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실리時失理의 추억
/김정중
2018년 2월 10일, 아침 찬바람이 설운 내 마음을 후벼판다. 친구의 부음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섰다. 호남선 무궁화호 차창에 기대어 옛 생각에 잠겼다. 스쳐 가는 아련한 추억들이 추위에 떠는 차창 밖의 나목같이 서러웠다. 초 .중학교부터 축구부에 들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고 누구보다 건강했던 그가, 이순을 목전에 두고 암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췌장암이었다. 가끔 안부 전화를 띄우며 조심스럽게 근황을 묻노라면 밝은 목소리로 "이까짓 질환은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다"라며 몸 상태를 묻는 나를 되레 무색하게 만들곤 했다. 큰소리를 치는 친구의 음성을 듣다 보면 꼭 병석을 훌훌 털어버리고 거뜬히 일어날 것 같은 기적을 보여줄 것만 같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북 옥구군(1995년 군산시로 편입) 임피면 술산리 472 번지이다. 동네 입구에는 일제 수탈의 현장 임피역이 있다. 호남선의
정차역인 익산에서 군산을 잇는 24.7km로 '군산선'이라 명했고 1912년에 개통되었다. 오산, 임피, 대야, 개정 등 4개의 간이역이 있었다. 일제가 국내 유일의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곡창지대인 만경 : 호남평야에서 생산 된 곡식을 군산항으로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간이역이였다. 농민들이 피땀 흘려 거둔 농작물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임피역과 연결된 집하장에는 철로가 연결되어 있고 곡물을 곧바로 화물열차에 실을 수 있도록 대형 창고가 두 동이나 갖추어져 있었다 지금은 폐역이 되어 역사 속 흔적으로 남아 국가 등록문화재 제208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임피역사와 퇴역 객차 두 량으로 이루어진 전시관에는 일제 수탈의 생생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작은 연못을 메꾸어 방죽공원으로 꾸며 놓은 시실리時失理 광장에는 시간이 거꾸로 가는 시계탑이 있다. '時失理 시계탑'이라 새겨서 있다.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 이란 뜻이다. 채만식 선생의 소설 탁류, [논 이야기]를 주제로 한 조형물이 그날의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다. 채만식의 생가가 이웃 마을에 있고 채만식 문학관은 군산역에서 가까운 금강시민공원 근처에 조성되어 있다.
어릴적 한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란 깨벽쟁이는 다섯이었다. 특별한 놀이 기구 하나 변변치 않은 시절이었기에 동네 뒤에 있는 '앰매짱'이라 불리던 야트막한 동산은 우리들의 단골 아지트였다. 학교에 갔다 오기가 무섭게, 마루 위에 책보자기를 집어 던져 놓고 뒷동산으로 내달리면 친구들은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햇별 따사로운 곳에 자리한 늙은 묘지 사이로 버릇없이 마음껏 뛰어놀아도 포근하게 감싸주던 앰매짱의 병정 놀이는, 밤이 이슥한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아비의 아비 때부터 터 닦고 살아온 터줏대감인 꾸부정한 늙은 소나무가 곁을 내주며 들려주던 별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질풍노도의 사춘기에 들어선 우리에게는 더 큰 아지트가 필요했다. 마을을 휘돌아 나아가는 탑천강은 넓은 세상을 향해 도약하고 싶어 하는 우리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만경강과 합수合水하기 위해 바삐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기꺼이 우리를 품어주었다. 가을이 깊어가면 가을걷이가 끝난 찬 서리가 내린 들판을 탑천강 물줄기를 따라 발정 난 수캐들(?)마냥 헐떡거렸다.
저 멀리,갈탄 먹고 비틀대는 미카(석탄으로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의 시커먼 울부짖음ᆢ. 산허리를 돌아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메케한 연기를 내뿜으며 쏜살같이 우리를 덮쳐 올 때면 황급히 논두렁에 쌓인 짚가리 뒤로 몸을 숨기고, 철로 아래 침목들은 아우성을 질렀다. 흙비 날리며 기차가 지나간 철길 주변에는 레일 위에 나란히 올려 놓았던 대못들이 연필 깎는 칼이나 촉을 만들기 알맞게 납작하게 눌려 떨어져 있고는 했다. 혼비백산도 잠시., 모두 전리품들을 챙기고 마냥 흥분되어 깔깔대던 다섯 철부지의 웃픈 추억은 그대로인데...
보릿고개를 함께 넘은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아픈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도 나처럼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익산에 소재한 축구 명문 이리고등학교 축구부에 특기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돈도 되지 않는 운동선수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보다 농사일과 부업으로 운영하던 자전거 수리점을 도와 주길 원했다. 결국, 진학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도와주다가 2~3년후 익산에 소재한 물산에 취업했다. 운동선수 출신답게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세상은 의협심이 강한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10여 년 후에는 노조의 핵심 간부로 노조 일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노조 활동을 불온 단체라도 되는 양, 색안경 끼고 바라볼 정도로 정착되지 않았던 때였다. 노사 간 노동 쟁의가 발생하고 알력이 길어지다 보면 노조 간부 몇 명은 구속되고 회사에서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블랙리스트가 존재했기에 회사에서 해고되면 다른 회사에 재취업은 아예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빠져 나오지 못하고 6개월간 콩밥과 친해져야만 했다. 재취업이 막힌 그는 공사장 일용직에서부터 주택 배관, 설비 등 궃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계속되는 악재 속에 가정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가장으로서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어려운 상황임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친구였다.
세상은 100세 시대블 노래하고 '인생은 60부터'를 외치고 있는데 벌써 세 번째 부고이다. 한 놈은 광주항쟁의 끄트머리에서 행방불명 되었고, 또. 한 녀석은 서른이 갓 넘은 늦은 가을날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돌 지난 아들을 남겨두고 발길 떨어지지 않는 길을 떠났다. 달빛 머금고 유유히 흐르는 다리 난간에 기대어, 강물에 어린 달빛 유혹에 취해 달뜬 세레나데를 노래하던 야중리(탑천강 다리 주변 동네 지명)의 추억도 이제는 헤어짐과 함께 흔적도 없이 신기루처럼 소멸하는 것인가. 옛 추억을 소환하며 세 시간 남짓, 상념에 잠기다 보니 어느덧 익산역에 도착하였다.
장례식장이 있는 원광대학교 병원을 찾았다. 빈소가 꾸려진 분향소에는 활짝 웃고 있는 친구의 영정 사진이 죽도록 미웠다. 늦은 나이에 문학에 흠뻑 빠진 나에게 멋진 시인이 될 거라며 자기 일처럼 기뻐하여 주던, 그날의 모습이 또렷한데 이렇게 사진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향불 냄새가 그육한 술잔을 가득 채워주며 그의 영혼이 이승을 떠나기 전, 꼭 이 말은 전해주고 싶었다.
친구야! 험한 세상을 만나 고생 많았다. 이젠 슬퍼하지도, 억울해하지도 말고, 회한도 미련도 버리고, 훌훌 털고 떠나거라. 그동안 가시밭길을 헤치며 열심히 살아왔구나. 너의 살아온 뒷모습을 보며, 두 아들도 곧은 성품을 본받아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가리라 의심치 않는다 너는 멋진 친구였다. 잘 가거라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