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40분에 여유있게 일어났다. 이렇게 빨리 일어난 이유는 정규가 오늘 창덕궁 가는것을 잊어먹고 준비를 않했을것이라고 생각 해서이다. 하지만 정규는 준비를 아주 잘하였다.
나는 정규한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정환,동욱,정규 그리고 나 넷이서 7시40분쯤에 출발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시계탑 가는방법을 몰랐다.
하지만 우리는 중학생이라서 시계탑 정도야 그냥 찾을수 있을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석촌호수를 뺑 돌아봐도 시계탑 같아 보이는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경비아저씨의 도움으로 겨우 시계탑을 찾았다. 시계탑에 도착했을때는 우리반 친구들이 많이와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곰 진혁이가 제일 튀어보였다. 이유는 반바지,반팔차림 이어서이다.
예정대로 지하철을 타고 창덕궁에 도착하였다. 나는 창덕궁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 관심은 오직 도서관 이었다. 하지만 막상 착덩궁에 와보니 아름다운 건물들이 참 많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정말 좋아하였다. 왜냐하면 점심을 먹으면 그 다음은 도서관을 가는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을 따라서 김밥천국으로 갔다. 나는 점심을 싸왔지만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해서 함께 갔다.
점심을 먹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도서관으로 왔다. 아이들은 도서관에 들어가서 조금 음흉한 아이들은 야한책들을 찾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었던 책들을 찾는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 은하철도999를 보러 옆 건물로 이동하였다.
처음에는 싫었지만 계속 보니 볼만하였다. 다시 책을 보러 도서관으로 향하였다. 나는 보던것을 찾아서 계속 보았다. 시간이 다 되자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데 정규가 도망쳐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기다리다가 오지 않자 우리는 그냥 갔다. 정규가 불쌍했지만
어쩔수 없었다. 승효가 찾으러 갔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찾을수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정규가 걱정이 되었다.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왔다. 중학생이 되서 다녀온 첫 소풍을 재미있게 다녀와서 정말 좋았다.
인터넷 조사
1.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으로 원래는 화강석조의 하얀색 댓돌이 있었고 그 위에 이층으로 세운 중문이었다. 이런 양식은 옛날 삼국시대로부터 궁궐의 정문으로 채택되어 왔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대문은 광화문으로, 홍예문이 셋이 열린 육축(陸築)위에 올려 세운 구조이다. 돈화문과는 그 모습이 완연히 다르다. 창덕궁의 모든 구성은 이궁(離宮)으로서의 조촐한 맛을 지니고 있다. 돈화문은 그런 구조를 대표한다.
창덕궁과 더불어 돈화문도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복구된 것은 선조 40년(1607)이었다. 조선 궁궐에 현존하는 중문으로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2.금천교- 조선왕궁에는 북(玄武)에서 발원하여 외당을 회유하면 극히 길하다는 명당수가 있고 궁의 정문에서 궁전으로 들어가려면 이 명당수 위에 놓여진 돌다리를 통과하여야 한다. 경복궁의 영제교며 창경궁의 옥천교와 덕수궁과 경희궁에도 있었던 그런 다리가 창덕궁에서는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길이가 12.9미터, 폭이 12.5미터로, 태종 11년(1411)에 조성되었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3.진선문- 창덕궁에는 궁 정문에서부터 정전에 이르는 주출입선에 세 개의 문이 세워져 있다. 세 개의 문은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인데, 돈화문은 제일 바깥에 위치한 창덕궁의 정문이고, 다음 금천교를 건너 만나게 되는 진선문은 외행각 주출입문이며, 마지막 인정문은 내행각 주출입문이다. 이처럼 진선문은 창덕궁 주출입선상에 위치한 중문이므로 문의 전후로는 어도를 두었다. 진선문은 남북축의 돈화문이나 인정문과는 달리 동서축으로 세워져 있어, 돈화문으로
들어와 북측으로 진행하다 동측으로 꺾어서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게 되며 다시 북측으로 꺽어서 인정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외행각의 동측 진선문에 대응하는 위치에는 숙장문이 세워져 있어 진선문과 함께 동서축을 이루고 있다. 진선문 북측 행각끝에는 동으로 정청(政廳)을 연결시키고 남측 행각끝에서는 동으로 내병조(內兵曺)가 연결된다.
4.숙장문- 숙장문은 돈화문으로부터 인정전 외행각을 거쳐 선정전 및 내전지역(內殿地域)에 이르는 주출입선상에 위치하는 문으로써, 외행각의 동측면이자, 어차고의 서측편에 위치한다. 북측으로는 인정문 좌월랑과 담장으로 연결시켰고, 남측으로는 인정전 외행각의 동행각과 연결하였다. 그러나 숙장문과 함께 인정전 외행각은 인정전 내행각과는 다소 틀어진 배치로 되어 있으며, 진선문과 함께 동서방향의 축(軸)을 형성하고 있다. 문의 전면에 해당하는 인정전 외행각의 내부 쪽에는 어도를 두었는데, 진선문 및 인정문과 연결된다. 어도는 중앙부와 양측부로 나누어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부를 양측부 보다 높여 두 단으로 구성하였다.
5.인정문- 임금이 만조백관과 조회를 하려면 인정전에 모인다. 인정문을 들어서야 참예할 수 있다. 인정문은 인정전을 에워싼 행각의 대문으로 남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나지막한 댓돌에 설치한 돌층층다리를 올라서면 좌,우,중앙 3간문을 들어서게 된다.다른 곳의 대문과는 그 구조와 장식이 다르다.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행각(行閣)은 전시장으로 쓰던 것을 개조하여 복원하였다. 태종 5년에 창건한 것이나 임진왜란을 겪고 복구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손상을 입었다. 영조 20년(1744)에 불에 탔는데, 이듬해 곧 중건되었다. 순조 3년 인정전이 불에 타 이듬해 재건되는데, 이때 인정문의 보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6.인정전- 임금이 높이 앉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어좌를 중앙에 두고 여러 가지 장엄을 베풀면서 권위있게 지은 법전이 각 궁궐마다 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으로 궁궐의 배설로는 외전의 중심이 된다. 외전은 보통 내전의 남쪽에 있어 중요한 전각들을 자오선을 주축으로 하는 선상에서 좌향시키기 마련인데, 창덕궁은 경복궁에서와 같은 규범에서 벗어났다. 이궁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지형에 따라 적절히 배설하는 방도를 강구한 것이다. 건물형태는 이중의 월대 위에 중층으로 세워진 집인데, 들어가 보면 아래 위층이 트여 있다. 20칸 크기의 다포계 공포양식을 지닌 전각으로, 조선조 말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전각안 천정 중앙에는 봉황 한쌍이 장식되어 있고, 북측 중앙에 닫집으로 장엄된 용상(어좌)이 설치 되어 있다.
7.선정전- 보통 때 임금이 신료들과 만나 정사를 의논하는 곳을 편전이라 부르는데, 이 전각이 창덕궁의 편전이다. 건물 중앙에 임금이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을 배경으로 앉고, 그 앞에 대소신료들이 위계에 따라 동서로 벌려 앉았다. 동쪽엔 문관이, 서쪽엔 무관들이 자리잡는다. 그리고 한쪽에 사관이 앉아 문답하는 내용을 속기하여 사초(史草)로 삼는다.
편전은 외전 중 하나이며 임금의 연침(燕寢) 가까운 자리에 건립된다. 선정전은 아홉칸밖에 안 되는 단층의 낮고 아담한 건물로, 외벌의 댓돌을 넓게 설치한 것과 지붕에 푸른색 유약을 입힌 청기와를 이은 점이 특색이다.
8.대조전 남쪽에 있으며, 임금의 거처로, 평시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이다. 중앙의 정면 3칸, 측면 3칸을 통간(通間)으로하여 응접실로 사용하였고, 응접실의 서편은 같은 크기로하여 회의실로 사용하였다. 응접실의 동쪽벽 상부에는 <총석정절경도>, 서쪽에는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걸려 있다.
고종은 경복궁이 완성되기까지는 여기에 머물렀고, 순종이 승하할 때 끝까지 여기에 있었다.
대한제국은 옛부터의 관습과 개화에 따른 신식문물을 절충시키는 시국에 처했을 때라, 임금의 처소도 전각은 옛법에 따르고 내부는 서양식으로 장치하는 방식을 반영하였다. 지금의 전각은 1917년 화재를 입어 소실되었던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헐어다 중건한 것이다.
9.대조전- 침전 여섯 중에 으뜸은 왕비의 침소인 곤전이다. 곤전은 임금의 정침 바로 뒤에 위치하여 중심되는 자리를 차지한다. 창덕궁의 곤전은 대조전으로, 희정당의 바로 뒷편에 일곽을 구성하고 있다. 경복궁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희정당을 지을 때 왕비의 침전이던 교태전도 함께 옮겨다 대조전을 지었는데, 고스란히 옮긴 것이 아니라 창덕궁에 적합하도록 그 구조는 새롭게 하였다.
10.경훈각- 대조전 서북쪽에 위치한 경훈각은 현재는 단층 건물이지만 원래는 2층 건물이었으며 위층이 징광루이고 아래층은 경훈각이라 하였다. 세조 7년(1461)에 전각 명칭을 바꿀때에 누상을 징광루, 누하를 광세전이라 하였으므로 그 이전부터 2층 건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로 인조반정 때에 소실되고 또 다시 이듬해에 중건된다. 순조 때 화재가 발생하기 전인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동궐도'에서는 경훈각이 2층에 청색 기와로 그려져 있으므로 인조 연간의 중건 때에 청기와로 지붕을 이은 것으로 추측된다.
11.내의원- 전의들이 왕과 왕족의 치료를 위하여 머물던 일종의 궁중 의료기관으로, 약방이라고도 부른다. 성정각이 중심되는 건물로, 거기에는 임금 받들기를 지극히 한다는 의미의 '보호성궁' '조화어약' 등의 편액을 높이 달아 두었는데, 정조 어필이다.
12.어차고- 인정문에서 내의원 쪽으로 올라가는 도중 오른쪽에는 고종과 순종이 사용하던 어연과 주정소(晝停所:국왕의 능행 등 행차때에 잠시 쉬기 위한 용도의 구조물), 외바퀴의 초헌, 마차와 승용차들이 전시된 건물이 있어 승용차의 변화 과정을 실감할 수 있어 흥미롭다.
13.낙선재-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순조 28년(1828)에 건립된 연경당보다 20년 뒤에 세워진 곳으로 궁궐에 조영되는 주거 건축술로서 그 구성의 법식과 보존 상태가 훌륭하며, 특히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 분방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14.영화당- 조선왕조에선 옛 제도에 따라 국가의 동량(棟梁)을 뽑는 일을 과거제도에 의존하였다. 공개시험으로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는 방법이었다. 지방에서 초시에 합격한 사람들만 골라 임금이 친히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게 하였다. 이를 전시(殿試)라 하는데, 영화당은 그런 과거를 보는 장소였다. 원래 이곳은 임금이 신하들과 꽃구경을 하고 시를 지으며 놀던 곳이다. 정조 때부터 이곳을 과거장으로 사용하여, 영화당에는 시관이, 그 앞 춘당대에는 응시자들이 자리잡고 과거를 보았다.
15.부용정- 영화당에서 과거를 보고 급제를 하면 주합루에 올라가 왕실도서관의 수만 권의 서책을 읽으면서 능력을 함양하게 된다. 그때 그 일을 축수해 주는 자리가 부용정이다. 부용정의 평면은 亞자형이면서 변화를 주어서, 작은 건물이지만 그 구성이 복잡해 보인다. 한쪽의 두 다리를 연못 속에 담그고 섰다. 연꽃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한송이 꽃과 같은 정자를 꾸민 것이다. 정조 때 개건했는데, 구조로 보아 특이한 정자이다.
16.부용지- 부용지는 장방형 연못으로 못 가운데에는 직경 9미터의 원형 섬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숙종 때부터 연못이 있었으며, 1707년 지금의 부용정 터에 택수제가 건립되었던 것을 1792년에 정조가 택수제를 헐고 부용정을 개건한 것이다.
17.주합루- 정조가 즉위하던 해에 주합루가 완성된다. 실학의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절에 정조는 등극하여 유능한 문신들과 더불어 문치에 노력한다. 임금 자신이 박식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서책들을 많이 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