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5일 화요일 [(자)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수도회]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철부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11,1-10
† 복음 루카 10,21-24
◈ 오늘의 묵상
이사이의 그루터기와 뿌리에서 새로운 싹이 움틉니다. 그 싹은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정신입니다.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세속적인 지식과
경륜은 옛 시대의 그루터기일 따름입니다. 이 세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힘과 용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의로움에서 옵니다. 죽어 가는
뿌리에 새로운 생명력을 주는 원동력은 ‘주님의 영’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재력과
지력이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남에게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업적과 능력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옛
시대의 그루터기에 머무르는 어리석은 부류에 속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철부지들’은 하느님의 영에 열려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바보로 취급당하여도 하느님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미약하지만 하느님의 빛을 받아 구원의
경륜과 지식을 쌓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말라비틀어진 이 세상에
성령의 생명수를 전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선택받아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아보고 듣는 영혼은
행복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눈으로 보고 싶었던 하느님의 은총을
누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는 그러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단순함이
2017년 나해 2월5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1,1-10
복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1-24
지난여름에는 비가 참 자주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밖으로 운동을
나가기가 힘들었습니다. 자전거를 주로 탔는데 비가 올 때에는 자전거
타기가 쉽지가 않거든요. 물론 끊임없이 비가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땅이 아직 젖어 있어서 미끄러울 거야.’, ‘흙탕물이 튀면 옷이
엉망이 되잖아.’라는 생각들로 인해서 자전거를 타지 않았던 것이지요.
드디어 맑은 날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려고 꺼내보니
바퀴의 바람이 완전히 빠져있었습니다. 바람 넣기가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뒤로 미뤘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전거를 거의
타지 못했습니다. 계속된 핑계와 이유를 붙여서 뒤로 미뤘기
때문입니다.
저의 유일한 취미이고 즐겨하던 것인데도 계속 미루다보니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일이 되고 맙니다. 지금 힘들어하고 하기 싫은 것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쩌면 이를 즐기지 않고 하나의 일로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복잡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귀찮다, 하기
싫다’ 등의 부정적인 말들이 입 안에서 맴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이 부정적인 행동을 이끌어서 할 수 없는 일로 만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힘들고 어려운 것도 가장 즐겁고 행복한 일로 만들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살아가는 모습,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지혜롭다는
사람, 슬기로운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고
오히려 부족함이 넘쳐 보이는 철부지 같은 제자들에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많은
배웠기에 지혜로웠고 또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슬기롭다고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단순하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는
슬기로운 사람이지만,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어떤 기도를
바치실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기쁨에 넘친 감사의 기도를
하실까요? 어쩌면 끊임없이 복잡하게 생각하고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움에 아무런 말씀도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제 부정적인 말과 행동은 그만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저 기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단순함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이유로 충분히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좋아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이 됩시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보세요.
인터넷에서 하나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일본의
광고였는데 상당히 큰 울림을 제게 주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실 안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것을 그려보세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은 노란 피카츄, 분홍색의
토끼, 장수벌레 등의 다양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도화지 가득 검은 색만 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친구가 모두
간 텅 빈 교실에서도 계속 도화자미다 검은 색을 칠할 뿐이었지요.
선생님께서는 걱정이 되어서 다른 선생님들께 보여드렸고, 이 그림을
본 다른 선생님들 모두 걱정 가득한 모습을 보입니다.
결국 학부모 면담을 한 뒤,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계속해서 도화지에 검은색만 칠하는 아이였지요. 의사선생님께서
“무엇을 그리는지 알려줄 수 있니?”라고 물어도 멈추지 않고 계속
검은색만 칠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호사가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 그림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다른 직원들과 함께 검은색으로
칠한 도화지들을 체육관에 가서 맞춰보기 시작합니다. 이 그림은
퍼즐이었던 것이지요. 이 도화지들을 다 맞추자 이 그림에서 하나의
동물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래’였습니다. 단순히 검은색 칠만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고래를 그리고 있었던 아이였던
것입니다.
큰 그림은 멀리서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이들을 가까이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꿈이 얼마나 큽니까? 그것을 내가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큰 교만이고 착각이겠지요. 따라서 조금 멀리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시작점이 아닐까요?
검은색만 칠하는 아이.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철부지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루카 10,21-24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드리나이다.”(10,21)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철부지
예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반대에 부딪쳐 복음선포에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그런데 파견한 제자들이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와 보고하자 예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셨습니다.”(10,21)
그런 결과는 하느님께서 이루실 구원 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영원한 생명과의 통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잘것없음을 통해 이루신 업적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빠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빠’라 부르며 친밀함과 신뢰와 존경의 태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아빠'라 부름으로써 모든 것을 이루시는 주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일이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고백하신 것입니다.
우리 '아빠’이신 주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하늘과 땅의 주님’
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할 때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 순간 나도 주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심을 지니고 친근하게 ‘아빠’를 부르며 삶의 주도권을
그분께 기꺼이 맡겨 드려야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10,21) 하고 기도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부족하고 미천하며
율법에 무식한 제자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감사드리십니다.'(10,21) 그분께서는
“그렇습니다, 아버지!”(10,21)라는 전적인 동의로 감사기도를 맺습니다.
우리도 보잘것없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선에 대해 감사드려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사랑으로 전부를 내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눈에 하찮아 보이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로도 선을 이루시고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심을
믿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음을 기억해야겠지요.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알 수 없으며,
하느님과 일치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 수 없습니다
(10,22). 이렇듯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참 지혜에 이를 수 있으며,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참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절정은 하느님께 전념하여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기고 그분과 하나되어, 자신의 온
존재를 통해 하느님을 드러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처신할
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10,23)라는 예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도 보잘것없는 나를 사랑의 도구로 삼아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선을 드러냄으로써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깨달음의 은총
2017년 나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루카 10,21-24
깨달음의 은총
연세도 지긋하시고, 풍채도 당당하시고, 그간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살아오신 세월도 있고 하신 분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씀하시는 거나
행동하시는 것이 너무나 그에 못미치는 분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인생 여정 전체를 두고볼 때, 지금 쯤은 인생의 무상함도 깨닫고,
우리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순간이건만,
진리나 신앙에 대한 추구는 뒷전이고, 그저 육의 이끌림에 따라
하루하루 차원낮은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을 안스럽게 바라봅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네 인생사 안에서 정말 중요한 과제가 한 가지 있군요.
죽기 일보직전까지 계속되어야 할 또 다른 깨우침을 향한 노력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자기만의 편협된 사고나 이데올로기에
갇혀 만사를 바라보고 평가하고 목숨거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 것들은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높이 높이 쌓아올린 거대한 허영의 탑은 언젠가
와르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한때 죽고 못살던 사랑도 지나갑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청춘도 지나갑니다. 한때 목숨과도 같았던 신념도
지나갑니다.
그렇게 이 세상 모든 것이 소멸되어 간후에 결국 우리 앞에 남는 것은
불사불멸하시고 영원하신 주님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쇠락하며 허물어져가는 우리네 인생임을
자각할때마다, 우리는 주님께 간청해야겠습니다.
“주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유한한 우리네 인생사 안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수 있는 깨달음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제 영혼을 깨끗히 씻어주소서. 제 눈을 가리고 있는 교만과 위선,
거짓과 자기과시의 장막을 말끔히 걷어주시고, 눈처럼 순수하고 티없이
맑은 어린이의 마음을 주소서.”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아버지의 뜻을 아는 사람들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복음: 루가 10,21-24: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제자들의 전도사업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로부터 전승을 물려받은데
반해 예수님은 하느님께 모든 계시를 전해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아드님만이 서로를 알고 계시며,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보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17)라고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
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죽음으로 몰고
갔다. 얄팍한 지식으로 신앙을 논하며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신앙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태양 앞에 등불을 켜 놓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등불을 가지고 그냥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은 그 빛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성령이 이루시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복음: 루카 10,21-24
성령이 이루시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
교황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실 때 사제들 사이에서는 그분께서 우리들
사는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지향하는 삶과 지금 우리의 모습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 부유하고 더 잘 먹고 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그분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면 이태석 신부님이나 다른 많은 신부님들은 프란치스코와
같이 가난하고 겸손하게 사는 삶이 참으로 옳았음을 인정받게 되어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지금은 많은 이들에게 “왜 너만 튀려고 그렇게 사느냐?”라고 비난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런 고난이 그치고 평화가 올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에 하느님나라를 이룩하러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어떤 이들에게는 거북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평화와 희망을
줍니다. 즉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핍박받고 참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을 심판하는 이들의 죄를 드러나게 해서
정의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의 죄를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게 만든 것은 세례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즉 성령을 지닌 이들은 이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이들입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정의와 평화를 이루러 오시는 메시아가 오늘
이사야서에서 예고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오로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로마 14,17)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오로의 이 정의는 그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구약부터 면면이 이어져오는 신앙의
일부였습니다. 특히 이사야서에서 메시아가 오시는 예언을 할 때면
항상 공식처럼, ‘성령=> 정의 => 평화 (=> 기쁨, 혹은 영광)’이라는
순서로 그리스도의 오심이 표현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32장에도 “왕이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는 날”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날 “하늘의 영기가 우리 위에 쏟아져 내려
사막은 과수원이 되고 과수원은 수풀이 되리라.”라고 말합니다.
‘하늘의 영기’가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왕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으로 사막과 같이 삭막해져 있는 우리 마음을 다시
에덴동산처럼 풍요롭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을 주신다면 그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바로 그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사막은 ‘법이 통하는 곳’이 되고
과수원은 ‘정의의 터전’이 됩니다. 법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는 본받아야 할 법입니다.
그 법을 지키는 이가 이 세상에 정의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만이 그리스도의 삶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그 “그 정의는 평화를 가져오고 법은
영원한 태평성대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은 평화스런 보금자리”가 되고 모든 이들은 그
“고요한 분위기에서 마음 놓고 살게 될 것”입니다.
즉, 성령을 주시는 분께서 이룩하시는 정의와 평화가 곧 행복이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공식은 오늘 독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먼저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고
말합니다. 이사이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루터기는 나무가
잘려나가고 땅에 박힌 뿌리만 남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기는 하겠지만 또한 동시에 다윗의 자손과는 무관할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튼다고 말하는
가운데 오히려 다윗과 이스라엘이 시작될 수 있었던 더 앞서시고
근원이 되시는 분일 것이란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즉, 그분에게 항상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하여 그 힘으로 참 ‘왕’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먼저 ‘정의’를 세우시는 왕이신데,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라고 하며 참 정의는 이 세상에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세워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당연히 나오는 것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며...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그렇습니다. 성령을 입고 오시는 왕께서 정의를 세우시는 곧 평화와
영광의 나라가 이룩되는 것입니다.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이렇게 성령을 입은 이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살고 있음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의롭게
사는 이들이 옳았다는 것을 드러낼 것이고 그들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렇게
이룩되어져야 하는 기쁨과 평화의 나라가 천상 예루살렘, 곧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 신경을 외우면서 ‘교회’를 믿는다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바로 이 정의와 평화가 흘러넘치는 교회가 완성될 것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대림 제1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곳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갈릴래아 호숫가,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났던 아인카렘,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던 타볼산,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파티마와 루르드가 있습니다. 성지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하면 세상의 걱정과 근심은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희망으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안회는
가난하였지만 언제나 깨달음의 경지에 있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그런
안회를 두고서 ‘가난하지만 도를 즐길 줄 안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재물이 많아도,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능력이 출중하여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욕심 때문에 더 많이 채우려고 합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또 다른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다스리는
나라가 오면 이루어질 수 있는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나라입니다.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뒹구는 나라,
곰과 염소가 함께 걷는 나라, 독사가 어린이와 함께 있어도 좋은
나라”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근심과
걱정이 없는 나라입니다. 배고픔과 병이 없는 나라입니다. 추위와 더위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안빈낙도, 하느님의 나라, 희망의 나라’를 찾은 시인이
있습니다. 오늘은 박노해 시인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랑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제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길을 찾는 지혜를 주셨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를
주셨습니다. 외로울 때면 친구가 되어 주셨고, 기쁨을 함께 나눌 이웃을
주셨습니다. 생각하니 정말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저에게 희망이
되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 길이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우주에서 지구는 먼지보다 작습니다. 먼지보다
작은 지구에서 사람은 또 먼지 보다 작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모으려고
하듯이 나도 이 사람들을 모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 되게 해 주소서.’
“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이사야 예언자도 바로 그 사람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시고,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귀가 열려야 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나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루카10,21-24)
귀가 열려야 한다.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게 됩니다. 같이
보거나 들어도 자기 시선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마련입니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을 다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데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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