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아름다워(544) - 제6회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우정걷기 기행록(2)
1. 아름다운 국경의 섬, 이키 탐방
4월 24일(월), 새벽 5시에 일어나 가방을 챙겨서 로비로 내려가니 벌써 많은 분들이 나와 있다. 5시 20분, 전날 이즈하라 항에서 가방을 호텔로 나른 대마시청의 트럭이 도착하여 짐을 싣는다. 5시 반, 일행들이 숙소를 나서 이즈하라 항까지 걸어간다. 아직 어둑한 시간, 까마귀 한 마리가 공중을 선회한다. 일본에서는 길조로 여기는 까마귀를 바라보며 일행들의 전도를 축복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옆에서 걷는 주일본문화원장을 역임한 강기홍 전 관광공사 부사장에게 일본에는 까치가 없는 게 사실이냐 물으니 그렇다는 대답, 개나리와 까치가 없는 것이 한국과 다른 점이라는 설명이다. 이를 들으며 대마도가 일본 열도보다 한반도와 더 가까운 곳인데도 생태계의 차이가 나는 이역인 것을 새삼 확인한다.
항구로 가는 길목의 하천 주변에 전시된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대마도를 알리는 관광팸플릿에는 조선통신사들이 대마도에서 묵었던 행로를 따라 걷는 산책코스를 소개하는 등 대마도와 조선통신사의 인연이 깊은 것을 새기며 전날 부족한 대마도 탐사의 아쉬움을 달랜다.(이전 탐사 때는 대마도에 이틀 묵었다.)
이즈하라 항까지는 15분 거리, 6시 반의 승선시간까지 여유가 있다. 이 틈에 터미널 대합실에서 미리 준비한 삼각 김밥과 오차로 아침을 가름하고 고속 제트 호일 비너스 호에 올랐다. 6시 50분에 출항한 비너스 호는 망망대해를 쾌속으로 달려 한 시간여 만에 이키(壹岐) 섬의 아시베 항에 도착한다. 배에서 내리니 시청 직원들이 ‘아름다운 이키 섬으로’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일행을 반긴다. 직원들을 대표하여 이키 시의 곤다 과장이 좋은 날씨에 이키를 방문한 것을 환영하며 유익한 여정이기를 빈다고 인사한다.
오전 일정은 이키 시청까지 12km를 걸어가는 것,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8시 20분 경 행진에 나섰다. 아시베 항을 벗어나니 농작물이 잘 자란 들판과 녹음 짙은 언덕길로 이어지는 시골풍경이 아름답다. 논에는 모내기를 한 곳이 있고 담배와 보리맥주가 무성한 밭 등 전형적인 전원풍경에 삼림이 울창한 신사와 아담한 주거지역, 상가와 편의시설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 시간 반쯤 걸어 한적한 신사에서 잠시 휴식한 후 고노우라에 있는 이키 시청에 도착하니 11시, 시청직원들이 청사 앞에 도열하여 일행을 맞는다. 이어진 환영행사, 외무성 출신의 사사하라 부시장이 이른 아침부터 세 시간여 걸어서 시 청사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키 섬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5년 간 12회 발행한 조선통신사들이 그 중 11회나 들렀던 연고를 상기하며. 고대문화 유적과 대륙과 본토의 지리적 요충지인 이키 섬이 2년 전 일본 정부로부터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국경의 섬으로 문화유산 1호로 지정 된 것을 자랑하기도.(여러 곳에 ‘문화유산 1호 - 국경의 섬, 이키∙쓰시마(對馬). 고도(五島)~ 고대로부터의 가교’라고 적혀 있다) 이어서 이키 특산의 소주를 여러 병 선물로 증정한다. 이키 소주는 보리 3분의 2, 쌀 3분의 1 비율로 양조한 정통소주, 이키 섬에 7종의 소주 공장이 있다는 사실도 소개하며.(저녁 식사 때 알코르 순도 25도의 맑은 소주를 한 잔 시음하였다) 일행을 대표하여 소주를 받은 이는 애주가 하리유 씨, 전날의 꽃다발은 여성인 시마 후미코 씨와 장정윤 씨가 받는 등 상황에 따른 엔도 야스오 회장의 배려가 세심하다.
환영식 후 시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500미터 떨어진 우체국까지 시가지를 걸은 후 버스에 올라 점심장소로 이동하였다. 식당 1층은 성게 등 이키 바다어서 채취하는 해산물 박물관, 잠시 이를 둘러 본 후 2층으로 올라가니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식당의 전 테이블에 미리 주문한 음식상이 차려져 있다. 우리 일행의 메뉴는 생 오징어 덥밥, 지금은 성게 철이 아니라서 이곳 특산의 성게를 맛볼 수 없다는 해설사(이키시 관광연맹의 다구치 히로히사 씨)의 설명이다.
점심 후 오후 탐사에 나섰다. 먼저 찾은 곳은 니지 신사와 동풍석, 니지 신사에 있는 현무암의 동풍석은 조선통신사들이 이곳을 찾아 행렬이 지나는 동안 순풍을 기원하였다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이어서 구로사키 해안에 있는 원숭이바위(원숭이 형상을 닮은 높이 45미터 규모의 현무암바위), 조선통신사들을 영접했다는 유적지(아미타당)과 인근의 성모궁, 몽고군이 상륙했다는 돌비석 등을 살피는 동안 이곳에 온 한국의 학술조사팀 일행과 조우하였다.(선상규 회장과 잘 아는 사이라서 더 반가웠다.)
마지막 코스로 이키 섬의 전경을 조망할 수 전망대에 올라 아름다운 이키 섬의 모습을 살피고 기원 전 3세기 무렵 원주민들이 거주하였다는 유적지에 이르니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에 일지국(一支國)의 왕도였다는 기록이 있고 나카사키 현에서 두 번째로 넓은 평원이라는 해설사의 설명, 이키 섬이 고대로부터 물산이 풍부한 천혜의 낙원이었던 것을 확인하게 된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이키섬의 아름다운 풍광, 방향표지판에는 북서쪽으로 부산, 서울이 적혀 있다
이키 섬을 두루 살피고 여장을 푼 숙소는 아시베 항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 한적한 어촌의 뉴 죠슈 여관, 다다미방의 식당과 침실이 운치 있는 여관이다. 저녁 6시부터의 식사는 싱싱한 해산물 정식, 맥주와 소주를 곁들인 식탁에 주흥이 감돈다. 식사 후 흥겨운 노래가 이어지는 등 두 시간 넘는 저녁시간이 즐겁다.
이키 섬은 규수 북단의 후쿠오카에서 76km 떨어진 곳으로 동서 15km, 남북 17km에 인구 2만 7천의 짝은 섬으로 한국에는 덜 알려졌지만 섬을 일주하는 50km 자전거 트레킹과 100km 마라톤이 열리고 일본 100선의 아름다운 해수욕장도 있는 등 일본에서는 꽤 알려진 관광지다. 조선통신사 옛길이 아니더라도 천혜의 자연과 문화, 물산을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섬을 기회 있으면 한 번 찾아보시라.
2. 시모노세키와 히로시마를 거쳐 요로고원으로
4월 25일(화), 이키 섬의 아침이 조용하다. 6시 반에 아침을 들고 7시에 버스에 올라 아시베 항으로 향하였다. 항구에 도착하니 10여 명의 시청 직원들이 먼저 나와 일행을 맞는다. 승선장에서 20여분 기다리니 전날 이즈하라에서 타고 온 비너스호가 파도를 가르며 항구로 들어온다. 비너스 호는 7시 55분에 하카다로 출발, 시청직원들이 다시 만나자는 플래카드를 펼치고 손을 흔들며 일행을 배웅한다.
현해탄을 가로 지른 비너스 호는 한 시간 만에 하카다 항에 도착, 배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한국관광공사 후쿠오카 지사의 임용묵 지사장이 빵과 음료를 사 들고 일행을 반긴다. 그는 2년 전 제5회 조선통신사 한일우정걷기 경복궁 출발 때 이 행사를 후원한 관광공사의 팀장으로 인연을 맺기도. 일행 중 서울에서부터 함께 한 엔요 교코, 타카하시 미치고 씨와 부산에서 함께 한 강 기홍 씨는 이곳에서 작별하고 오오타 타이 씨등 새로운 참가자들이 합류하여 41명이 버스에 오른다.
9시 반에 하카다 항을 출발한 버스는 10시 50분에 시모노세키 아카바 신궁 앞에 도착하였다. 신궁 앞 해변에 조선통신사가 일본 본토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기념비가 있는 곳에 이르자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걷기 애호가 부부가 일행을 반긴다. 지역 명산 술을 두 병이나 가지고 와서. 기념비를 살핀 후 맞은편의 신궁과 그 옆에 있는 청일전쟁 후 강화조약을 맺은 기념관을 돌아보고 11시 20분에 다시 버스에 올라 고속도로를 달려 히로시마로 향하였다.
버스 내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들고 구다마쓰 휴게소에서 20여분 휴식을 취하고 히로시마 원폭공원에 도착하니 오후 2시 15분, 1945년 8월 6일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돔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후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에 꽃다발을 바치고 묵념을 올렸다. 기념비에는 히로시마 원폭희생자는 20여 만, 그 중 한국인이 2만 명이나 희생된 원혼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970년 4월 10일에 교민단체가 위령비를 세운다고 적혀 있다.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곁에 새긴 유래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히로시마에는 약 10만 명의 한국인이 군인, 구속 징용공, 동원하고, 일반시민으로서 살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의 원폭투하로 이해 2만 여명의 한국인이 순식간에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히로시마 시민 20만 희생자 수의 1할에 달하는 한국인 희생자 수는 묵과할 수 없는 숫자이다.
폭사한 D 희생자는 공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 영혼은 오래동안 구중을 헤매고 있던 차 1970년 4월 10일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히로시마현본부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강요당한 영혼들을 편히 잠들게 하고 원폭의 참사를 두 번 다시 되풀이 않기를 희구하면서 평화의 땅 희로시마의 일각에 이 비를 건립했다.
고향산천을 그리면서 이국땅에서 폭사한 혼령들을 위로함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까지도 이해해 받지 못하고 있는 한국인 피폭자의 현상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하루라도 빨리 양심 있는 지원이 실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국인 희생자 위령제는 매년 8월 5일 이 장소에서 거행되고 있다. 재일한국청년상공인연합회 및 유지 일동’
이국땅에서 비명에 숨진 고혼들이여, 길이 안식을 누리소서.
히로시마한국인원폭피해자위령비 앞에 헌화하고 숙연한 마음으로 묵념하는 한국참가자들
이어서 가까운 곳에 있는 평화의 종을 찾아 세계와 조국의 평화를 염원하며 타종을 하였다. 에밀레종의 여운처럼 길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불안요인이 상존하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하나님이여, 우리 겨레와 강토를 평안하게 돌보소서.
오후 3시, 히로시마를 출발하여 구레(吳)시에 있는 국립공원 야려산(野呂山)으로 향하였다. 세토내해를 곁에 끼고 야려산에 이르는 주변 풍광이 아름답고 산록 곳곳에 활짝 핀 겹사쿠라가 눈부시다. 840미터 고지에서 바라보는 해상 경관이 빼어나고.
숙소(국민숙사 野呂高原)에 도착하니 오후 4시 반, 여장을 풀고 대욕탕에 내려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이틀간 새벽부터 활동하느라 고단한 심신의 피로가 확 풀린다. 저녁 6시부터의 만찬은 연일 거르지 않는 싱싱한 회를 포함하여 지역특산의 소주와 청주, 맥주 등이 입맛을 돋운다. 이날은 엔도 야스오 일본 대표의 생일, 그간 여러 차례 4월에 걷기행사를 치르는 동안 그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노래를 부르며 모두들 행복한 표정이다. 일행 중 마유미 치에코(프리랜서) 씨의 사는 곳이 가까운 야마구치현, 그녀의 남편(신문기자)이 차를 몰고 세 시간이나 달려와 저녁식사에 합류하였다. 야마구치 명산의 청주를 세 병이나 사들고. 이래저래 축제분위기, 열심히 행진하고 잘 먹고 즐겁게 노는 행사에 축복 있으라.
3. 조선통신사를 정중하게 대접한 시모카마카리
4월 26일(수), 새벽부터 내리는 비가 종일 이어진다. 아침 7시, 정갈하게 차린 조반을 들고 8시에 숙소를 출발하여 산 아래 시모카마가리에 있는 조선통신사자료관(쇼토엔, 松濤園)으로 향하였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전날 올라갈 때 아름답게 보이던 세토내해의 경관을 살필 수 없어 아쉽다. 8시 반에 시모카마가리의 란도문화진흥재단에 도착하여 9시부터 2층의 강당에서 구레(吳)시 관계자와 지역유지들이 참서한 가운데 환영식을 가졌다. 다케우치 부시장은 환영인사를 통해 ‘조선통신사 일행은 조선조 공식사절로 이곳 카마가리에 11회나 들렀다. 이는 양국의 깊은 교류와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당시의 행차와 접대 자료들을 소중히 전시하고 있다.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한일우정걷기 일행을 환영하며 이 행사가 유네스코기억유산 등재에 도움이 되기 바란다.’고 말한다. 이어서 자료관 탐방, 담당직원의 안내로 통신사 일행이 거쳐 간 족적을 한 시간여 살펴보았다.
자료관에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타고 온 배의 축소 조형물(선단은 정사, 부사가 탄 큰 배와 종사관이 탄 중형 등 6척의 통신사 일행의 배와 대마도에서 수행한 50여 척의 소형 배에 통신사 일행 500여 명과 현지 수행원 500여 명의 큰 규모였다고 함), 가마 타고 걸으며 마을에 들어서는 행렬의 모습, 3사(정사, 부사, 종사관)의 복식, 접대한 음식의 상차림, 당시의 정황을 묘사한 회화 등 다채로운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안내인의 설명, 통신사 일행이 이곳에 머물 때 흙을 밟지 않도록 붉은 색 네덜란드 산 카펫을 깔고 인근 해역(세토 내해)에서 잡은 해산물과 꿩 고기 등 음식 접대가 극진하였다. 그 예로 접대 메뉴를 진열한 곳에 아키 가마가리 고치소 이치반(安芸蒲刈御馳走一番, 1711년 통신사 일행이 에도에 도착하였을 때 각지의 향응에 관해서 질문하자 이들과 동행한 대마도의 영주가 카마가리의 요리∙ 접대가 최고였다고 대답한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적은 글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자료관에는 조선통신사의 왕래에 큰 의미를 부여한 일본의 외교적 선각자 아메노모리 호슈의 성신 외교(서로 속이지 않고 싸우지 않고)의 정신을 새긴 초상도 걸려 있다. 이를 통하여 쇄국정책을 펴던 에도 막부로서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매우 중요한 국제교류의 기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정신을 오늘에 새겼으면.
10시 반, 비를 맞으며 4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시모카마가리초등학교까지 걸었다. 학교에 들어서니 강당으로 안내한다. 학생은 30여 명, 학생 대표가 환영사를 읽는다. ‘한일 우정걷기 여러분의 시모카마가리소학교 방문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이 오시기를 즐겁게 기다렸습니다. 조선통신사는 옛날의 자랑스런 역사로 5,6학년에서 이를 배우고 있습니다. 에도 시대 갔던 2,000km의 먼 거리를 걷는 것은 매우 가슴 두근거리는 일입니다. 안전한 여행, 즐거운 시간 가지세요. 6학년 무라카미 하루나’ 이어서 5,6학년 11명의 연주단이 5분여 힘차게 일본 전통 북을 두드리며 흥취를 돋우고 전체가 한데 어울려 아리랑과 후루사토를 합창하는 등 흐뭇한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귀여운 새싹들이여, 지혜롭고 건강하게 잘 자라라.
시모카마가리초등학생들과 친교의 시간을 가진 후 기념촬영
행사를 마치니 12시, 50여분 쯤 걸어갔던 길을 되짚어 가방 등을 보관한 문화재단에 돌아와 버스에 올랐다. 점심은 도시락으로 버스 안에서 들고. 세 시간여 만에 도착한 곳은 히로시마현 후꾸야마시의 아름다운 어항인 토모노우라, 숙소에 여장을 풀고 온천수가 좋다는 대욕탕에서 비 맞으며 걸은 피로를 풀었다. 잠시 틈을 내 로비에서 신문을 살피니 두 가지 기사가 눈길을 끈다. 하나는 일본 내각의 이마무라 부흥상이 한 모임에서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 때 입은 피해복구에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데 만약 이런 피해가 도쿄 일원에서 발생했으면 더 엄청난 재정 부담을 떠안을 뻔하였다는 말실수로 즉각 사임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이다. 정치인이나 일반인이나 말로 실덕하는 것의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다른 하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한미일 3국이 대북압력을 강화한다는 내용, 한반도 정세가 국제적 관심사로 계속 이어지는 상황에서 언제쯤 마음 졸이지 않을 수 있을까?
저녁식사는 숙소 안의 큰 식당, 뷔페식 음식에 노숙수가 직접 썰어주는 싱싱한 회 맛이 일품이다. 저녁 식사 후 8시부터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큰 방에서 즉석 파티가 열렸다. 이 지역에 사는 재일동포 강정춘 씨가 히로시마 특산의 명주와 만쥬(일본 모치) 등을 한아름 들고 와 정담을 나누는 시간, 그녀는 조선통신사 1차(2007년)와 3차(2011년) 및 한국일주 1차(2012년)에 함께 걸으며 통역으로 수고하여서 일행들과 친숙한 사이인데 우정걷기 일행이 이곳(토모노우라)에 머물 때마다 귀한 선물로 대접하였다. 함께 걸으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누어 우리 내외와 친숙한 사이이기도 하다. 생업으로 틈틈이 배운 한복사업에 진력하며 열심히 사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 남은 때, 건승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