라지는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인생의 모든 열매들은 스스로는 삶의 보람을 가지고 자랑할지라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쭉정이’, ‘가라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예수 없는 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예수 없는 사람들의 출세와 성공, 번영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추수 때에 보면 빈 껍데기 뿐입니다. 다음의 성구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시편73:1-20입니다. 표준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시73:1-20) (1) (아삽의 노래)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2)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3)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5)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6) 그들에게는 오만이 목걸이요, 폭력이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7)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 기대한 것보다 더 얻으며, (8)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9)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10)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키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11) 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 하고 말한다. (12)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13)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14) 하나님, 주께서는 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 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 (15) "나도 그들처럼 말하면서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도 주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처럼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16)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17)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19) 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20)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아무리 유익한 것일지라도 다 해(害)로 여겼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빌3:7-9)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예수 믿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았어도 잘 되었다고 기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빛좋은 개살구같은 것입니다. 예수 믿고 말씀대로 했더니 더 힘들고 어렵고 별로 좋아진 것이 없다고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적고 작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말씀에 대한 순종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에서 볼 때 축복인 것입니다.
어느 어촌의 조그마한 배들이 고기잡이를 떠났습니다. 이 어촌에는 고기잡는 일 외에 다른 직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기잡이 나간 배들이 돌아와야 할 시간에 돌아오질 못했습니다. 풍랑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온 동네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바닷가에 나가서 남편 혹은,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파도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때에 설상가상으로 어느 집에서 어린 아이가 집을 보다가 촛불을 넘어뜨려 불이 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합심해서 이 불을 끄느라고 남편, 아버지를 기다리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물동이를 다 동원해 정신없이 몇 시간을 싸우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는 중에 배가 돌아왔습니다. 무사히 풍랑을 이기며 돌아온 것입니다. 아침이 밝아왔고, 어젯밤의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불끄는 데 누가 가장 애썼고, 풍랑은 또 어떠했느냐, 얼마나 서로가 힘이 들었느냐 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어느 어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웬 불인지는 몰랐으며 어쨌든 불이 보여서 그것을 바라보고 목표를 정해서 결국 집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집에 불이 나지 않았으면 우리 배는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 두 손을 모았다고 합니다. 집에 불난 것이 실패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어느 것이고 실패가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예수 없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해도 예수 안에만 있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인생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 마지막 날을 추수하는 날로 표현하며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계14:14-17)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마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인생의 추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한 낫을 들고 인생들을 추수할 때(심판의 때) 알곡들이 다 되어 있기를 소원합니다.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님께 끝까지 남아있고 머물러 있고 붙어있는 사람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열매를 더 풍성히 맺도록 하기 위해서 가지치기하는 아픔이 있다해도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본문 2절>) 끝까지 말씀대로 살며, 성령을 따라 행하시고 사시는 믿음이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5. 마지막으로, 좋은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들은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벧후1:4-8)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러한 성품의 열매들은 말씀과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 영적인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자신을 괴롭히는 교인 하나 때문에 새벽마다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 다음과 같은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종이 저 사람 때문에 괴롭고 힘들어 목회를 못하겠으니 다른 곳으로 보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종아, 그 사람을 꼭 내보내야 되겠니?” “그렇사옵니다.” “그 사람은 갈 곳이 없다. 내가 구원시켰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교회로 가야 되는데 네가 맡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 아버지, 이 종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주여, 하늘 나라로 데려가 주시옵소서.” “아직 때가 안 되었다.” “그러면 그의 버릇을 고쳐 주시옵소서. 그 버릇 때문에 이 종이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나도 그 사람 버릇은 못 고친다.” “주여, 주께서 왜 못 고치옵니까?” “나도 못 고치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 나도 그 사람 못 고치겠기에 내가 대신 십자가에 죽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흘린 피로 덮어서 심판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하늘나라로 데려갈 것이다. 너도 고칠 생각 하지마라. 나도 못 고치는데 네가 왜 고치려고 하느냐? 사랑하는 종아, 그 사람 버릇 고치려고 하면 심장이 굳어질 것이다. 그리고 명대로 못 산다. 네가 죽어 내 곁에 오는 것은 좋지만 그 사람 버릇 고치다가 와서야 되겠니?”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책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종아, 그 사람 버릇 고치려고 하지 마라. 버릇 못 고친 채로 내가 데려갈 것이니 너는 조용히 참고 기다려라. 네가 그 사람 구원시킬 것도 아니고, 또 천국으로 데려올 수도 없다.”
“제 버릇 개 못준다.” 는 옛 속담이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말하면, ‘표범도 자기 얼룩을 바꿀 수 없다.’(A leopard can't change his spots) 는 이 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천성은 바뀌지 않는다.’ 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Can the leopard change his spots(표범이 그 반점을 바꿀 수 있느뇨)?” 구약성경 예레미야(Jeremiah) 13:23절에 나오는 말로,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540~470 B.C.)는 “성격은 운명이다”(Man's character is his fate)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게를 똑바로 걷게 할 수는 없다”(You cannot make a crab walk straight)라거나 “천성은 골수에 배어 있다. 천성은 아무리 애써도 감출 수 없다”(What is bred in the bone will not go out of the flesh)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성격(character)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사람 됨됨이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역경을 통해 그 성격을 드러내게 되기도 하고 그 역경을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좋은 인격을 형성하기도 합니다.(Adversity reveals and shapes character) 예를 들면, 구약의 욥은 실로 엄청난 환난과 역경을 당했음에도, “(욥1:21-22)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며 그 견고한 믿음과 고결한 신앙인격을 보여주었습니다. “재산을 잃으면 잃은 게 없고, 건강을 잃으면 약간 잃고, 인격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When wealth is lost, nothing is lost; when health is lost, something is lost; when character is lost, all is lost)는 말이 있는데 욥은 그 어떠한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도 그 인격과 성격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욥은 마침내 갑절을 복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성도 여러분의 성격을 다르시므로 욥과 같은 성품과 신앙인격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돈이 많아도, 권력이 높아도, 그리고 지식이 많아도, 아무리 잘 생겼다 해도 그의 성품과 인격이 따르지 아니하면 그런 것들은 모두가 천박하고 추해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이 여러분의 성격을 다스리시므로 욥과 같은 성품과 인격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성품 변화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갈6:8-9)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마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열매가 있어야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축복들의 열매들만 요구하지말고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열매,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야 영원한 축복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영적인 영원한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참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십니다. 농부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지는 우리 인생들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농부가 그 가지를 제해 버리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도록 하기 위해 가지를 깨끗케 하십니다. 예수를 믿으시므로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들이 되기 위하여 그 나무의 수액을 받아야 되는 것처럼 그 분의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많은 열매를 맺어 삶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인생의 알곡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