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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인욱의 무인이야기] 을지문덕 편
을지문덕(乙支文德, ?~?)은 고구려의 장군으로, 영양왕 23년(612)에 30여만이나 되는 수(隋)의 대군을 전멸시킨 인물이다. 당시 살아 돌아간 수군은 2,700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을 맺었다. 그는 수의 군대가 평양성 밖 30리 지점에 군영을 설치하자, 거짓으로 항복을 청하며, 적장 ‘우중문에게 주는 시[與隋將于仲文時]’를 짓기도 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고 기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통달했다 전쟁에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 멈추는 것이 어떠한가.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1794년 저술한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는 “을지문덕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라고 되어 있는 정도이다. 석다산은 돌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었는데, 평안남도 적송면(赤松面) 석삼리(石三里)에 위치한 해발 271m의 산이다. 이 산에는 ‘센기낭’으로 부르는 돌벼랑이 있고 함박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함박봉’이, 그 옆에 망을 보는 듯한 모양으로 솟아 있다하여 ‘재티기봉’으로 부르는 봉우리가 있으며, 서쪽기슭에는 메밀 같은 모양의 ‘모말바위’가 있고 눈썹모양의 ‘눈썹바위’가 있다.
을지문덕에 관련한 이야기는 진위 논쟁이 있는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도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석다산 사람으로,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꿈에 삼신(三神)을 뵙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해마다 3월 16일이 되면 말을 타고 마리산(摩利山)으로 달려가서 제물을 올리고 경배하고 돌아왔다”며 “10월 초사흘이 되면 백두산에 올라 삼신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삼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신시(神市)의 옛 풍속이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전통적인 사상을 계승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수나라와의 전쟁과 관련한 기록 외에 을지문덕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만, 1984년 편찬된 ‘평안남도지’와 2001년 북한에서 간행된 ‘고장이름사전 평안남도편’에는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참고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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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이름사전에는 옛날 석다산 기슭에 적송골에 사는 여인이 밭일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도중 갑자기 하늘에서 푸드득하는 소리가 들려 위를 보니, 큰 새 한 마리가 동굴로 날아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상히 여긴 여인이 굴에 가보니 푸르스름한 큰 알이 있어 집으로 가져다 따뜻한 아랫목에 놓았는데, 며칠 후 그 알에서 귀여운 옥동자가 나왔다. 생김새가 보통이 아니어서 ‘새 을(乙)’과 ‘지탱할 지(支)’자로 성을 달고 글을 잘 알고 덕이 있는 사람이 되라고 ‘문덕(文德)’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기도 하다.
성과 관련해 을지문덕의 후손이라고 하는 목천 돈씨 집안의 족보에 의하면, 을지(乙支)씨는 원래는 을(乙)씨였는데, 을지문덕 때에 ‘을지’씨로 바뀌었다가 후에 ‘돈씨(頓氏)’로 변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1930년에 간행된 ‘별건곤’ 34호의 ‘을지문덕묘참배기’에도 실려 있다. 앞서 언급한 목천 돈씨 족보에 의하면, 을지문덕의 16세 후손 을지수(乙支遂)가 동생인 을지달(乙支達)과 함께 고려 인종 때 일어난 묘청의 난에 공을 세워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졌고 돈(頓)씨를 사성 받았다고 한다.
성과 관련해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을지는 동이(東夷)의 복성이라고 하고 있으며, ‘울지문덕(蔚支文德)’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선비족 계통의 성인 울지(尉遲)씨의 귀화와 연계시키기도 한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와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삼국시대 우리나라 복성으로 기재하고 있기도 하다.
을지문덕은 고구려 25대 임금인 평원왕 19년(577)에 평양 서부 즉 지금의 강서군 적성면 석삼리에 위치한 석다산(石多山)과 불곡촌(佛谷村)에서 을루(乙婁)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양친을 모두 여의고 가난 속에서 고독하게 자랐다고 한다. 을루는 요동성주로 지군정사가 된 인물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석다산 석굴 속에서 글공부를 하여 병서에 정통하였으며, 활을 쏘기 위한 사대(射臺)를 석외산(石外山) 남방 5리에 위치한 마이산(馬耳山) 밑에 쌓고 궁술을 익히는 한편 석다산에서 북방으로 15리 되는 곳에 위치한 한천면(漢川面) 감칠리(甘七里) 내동(內洞)에 있는 해발 238m의 불곡산 중턱의 석굴동에서 수도하며 신검(神劍)을 들고 검술을 익혔다고 하며, 저녁마다 ‘두루메’라 불리는 청산면(靑山面) 운봉리(雲峰里) 대원산(大圓山)에도 달려가 무술 연마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을지문덕이 불곡산 석굴 속에서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때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그를 해치려고 기어 들어왔다. 잠결에 괴이한 살기를 느낀 을지문덕이 눈을 뜨면서 번개같이 칼을 휘둘러 구렁이의 목을 쳤다. 그때 칼로 내려친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돌로 만든 책상 모서리가 떨어져나갔다고 한다. 지금도 그 석굴에는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돌책상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석다산에는 지금도 을지문덕이 쓰던 돌집이 남아 있으며, 그 안에는 돌상도 하나 있고, 석다산 맞은 켠에 있는 높은 산은 ‘마두산’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을지문덕이 타고 다니던 말이 나왔다고 한다. 석다산에서 무예수련을 한 을지문덕의 무술 스승은 ‘우경’이라는 도사였다. 그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데려와 활쏘기와 칼쓰는 법을 가르쳐 장차 나라를 지켜낼 훌륭한 인재를 키웠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을지문덕이었다는 것이다.
대원산에는 또 다른 을지문덕 장군의 전설이 있다. 을지문덕이 무술 훈련을 하면서 활을 쏘는데 과녁이 잘 보이지 않자, 높이 자란 나무들을 칼로 쳐서 시야를 훤히 트이게 만들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나무들은 칼질을 한 그 높이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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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이 되었을 때 을지문덕은 호랑이를 잡아 호랑이 장수로 온 증산고을에 널리 소문이 났다. 얼마 후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을지문덕은 하는 수 없이 마을에 있는 대장간 집에 내려와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어떻게나 쇠메질을 잘 했던 지 대장일에 오래 숙련된 주인도 그를 따를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러한 때 고구려는 외래 침략자들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의 영양왕은 군사를 이끌 훌륭한 군사를 찾아내려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논을 했다. 어느 날 궁성에 이름 있는 점쟁이가 왕 앞에 찾아와서 말하기를 “힘세고 용맹한 장사가 있으니 그 장사만 찾아다 군사를 이끌게 하면 아무리 큰 싸움도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온 나라의 스님들에게 점쟁이가 말한 그런 힘장사를 찾으면 상을 준다고 했다. 왕의 명을 받은 스님들이 각 곳을 돌아다니며, 그런 힘장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적송골에도 스님이 나타났다. 스님이 사방을 살펴보니, 멀지 않은 곳에 대장간이 하나 있었다. 대장간에서 20살이 되나 마나한 청년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큰 쇠메로 모로 위에 놓은 쇠붙이를 연방 내리치는데, 내리칠 때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튕겨 나왔다. 남이 3~4번 내리쳐도 못해낼 일을 그는 단번에 척척 해내곤 하였다. 그 청년은 남달리 몸집이 우림하고 얼굴 생김새가 의젓하여, 첫눈에도 장수의 기상이 확연하였다. 누가 봐도 우러러 볼만한 장수의 모습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늙은 스님은, 곧 궁전으로 달려가서 왕에게 자기가 보고 온 사실을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이렇게 되어 을지문덕은 궁전으로 불리어 올라가게 되었다.
그 후 수와의 전쟁을 마친 후 그는 평양 서방 용악산 밑에 있는 귀촌에 초당을 짓고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묘는 ‘별건곤’의 ‘을지문덕 묘참배기’를 따르면, 강서(江西)와 대동(大同) 두 고을을 접경한 강서군 잉차면(芿次面) 2리에 현암산(玄巖山)에 있기는 하지만 1934년 당시에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8년 5월 24일자에는 평양기독청년회관에서 평양 지식인들이 을지문덕의 묘를 보수하기 위한 모임을 조직했다는 기사가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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