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가 마거릿 미첼
‘인생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러시아의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몰라도 위 구절은 어디선가 한번쯤
읽었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위 구절은 1825년에 발간된 푸시킨의 시집 「인생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
수록된 표제시의 일부다. 푸시킨(1799~1837)은 「대위의 딸」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숱한 소설과 시를 남겼다.
그러나 그가 흑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의 외증조부가 에티오피아에서 노예로 잡혀와 피터대제에게 선물로 바쳐지면서
푸시킨에게 흑인DNA를 물려주었다.외증조부 아브라함 간니발은 피터대제의 총애
속에 혁혁한 전공을 세워 장군으로 진급했으며 말년에는 귀족칭호까지 받았다.
푸시킨은 자신이 에티오피아인의 후예라는 사실을 명예롭게 여기며 창작에 전념했다.
38세 되던 해, 푸시킨은 부인이 부정한 짓을 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프랑스 귀족과
결투 끝에 총에 맞아 숨졌다.
※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알렉산더 뒤마도 흑인이었다.
허먼 멜빌(1819~1891)은 평생 무명작가로 지내다가 죽은 뒤에야 명성을 얻은 불행한
작가였다.그의 유일한 대표작인 「Moby Dick」도 사후에야 불티나게 팔리면서 영화로도
나와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언젠가 그레고리 펙(1916~2003) 이야기를 하던 중 그가 주연한 「백경白鯨」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백경’이란 왜놈들이 우리말의 고래와 같은 고유언어가 없어 한자를 조합
하여 만든 이름이다.
1951년 런던에서 초판이 나왔을 때의 제목이 바로 「The Whale」이었던 것이다.
같은해 뉴욕에서 두번째로 출판될 때 비로소 「Moby Dick」이란 원제를 되찾았다.
저들은 고니는 백조, 두루미는 백학, 왜가리는 백로라고 부르는데, 저들이 뭐라든 우리는
아름다운 우리말로 부르는 게 바람직하다.
왜놈이라는 비속어는 ‘다케시마의 날’ 기념식을 강행한 제놈들이 자초한 용어다.
「Moby Dick」이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1921년이었다.
비평가 러셀 브랭큰십은 ‘「Moby Dick」은 문학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리얼리티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이어 비평가 레위스 넘포드는 ‘허먼 멜빌은 나타니엘 호손,
마크 트웨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문호’라고 극찬했다.
「Moby Dick」을 단테의 「신곡」 및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동급인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한 비평가도 있다.
모비 딕은 주인공인 에이허브 선장이 자신의 다리를 잘라 먹은 범고래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복수에 나선 에이허브 선장은 모비 딕과 처절하게 싸우다가 끝내 목숨마저 잃고 만다.
미국의 할데만 줄리우스(1877~1951)는 세계 최초로 책에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여
백만장자가 된 출판업자다.
줄리우스는 편집인들로 구성된 ‘Book Hospital’을 차린 뒤 잘 팔리지 않는 책을 보냈다.
책병원에서는 줄리우스의 지침에 따라 내용은 그대로 둔 채 책이름이나 표지 디자인만 바꿔
다시 출판했다.연간 600권 정도 팔리던 고티에르의 소설 「황금 양털」은
「금발머리를 찾아서」로 제목을 바꾸자 매년 5만 권 이상 팔렸다.
빅토르 위고의 희곡 「즐거운 왕」은 「쾌락에 빠진 왕」으로 제목을 바꾸자 4배 이상
판매가 급증했다.먼지가 쌓여가던 쇼펜하우어의 「논쟁술」은 「합리적인 논쟁의 수단」으로
개명된 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마거릿 미첼(1900~1949)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제목만큼이나 풍운의 소설이다.
미첼은 남북전쟁의 중심지이자 소설의 무대인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북부의 스미스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던 미첼은 집안형편이 어려워 중퇴하고 낙향하여
신문사에 취직했다.그러나 취재 도중 발목 부상으로 신문사를 그만두고 칩거하던 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집필에 착수했다.
10년 만에 집필을 마친 미첼은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다녔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무명작가의 처녀작 치고는 분량이 너무나 방대했던 것이다.
미첼은 우연히 작은 출판사에 다니는 지인을 만나 원고를 건네주며 신신당부를 했고,
출판사 직원은 간신히 사장을 설득하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빛을 보게 되었다.
※ 「로빈슨 크루소」는 무려 20번, 「갈매기의 꿈」과 「러브 스토리」는 각각 12번
거절당하다가 겨우 출판된 뒤 세계적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거절했던 출판사 사장들의
허패를 뒤집어놓았다.
1936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서점에 나오자 금세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책을 낸 애틀랜타의 작은 출판사는 단숨에 명성을 얻어 전국구로 발돋움했고 미첼은
세계적인 유명작가 반열에 올랐다.
1937년 미첼은 미국의 ‘언론ㆍ문학ㆍ작곡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39년에는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관객몰이를 하면서 비비안 리를
세기의 연인으로 부각시켰다.비비안 리가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 역에 캐스팅될 때까지
1400명의 여배우가 오디션에 참가했다가 불합격을 받았다.
미첼은 49세의 만개한 나이에 집을 향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비명횡사했다.
1922년, 헤밍웨이가 <토론토 스타>지 파리 특파원의 신분으로 스위스에서 취재활동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아내 헤들리가 크리스마스 휴가에 맞춰 헤밍웨이를 방문하기로 했다.
헤들리는 헤밍웨이의 초기 작품 원고들을 가방에 챙겨 넣고 비행기에 올랐다.
23세의 혈기왕성한 새신랑에게 깜짝선물을 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짐꾼에게 가방을 맡겼다가 도둑을 맞고 말았다.
귀중품으로 오해한 짐꾼이 두툼하고 묵직한 원고가방을 들고 줄행랑을 친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여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말짱 헛수고였다.
헤들리는 남편에게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구했다.
헤밍웨이는 흔쾌히 아내를 용서하고 즐거운 휴가를 함께 보낸 뒤 귀국하자마자 이혼해버렸다.
신효범은 대입에 낙방하여 재수 중 친구 권유로 <MBC 신인가요제>에 나갔다가 금상을 받는
바람에 가수로 발목이 잡혔고,프랑수아즈 사강(1935~2004)은 대입에 낙방하여 재수하던 중
집필한 「슬픔이여 안녕」이 세계적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사강은 다음해 소르본대학에 입학했으나 「어떤 미소」 「브람스를 좋아하나요?」
「뜨거운 사랑」 등이 잇달아 히트하면서 아예 대학을 접고 작가로 나서 수많은 소설과 희곡과
시나리오를 남겼다.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