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
여상현
슬픈 역사가
오수에 잠긴 고궁
홰를 치며 우는
닭의 울음이 어데서 들릴 것만 같다
하늘을 쏘는 분수
지열과 함께 맹렬히 뿜는 의분이런가
장(墻) 넘어 불타는 아스팔트 거리에는
생활이 낙엽처럼 구르고 ---
텅 비인 정원엔 성조기 하나
‘공위(共委)’ 휴회 후, 원정(園丁)은 때때로 먼 허공만 바라볼 뿐
비둘기 깃드는 추녀 끝엔 풍경이 떨고
꼬리치며 모였던 금붕어 떼 금세 훝어진다.
노상 속임수 많은 여름 구름은
무슨 재주를 필 듯이 머뭇머뭇 지나가는데
내 마음의 분수도 사뭇 솟구치려 하는구나.
(덕수궁에서)
(시집 『칠면조』, 1947.9)
[어휘풀이]
- 훼를 치며 : 닭이나 새가 앉은 채로 날개를 퍼덕이며. ‘홰’는 새장이나 닭장 속에 새나
닭이 올라 앉게 가로질러 놓은 나무막대
-공위(共委) : 미소공동위원회
-원정(園丁) : 정원사
[작품해설]
이 시도 앞의 『봄날』과 매우 흡사한 구조를 지닌다. 1~6연까지의 각 연은 모두 2행으로 구성되어 어느 여름날의 ‘고궁’(덕수궁)의 풍경을 그리고 있으며, 마지막 7연에 가서야 시적 자아의 모습이 분명히 드러난다. ‘슬픈 역사가 / 오수에 잠’겨 있는 한낮의 ‘고궁’은 ‘홰를 치며 우는 / 닭의 울음이 어데서 들릴 것만 같’을 정도로 고요와 침묵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침묵은 단순한 정밀감(靜謐感)의 이미지보다는 권태에 가깝다. ‘장(墻) 넘어 불타는 아스팔트 거리에는’ 비록 ‘생활이 낙엽처럼 구르고’ 있지만, ‘공위(共委) 휴회 후, 원정(園丁)은 때때로 먼 허공만 바라볼 뿐’ 정원은 텅 비어 있다.
이러한 고궁의 권태를 깨뜨리는 동적인 이미지의 표상이 바로 분수이다. 시적 화자는 이 분수를 일러 ‘지열과 함께 맹렬히 뿜는 의분’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1947년 여름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독립된 통일민주 국가의 성립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분노의 표상이다. 이러한 시인의 현실 인식은 ‘슬픈’ · ‘의분’ · ‘낙엽처럼’ · ‘텅 비인’ · ‘먼 하공’ 등의 시어에서도 드러나지만, 마지막 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노상 속임수 많은 여름 구름은 / 무슨 재주를 필 듯이 머뭇머뭇 지나’ 가는 한 여름의 풍경 속에는 믿지 못하는 여름 날씨뿐 아니라, 짐작할 수 없는 요지경 정치판에 대한 시적 화자의 부정적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내 마음의 분수도 사뭇 솟구치려 하는구나’ 라고 하여 비로소 자신의 속내을 직접 내비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현실 인식에서 기인하는 시적 긴장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아울러 평이한 시어의 선택과 단순한 구조 속에서 권태와 역동성이 뚜렷이 대비되는 이미지의 구사로써 탁월한 시적 형상을 성취하고 있다.
[작가소개]
여상현(呂尙玄)
본명 : 여상현(呂尙鉉)
여성야(呂星野)
1914년 전라남도 화순 출생
1935년 고창고보 졸업
연희전문학교 입학
1936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등단
1939년 연의전문학교 졸업
해방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월북
시집 : 『칠면조(七面鳥)』(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