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리학(性理學)의 이론
경세론(經世論)
수양론(修養論)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이기론, 심성론, 경세론, 수양론의 4가지 범주로 나누고(더 많은 범주가 있긴 합니다.) 각 분야마다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켰습니다.
경세론은 이(理)의 원칙론을 전제로 하는 실질적인 학문(정치, 경제, 사회 등)입니다. 원칙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구체적인 행정과 제도에서는 효용성과 합리성을 확실히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본 포스팅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순수하지만 개인의 사사롭고 지나친 인욕(人欲, 氣心)에 의해 혼탁해진다고 생각하여 수양론을 통해 인간본성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수양방법으로는 격물치지와 거경궁리 등이 있습니다.
'격물(格物)'은 근본(根本)을 탐구하여 본말(本末)을 가려내는 것이고, '치지(致知)'는 격물을 올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참모습을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인격수양을 강조한 것입니다.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는 원래 <대학(大學)> 8조목에 나오는 내용으로 주자가 두 단어를 합쳐서 격물치지라는 합성어를 만들었습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는 알아도 그 앞에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앞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정도만 알아두세요. 굳이 외우지려 하지 마시고...
후한(後漢)의 유학자 정현(鄭玄)이 '격물치지'에 대한 주석을 처음으로 달았을 때만 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사실 死언어나 마찬가지였지만...) 주자가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직후부터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격물치지'처럼 하나의 고전 문구를 두고 수 세기 동안 치열한 논쟁을 벌인 경우는 드믈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성리학자와 양명학자의 이견이 있는데, 이들은 글자 하나 하나에도 위에처럼 해석을 달리 했습니다.
성리학과 양명학은 그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성즉리(性卽理)'와 '심즉리(心卽理)'는 두 유학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 성리학(性理學) 🔺
성즉리(性卽理), 즉 성과 이가 같다고 보는 학문으로 이(理)와 기(氣)가 나오는 원천이 다르기 때문에 이원론(二元論)이라고도 합니다.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主理論)은 '이원적 이기이원론(二元的 理氣二元論)'을 줄여서 표현한 이론이고, 이이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主氣論)은 '일원적 이기이원론(一元的 理氣二元論)'을 줄여서 표현한 이론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두 이론 모두 이원론이지만,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해서 이원론, 일원론이라 부른는 것입니다. 주기론의 모순 때문에 '이기일원론'이라 부르는 이유가 더 크지만요...
🔺 양명학(陽明學) 🔺
심즉리(心卽理), 즉 심과 이가 같다고 보는 학문입니다. 심과 리의 일원론(一元論)이기 때문에 심(心), 성(性), 정(情), 이(理)는 모두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왕수인(王守仁)의 호가 양명이기 때문에 붙은 명칭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퇴계학과 같은 이유죠...
'거경(居敬)'은 경(敬, 경건함)의 태도로 수양에 임하는 것이고, '궁리(窮理)'는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터득하는 것입니다.
즉, '경건한 마음으로 만물의 이치를 터득한다.'는 뜻으로 수양에 임하는 자세를 강조한 것입니다.
거경은 성정(性情)을 통합(統合)하고 이기(理氣)를 합일(合一)시키는 내적 인식론으로, 궁리는 인격 완성을 위한 외적 실천론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퇴계는 경의 실천이 중요하다면서 거경과 궁리의 병행을 강조했습니다.
➡ 경(敬)의 실천 방법
ㆍ주일무적(主一無適) : 마음을 하나로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함
ㆍ정제엄숙(整齊嚴肅) :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마음을 엄숙하게 함
ㆍ상성성(常惺惺) : 항상 깨어 있어서 또렷한 정신상태를 유지함
조선의 왕은 '수기치인(修己致人)'을 위해 경연(經筵)을 활용했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루에 3번(조강, 주강, 석강) 하는 것이지만 제대로 지켜진 적은 별로 없습니다.
왕이나 경연관 모두 공부를 하지 않으면, 경연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겁니다.
성종은 26년 간의 재위기간 동안 무려 9,200여 번의 경연에 참여해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3,400여 번의 영조(52년 재위)가 차지했습니다.
그에 비해 연산군은 내시를 대신 참석시키기도 했고 아예 경연을 없애기까지 했습니다. 역시 융이 형...
아마 중종도 조광조의 경연 강화에 싫증을 느껴서 그를 배척(물론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만...) 하게 된 부분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참고로 고려시대에는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주로 강론했고, 조선시대에는 <대학(大學)>이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주로 강론했습니다. 연의(衍義)가 붙으면 주석서(註釋書)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위의 수양방법은 유학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조금 오버하면... 서당에서 소학(小學)을 조금만 읊었어도 알만한 내용입니다.
그럼 실제로는 어땠을까요?
학문과 마음을 닦아 관리에 오르면(先知) 백성들을 위한 일을 해야함이(後行) 당연한 일이나, 실제로는 修己(先行)만 계속합니다.
학문과 덕(德)이 아직도 모자르다는 미명하에 수기하고 또 수기하고 또 수기만 합니다. 이러니 진정 백성을 위한 행동이 쉽게 나올리가 있겠습니까?
논쟁이나 벌이고 이해관계나 학맥에 따라 붕당(朋黨)이나 만들어 반대파를 숙청하고 백성은 뒷전이고 명분론의 뜻을 너무나도 잘 세겨서 後行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인지
조금 삐딱하게 보면 가문의 영광, 입신양명(立身揚名), 일신의 영달(榮達)을 위한 수양이 아니었나 생각될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