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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친타
◼마르코 12,38-44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경상남도 여기저기 다양한 동네에서 오셨고, 또 경상도랑 가깝다는 이유로 전라도 분들도 어제 와서 잤습니다.
다행히 오늘 좋은 날씨 그리고 편안하게 미사 할 수 있게 된 것에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오늘 여러분들은 주일날 본당에서 미사 드리는 것이 아니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서 이 먼 데까지 오셨어요.
하지만 우리가 늘 이곳에서 은혜를 받고 돌아가는 그 첫 번째 단추는 뭐라고 그랬죠?
마음가짐, 어떤 마음가짐?
그렇죠. ‘주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에 온 거다.’
누구 차를 타고 가고, 날짜 잡아서 신청하고.
겉으로 보면 사람이 계획하고 완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죠.
어떤 분들은 아침에 갑자기 못 오게 되는 분들도 있고요.
또 어떤 사람은 오기 싫은 거 억지로 끌려와 울다가 가는 사람도 있고요.
그래서 여기는 하느님이 불러주셔야만 오는 데예요.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으로 이곳에 머물다 가시면, 불러주셨으니 하실 말이 있고, 또 뭔가 주실 선물이 있겠죠.
하실 말은 사제의 입을 통해서 또 이곳에서 군데군데 앉아서 묵상하시면 여러분의 양심을 통해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릴 겁니다.
분별이 필요한 사람한테는 어떻게 분별할 것인지 방향을 잡아주실 거고요.
또 영과 육이 병든 사람에게는 ‘네가 무엇을 포기해야만 네 병이 나을 거다.’ 하는 그 해법을 알려주실 거예요.
오늘 미사는 본당에서 하는 미사가 아니고, 사실 피정처럼 준비했습니다.
연중 제32주일의 강론을 준비하면서 주제를 ‘아름다운 봉헌이란 무엇일까?’로 잡았어요.
제가 피정 지도하면서 아주 중요하게 신자들한테 거듭거듭 수천 번을 얘기한 단어들이 꽤 여러 가지가 있어요.
영성 생활의 키워드죠. 그중에 하나가 ‘봉헌’이에요.
왜? 봉헌이 어긋나면 절대 하느님 못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만나기 위한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봉헌이에요.
그래서 신학자가 얘기하는 봉헌의 신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나는 아주 쉽게 신자들한테 봉헌이 무엇인지 알려드렸죠.
봉헌이 무엇입니까?
군더더기 다 떼고 핵심만 얘기할 때, ‘하느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 떠날 때도 하느님에게 가잖아요.
태어날 때도, 이게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하느님이 세상에 내보냈어, 그리고 거둬가시는 거예요.
머리끝에서 발가락끝까지 내 것이라고 하는 것, 사실 아무것도 없거든요.
멀쩡하던 손가락이 갑자기 관절염이 생겨서 뻑뻑하고 아파.
이거 내 것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얘가 말을 안 들어.
무릎이 아프고 어느 날 지팡이를 짚어야 하고, 머리도 내 것인 줄 알았는데 금세 잊어버리고,
머리카락도 내 것이라면 이 세상에 대머리가 있겠어요?
‘내 것’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발톱 하나 손톱 하나.
꽃동네 가면은 입구 돌멩이에 뭐라고 크게 새겨져 있는 줄 아세요?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사실 그 표현만으로는 약해.
내가 눈 껌뻑거릴 수만 있어도 그건 주님의 은총이고,
내 손가락에 묵주 걸고 묵주 굴릴 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고.
내가 내 두 다리로 성당 문턱을 드나들 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죠.
세상에는 묵주기도를 하고 싶어도 손가락이 말을 안 들어 못 굴리는 사람도 있잖아요.
나병 한우들은 손가락이 다 떨어져 나갈 수 없어요.
팔꿈치에 고무줄로 나무때기 붙들어 매고, 바닥에 묵주 펼쳐놓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굴려요.
그분들한테 물어보면 자기 소원은 손가락 2개만 있으면 좋겠대요.
5개도 필요 없대요.
하나에 걸고 하나는 넘기는 것.
다른 사람이 손가락에 걸고 묵주기도 하는 것 보면 그렇게 부럽대요.
그런데 우리 묵주 기도하면서 손가락 있는 것에 감사해 본 적 없잖아요.
으레 당연히 손가락으로 묵주 기도하는 줄 알고, 내 두 발로 으레껏 성당 가는 줄 알아요.
‘아름다운 봉헌’, 오늘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에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죠?
부자들은 큰돈을 내면서 으스댔지만, 가난한 과부는 성경에 보면 생활비 전체를 다 낸 거야.
‘렙톤’이라고 하는 것은, 글쎄 한국 돈으로 따지면 얼마일까, 한 1천 원?
‘렙톤 두 닢’이면 한 2천 원.
만일 생활비를 다 냈는데 그러면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그 과부가 그날 저녁 굶었을까요?
여러 은인을 통해서 별의별 것 다 먹었다고 내가 전해 들었어.
불고기에 삼겹살에, 생전 먹어보지도 못했던 것.
생활비를 다 내니까 하느님께서 그냥 어마어마한 것을 주신 거예요.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죠.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모질게 요구하신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그만 요구하시지, 이제껏 순명 잘하고 살아왔는데 또 순명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산 하나 넘어가면 또 주님께서 뭐를 요구하셔.
어떤 때는 ‘참 지독한 분이시다.’ 그런 걸 느낄 때가 있죠.
그런데 나중에 그 요구에 ‘예’하고 순명했을 때 결과를 보면, 그 철저한 주님의 요구하심이
우리에게는 축복으로 돌아옴을 결과가 항상 증명해 줍니다. 아멘
순명했더니 기적이 일어나거든, 순명했더니 주님이 나를 들어 올려 주신다는 말이야.
성경에 나오잖아요. 아브라함 얘기 잘 아시죠?
아브라함 나이 100살에 누굴 얻어요? 아들 이사악.
아들 하나 얻어 금이야 옥이야 키울 때, 하느님이 줄 때는 언제고 또 어떻게 하라 하세요?
그 하나뿐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십니다.
번제물이 뭐예요? 죽여 불에 태워서 바치라는 거예요.
잔인하고도 끔찍스러운 요구예요. 이게 말이 되기는 요구예요?
하느님이, 그 자비하신 하느님이.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어요?
바치려고 하죠, 바치는 척이 아니라.
가슴에 칼을 품고, 양을 끌고 가는 대신에 아들을 잡고 ‘우리 제사 지내러 가자.’
이사악은 영문도 모르고 ‘왜 아버지 오늘은 제물을 안 데리고 갑니까?’ 하니까
‘아마 하느님이 알아서 거기 준비해 놓으셨을 거야.’
산으로 올라가죠.
그리고 ‘아들아, 바위에 이렇게 누워 봐. 아빠랑 놀이하자.’
아들을 꽁꽁 바위에다 묶어요.
아들은 그때까지도 무슨 놀이를 하는 줄 알았죠.
아브라함은 눈 속에서 피눈물이 흘러요.
칼을 빼서, 눈을 뜨고는 못 봐 그냥 눈을 감고 내리찍는데, 그 뾰족한 칼날 끝이 아들의 심장에 닿기 전에
주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의 손을 딱 움켜쥐잖아요.
‘멈춰라. 이제야 내가 네 믿음을 알았다.’
참 어마어마하고 기가 막힌 시험을 하신 거예요.
아브라함은 피눈물 날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순명을 했지요.
그랬더니 그 결과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아들을 잃지 않고도 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후손을 약속받았죠.
그래서 참다운 봉헌에 순명할 때 주시는 축복이, 성경에는 ‘첫 번째 자손에 대한 축복’이에요.
그 말은 나 혼자 살다 죽으면 그 뿐이지가 아니에요.
내가 보지도 못할 200년, 300년 후의 내 후손들한테까지도 내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영향을 끼친다는 거예요.
마태오복음 1장 1절에 우리랑 아무 상관 없는 예수님의 족보가 왜 나왔겠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만들어지기까지, 그 수많은 하느님에게 순명했던 조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다윗 가문에서 예수님이 나왔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자손들을 생각해서 잘 살아야 해요. 함부로 살면 안 돼요.
전 세계를 휘어잡고 있는 것이 유대인인 건 아시죠?
어느 나라든지 보면 전부, 제일 머리 좋고 노벨상 제일 많이 탄 게 유대인이에요.
인구 몇 명 되지도 않는 그 조그마한 나라에 다른 나라도 꿈쩍 못할 정도로 힘이 강하잖아요.
무슨 축복을 받아서? 아브라함 할아버지 잘 뒀기 때문에 그래요.
이사악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자손을 약속받았죠.
만일 아브라함이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미쳤냐, 내가?’ 하면서 하느님께 삿대질하며 도망쳤다고 그래봐.
그리고 빨리 자손 보기 위해서 또 며느리를 들였다고 그래봐.
하느님께서 그 며느리의 태를 막아버린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은 누구로 끝나는 거예요?
이사악에서 끝나는 거예요.
여기서 이제 하나의 원칙이 나와요.
‘하느님의 계산과 인간의 계산은 전혀 다르다.’ 아멘
인간의 계산으로는 하나 있는 아들을 봉헌하면 무자식이 되고 대가 끊깁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는 그렇지 않았죠.
하나 있는 아들을 봉헌해도 그 후손이 10만도 되고 100만도 되잖아요.
그렇기에 ‘봉헌을 인간의 계산으로만 해서는 절대 우리는 은총 가운데 있지 못한다.’
오늘 제1독서 생각나십니까?
사렙타 과부 이야기가 나오죠.
과부의 유일한 재산은 뭐냐?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음식과 기름만 있었어.
그런데 지나가는 나그네 엘리야가 그것을 바치래요.
이제 이거 먹고 죽어야 할 판인데, 그걸 바치려는 거야.
그때 과부가 그걸 숨겼어요, 아니면 해다 드렸어요? 해드렸죠.
예언자 엘리야에게 바쳤기 때문에, 그 과부에게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아서
대흉년이 와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에요.
만일에 이 사렙타 과부가 자기가 먼저 먹고 하느님의 사람인 예언자를 생각했다면,
자기 입에 들어간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고 그 과부는 흉년이 왔을 때 굶어 죽었겠죠.
그런데 자기의 마지막, 오늘 나오는 과부처럼 생활비 전체를 바치죠.
계산법이 다른 거죠.
그런데 말이죠, 참 묘한 게 있어요.
하느님이 나한테 뭔가 요구하실 때, 갈등을 막 겪다가 ‘나 못 들은 척할래.’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봉헌하지 않으면 대개는 10배, 100배가 빠져나가요.
체험하신 적 있죠?
하느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데 제대로 봉헌하지 않으면, 대개는 마귀라는 놈이 100배 1,000배 뺏어가 버리고 말아요.
그러니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것을 뺏기는 손해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봉헌을 통해 내 인생과 내 재산이 지켜진다는 축복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죠.
놀랍게도 하느님에게 하나 봉헌하면 열을 주신다는 말이에요.
그것이 하느님의 셈법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 지키려고 그 하나를 안 내놓잖아요.
그리고 그 하나마저도 나중에 보면 나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어.
그땐 후회해요.
‘주님이 달라실 때 드렸으면 칭찬이라도 들었지, 그거 다 어디 갔지?’
사기당하고, 돈 빌려주고 못 받고, 막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는 거죠.
성경에 보면 하느님의 몫이 꼭 나와요. ‘하느님의 목’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이 꼭 나와요.
우리는 그것을 십일조라고 불러요.
하느님의 ‘이것은 내 거다.’ 얘기하신 것이 십일조예요.
레위기 27장 30절에는 ‘수확과 수입의 10분의 1은 내 것이니 나에게 바쳐라. 거룩한 야훼께 바쳐라.’,
또 말라기서 3장 10절에는 ‘십일조를 바쳐서 나를 시험해 봐라. 네가 복을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내가 풍성하게 해주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이처럼 성경에는 십일조의 은혜가 분명히 있어요.
신부님들은 강론할 때 십일조 얘기, 돈 얘기 거의 안 하죠.
그런데 목사님들은 해요. 그래서 개신교 신자들은 십일조를 가능한 한 하려고 그래요.
십일조 할 때마다 더 가난해지면 바치겠습니까, 안 바치겠습니까?
십일조를 하면서 체험하는 거야. ‘10개를 드렸더니 100배가 들어오는구나.’
또 하느님의 몫을 내가 챙겨드린다고 하는 그 뿌듯한 마음.
그러니까 십일조도 신앙의 한 중요한 기초가 돼버리는 거예요.
우리 천주교 신자들 냉담자 많죠. 코로나 터지고는 더 늘었어요.
최소한 1년에 두 번 고백성사 보는 신자를 수계 신자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약 30%였는데 지금은 18%로 떨어졌어요.
코로나 이후 10명 가운데 1명 반 정도밖에 미사로 안 나온다는 얘기예요.
지금은 코로나에 탓을 돌려요. ‘코로나만 안 터졌으면 내가 열심히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코로나 전 주된 냉담 이유를 들어보면, 약 60%가 밀린 교무금 때문에 못 나가겠대요.
건축금 약정해 놓고, 그걸 못 지키니까 나가도 신부님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자격지심이죠. 신부님이 돈 안 낸다고 미사 하면서 쳐다보겠어요?
교무금도 매달 내면 되는데, 작은 교무금이라도 밀린 것을 내려면 목돈이 돼버리죠.
냉담자 60%가 교무금, 건축금, 또 마땅히 내야 할 것들을 안 냈다는 것이 출발이 되는 거예요.
‘냉담의 출발’, 이해되시죠?
개신교 신자들은 봉급을 타면 딱 10분의 1을 떼어놓아요.
그리고 깨끗한 돈으로 깨끗한 봉투에다 딱 갖다 바치고, 10분의 9를 가지고 살아요.
그런데 아까 얘기한 것처럼 채워지고도 남아, 그런 체험을 한다는 말이야.
하지만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자기가 쓰고 남은 것 중에서 얼마를 바치려고 해요.
그러니까 맨날 모자라죠. 쓰고 남는 게 어딨어?
애초부터 10분의 1을 떼고, ‘이건 없던 돈, 하느님 것이다’라며 남은 돈으로 살면 더 풍요롭게 살아요.
그런데 쓰고 남으면 봉헌하겠다? 절대 안 남아, 바칠 게 없죠.
또 그나마도 바치는 것도 아까워하면서 바치죠.
우리가 봉헌할 때 아브라함처럼 내 심장이나 허파를 떼서 바치는 마음으로 바쳐야 해요.
간이나 콩팥을 떼어서 하느님에게 드리는 마음으로 바쳐야 해요.
내가 피정 때 가끔 한 이야기인데 기억나시나 모르겠어요.
본당 신부하고 있을 때 간병인 하는 자매가 와서 신부님한테 허락받으러 왔다며,
자기 병원에 25살 소년 가장이 있는데 신문 배달하다 트럭에 치여 콩팥이 다 으깨졌대요.
청년이 너무 불쌍해서 어찌 피 검사를 했더니, 세상에, 자기 콩팥을 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그 자매도 병 덩어리야, 혈압도 높고 당뇨도 있고.
그래서 내가 남편이 허락하셨냐 물었더니 허락했대요.
아니 허락할 정도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으냐 물으니 사이 무지하게 좋대요.
그런데 왜 부담스럽게 나한테 와서 허락받느냐 물었죠.
그랬더니 ‘신부님이 영적으로 아버지인데 아버지가 허락하셔야지 떼어주죠.’
내 것도 아닌데 그러라 했죠. (웃음)
그래서 떼어주는 날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나도 쫓아갔죠.
머리에다 손을 넣고, 자매님 무서워하지 말고 하느님이 다 보고 계시니 한숨 자고 나오면
그전에 있던 병도 다 치유받아 나올 거라고 했어요.
자기 새끼에게 콩팥 떼어주는 부모는 있지만, 피도 살도 안 섞이고 돈 때문도 아니거든요.
그 자매가 아멘 하면서 들어갑디다.
수술이 꽤 컸어요. 한 6시간?
그 청년도 수술이 잘 되고 살아났고, 그 자매도 한 달 지나 종합검사를 했대요.
그랬더니 그전에 있던 지병이 다 없어진 거예요. 아멘
당뇨고 뭐고, 오만군데 병 덩어리였는데.
그러니 우리가 봉헌할 때는 정말 내 허파를 떼어주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해야 그것이 참다운 봉헌이지,
아니면 찌꺼기 봉헌이죠.
오늘 강론의 주제가 뭐라고요?
그냥 봉헌이 아니라 ‘아름다운 봉헌’이에요.
신앙은 바로 ‘봉헌’에서 생겨요.
그리고 ‘주시는 은혜의 맛이 이렇게 맛있구나’ 하는 것도 우리들이 참되게 봉헌할 때 생기죠.
늘 찌꺼기를 바치려니까 신앙에 부담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마저도 안 내다보니, 자꾸 하느님한테 멀어지고 십자가 쳐다보는 것도 부담스럽고.
냉담하기 전 열심히 할 때는 길에서 수녀님 만나면 쫓아가서 인사했는데,
이제는 신부님 나타나면 골목으로 도망가고, 어 성당 종탑만 봐도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내가 시골 본당에 있었던 일을 하나 얘기 드릴게요.
시골 본당에 부임했는데 첫 번째 주일미사에 참여한 교우들의 얼굴이 밝지 않았어요.
난 강론할 때 적어도 두세 번은 웃게 만들거든요.
아, 그런데 이 인간들이 안 웃어요.
나랑 무슨 웬수가 졌는지 그냥 날 째려보고 있고, 아무리 해도 웃지도 않았어요.
또 울어야 할 순간에도 눈물 하나 흘리는 인간이 없어.
그리고 뭘 시켜도 신자들이 눈치만 보고 표정이 항상 하나같이 어두웠어요.
처음에는 왜 어두운지 몰랐죠.
시골에는 가을이 되면 가을 판공을 하며 교무금 같은 것을 정해요.
그리고 이 사람이 교무금을 얼마를 냈는지 다 봐요.
첫 번째 내가 부임해서 가을을 맞고, 세상에, 깜짝 놀랐어.
그 어두운 이유를 거야 안 거야.
1년 내내 교무금을 안 내요.
그러다가 성탄 면접 때 가서야 그때 추수 수매한 돈 중에서 1년 치라고 하면서 만 원 내요.
계산도 안 돼요, 한 달에 얼마 내는 거야?
제일 많이 내는 사람이 1년 치라고 낸 게 5만 원이었어요.
그런데 나랑 면담하면서도 그 만 원 2만 원도 안 내고 뭐라 했는 줄 알아요?
그 전 미국 신부님은 갖다줬는데 어떻게 돈을 달라고 하냐고 물어요.
전 신부님은 자기 나라에서 돈 얻었다가 다 해서 교무금 얘기한 적도 없대요.
하긴 내가 어느 또 다른 시골 성당에 부임해 가정 방문했더니 전부 밀가루 신자들이야.
6.25 직후에 어려울 때 미국 신부님에게 밀가루, 옷 같은 것 얻으려고 세례받은 거예요.
어느 할아버지가 ‘이제 나오셔야죠?’ 했더니, 나오라는 소리를 왜 하네요.
밀가루 서너 포대 얻어먹고 3년 나가주었으면 됐지, 왜 자꾸 나오라고 하냐.
그게 밀가루 신자예요. 모두 냉담자에 들어가 있으니, 냉담자 퍼센티지가 올라가는 거지.
나도 아까 얘기한 것처럼 면담하며 1년 치 교무금이라 봉투를 주는데 1만 원이야.
‘이거 10만 원짜리 수표 잘못 넣으신 거 아니에요?’
그렇게도 내는 사람이 40%밖에 안 됐어요.
나머지 60%는 교무금을 왜 내야 하네요.
미국 신부님은 돈 갖다주고, 땅도 사주고 논도 사주고 그랬는데.
‘한국 신부 그거 못해요. 여러분들이 운영하셔야죠. 교무금은 교회 운영비에요.’
그러면 성당 안 나오겠대요.
성당 신자들 얼굴이 하나같이 어두운 이유가 그거였어.
하느님 몫을 떼어먹는 거예요. 제대로 안 내는 거죠.
그래서 그 원인을 알고 난 다음에 내가 얘기했죠.
‘여러분의 믿음이 1년 내내 죽어 있는 이유를 이번 가을 판공 주면서 알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성당을 줄곧 외상으로 다녔기 때문에, 표정이 떳떳지 못하고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매월 하루 품삯을 첫 주일에 맞돈처럼 내놓고 다니십시오.’
‘맞돈’이 뭔지 아시죠?
그때 1년 만에 처음 웃습디다.
그리고 교우들이 교무금을 매월 초에 착실히 내면서 본당 재정이 잘 돌아가기 시작했죠.
그리고 또 자선도 교회에서 넉넉하게 베풀 수 있었어요.
할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떠날 무렵에는 십일조를 생활하는 교우들이 60%를 넘어서게 됐어.
그래서 오히려 도시 본당 건축금을 꾸어줄 지경까지 된 거야.
그리고 버스도 운영해서 시골 공소 신자들 데려오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사제들은 신자들을 교육시켜야 해요.
우리 신자들이 개신교 신자들보다 덜 열심히 해서가 아니고 모르기 때문에 못 하는 거죠.
꼭 해야 하는 걸 내가 못 하고 살았다고 하는 깨달음을 줘야 한단 말이에요.
아무튼 그 성당에서 무엇보다 제일 큰 변화는 신자들의 죽은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어요.
그러면서 얼굴들이 밝아졌고 평화가 오고.
그리고 이제 신앙생활이 즐거우니 지나가다 성당만 쳐다봐도 행복하대요.
외상으로 성당 다니면 얼굴이 이쁠 수가 없는 거예요.
오늘 이 자리에서 찔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유튜브 강론 들으며 신부님이 오늘따라 이렇게 콕콕 바늘로 찍어대나 하는 분도 계실 텐데요.
내가 늘 하는 얘기 ‘혼란스러울 때는 원칙대로 살아야 해요.’
원칙대로 살면 평화가 안 깨져.
그런데 원칙에서 벗어나면 평화가 없죠.
물론 외상 신자니 맞돈이니 하는 표현이 아름답진 않아요.
그렇지만 여러분들에게 쉽게 와닿게 하려고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을 제대로 바치지 않게 되면 그 신앙은 위선이 되고 떳떳지 않게 된다는 것은, 진리 중의 진리죠.
하느님을 속이고 있기에, 기도해도 힘이 없고 또 은혜의 맛을 절대 체험할 수가 없어.
물론 나오지 않지만, 가난한 과부는 그날 저녁에 사람들이 불고기 사줬다고 그랬죠.
결론은 그겁니다.
하느님의 복은 봉헌에서 나온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거예요.
여러분들, 십일조가 어려우면 십일조의 반이라도 봉헌하세요.
개신교 신자들은 신자 30명만 있어도 교회를 운영해요.
개척교회 같은데 100명이 안 돼도, 봉고차 굴리면서 운영하며 키워 나가요.
그래도 봉고차 굴리면서 그 교회를 운영하면서 키워 나가요.
그 십일조 때문에, 어떤 때는 너무 심하게 얘기하는 예도 있지만요.
목사님들 얘기와 신부들 전혀 얘기하는 것을 섞어서 반으로 나누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우리 신자들은 신부님들 입에서 십일조 봉헌하라는 말을 아마 거의 들어본 적 없을 거예요.
이유는 뭔 줄 압니까?
신부님은 내 성당이라는 게 없잖아. 4년 되면 가야 해. 책임 의식이 없는 거야.
내가 4년 후에 가더라도 이 성당을 한국에서 최고의 성당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로 부임해야죠.
신자들의 어떤 교육 수준을 높여야겠다고 계획해서 열심히 유명한 피정 강사들을 부르고,
지저분한 곳 다 정리하고, 신자들 가정 방문하며 면담하면 냉담자들도 막 나와요.
그런데 피정 다녀 보면 신자와 본당 신부가 살갑게 사는 본당이 많지 않아.
본당 신부님도 얼굴이 어두워 밥 먹다 얘기해 보면, ‘아유 신부님 말도 더럽게 안 들어요.
저 1년만 참으면 딴 데 가요.’ 벌써 갈 거 생각하고 있고. 또, 신자들도 ‘저희도 1년만 참으면 돼요.’
신부님 빨리 가기 9일 기도가 있다나, 아이고, 살다 살다 별 얘기 다 듣지.
하느님의 축복은 어디서 나온다고요?
그냥 봉헌이 아닌 가난한 과부의 헌금처럼 아름다운 봉헌에서 분명히 나와요.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의 몫을 챙겨드리지 않으면 하느님 속 썩이고 자신도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린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봉헌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내가 이제껏 어떤 봉헌을 하고 살아왔느냐?
주님 보시기에 100점짜리 봉헌은 없잖아요.
그렇지만 적어도 낙제 점수는 안 받아야지요.
‘너는 항상 너 쓸 것 다 쓰고 난 다음 남으면 나한테 뭘 하나 보내긴 보내는데,
나 이것 가지고 짜장면도 못 사 먹어.’ 이런 말을 듣는 봉헌을 하며 살지 않았는가.
그래서 오늘부터라도!
봉헌은 여러 종류라고 그랬죠.
기도의 봉헌도 있어요. 아름다운 기도 봉헌.
몸 봉헌도 있어요. 내가 몸 움직여서 봉사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물질의 봉헌도 있어요. 아름다운 물질의 봉헌.
이것을 3대 봉헌이라 그래요.
거기에 전부 다 하나같이 ‘아름다운’이 들어가야 해요.
그래야만 그 봉헌을 통해서 생각지도 못한 축복을 우리들은 분명히 받게 돼요.
절대로 여러분들, 하느님에게 인색하지 마세요.
그분이 우리 생사를 좌우하시잖아요. 절대 인색하지 마세요.
그리고 어떨 때는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것처럼 모진 느낌이 들 수 있어도,
일단 ‘그래 내가 순명하면 주님을 내 앞길 선하게 예비하고 계실 것이다.’ 아멘
야훼이레. 그것을 믿어야 해.
그리고 어떡하라고요? 감사도 어떡하라고요?
감사할 일이 생긴 다음에 감사하지 말고 땡겨서 감사.
돈만 땡겨쓰는 게 아니라 감사도 땡겨서 해야 해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좋은 일 생기면 조상한테든 천지신명께든 감사하고 살아요.
우리 믿는 이들은 감사할 건더기가 하나도 없어, 앞을 봐도 캄캄하고 뒤에도 절벽이고.
그럴 때 진짜 미리 당겨서 감사하면 갑자기 고속도로가 눈앞에 딱 보여, 길이 보이는 거예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예요. 그죠?
그래서 봉헌과 감사는 항상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 있어요.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애쓰면 저절로 아름다운 봉헌이 나오겠죠.
사제인 저도 한평생을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제로 살려고 애를 썼어요.
많이 부족하지만, 늘 후회하지만.
그리고 신자들한테도 그렇게 같이 살자는 마음으로 권고를 많이 하고 살았죠.
아까 아브라함이 아들 하나 잃어버릴 줄 알고 도망을 쳤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인 지금 유대인들은 없어요.
유대라고 하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 자체가 없을 거예요.
축복을 받은 거죠.
어제 예비 수녀님들이 네 분이 오셨어요.
여기서 조금 떨어진 여주에 가면 복자 수도원 수련소가 있어요.
짜장면 살 테니 오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예비 수녀들이 넷이 왔는데 3명이 전부 다 동남아 사람들이에요.
한국 사람들은 딱 하나예요.
수도원마다 이제는 수녀원 들어오는 한국 사람이 없대요.
어제도 보니까 미얀마에서 둘, 베트남에서 하나, 한국 사람 딱 하나.
그 사람들 오면 한국말 가르치느라고 대학교 보내야 해.
돈은 돈대로 많이 들고 힘들죠.
수도원 이제 없어지게 생겼어요. 신학교도 자꾸 없어지잖아요.
대한민국 자체가 지금 없어질 판인데.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봉헌하는 부모님이 있죠.
독자를 봉헌했으니 대는 끊어졌죠.
그렇지만 그 사제가 한평생 살면서 얼마나 많은 영적인 자식을 만들겠어요?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이랑 똑같은 거예요.
하나밖에 없는 7대 독자 신학교 보내고 신부가 됐어.
집 안에서는 미쳤다고 손가락질당했지만, 그 부모님은 담대하게 그것을 다 받아냈거든.
그리고 아들 신부가 한평생 살면서 회개시켜 만든 하느님 자식이 후손인 거죠.
피와 살이 섞이고 혈액형이 똑같고 유전인자가 똑같아야만 후손은 아니에요.
영적인 자식들이죠.
우리 아름다운 봉헌을 합시다.
♣2024년 연중 제32주일 (11/10)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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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친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