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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포도나무요(3)
열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요 15:1-8 / 이규헌 목사
삶 속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힘든 것이 한두 가지이겠습니까. 하는 일들마다 다 어렵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어떤 일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허무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허무함을 느끼기 때문에 힘듭니다. 나는 했는데, 자신이 생각한 결과와 열매가 없을 때, 허무함을 느낍니다.
다 쏟아 부은 후, 무언가를 얻었다면 그것은 할 만합니다. 땀도 흘리고 눈물도 흘려서 어떤 결과가 주어졌고, 자신이 기대한 이상의 결과가 주어지면 행복합니다.
세상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수고했는데 수고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 허무를 느낍니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으며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산고(産苦)는 굉장히 큰 고통입니다. 쉽게 낳는 사람도 있지만, 산고를 겪는 사람들은 죽는 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고통을 겪으며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를 한 명만 낳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생명을 얻었을 때의 기쁨으로 인하여 고통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지만,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 4:1)”라고 고백했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 바울에게 기쁨이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감옥에 있었지만, 자신의 삶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복음의 결과물과 열매를 생각하니 살맛이 났습니다.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소설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는 유명합니다. 노인이 작은 배를 타고 먼 항해를 떠났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상어를 잡고 신나서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 고기 떼들이 상어를 다 뜯어먹어버렸어요. 앙상한 뼈다귀만 남아있었습니다. 헤밍웨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헤밍웨이는 인생을 그렸습니다. 수고하고 애써서 큰 것을 잡았지만, 항구에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에는 허무주의(nihilism)가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유복(裕福)한 가정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봄날 그는 뜰에서 자신에게 산탄총을 겨누었습니다. 자살했습니다. 그는 죽도록 수고하고 기가 막힌 감격도 경험했지만, 나중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자신의 인생을 그렸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서 열심히 삽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모두 수고합니다. 오늘날 도시의 삶이 얼마나 힘듭니까. 저녁이 되면, 파김치가 됩니다. 저녁에는 모두 지쳐 돌아옵니다. 피곤하다는 말이 입에 늘 붙어있습니다.
삶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거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려운 현실이 아닙니다. 무엇이 남느냐가 중요합니다.
결과주의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의 의미가 무엇인가, 열심을 통하여 어떤 열매를 거둘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학교에서 1등을 하고 두각을 드러내던 친구가 우울증에 걸리고, 삶을 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승진하고 출세하고 세상에 알려지지만, 나중에 보면 절망하고 비참합니다. 바닥을 긁습니다.
우리는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열심만으로는 안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만큼 열심히 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열심입니다. 프로그램도 많고, 사역도 열심히 하고, 한국 사람은 열심이 특심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빈손이 되면 안 됩니다. 허무해져서는 안 됩니다.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는 탁월한 비유죠. 신앙의 원리를 가르쳐주는 귀중한 메시지입니다. 진리가 풍성하게 담겨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매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열매 맺는 원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열매 맺는 원리가 중요합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모든 것이 결판납니다. 대단하다고 하고, 능력 있다고 하는데, 열매가 없으면 안 됩니다. 열심히 한 만큼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적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에 보면,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 가에서 무화과나무를 보셨을 때, 무화과나무에 열매는 없고 잎사귀가 무성했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미가 7장 1절에 보면,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재앙입니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 시대의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를 가리킵니다. 그 시대의 바리새인만큼 열심히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으로는 바리새인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이 출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어떤 열매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이 만들어낸 결과는 열매가 아니라 잎사귀였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판결은 확실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15장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으면 잘라버리십니다. 제거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에 최고의 과제는 열매입니다. 직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직분을 통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어떤 자리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은사를 갖고 있기만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은사를 주셨습니까? 은사를 사용하여 열매 맺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은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은사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사로 키 재기 했습니다. 서로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은사를 가지고 열매 맺지 않으면, 은사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포도나무는 오직 열매 맺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를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은 의미 있습니다. 그냥 서있는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시편 1편은 열매에 대한 풍성한 그림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시편 1편 3절에 보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철을 따라 열매 맺는 인생, 우리가 기대하는 인생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맺어야 할 열매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두 번 열매 맺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때 반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죽기 전에라도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잘 나가면 잘 나가는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 있었지만, 열매를 맺었습니다. 자기와 함께 사슬에 매여 있던 시위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시위대 사람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평소에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열매 맺어야 합니다. 한때가 아닙니다. 매일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 가운데 열매 맺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열매 맺게 하십니다.
본문 요한복음 15장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제자도의 비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천을 감당해야 합니다. 약한 자가 강국(?國)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본문 요한복음 15장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거하다’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거한다’라는 말에는 ‘붙어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머물러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열매가 없음으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왜 열매가 없습니까? 하나님께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보였을 뿐, 사실 그들은 하나님께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회에 참석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기도회에 참석해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도회에 참석하는 활동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들 기도하니까 분위기에 휩쓸려 그곳에 앉아있지만, 그들에게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배드리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배드리는 활동에 참여한 것일 뿐, 예배자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 사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먼 종교적 열심으로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만족에 빠져있었습니다. 사람들과 비교하며 자기자랑에 도취되어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얼렁뚱땅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도 제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일명 ‘가나안’ 성도가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종교적 퍼포먼스(performance)를 해서는 안 됩니다. 모조품일수록 더 화려합니다. 진짜가 아닌데, 진짜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요한복음 15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5장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집사 일곱 명을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에 보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5~6절에 보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8절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을 집사로 세웠습니다. 다른 것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충만한 상태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우리에게 임하셔야 합니다. 충만은 성령의 주도하심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충만한 상태에서 일하면, 일하는 것이 다릅니다. 충만한 상태에서 기도하고 설교하면,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설교하고 회중과 만나려고 하면 힘듭니다.
설교자가 충만하면 하나님의 진리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과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무리 잘 한다 해도,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서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실력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일은 세상의 실력으로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실력은 비슷비슷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충만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열심으로 충만해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열심히 충만해지려고 하면, 혈기가 충만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육체의 힘이 기승을 부립니다. 자신도 힘들고, 다른 사람도 힘들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붙어있어야 합니다. 잘 붙어있는 것이 실력 중의 실력입니다.
그런데 붙어있는 것은 어렵습니다. 붙어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동적인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면 붙어있을 수 없습니다.
죄성은 자신이 주인이 되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에 누가 결정합니까? 자신이 결정합니까, 주님께서 결정하십니까? 우리는 충분히 기도하지 않고 일을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무슨 일이든 자신이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하십시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지시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합니다.
인생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뼈아픈 고통을 맛본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 마음대로 결정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을 때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의 안중에 없습니다.
탕자의 인생이 어떠했습니까? 탕자는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이것은 포도나무의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집에 있었던 맏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맏아들은 자신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와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기도는 어렵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결재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셔야 제가 움직입니다. 말씀해주셔야 제가 시작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완전히 수동적인 자세입니다.
시작하시는 이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시작하는 지점에서 꼬이면 전체가 꼬여버립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듣고 확신을 가지고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기다리지 못합니다. 자기 열심이 앞서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합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기다리지 못합니다.
기다리지 않는 것, 이것은 신자의 모습에서 가장 나쁜 것입니다.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주인 되어 사는 것이요,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은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5장에서 해답은 ‘충만’입니다.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만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우리는 무엇인가 열심히 하면서 스스로 뿌듯해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남녀가 서로 주고받는 선물의 크기가 서로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물만 주고받을 뿐, 자주 만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선물을 주고받지 않아도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은 활동의 양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께서 열어가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열심이 우리의 신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때, 우리의 신앙이 자랍니다. 신앙이 자랄수록 우리의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열심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나온 열심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열심으로는 쉽게 지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제 삶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사용해주옵소서. 하나님의 통제와 지배를 받겠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수동적인 자세를 배우지 않고, 능동적으로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수동적인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풍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붙어있을 때, 우리의 삶이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에 열매가 맺힙니다. 바닥을 긁어 겨우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놀라운 열매를 맺힙니다.
수동적인 자세를 익혀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머물러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제와 지배 아래에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고요히 엎드려야 합니다.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 기울이고,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충만함이 내 안에 흘러옵니다. 삶이 풍성해집니다. 모든 일에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라고 하면 성령의 열매가 생각납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품입니다. 최고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내 안에서 흘러나올 때, 우리의 삶에 어떤 열매가 맺힐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선한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의로운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시기 바랍니다. 관계 속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 열매를 올려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항복한 사람들
성흥모 목사
지난주간에는 “사랑에 항복하다- Surrender to Love”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심리영성연구소의 소장이며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신 ‘데이비드 베너’의 책이었습니다. 그 분의 책을 한 줄로 요약하라고 하면 “사랑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 분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라” “자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는 노력을 포기할 때 찾아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의탁, 사랑, 영성에 대한 책입니다.
이 교수님이 한 여성으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교수님이 쓰신 여러 책을 통하여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는데, 최근에 쓴 책을 보니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어서 교수님의 견해에 반박하는 글을 적어 보낸 것이었습니다. “의탁할 것을 권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심리학자로서 누구보다도 타인에게 복종하는 것의 위험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그 여성은 계속해서 교수님이 영적 지도자로서 무책임하며, “인간관계에서 힘이 남용되는 것을 무분별하게 간과하는 전형적인 남성”이라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이 여성의 메일을 보고는 느낀 것은 ‘의탁’이라는 개념이 어떤 이들에게는 받아들이기에 매우 두려운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성목사도 오늘 ‘의탁’이라는 주제를 선택하였는데, 의탁이라는 개념은 최근 들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의탁이라는 말이 ‘복종’과 비슷한 개념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종속’이라는 말이냐고 합니다. 어떤 이는 개인적인 ‘힘의 포기’를 말하느냐고 합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의탁이라는 신앙보다는 순종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의탁과 순종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의탁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밑바탕이 되고 있으며, 순종이 자라나는 토양이 됩니다. 의탁이 먼저요, 의탁이 이루어져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맹종, 기계적인 복종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고 있습니다. 의탁이라는 말은 마음을 드리고, 사랑을 드리고 의존하고 신뢰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지음 받을 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바르게 살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인생을 멋지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의탁하여야 자기 중심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도 넉넉한 자유로움을 얻고, 나 이상의 힘을 발휘하면서 승리할 수 비결이 바로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드리고 나의 사랑을 드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의탁입니다.
이렇게 질문해보겠습니다. 단순한 질문이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설교를 들으시는 성도들 모두가 스스로에게 답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고 계십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시고, 감찰하시고 알고 계신다는 것 인정하시지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십니다.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대하여 어떻게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대하여 어떻게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각자 진솔하게 자기에게 말해보십시오. 이 질문에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대하여 실망하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분노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하고 허물 많은 죄악으로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면서 실망하시고 분노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면서 역겨워하시고 받아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앉아 있기도 죄송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보시면서 흐뭇하세 생각하실 것입니까? 그러면 아멘입니다.
저도 여러분의 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왜 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지, 때로는 쥐구멍이라고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에 하나님의 감정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되심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생각 안에 하나님의 생각을 담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크신 생각에 나의 생각이 담겨야 하고, 하나님의 크신 성품에 나의 성품을 적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감정이라고 하면 우리를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일4:8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혐오하고 아파하면서 버려야 합니다. 죄를 버린다고 회개하였는데, 그러면 완전히 버린 것입니까? 죄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입니까? 죄라는 놈은 여전히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고, 죽을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죄는 우리를 종으로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문제, 우리의 영원한 난제를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탁하고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을 의존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이대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의롭다고 보아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이 없는데, 한 사람도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을 주실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 그리고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생명의 연결, 하나의 생명, 생명의 존속이라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신비한 관계를 하나의 생명체인 포도나무를 가지고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가지가 없는 나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원 기둥, 줄기가 없는 나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원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고, 잎이 있습니다. 줄기는 뿌리에서 오는 진액을 받아서 가지에 공급하고 잎에서 만들어지는 진액을 온 가지와 줄기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가짜 포도나무도 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당신만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참’이라는 말씀은 “알레디노스”라고 하는데, 참된, 실제의, 신뢰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진짜라는 말입니다. 거짓된 것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진실로,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은 순종이며, 좋고, 온전한 생명을 주는 포도나무라는 의미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실 포도나무는 나무가 아니고 넝쿨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원래의 굵은 줄기를 나무라고 하였고, 가는 줄기를 가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무라고 하면 땅에 꼿꼿하게 서 있는 식물을 나무라고 합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나무라고 부르지만, 소나무나 삼나무 같은 그런 모습으로 서 있지 않고 넝쿨로 자라고 있습니다.
열매는 항상 가지에서 열리기 때문에 좋은 열매가 열리기를 바라면, 전지를 잘 해주어야 합니다. 약한 줄기에서는 충실한 열매가 열리지 않으니, 좋은 가지만 남기고 약한 가지는 잘라버려야 합니다. 유대나라에서도 좋은 열매를 얻으려고 전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2절입니다. “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농부가 다 잘라버리고 열매를 맺는 튼튼한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합니다.
가지가 생존하려면 원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생명체의 생존이라는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보면 머리와 몸통이 붙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다른 보이는 지체들은 몸통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1mm 라도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나무라고 하면 땅에, 흙에 심겨져 있어야 하는데, 땅에서 나오는데, 1cm라고 떨어지고 벗어나면 그 순간 죽음입니다.
4-5절 말씀이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오늘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 오늘 이 자리에서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참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할 때에 주님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줄기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죽음 초래하는 것처럼 , 우리들이 주님 안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떠난다면 열매는 고사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나는 예수님을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 마음대로 무엇을 한 것 같고, 예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지나놓고 보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요, 죄악을 일삼는 것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원줄기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처럼, 참 포도나무이신 우리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 안에 머무를 때에, 우리의 인생을 열매를 맺고, 복된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예수님과 의논하지 않고, 예수님과 동업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물어보지 않고 하는 일들이 성공한 적이 있는지 말씀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에, 우리 사람들은 의존적인 관계를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우리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성령님과 동행하여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마느냐가 우선이 아니라, 내가 먼저 예수님 안에 머물고, 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의탁이요 의존이요,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부르고, 주님이 앞장서시고 인도하시고, 싸워달라고 맡기고 그리고 나서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루에 몇 번이나 생각하고, 말하고, 주님을 떠올리고 주님께 간구하고 주님을 의지하십니까? 예수님이 없는 가정, 예수님이 없는 사업, 예수님이 없는 직장,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지식, 예수님이 없는 출세, 다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제외하고, 열외로 하고, 그냥 손님으로 모시고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면 지옥을 경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승리한 것 같으나, 그것은 타락으로 이끌어 들이는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좋은 사람이라서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서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존귀하여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은 후에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식이 있어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서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원줄기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진액을 받고, 생명의 능력을 공급받아서 살다보니 성공적인 인생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생명의 줄기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진액을 공급받아야 가지는 살아나고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생명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 연합”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엔 크리스토- in Christ"라고 합니다. 바울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연합이라는 말을 할 때에 롬6장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6: 5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은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럽고 추한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주님과 함께 죽고,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내가 나의 삶을 사는데, 내 안에 주님이 사시면서 주님이 드러나고 나타나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연합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항상 들려져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로 나누는 대화에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사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이요,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상호간의 대화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려면 기도하지 않고는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었어도 읽은 것으로 그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지 않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고,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거하는 비결은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하면 무조건 하나님이 나오시는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나타나 선물을 주는 것처럼, 요술램프에서 요정이 나와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기도의 목표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에 주님과 데이트하는 것처럼 사귐을 가집니다. 요즈음 향심기도니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주님과 깊은 만남으로 사귐을 가지는 기도입니다.
케에케고르는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하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을 말씀하시는데, 우리 안에는 주님의 말씀이 거하고 주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주님 안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간구하게 되고, 소원하면서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드리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곧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안에 있고, 주님에게 우리의 인생을 의존하고 맡길 때에 주님의 말씀과 계명이 머물게 되고, 그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항상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병들어 있고, 타락하여 죄를 범하고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었기에 나로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바른 삶을 살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착한 체 하였지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 의탁하여야겠습니다.
한번은 중국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곤명에 교회를 지어주려고 후보지를 돌아보느라고 다녀오는데, 귀국하면서 우리 식구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려고 하였는데, 아이들을 위해서 선물을 사는데, 고심하게 됩니다. 무엇을 선물해야 좋은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출 수가 없습니다. 손자들이 4명인데, 여자 아이들은 인형 선물이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손자에게 알록달록하게 생긴 손목시계를 샀는데, 이것이 통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인형보다 비싼 시계인데, 손자 녀석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녀석이 속이 상해서 자기 취향이 아니라니, 여자 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좋아하니 심통이 나서 견디지 못하고 울어버립니다. 그 녀석을 달래기 위해 장난감 상점에 가서 로버트를 사주고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지 못하였습니다. 살 것도 없지만 사지 말라는 강력한 명령도 받았기에 그냥 왔습니다. 아내에게 내밀 것이 없었습니다. 선물도 못 사왔다고 하니, “잘 돌아온 게 선물이예요.” 다른 선물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안전하게 돌아왔으니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손자들은 선물이면 그만이지만, 아내는 남편이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온 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분, 나에게 하나님이 계시다, 나의 사랑하는 주님이 계시다, 나에게 주님이 있다. 주님은 나의 마음을 받아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항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주님의 사랑만이 살 길이라고 투항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의존하고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걸어야 합니다. 주님께 사랑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 분의 사랑에 여러분을 맡기십시오. 인생의 자유는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는 노력을 포기할 때 찾아옵니다. 주님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과 모든 것을 의탁하고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통하면 됩니다
조상호 목사
지금은 없지만 과거 우리 교회에 Mishubishi 황금색 승합차가 한 대 있었습니다. 약 6년 전의 일로 기억이 나는데, 그 교회버스를 타고 한 성도님이 입원하고 있는 크라이스트처치병원에 문병을 한 후 다시 주차장에 돌아와 시동을 걸려고 했지만, 도대체 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제 힘으로 할 수가 없어서 교회에 전화를 걸어 전도사님에게 ‘교회 근처에 있는 BP 주유소에서 Jumper 선을 빌려서 빨리 병원 주차장으로 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15분 정도가 되자 전도사님이 도착했습니다. 빌려온 Jumper 선을 가지고 전도사님 승용차의 밧데리와 교회버스 밧데리에 연결하자 손쉽게 시동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었는데, 서너 시간이 지난 후 또 다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시내에 볼 일이 있어서 교회버스에 키를 꽂았지만, 또 다시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전에 크라이스트처치병원 주차장에서처럼 아무리 해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교회 근처에 있는 BP주유소에서 Jumper 선을 빌려와서 시동을 걸기는 걸었지만, 마음이 찜찜했습니다. 그래서 시내에서 보려고 했던 일을 취소하고, 자동차 정비소로 곧장 갔습니다. 정비소 직원이 밧데리를 체크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고, 그 외에 다른 곳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시동이 걸리지 않는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직원이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여기 보세요. 전기는 통해야 합니다. 뭔가가 이렇게 막고 있기 때문에 전기가 통하지 않았고, 전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 시동도 걸리지 않은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데 있지 않고 밧데리와 밧데리를 연결하는 부위가 문제였습니다. 밧데리에서 밖으로 흘러나온 황산 때문에 밧데리 연결부위에 여러 가지 이물질이 끼는 바람에 전기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직원이 밧데리 연결부위를 Sand paper 등으로 문질러 깨끗하게 한 후 다시 선을 연결해주자 더 이상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때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평소에 알고 있었던 상식이지만, 전기는 통해야 하고, 전기가 통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 똑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뉴질랜드에 와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의 장벽일 것입니다. 언어가 달라서 답답함을 느낀 적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가 달라서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같은 한국말을 쓰는데도 통하지 않아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유선전화, 무선전화, 인터넷, 등 커뮤니케이션 기기들이 크게 발달한 것이 사실이지만, ’불통(不通)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로 통해야 되는데, 막힌 곳이 너무 많습니다. 한 지붕에서 사는데도 가족들끼리 서로 통하지 않고, 주위에 있는 이웃들과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보지만 서로 통하지 않고, 학교에서 강의 시간에 서로 만나지만 친구들과 서로 통하지 않고, 직장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데도 서로 통하지 않아 답답함을 느낍니다. 세대 간에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느 싸이트를 보니까 신세대인지 쉰 세대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나와 있었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7개의 질문 중 5개 이상을 맞추면 신세대라고 할 수 있지만, 5개 이상을 맞추지 못하면 쉰세대라고 합니다. 한 번 속으로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전투기 F15 보다 성능은 약하지만 날아다니는 파리까지 쏘아 떨어뜨릴 수 있는 정확성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무기는 과연 무엇일까? 답은 ’F 킬라’입니다. 둘째로, 울산의 어느 여고에서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다 여학생 한 명이 죽었다. 왜 죽었을까? 답은 ‘금을 밟았기 때문에‘ 입니다. 셋째로 고양이 가면을 쓰고 놀 때는 "야옹"하고 소리를 내고, 강아지 가면을 쓰고 놀 때는 "멍멍"하고 소리를 낸다. 그렇다면 오징어 가면을 쓸 때는 무슨 소리를 내고 놀까? 답은 "함 사세요!"입니다. 넷째로, 눈과 구름을 자르는 칼을 세 글자로 하면? 답은 ’설운도‘입니다. 다섯째로, 의사와 엿장수가 좋아하는 사람은? 답은 ’병든 사람‘입니다. 여섯째로, 물고기의 반대말은? 답은 ’불고기‘입니다. 일곱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공중변소는? 답은 ’전봇대‘입니다.
몇 개나 맞추셨습니까? 여러분들은 신세대입니까? 쉰세대입니까? 요즘 세대 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서로 답답해 합니다. 야당과 여당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고 답답해 합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교우들끼리 통하지 않는다고 답답해 합니다. 여기저기에서 ‘나 참, 답답하네.’ ‘도대체 말이 통해야 살지.’라는 말들을 하며 통하지 않은 것을 한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 어떤 불통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불통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가족과 이웃과 직장동료와 학교친구와 교우 간에 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하나님과 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관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인 줄로 믿습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는 죄를 짓는 바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자, 나머지 모든 관계도 함께 깨어졌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땀 흘려야만 소산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여인의 후손은 잉태의 고통을 겪게 되었고,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등, 모든 것들이 다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다른 관계도 깨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회복되면 다른 관계도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야 나머지 가족관계, 친구관계, 동료관계, 인간관계, 재물관계, 등이 좋아질 수 있고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욥기 22장 21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우리는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통하지 않으면 될 일도 안 되지만, 하나님과 통하면 되지 않을 일도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축복된 인생을 원하십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신통(神通), 즉 하나님과 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통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주님 안에 거하라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말씀하고 있고, 5절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종합해보면, 성부 하나님은 농부로, 성자 예수님은 포도나무로, 그리고 우리는 가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지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다같이 4절을 보겠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오늘 본문에는 ‘거하라’는 단어가 8번 나오는데, 헬라어 원어로는 ’메이나테‘입니다. 이 단어는 ’머무르다, 계속하다, 인내하다, 뿌리 깊게 결합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가지가 나무에 붙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결된 가지와 나무 원줄기 사이에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원줄기는 뿌리로부터 빨아 올린 물과 영양분을 가지에게 공급해 줍니다. 또 가지는 잎사귀에서 광합성작용을 통해서 만들어낸 영양분을 원줄기에게 공급해줍니다. 이것을 앞서서 말한 ‘통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지와 원줄기가 끊임없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거치면, 다시 말해 가지와 원줄기가 서로 긴밀하게 통하면, 나무는 점점 자라게 되고 가을이 되어 마침내 가지에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 원줄기에 계속해서 붙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포도나무가 되시는 주님께 계속해서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할 수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주님께 붙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붙는 종교입니다. 어디에 붙어야 합니까?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열 두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주님께 달라붙었던 것처럼, 소경 바디매오가 주님께 달라붙었던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 달라붙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마가복음 14장 54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여기 ‘멀찍이 좇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과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주님을 부인할 가능성이 점점 커집니다. 신앙생활도 교회와 가까워야 합니다. 집이 가까워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교회와 영적인 거리가 가까워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기왕이면 앞자리에 앉는 것이 좋습니다. 앞자리에 앉으면 앉을수록 뒷자리에 앉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은혜가 됩니다.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열심히 믿던 사람이 갑자기 타락하지 않습니다. 서서히 믿음이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타락을 합니다. 부부관계가 우리의 신앙생활과 비슷한데, 부부가 어느 날 갑자기 이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대화가 줄어들고 마음이 점점 멀어지다가 나중에 갈라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주님을 부인하고 타락하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예배에 소홀히 하다 보면, 교회로 향하던 발길이 점점 줄어들다보면, 점점 믿음이 떨어져 나중에는 타락하고 맙니다. 한 서너 주일만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교회가 서먹서먹해지고, 예배가 낯설어집니다. 그러나 주일예배에 나오고 금요집회에 나오고 새벽기도에 나오고 샘모임에 나오면 우리 영혼이 싱싱해집니다. 가지에 영양분이 주어지는 것처럼, 예배 자리에 나오면 우리 영혼에 영적인 영양분이 주어집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고 혼자서 충분히 승리할 만큼 잘난 교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배 자리에 나오지 않고 건강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배와 교회와 조금씩 멀어지는 것을 우습게 알면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를 가까이 하고, 교회를 가까이 하고, 주님을 가까이 하면 승리합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가지가 과일을 억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팔 걷어부쳐도 안 되고, 발을 구르며 몸부림을 쳐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원줄기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가지에 열매가 맺힙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아무리 문제가 많고, 주위에 싫은 사람이 있고, 시험이 많을지라도 주님께 달라붙어 있으면 주님과 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 원줄기에 계속해서 붙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계속해서 나오면 언젠가는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쓰지 않아도, 주님과 통하기만 하면 우리의 삶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맛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과 통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님 안에 거해야만 합니다.
2. 말씀 안에 거하라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기 위해서는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다같이 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말은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머무르게 한다’ 혹은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점점 하나님과 불통이 되고 맙니다.
기쁨의 교회를 섬기시는 김원태목사님이 쓰신 <지금 내게 필요한 은혜 회복>이라는 책에서 사하라 사막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51쪽). 사하라 사막 서쪽에는 ‘사하라의 중심’이라 불리우는 작은 마을이 있다고 합니다. 매년 적지 않은 여행객들이 이 마을을 방문하기 위해 사막을 찾는데, ‘레빈‘ 이라는 사람이 이곳을 방문하기 전까지 이 마을은 전혀 개방되지 않은 낙후된 마을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한 번도 사막을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척박한 사막을 빠져나가고 싶어서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레빈은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손짓발짓으로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어디로 가든 결국에는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맙니다.” 레빈은 그 말이 사실인지 실험해보기 위해 직접 북쪽을 향해 걸었고, 3일 만에 사막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그 동안 한 사람도 그 마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레빈은 다시 마을로 들어가서 이번에는 마을 청년 한 명을 데리고 청년이 가자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열흘 동안 밤낮 없이 걸었지만, 11일째 되는 날 사람들의 말대로 다시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레빈은 마침내 그 마을 사람들이 사막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마을 사람들 중 아무도 북극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레빈은 지난 번 실험에 참가했던 청년에게 낮에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아꼈다가 밤에 북극성을 따라 걸으면 사막을 벗어날 수 있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청년은 레빈의 말대로 했고, 과연 사흘 만에 사막 경계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청년은 사막의 개척자가 되었고, 개척지 중심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동상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새로운 인생은 방향을 제대로 찾을 때 시작된다!”
우리에게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는 북극성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시시한 세상의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 말씀을 인생의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가 방황하지 않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인생의 기준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기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하나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통하는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님께 기도하라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기 위해서는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찰스 시몬은 새벽 4시부터 8시까지 시도했다고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새벽 4시부터 매일 2시간씩 기도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을 위해 한창 바쁠 때 마르틴 루터는 “만약 내가 매일 새벽 2시간을 기도로 보내는 것을 실패한다면 그날의 승리는 마귀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너무나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매일 3시간씩 기도로 보내지 않으면 결코 이 일을 지탱해 나아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한 일도 하나님과 소통하는 일이었습니다.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금식기도 함으로 하나님과 깊은 소통을 하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는 사역 중에도 시간을 떼어서 산에서 또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기도로써 하나님과 소통하셨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소통의 길을 여심으로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다같이 다시 한 번 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으로부터 더 풍성한 것들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부르짖어 간구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생명의 진액을 공급해 주십니다. 또한 신명기 4장 7절에서 “우리 하나님 야훼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니다.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은 워싱톤 초대 대통령입니다. 어느 날 기자들이 워싱톤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워싱톤은 생각할 틈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엄청난 일들을 다 처리하는 비결은 매일 4시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그 지혜로 남들이 일어나기 전에 벌써 많은 일을 해놓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기독교를 기도교라고 말했는데, 그만큼 우리 기독교는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과 더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기도가 통하면 하나님과 통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통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통하는 줄로 믿습니다.
4. 말씀에 순종하라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단지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단계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 깊이 거할 수가 있습니다.
은강이라는 마부와 만민이라는 마부가 짐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린 뒤였기 때문에 길이 온통 진흙탕이어서 수레가 그만 진흙탕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귀가 아무리 힘을 써도 수레는 앞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믿음이 좋았던 은강이라는 마부는 곧바로 진흙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별로 믿음이 없었던 다른 마부 만민이는 투덜대며 주위에서 나무 가지들과 나뭇잎과 돌, 등을 주워 모아 수레 바퀴 밑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귀를 두드려 앞으로 나아가게 한 다음, 수레를 뒤에서 힘껏 밀었습니다. 그래도 수레가 꼼짝도 하지 않자, 그는 또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 와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투덜대던 만민이를 도와 진흙 구덩이에서 수레를 끌어냈습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를 드리던 은강이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은강이는 당황해서 천사에게 소리쳤습니다. "죄송하지만 천사님! 무언가 착각하신 것이 아닙니까? 기도를 드린 사람은 저 친구가 아닙니다.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저 친구가 아니라 전데요. 보십시오. 지금도 저는 기도하고 있잖아요?"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도만 하는 사람보다는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을 도우신단다."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기도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기도도 중요하지만 실천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 말씀 안에 거하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신 것처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제가 2년 전 이맘 때 ‘주님과 소통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는데, 주위에 보면 하나님과 불통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밖에 예수님을 믿지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이미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불통이 된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기는 하는데도 하나님과 불통이 된 상태로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 6~70년대 한국의 유명한 부흥사이셨던 이천석 목사님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신통(神通)하고 인통(人通)하면 만사형통(萬事亨通)한다.” 여기 ‘신통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통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신통하게 되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통하면 사람과도 통하고, 사람과 통하면 만사형통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동차 밧데리에서 전기가 통하지 않으면, 시동도 걸리지 않고 와이퍼도 돌아가지 않고 라디오도 켜지지 않고 헤드라이트도 비출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자동차가 작동이 되려면 가장 먼저 밧데리의 전기가 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축복된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과 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주님 안에 거하고, 말씀 안에 거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신통하는 사람이 되어 여러분들의 삶 속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제자
요 15:1-10 / 박조준 목사
요한복음 14장은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는 말씀으로 끝맺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15장은 돌 연한 어조로 내가 참 포도나무요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하여 학자들 사 이에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메이어는 일어나자고 하였으나 제자들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앉으셔 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돌럭 같은 분은 마침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방 밖에 있는 포도나무 가지가 창문 사이로 들어온 것을 보시면서 말씀하셨다고, 혹은 달빛에 비치는 포도원을 내다보 시면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제롬 같은 사학자는 성전 문에 새겨 있는 포도나무를 상상하시면 서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랑게 같은 분은 예수님의 일행이 겟세마네를 향해 가시는 도 중에 포도원을 보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이스라엘 사람들과 포도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 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 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 찜인고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 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 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랬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 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 5:1∼7). 예레미야 2장 21절에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했습니다. 호세아 10장 1절에는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80편 8절 말씀은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 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상의 모든 말씀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성전문에는 황금으 로 포도나무를 조각했었는데 이것도 이스라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쁜 열매를 맺는 민족으로 책망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마태복음 20∼21장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포도 원 비유도 역시 유대민족의 불충실과 반역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포도나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비유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 깊 은 근거를 두면서도 새로운 뜻을 지닌 교회의 모습을 본문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을 증명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 이 되는 교회를 설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즉 하나님은 그리스 도의 몸 된 교회의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23절에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 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존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망령된 일을 자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2절에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버리시고 하였습니다. 비 유의 초두부터 경고가 나오는 것은 과실을 맺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쓴 경험에서 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서 11장 16∼17절에 보면 사도 바울도 감람나무 비유를 말하면서 이 스라엘은 꺾여져 나간 가지로, 그리고 이방인을 그 원목에 접붙인 나뭇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 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나무, 신자를 그 가지로 비유했습니다. 가지는 나무에서 났고 나무로 말미암아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 비유야말로 참 생명이시며 생명의 근원 되시는 그리스도와 신 자와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나타낸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원문에서 깨끗케 한다 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카따리오 ( )라는 동사를 썼는데, 이것은 불결한 것을 청결케 한다 는 뜻입니다. 가지는 모세관으로 원목에 붙어 생명을 유지하는데 이 모세관 에 불순물이 고이면 뿌리에서 수분이 흐르지 못하므로 결국 말라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그 리스도인이 생활에서 범하는 죄를 주님께 고백하여 깨끗케 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고 결국 마른 가지처럼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져스틴(Justin)이란 사 람은 이것은 하나님의 참 종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훈련을 비유한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신비 롭고 측량할 수도 없고 또 그밖에 달리 사할 수 없는 이 방법을 하나님은 늘 마음에 간직하시 며 그의 백성을 상대해서 몇 번이고 반복하십니다. 왜요? 우리에게 생명의 열쇠를 주시기 위해 서입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3절). 13장에도 같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베드로가 너무 황송해서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 다. 그때 예수님이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 고 하시니까 베드로는 ( 그러시면)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옵소서 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하셨습니다. 웨스트코트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의 훈련으로 깨끗해진 것입니다.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 해졌다 고 하였는데 말, 로고스 는 단수로서 주님의 복음 전체를 가리킵니다. 바울도 에베소서 5장 26절에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다 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4절). 전후 양부분이 다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 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그리고 나로 하여금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는 뜻입니다. 가지는 나무 안에 거하고, 나무의 수분은 가지 안에 흘러와서 거합니다 여기 거한다 ( )는 동사는 그 리스도와 신자와의 생명적인 관계를 표시하는 말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과실 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말하는 열매도 신앙을 떠나 천성으로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열매란 그리스도의 공급하시 는 은혜를 힘입어서만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나 는 예수 그리스도요, . 너희 는 우리 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의 특색이 분명합니다. 기 독교는 나 와 너희 가 선명한 인격적인 종교입니다. 그리고 나와 너희는 결합되어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결합의 결과로 열매를 맺고, 열매를 맺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 다. 본문 말씀 중에서 중요한 부분은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중에 내 안 에 란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15장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고 했고, 5절에도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 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 고 했습니다. 6절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진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9절에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인 우리의 관계는 너무 분명합니다. 생명적인 관계입니다. 옆에서 보고 배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교훈이나 수양이 아닙니다. 철학적인 연구도 아닙니다. 생 명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지 된 우리는 나무이신 주님의 생명 안에 있어 주님으로부터 그 생명을 받아들여야 바로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 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셔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죄 많은 사람인지 스스로 시인하고, 애통하며, 회개하고,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우리 마음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물론 주님은 여러 가지 방면 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환난을 통해서, 실패를 통해서, 질병을 통해서, 친구의 권면을 통해서, 좋은 예술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나 문을 열거나 열지 않는 것은 사람의 책임입니다. 우리의 마음 문을 열면 주님은 우리에게 들어오십 니다. 그래서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 른 말로 하면 주 안에서 새생명으로 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애가 세상에 나오면 배우지 않아도 젖을 빨 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새생명을 얻으면 생 명의 젖을 빨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예배당에 나오고 싶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찬송하면 즐겁고, 마음에는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 안에 있다는 증 거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나오지 않으면 마음이 컬컬하고 기도하지 않으면면 마음이 답답해 지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혼이 굶주리게 되기 때문입니다.어린애가 배고프면 웁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고 권면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주님 안에, 그의 생명 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 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고 했습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잘 배워야 합니다. 예전에 어떤 댁을 심방했는데 박태선 집단 신앙촌에서 20여년 계시다가 교회에 나오시는 댁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렇게 간증하셨습니다.제가 신앙촌에 가서 책임을 지고 일도 많 이 하느라고 했는데 그게 정말 헛믿었어요. 저는 20년 동안 늘 찬송만 불렀지 성경은 한 번도 펴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성경은 도무지 몰라요. 이제부터 배워야겠어요. 성경을 배우면 거기 에 생명이 있는데 공연히 이적과 기사만 따라 다녔어요. 이제부터는 바로 믿어야겠어요. 그런 데 이 분만 성경을 모릅니까? 우리 가운데 성경은 아예 배울 생각도 하지 않고 예수 믿는 분은 안 계십니까? 성경을 모르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말씀을 모르면서 어떻게 봉사하고, 전 도하고, 교육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 말씀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기 도할 수 있습니까? 가지가 나무 안에 붙어 있고 나무의 수분이 가지에 흘러 들어갈 때에는 가지는 소원대로 꽃 이 피고 결실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압니다. 알포드가 말한 것처럼 모든 열매 맺는 일은 기 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렇게 응답 받는 기도의 조건도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 리스도의 말씀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즉 기도가 주님의 말씀에 부합되어 야 합니다. 웨스트코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참 제자의 기도는 그리스도 말씀의 산울림이 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말한다. 그들의 기도는 주께서 교훈하신 말씀이 기도 의 형식으로 변화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응답받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주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주 안에 사는 사람의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 할 것은 무슨 일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그것을 어떻게 당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는 말은 어떤 권력자가 자기의 권력을 과신 하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겸손히 한 말입니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내가 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주님의 능력이 뒷받침 해줄 때 그 능력을 힘입어 주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겸손 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8절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 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를 맺는 것의 궁극적인 결과가 무엇입 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도의 제일되는 목적입니다. 과수에 열매를 많이 맺을 때 가장 기뻐하는 분은 그 과수원의 농부입니다. 열매 많이 달린 가지는 오 히려 괴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열매를 맺는 또 하나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열 매 맺어야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고 많은 열매를 맺읍시다.
안과 밖
요 15:1-10 / 이용효 목사
비행기 안과 밖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비행기 안은 적당한 온도와 산소가 있어 잠을 잘 수 있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볼 수 있으며 스튜어디스의 서비스를 받으며 차도 마시고 음식도 먹을 수 있지만 비행기 밖은 살인적 추위로 인하여 사람이 견디지 못합니다. 우주인이 머무는 캡슐안과 밖의 차이도 그러합니다. 우주인들은 지구에서 생활하는 것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의 환경 가운데 캡슐 안에서 연구도 하고 실험도 합니다. 하지만 캡슐 밖으로 나가면 인체는 분해되고 말 것입니다. 해저 수백미터 물속에서 순항하는 잠수함속은 사람들이 잠자고 활동하기에 불편함이 없지만 잠수함 밖에는 수압으로 인하여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안 과 밖의 차이 중 가장 크게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과 그 분 밖일 것입니다. 예수 안에 생명 있지만 예수 밖에는 영원한 멸망이요, 예수 안에 천국이 있지만 예수 밖에는 지옥이 있을 뿐이요, 예수 안에 축복이 있지만 예수 밖에는 저주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시편16:2절에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하였고, 시편73:25절에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1.주님의 안 과 밖은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6,8절) 한국계 미국인 유나 리, 중국계 미국인 로라 링 이 두 여인들이 북한에 억류 되어 있다가 지난 4일 풀려나 가족들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 두분을 구출하려고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가 지시하였고, 국무장관 힐러리가 사과도 하고 호소도 하였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열렸으며 엘 고어 전 부통령이 중간역할을 맡았고,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으로 날아가 김정일을 면담하고 난 다음 풀려 난 것입니다. 그들이 미국시민이었으므로 미국은 최선을 다해 그들이 풀려나도록 힘을 썼던 것입니다. 그들이 미국 밖의 사람들이었다면 미국은 관심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국 안에 있는 사람이므로 모든 것을 동원하여 구해줄려고 하였습니다. 1979년 2월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말리부에서 산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산위에 있던 바위 하나가 아래로 굴러 내리다 고속도로 바로 위에서 멈췄습니다. 그 바위가 고속도로로 떨어지는 날에는 도로가 막히게 될 뿐만 아니라 인명 피해가 우려되었습니다. 당국은 그 바위를 공공위험물로 지정한 후 곧바로 9만 불을 들여 안전한 지대로 옮겼습니다. 그 때에 호주의 조각가 <블랙 리빙스톤 스트롱>이 그 바위를 사겠다고 제안하였고 당국에서는 단돈 1백 불에 팔았습니다. 스트롱씨는 그 바위를 2천5백 불을 들여 호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8주 동안에 걸쳐서 당시 암으로 투병 중이던 미국의 최고의 영화배우 <존 웨인>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완성된 작품은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미국은 그 작품을 백만 불에 사들여 헐리우드의 한 극장 앞에 전시하였습니다. 존 웨인을 사랑하는 자들로 존 웨인을 기리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존 웨인은 그 작품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일로 인하여 그 조각한 존 웨인 상을 통해 모금한 돈으로 존 웨인 암 센타가 세워졌습니다. 위험한 바위였고, 버려진 바위가 조각가에 의해 귀한 바위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불안케 하여 버려진 바위가 조각가의 손에서 존 웨인상으로 조각되었을 때 그 값은 백 만불이 되었습니다. 만 배의 가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회개한 후 변하여 새사람이 된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떤 죄인괴수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변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자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8:1,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기 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5:17절) 제가 어릴 적 밤중에 멀리 떨어진 변소에 가는 것이 귀찮고 무서워 요강에다 오줌을 보았습니다. 그런 요강이라도 용광로 안에 넣기만 하면 녹아서 새로운 밥공기도 되고 국그릇도 되는 것입니다. 다 깨어진 농기구라고 할지라도 구멍이 뚫어져 못쓰게 된 그릇들일지라고 용광로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가지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기만 하면 점진적으로 변화되고 마침내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에서 처음 행하신 표적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이적이었습니다. 물보다 포도주의 맛이 좋습니다. 색깔도, 용도도, 값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런 이적을 보이신 것은 그 이적을 통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하여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 이적이 주는 믿음의 메시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변하여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인생이 열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려 돌아다니던 여인이었지만 예수님 안에 들어온 뒤 거룩한 성녀가 되고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어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돈 만 알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 안에 들어온 뒤 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 들오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인생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2. 주님의 안 과 밖은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4,7절) 레나 마리아 같은 분은 태어나면서 양팔과 한 다리가 없는 불구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책에서 단 한 번도 실망하거나 낙심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늘 감사하면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에 그녀는 오직 예수님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지선 자매는 자동차 사고로 전신에 3도 이상의 심한 화상을 입고 손가락이 모두 잘리고 얼굴도 심하게 일그러져 그 아름다운 미모는 사라지고 보기에 흉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에게 이런 장애를 준 사람을 용서하였고 그런 시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감동적인 삶으로 만들었나요? 예수 안에 있는 능력입니다. 세계적인 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는 숱한 질곡의 세월이었습니다. 지병인 폐병과 간질로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은 일생이었습니다. 1821년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코바의 어느 빈민구제원에서 태어난 그가 15세 되던 때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첫 번째 아내 마리아도 역시 폐질환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반정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시베리아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그 때를 회상하면서 “나이 오십에 수천 년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였다”고 할 정도 였습니다. 그러나 시베리아 유형길에 간이 기차역에서 어느 부인이 전해 준 성경을 받고 그의 일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뒤 주님 안에서 그는 위대한 문학가가 되었습니다. 신림4거리에 모텔이 176개나 있고, 봉천 4거리에는 168개가 있다고 관악구청 직원으로 근무하는 집사님이 일러 주었습니다. 모두 성업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텔들이 나그네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 불륜관계의 남녀들이 낮에도 들어와 불륜을 저지르고 얼굴을 가리고 빠져 나간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 부부가 만나는 학교 동창들이 모두 18쌍인데 이번에 보니 그 중에 10쌍이 이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혼하지 않은 8쌍은 그의 예수님을 믿는 가정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안이 바로 안전지대요, 예수안에 있는 것이 거룩이요 경건입니다. 학교의 어린이, 학생 할 것 없이 사나워졌고, 상하를 모르고 권위를 업신여긴다고 합니다. 모두가 가정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주 예수 안에만 있으면 이런 가정도 치유 받고, 회복되고 화목한 가정이 됩니다. 그래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부녀들이 가정을 지키게 되고 자녀들도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고 예수 안에서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LA에 사는 한 가정은 10년 전에 큰 불행을 겪었습니다. 교통사고로 남편이 즉사한 것입니다. 어린 두 자녀를 남겨둔 부인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보험금까지 탔기 때문에 큰집을 사서 두 자녀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하루 종일 남편만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먼저 간 남편이 그렇게 원망스럽다면서 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전문 상담인의 상담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공부할 생각을 안 합니다. 하루 종일 멍하니 창문 밖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나쁜 친구들을 만나 여러 번 가출하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빨리 정신을 차리고 살길을 찾아 앞으로 나가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다고 하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2006년 8월 모 주간지에 <임정미> 양의 스토리가 실렸습니다. 2000년 임 양이 13세 때, 청운의 꿈을 품고 가족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미국이민생활 1년 만에 폐암 판정을 받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이민 생활 자리도 잡히지 않은 시기에 집안의 기둥이 무너진 것입니다. 또한 물질적으로도 어려웠습니다. 임양의 어머니는 네일 가게에서 남의 손톱을 갈아주며 두 아이를 키웠습니다. 이 가정이 표지 인물로 소개된 이유는 임정미 양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통령상을 비롯해서 6개의 상을 받고 졸업했다는 것입니다. 임 양은 중학교 때부터 치과 직원, 편의점 캐셔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아직 일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민생활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임양은 피아노를 잘 쳐서 늘 교회 반주자로 봉사하는 신앙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현재의 힘든 삶은 잠시 스치는 과정'이라는 밝고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LA의 가정과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4식구. 아버지의 사망. 슬픔과 고통. 그러나 한 가정은 아직도 헤매고 있고, 한 가정은 역경을 뚫고 밝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임양은 인터뷰에서 성경말씀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기에 넉넉히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빌립보서4:13절의 말씀“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 진리임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쓴 성경에서 언제나 입버릇처럼 그리스도 안 혹은 예수 안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어려움을 너무나 많이 겪었지만 그 숱한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예수 안의 능력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세상의 시련과 핍박을 이길 수 있고 어떠한 환경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실재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함께 하시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너희 속에 있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행동하고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이 확신이 우리를 얼마나 담대하게 하고 얼마나 능력있게 하는지 모릅니다. 모두 주안에서 이런 능력을 경험하며 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3. 주님 안 과 밖은 영생과 멸망의 차이가 있습니다. 타이타닉 호가 북대서양 얼음바다에 침몰하는 장면을 영화로 만든 것을 보았습니다. 배안에 있던 150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구명보트에 옮겨 탄 700여명의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이 지구라는 배는 이제 침몰하고 있습니다. 오직 구원은 예수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느니라”(요14:6절) 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십자가 한 편 강도는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죽임을 당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주님과 함께 그 날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만 영생이 있습니다.(요한일서 1:11~13절) 노아 홍수 때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8식구는 모두 구원을 받았지만 방주 밖에 있던 사람들은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제 구원의 방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곧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믿지 않던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은 큰소리 외쳐 울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어떻게? 누가 예수 안에 들어갑니까? 너무나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됩니다. 즉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예수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용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출신 성분도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이제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에게 붙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말씀과 기도로 영양분을 공급받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안에 있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주님 안에서 말씀을 먹고 기도하여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영원한 연합
김상복 목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을 알파벳으로 비유한다면 구원의 문제는 A,B,C입니다, 출발이지요. 이것을 깨달아야 영원한 평화가 가슴속에 있게 됩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 또는 거듭남에 대한 확신 다음에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있어요. 오늘 본문 말씀과 설교의 제목으로 사용한 ‘영원한 연합’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과 내가 영원토록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 안에 영원히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때 나타나는 엄청난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원한 연합’,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된 영원한 연합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함으로 여러분의 가슴속에 새로운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사람의 연합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로 보여 줍니다. 어떤 때는 결혼한 부부로, 또 때로는 나무와 나무가지,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것이지요. 가지는 의례히 나무에서 나오는 것이요 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는 것이 하나됨을 역시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비유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 순간이 우리의 모습이 영원히 달라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 온 사람이 있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그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이에요.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속이 달라졌어요.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났고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 온 새로운 영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내가 영원히 하나가 된 것이지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예수님과 내가 하나 된 사실을 분명히 믿고 사시길 바랍니다.
또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데 또 다른 곳에 보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분명히 말해 주고 있어요. 오늘 말씀에도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역시 내 안에 임재 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고백하는 그 순간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재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십니다. 그래서 그 순간부터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속에는 이 시간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한 순간도 주님이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을 마칠 때까지, 여러분이 어디서, 어떤 형편에서, 어떤 환경에서 사시든지 예수님은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여러분의 가슴속에 살아 계십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와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 된 것을 믿고 고백하며 여러분이 그로부터 오는 신비스러운 영광의 풍요함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된 것은 법적으로도 증명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안에 들어 온 사람에게는 절대로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나니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수가 없어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나를 심판하고 정죄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실 수 없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법적으로 영원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과 내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내 모든 죄를 덮으셨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죄 없는 자로 인정받고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이 놀라운 영적인 축복이 여러분과 저의 것임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 째는 외적인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합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그 시간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싶어요. 이런 새로운 의욕이 생기면서 외적으로 보면 이전에 예수 믿기 전하고 예수 믿은 다음부터 우리에게 변화가 나타납니다. 생각이 바뀌어지기 시작해요.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싶어져요. 생각이 변하니까 말이 변해요. 이전에 내가 쓰던 험한 단어들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아주 달콤하고 맛있는 단어로 나의 언어가 변합니다. 언어가 변하니까 감정이 변합니다. 전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어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 내가 살기 시작하니까 내 마음에 기쁨이 있고 평화가 있고 내 정서가 변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태도가 변합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소극적이요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믿음으로 표현한 이런 모습이 나타나요. 따라서 행동이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자연히 선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행동을 반복하고 좋은 말을 반복하다 보니까 좋은 습관들을 많이 갖게 됩니다. 습관들이 계속될 때 좋은 인격과 인품을 갖게 됩니다. 어디가든지 칭찬을 받고 어디가든지 빛이 되고 소금이 되며 이 땅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고백한 그 순간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임재 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왔습니다. 이제 그 분과 함께 이 땅을 살아가면서 다시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이루며 사시는 그 힘과 용기와 지혜를 그 분에게서 얻어 살아가면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그 분과 함께 거니는 삶, “하나님, 우리에게 그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풍성한 열매
김삼환 목사
오늘 찬양 너무 은혜 됐습니다. 우리 김인혜 교수님은 성악도 세계적인데 지휘도 세계적입니다. 아주 잘했습니다. 너무 감동적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예수님은 포도나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우리는 죄의 가지에 붙어 있었습니다. 마귀라고 하는 나무에 붙어 있었던 가지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의 세상을 살면서 죄를 짓다가 죄의 열매를 맺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에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듯이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듯이”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로마서 3장 10절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우리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포도나무로 이 땅에 보내어 주셔서 누구든지 저를 영접하면 포도나무에 붙어서 포도열매를 맺는 이 놀라운 기적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십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는 순간적으로, 좋아서 지었던 실수로 지었던 어떻게 지었던 간에 죄는 자라나게 되어있고 그 열매를 본인이 따먹어야 합니다. 불행이고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오늘 세상에서도 죄를 짓는 많은 사람들은 그 열매를 먹습니다. 심을 때는 별것 아닌 거 심었지만은 보이지는 않아도 서서히 그것은 자라나고 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감자를 심어보면 감자는 눈을 심습니다. 감자의 눈을 하나 따가지고 땅에 심으면 두 석 달 지나면 겉은 감자가 안 보입니다만은 안에서 굵어집니다. 자꾸 굵어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온 밭에 감자밭이 됩니다. 고구마는 심을 때 어떻게 심느냐하면 이 잎을 심습니다. 요만한 순 가지를 가져다가 심습니다. 한 두 서너 달 되어보면 고구마도 겉은 모릅니다만 땅속에 이렇게 굵어집니다. 저희들은 가난하니까 다 익을 때 까지 못 기다립니다. 감자도 어지간히 익으면 캐먹어 버리고 벼도 열매를 맺으면 이미 베어다가 이렇게 훑어 가지고 빻아 먹어 버립니다. 언제나 먼저 먹어 버립니다. 그래서 고구마 밭에 가서 이래 보면 고구마가 굵기 시작하면 땅이 벌어집니다. 땅이 이렇게 금이 죽 죽 갑니다. 그래서 갖다 캐 먹습니다. 고구마를 심을 때는 별거 아닌 요만한 하나 그냥 이런 것 갖다 심지만은 자라납니다. 죄악이라고 하는 것은 지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짓지만, 그것은 내 몸에서 자라나서 내가 그 열매를 먹어야 되고 우리 가정에 열매가 맺어져서 가정이 그 고통스러운 죄의 열매를 거둡니다. 자기가 심은 건 자기가 거두기 때문에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원래 좋은 열매 맺도록 지음을 받았지만은 아담 이브가 범죄 한 다음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 엉겅퀴 열매가 맺어지고 가시 열매가 맺어지는 좋은 열매를 하나도 맺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을 사랑하사 하나님께서 2000년 전 에 포도나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누구든지 저를 영접하면 예수를 믿으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포도나무에 진액을 공급하여 포도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는 원래 돌감람나무 가시나무이지만 포도나무를 영접하여 포도나무 되시는 주님과 하나 되어 접붙임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영양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포도나무입니다. 우리 몸도 이식하면 남의 몸이지만 내안에 들어오면 내 몸에 영양이 가듯이 우리는 죄인이지만은 그리스도에게 딱 붙으면 그리스도의 영양분이 옵니다. 거룩한 영양분이 진리의 영양, 생명의 영양, 승리하신 구원의 영양분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지만은 주님으로부터 받는 은혜, 생명의 은혜, 거룩한 은혜를 받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워지고 거룩해지며 승리하는 삶이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 태어나는 즉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그를 더 죄의 길로 유혹하고 더 죄를 지어서 죄의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하며, 죄의 단비가 내려서 죄의 거름이 주어져 가지고 이 문화라고 하는 거름, 이 세상의 지식들이 점점 점점 더 죄를 짓게 합니다. 저는 이번에도 와서 보니 우리나라도 마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100 만 명에 이제 가까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배우고 이렇게 좋은 환경 속에 살면서도 자기를 망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약이라고 하는 것은 도박보다도 열배나 더 무섭고 알코올 술중독자 보다 열배나 더 무서운 것이 마약인데도, 많은 사람은 이 길로 들어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면 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 다 안 갈려고 하지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의 길로 들어가게 되어져 있습니다. 죄악 세상에 살면서 죄를 짓지 않고 죄의 열매를 거두지 않으며, 죄의 저주를 받지 않는 길은 포도나무 되시는 주님과 함께 살아야 되고 주님만을 사랑하며 의지하고 주와 함께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모든 저주가 떠나가고 승리의 축복이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7가지 이런 축복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장에 나는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십니다. 어두움에 다니지 않습니다. 사망의 저주 이 캄캄함 이 저주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으면 우리는 영원히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양의 문이라고도 요한복음 10장 7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구원의 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선한 목자라고 요한복음10장에,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고 11장에,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오늘 본문에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포도나무입니다. 주님 외에는 이 땅에 포도나무가 없습니다. 열매 맺게 하시려는 축복의 열매 우리 가정과 우리 삶의 열매는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에 붙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예수님 사랑하고 예수님 의지할 때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나 깨나 우리 일생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며, 가지로서의 삶을 가지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 하시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왜 나옵니까? 예수님 배우려고 나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려고 나옵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연구하고 가까이 하며,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서 교회 나옵니다. 전에도 저가 한번 그런 말씀을 했지만은 벤치마킹이라는 말이 요사이 아주 기업하시는 분들에게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벤치마킹이라고 하는 것은 ‘기업조직의 향상발전을 최고의 기업으로 인정된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나 작업과정이나 조직이나 운영 등을 비교 검토하는 지속적이고 또한 조직적인 과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우량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우량기업을 어떻게 하더라도 따라 가려고 지속적으로 끝임 없이 배우고 연구하며, 모니터링을 하는 것을 벤치마킹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최고의 우량기업,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습니다. 기업을 하는 분이 가만히 있으면서 어떻게 좋은 기업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수한 기업을 어쨌든 끊임없이 따라 가려고 노력을 하는 것을 벤치마킹이라고 합니다. 저는 해외에서 비행장에서 우리 교인들을 여러 번 10년 전에 15년 전에도 만났습니다. 암스테르담 공항에 런던공항에 남미 브라질공항에 우리 교인이 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여기 왔냐?’ 그러니까 ‘아이구~ 목사님! 저는 삼성에 있습니다. 삼성에서 저에게 1년에 몇 억을 주어 자기는 1년 동안 이곳에 와서 전체를 이 나라에 관한 걸 연구를 해가지고 돌아갑니다. 그래서 일절 간섭하지 않습니다. 저는 1년 동안 여기 와서 이 나라에 대한 모든 것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보고 ‘저렇게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결국 삼성은 끊임없이 세계최고의 나라들을 모니터링하고 끊임없이 벤치마킹하며, 똑같은 자리에서 어쨌든 따라 가려고 노력하므로 이렇게 커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온 인류의 벤치마킹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왜 나옵니까? 예수님을 벤치마킹 하기해서, 예수님이 ‘너 나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찍이 따라간 민족은 세계의 제일 우량국가가 되고 우량정치가 되며, 우량기업이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라들 보잘 것 없는 사람들도 예수님 따라간 나라들은 최고의 나라가 다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 따라가면 열매 맺습니다. 국가도 열매 맺습니다. 우량기업이 됩니다. 벤치마킹에서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일회성 행사, 단순하게 뭐 몇 달만 배우려고 하면 어떻게 따라갈 수 가 있겠습니까? 우량기업 큰 기업은 제품도 있지만은 그 제품을 만드는 과정, 경영 운영, 그리고 경영자의 마인드, 철학, 목표, 수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10년, 20년, 30년 계속 지속적으로 따라가야지 잠깐 가서 공장 둘러보고 오면 안 됩니다. 벤치마킹이 똑같은 자리에서는 절대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제일 중요한 것은 무슨 모방을 한다든지 복제나 해가지고 무슨 제품만 만들어 내는 것은 그것도 커질 수 없습니다. 그 제품을 만들기까지의 수많은 과정, 그것은 아주 훔쳐다가 정보를 가져다가 모방을 해 가지고 제품을 만들 수 있어도 그 기업처럼 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1, 2년 예수님을 예배만 요래 드려서 잠깐 모방하고 이런 식으로 잠깐 동안 일회성으로 은혜나 받아 가지고 좋은 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몇 백 년 지속적으로 주님을 따라 가면서 섬기는 민족이 세계적인 민족이 되고 영적으로 우량기업의 인생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미국가도 늘 바쁘니까 잘 다닐 수 없었는데 이번에 미국에 뉴욕과 워싱턴과 휴스턴, LA 이런 지역으로 다니면서 큰 교회들을 많이 가 보았습니다. 레이크우드라고 하는 3 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 가니 목사님이 예배 중에 소개도 해주고, 예배를 제가 직접 드려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벤치마킹을 해야 되니까 그래서 그 나라의 좋은 교회들을 보기 위해서 주 욱 살펴보았습니다. 미국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은 것은 우리가 미국에 가서 경영도 배워오고 지식도 배워오고 정치도 교육도 다 배워오지만은 그 나라의 가장 큰 힘은 영적인 힘 교회의 힘입니다. 원래 그 땅은 인디언의 땅입니다. 쓸모없는 땅인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땅을 만들어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길 때 그 땅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축복을 받아 짧은 300여년 밖에 되지 않은 역사지만은 세계를 이끌어 가는 이 놀라운 풍성한 포도나무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누구든지 우리 인생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어느 나라에 살든지 어느 지역에 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벤치마킹하면서 본받고 나아 갈 때에 우리의 미래는 주님이 좋은 열매로 이런 풍성한 열매로 우리를 축복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시편 75편 6절에는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을 열매 맺게 하고 풍성한 은혜는 동쪽, 서쪽,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우리 인간이 맺어야할 풍성한 열매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옵니다.
저는 이번에 우리 장로님들 하고 워싱턴에 가서 백악관도 이렇게 주욱 다 둘러보고 직무실도 가보며 또한 저는 특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워싱턴에서 들어가는데 저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워싱턴에 가도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생각했는데 패론이라고 하는 8선 국회의원이 저를 초청했습니다. 미국에는 국회의원도 한번 하면 그 지역이 한번 밀어주면 그렇게 오래오래 밀어줍니다. 우리는 한 번도 끝까지 못 참아 이래 한번 밀어주고는 그것 끝까지 못갑니다. 우리는 너무 그런 면에서 조급합니다. 8선의원입니다. 그런데 저를 초청하는데 버스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냥 버스인줄 알았는데 올라가 보니 궁궐과 같습니다. 버스가 13인승인데 얼마나 응접실로 잘해 놨는지 올라타서 국회의사당까지 가는데 앞뒤에 아주 불이 막 여러 개 달린 경찰차가 와서 ‘외앵’ 하면서 저를 국회의사당까지 데리고 갑니다. 이 버스 앞뒤에 차가 이렇게 가니까 모든 차들을 다 스톱시킵니다. 그래서 백악관 기자하시는 여러분들이 그럽니다. 한국 사람은 40년 동안 만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랍니다. 왜 그러냐 하면 워싱턴에는 한 주일에도 세계의 국가 원수들이 오는데 교통 늘 차단하고 국무총리급은 몇 백 명이 오는데 그걸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저가 만일 우리나라 서울시내 교통을 차단하고, 누가 그리 쉽지 않지 않습니까? 제가 아무것도 아닌데 고속도로서도 차가 다 비킵니다. 우리나라는 고속도로에 경찰차가 와도 비킵니까? 안 비킵니다. 그런데 좌악! 제가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휴 나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것 보다 차라리 현금을 주는 게 낫지 뭐 이렇게까지...’ 나중에 알고, ‘왜 그랬냐?’ 그러니까 ‘우리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병원도 세워주고 해서...’ 이 8선의원은 흑인입니다. 이 분이 ‘이 아프리카를 어떻게 그 한국이 이렇게 생각 하냐?’고 저에게 묻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가 우리 6.25사변 때 도와줬기 때문에 우리가 도와준 거지, 제가 뭐 대단한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촌사람이고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저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는 이런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주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에 붙은 이 은혜로 이런 좋은 날이 오고 이렇게 된 것이지, 제가 예수에게 붙어있지 않았더라면 지금 술 먹고 완전히 폐인 다 되었을 것입니다. 성격이 급해 싸움하다가 벌써 얻어 터져 병신이 다 되었을 거고, 어려서부터 화투를 좋아해 그거 하다가 재산 다 허비했을 겁니다. 저는 인간도 아닐 텐데 워싱턴에서 이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이건 전적으로 다 내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이렇게 된 줄로 믿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영접하면 누구든지 저와 함께 하면 주님이 빛이 되셔서 목자가 되셔서 인도하시고, 주님이 포도나무가 되셔서 영양분이 되셔서 여러분의 가정에 죄악이 주는 열매가 떠나가고 마귀가 주는 저주가 떠나가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실패한 사람은 열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카네기에 보면 첫째로 모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잘못한건 ‘너 때문이다.’ 전부 전가 합니다. 두 번째는 열등의식이 많습니다. ‘나 같은 게 뭐’ 열등감이 너무 많습니다. 세 번째는 삶의 목표가 없습니다. 되는대로 삽니다. 네 번째는 쉽게 포기합니다. 하다가 안 되면 치워버리고 안 되면 치워버리고. 다섯째는 과거에 매여 있습니다. 사람은 멀리 바라보고 미래의 꿈을 가지고 나아가야 되는데 과거에 자꾸 매입니다. 독창력이,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 되는 데로 삽니다. 또한 여덟 번째는 인생의 지름길을 찾습니다. 쉽게 돈 벌고 쉽게 뭐 요래 가지고 쉬운 것만 찾지, 세상에 좋은 것은 쉬운 게 하나도 없습니다. 잘되는 것은 영원히 축복 받는 것은 쉬운 일이 하나도 없고, 죄짓고 나쁜 길 안 되는 길은 쉬운 길인데 전부 그런 것만 찾습니다. 인생의 지름길을 찾아 인생을 낭비합니다. 아홉 번째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에 나를 통하여 일하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열 번째 패배에 대한 원인 분석이 없다라고 합니다. 열 번을 잘못되어도 잘못한 것을 통하여 교훈을 얻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변화를 받아야 되는데 실패를 반복하는 삶이 바로 이 열 가지 요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는 우리 인생은 자기가 이런 길을 가면서도 잘 모릅니다. 이러한 사람도 이러한 성격도 이러한 실패 인생도 예수님이 포도나무만 되면 마음이 바뀌어지고 목적이 생겨납니다. 자신에 대한 긍지와 의지와 용기가 생기고 과거에 집착하던 삶이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삶은 잘 모릅니다. 고칠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가 이번에 와서 신문에 보니까 그런 것이 났습니다. 양천구에 있는 어떤 분이 남편이 자꾸 자기를 괴롭히니까 그 애인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우리 남편 손 좀 봐 달라.’고 그러니 이 멍청한 애인이 왔습니다. 와 가지고 둘이 대판 길가에서 치고받고 싸움해 그 남편이 그래도 힘이 있어 그 애인을 두들겨 팼습니다. ‘이 자식! 내가 그렇지 않아도 누군지 알고 싶었는데 늘 우리 집에 전화하고 너 누구냐?’ 그러니까 ‘너 왜 내 애인 때리냐?’고 이쪽은 또 ‘야~ 내 부인 때리는데 니가 왜 간섭하냐?’, ‘너 부인이지만 내 애인이다 자식아.’ 그래서 또 때려 맞아 이 사람이 입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소를 했습니다. 고소한걸 보고 ‘야~ 재정신이 아니구나. 제 정신이.’ 사람이 어떻게 그 여자도 또한 어떻게 그 애인을 불러 가지고 우리 남편 손 봐 달라고 이럴 수 있습니까? 저는 그래서 ‘그 자식 잘 때렸다. 죽도록 두들겨 패버려야지 그게 무슨 놈, 그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자기들은 다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머리가 잘 돌아가고 현대인들이 이거 다 배우고 똑똑한 짓이라고 하지만은 이것은 세상에서 벤치마킹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게 아닙니다. 자기들은 잘나고 뭐 잘하고 똑똑한 거 같지만은 이게 비정상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자기들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똑똑해도 예수 없이 똑똑한 것은, 그리스도에게로 오지 아니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후회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행복도 예수 안에서 성공도 예수 안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 한분밖에는 없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 인생을 풍성하게 하고 오늘 본문에도 기쁨도 풍성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떠나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진다.’, ‘불에 태워진다.’, ‘밖에 말리워진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열매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목적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동물적인 목적을 가집니다. 먹고 사는 목적을 가지고 거기에 집착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영원히 살아서 하나님을 세세무궁토록 영화롭게 해야 될 이 높은 차원,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목표가 있는데 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목표가 하늘에 있고 저 높이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나아가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 전심전력해야 됩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에게만 벤치마킹을 하니까 유대인이 세계를 정복하듯이 오늘 우리 민족도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벤치마킹 하면서 끊임없이 그를 따라가면서 끊임없이 모니터링하면서 ‘주여!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사모 할 때에 여러분의 인생은 금년 2007년도도 축복의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번에 백악관에 가서 그 안에 봤는데 거기에는 지금 대통령께서 기자회견도 하시고 직무실, 면담하는 자리도 있습니다. 강영호 박사님께서 안내를 해주시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이 직무 하던 곳도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이 다 계셨으니까. 소아마비는 어려서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루즈벨트 대통령은 39살에 소아마비가 됩니다. 그래서 인생이 쓰러져 폐인이 되었는데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소아마비의 역경을 다 딛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대통령이 되도 몇 번 하셨습니까? 네 번 하셨습니다. 이분만 네 번 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침대 올라 갈 때는 안아서 옮겨져야 되고 늘 휠체어에 앉아 있다가 들어 이렇게 밀어 줘야 되고, 대통령은 건강하게 움직여야 되는데 그러고도 어떻게 미국을 이끌어 가셨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분이 2차 대전을 이끕니다. 2차 대전 승리한 것이 루즈벨트입니다. 이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의 모니터링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벤치마킹하면서 이런 지혜를 얻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할 때도 17시간을 백악관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건강하냐 소아마비냐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대학 나왔냐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대학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도 예수 없는 세상을 벤치마킹하면 그건 안 됩니다. 술집에 다니고 그러면 그 인생은 끝납니다. 아무 대학도 구경을 못해도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일이 풍성한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옵니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을 할 때 미국 경제가 5년을 불경기를 만나 37개 주의 은행이 문을 다 닫았습니다. 은행이 다 폐쇄되었습니다. 이런대도 나라를 전부 회복시킵니다. 경제도 회복시키고 전쟁도 해결하며, 우리 인간의 능력은 몸에 있는 게 아닙니다. 현대인들처럼 지식에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 정보에, 기술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주님을 끊임없이 의지하고 나아가며 봉사할 때에 여러분의 인생은 이제와 영원한 축복이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또한 애인을 두면 안 됩니다. 세상에 애인을 두고 교회생활하지 말고 교회에 집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벤치마킹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부모님들도 아셔야 됩니다. 자녀를 보고 ‘야~나는 포도나무가 아니야. 너희는 예수님에게 어려서부터 예수님에 붙어야 돼. 예수님 사랑해야 돼.’ 아내를 보고도 어떤 분은 아내에게 자기가 포도나무인줄 알고 ‘내 있는데 붙어라.’ 그러는데 여러분! 남편 의지해봐야 별거 없습니다. 저도 우리 집사람이 철저하게 예수님에게 붙어야 집사람도 행복하고 저도 행복합니다. 집사람도 예수님에게 붙어야 열매를 제가 거둘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 사람 보고 가끔가다 그럽니다. ‘여보! 당신 남편 잘 만난 복이지? 그러니까 미국 와서 이런 대접 받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뭔 소리. 나는 내 복이야. 내 복. 내가 예수님에게 붙은 덕택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인데...’ 이 얼마나 당당합니까? 이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당당하게 당신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얼마나 맞습니까? 그 분이 하나님 은혜로 살고 하나님 은혜로 저를 만난 것이지, 제가 그 분 건져 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내 아내가 포도나무 가지되고 나도 포도나무 가지되며, 우리 자녀들도 모두 포도나무 가지되어서 우리 온 식구가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야지, 자녀보고 ‘나 의지해라.’ 부인보고 ‘내 의지해라. 내가 포도나무다.’ 내게서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교회도 목사도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저를 의지하면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을 포도나무 가지되시는 예수님에게 접붙이도록 도와주는 역할밖에 하는 게 없습니다. 이단은 교주가 ‘내가 포도나무다.’ 그거 다 가짜입니다. 이 땅에는 포도나무가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한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한 분인 줄로 믿습니다. 목사가 포도나무인척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교역자는 팬클럽을 만들면 안 됩니다. 자기 인기주의로 나가면 안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가지에 지나지 않아. 그러나 주님으로 부터 받은 이 은혜 때문에 내가 좋은 가지가 된 것이지...’ 이 가지의 능력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나무 하나가 자라나서 소나무 하나에 억 천 만의 소나무 잎들이 전부 다 영양을 공급 받듯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되는 포도나무를 통해서 온 인류가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으며, 생명을 얻고 희망을 얻으며 영생을 얻고 영육에 풍성한 복을 받는 줄 믿습니다.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옵니다. 저는 원주 수양관에 가서 소나무를 볼 때 마다 늘 감동을 받습니다. ‘한 나무에서 어떻게 하면 똑같은 영양분이 저렇게도 같이 주어질 수 있을까?’ 솔잎이 큰 솔잎도 없고 적은 솔잎도 없으며, 다 푸르게 넘치는 영양분을 누구로 말미암아 받느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억 만 명이 믿어도 백억이 믿어도 똑같은 은혜를 다 같이 받아 누리는 줄로 믿습니다. 풍성한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는 능력이 여러분의 앞날과 미래를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어제 저녁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김수만 장로님에 대해서 책을 읽고 얼마나 밤에 많이 울었는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분은 정미소를 운영하다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습니다. 우측 다리를 절단합니다. 그래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에 정미소하면 시골에서 부자였습니다. 너무 절망해 ‘하나님! 내 다리 주세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다리 주세요.’ 그러니까 꿈에 ‘너 옆에 다리가 있느니라.’ 그래서 보니까 나뭇가지가, 나무가 이렇게 하나 서 있는데 내 다리 같이 서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 다리 나무를 베어 목발로 만들어 그걸 짚고 다니면서 교회를 몇 개를 세웠느냐하면 10개를 개척했습니다. 임하라는 마을은 안동에서 60리인데 60리를 걸어가 그 마을에다 교회를 세웁니다. 정미소는 자기 부인한테 맡기고 거기에서 또 다른 곳으로 다니면서 어떨 때에 산에 눈이 왔을 때 산으로 그 딸을 데리고 같이 올라갑니다. 그 따님이 바로 우리 문헌순 목사님의 사모님입니다. 집에 어머니는 남편이 저렇게 계속 전도만 하고 다니니까 국민학교 다니는 딸보고 ‘너 아버지한테 좀 식사하게 해드려라.’ 그래 같이 사택에 있어도 아버지는 전도하러 다니고 집에 며칠을 오시지 않습니다. 이 동리 저 동리 목발 짚고 산으로 갑니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니까 가는 곳곳마다 교회가 금방 세워집니다. 3년만 되면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렇게 모두 능력 있는 사람도 전도가 안 되는 이 완고한 안동의 마을들이 이 분만 들어가면 동리가 다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그 시골 마을에서 1,2,3부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1부는 남자들 나오고 2부는 여자들 나오며, 3부는 청년학생들 나오게 해서 교회를 개척합니다. 이 분이 열 교회를 세웁니다. 오직 복음에만... 그래서 자다가 이 딸이 아빠를 이렇게 보면 ‘감사감사감사감사감사감사’ 합니다. 그래서 깨보면 아버지가 깨어 나셔서 언제나 ‘감사감사감사’ 하십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런데 아빠! 감사할게 하나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감사해요?’ 그러면 ‘얘야! 하나님이 건강 주시지, 나를 구원해 주시지, 예수 믿게 해주시지, 이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냐?’ 여러분! 포도나무에 붙어야 감사가 나옵니다. 여러분이 엉뚱한데 붙어 있으니까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쪽다리 가지고도 감사감사, 국민학교 다니는 오빠가 있었는데 저녁때 되면 이래 냇가에 같이 가자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자기 오빠와 같이 손잡고 냇가에 가면 동리 여자분들이 다 와서 저녁에 음식 만들 것을 전부 준비해 가지고 옵니다. 채소 같은 것을 씻고 고기 같은 것을 고등어 이제 머리 자르고 내장 빼 내고 토막만 내 꽁치나 이런 것들 다 그래 가지고 씻고 들어가면, 오빠가 거기 가 모두 없는데 가 꽁치 머리하고 내장하고 가져다가 전부 그걸 쪄서 먹는답니다. 아버지는 전도하고 없으니까 애들이 먹을 게 없어 가지고 그렇게 하면서 살았답니다. 제가 하나하나 보면서 얼마나 눈물이 나고 감격스러운지 그런데 그 딸이 지금 훌륭한 교회 사모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으로 사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분에게는 열매 맺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오늘 교회는 포도나무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나오면 포도나무 은혜가 주어집니다. 교회 나와서 예배 드리면 포도나무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주어져서 마음에 세상적인 저주와 어두움이 떠나가고 하늘의 영광이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열매가 있습니까?
임덕순 목사
여러분이 기도해주시고 불편을 참고 기다려주시는 바람에 휴가를 잘 다녀왔습니다. 처음 두 주간은 북유럽을 다녀왔고, 그 다음 주는 대구를 돌아 대전에서 선교세미나에 참석하였고, 그 다음에는 제주도에서 쉬다 왔습니다.
북유럽이라고 하면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인데 과거에는 가난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석유도 많이 나고 전자제품 자동차 등을 잘 만들어서 아주 부자나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춥고 험한 산과 바다로 된 땅을 스웨덴이 떼어 독립시켜준 노르웨이는 현재 국민소득이 1인당 9만 불이나 되어 스웨덴보다 부자가 되었다는데 겉으로 보기에 잘사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도로도 꼬불꼬불한 옛날 산길 그대로였고, 한국에서 3천만원 쯤 하는 산타페가 1억5천만원이나 한다니, GNP가 우리의 다섯 배 인데 물가도 다섯 배쯤 되니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곳 교회들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북유럽 3국은 루터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는데 루터교회는 십자가 종탑에 닭 모양을 걸어놓아서 외모가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내부는 우상종교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카톨릭이 비성경적라고 종교개혁을 했는데, 그 루터의 신앙을 이어간다는 루터교회가 우상들이 가득찬 예배당에서 자기 소원성취를 빌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정교회를 믿고 있었는데, 모스크바 크레물린 궁전 안에도 바짝바짝 붙은 성당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성당이 많은가 하면, 성당마다 모시는 성인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성당은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성당이고, 병 나으려면 어떤 성인에게 가서 기도해야 하고, 사업을 잘하려면 어떤 성당에 가서 기도해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 있고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결국은 딱 두 종류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인생의 주인인줄 알고 자기 뜻대로 세상을 살기 위하여 어떤 신의 힘을 빌려보려고 하는 자력종교가 있고, 자신이 주인이 아님을 고백하고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찾고 순종하는 참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신들을 믿는 인도의 힌두교나, 모하멧을 따르는 모슬렘이나, 부처를 따르는 불교, 그리고 마리아와 예수를 믿는다는 카톨릭, 정교회, 루터교회가 똑같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이 부르는 신의 이름은 제각기 다르지만 내용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힘이 있어 보이는 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왜 자신을 창조하였는지, 그 신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자는 묻지 않는 것이 이 종교들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그런 종교생활로는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참된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삶은 열매 없는 삶, 기회를 허비하는 삶에 불과합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술주정꾼으로 거의매일 폭력을 휘둘렀고, 창피한 표현이지만 친아버지가 그 딸에게 거의 매일 성폭행을 했다고 합니다. 이 여자는 어린 시절에 당한 그런 잔혹한 고통 때문에 마음이 상처로 가득했고, 그의 하루하루는 저주 같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고난의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 그 고난에서 벗어나보려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했는데, 수십 년 기도했음에도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비참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내버려두십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를 돕지 않고 그렇게 불행하게 살도록 놔두셨을까요?
그는 어느날 생각을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왜 나를 내버려두시는가 하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 그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고 과거는 지나갔으므로 과거에 매이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나를 무언가로 만들려고 하신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나는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내게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joyce meyer입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그의 영향력이 대단하답니다. 그는 “하나님말씀 안에 있는 생명” 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인생을 열정으로 껴안으십시오.’ ‘참된 행복의 비결’ 등 많은 책을 썼는데, 그 책들이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가 되어있습니다. 그가 설교하면 수만 명이 모이고, TV를 틀면 그의 간증이 나옵니다. 한국에서도 인터넷에 ‘죠이스 마이어’라는 이름을 치면 그가 하는 강의 동영상이 나옵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왜 나를 돕지 않느냐고 묻기를 그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기 시작하니까 그 인생이 바뀌었고, 그 자신의 인생이 바뀌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불평만 가득했던 사람이, 자기가 맺어야 할 열매에 관심을 갖자 그렇게 많은 열매가 맺히고 삶이 행복해진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살다 보면 이해 못할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왜 나는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왜 내게 이런 실패를 주시는지, 묻고 싶은 일들이 얼마든지 많이 일어납니다. 그때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왜 나는 안 되지요? 왜 하필 나지요?’ 라고 묻지 마십시오. 다만 내가 당하는 이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지, 나라는 그릇을 어디에 쓰시려고 지으셨는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만 묻고, 나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네게 복을 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Don`t ask me. just trust me.' 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오늘 본문인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지질히도 되는 게 없을까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답이 본문의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나는 누구보다 기도를 많이 하고, 누구보다 교회봉사 많이 한다고 자부하는데 왜 나는 되는 것이 없나요 하는 사람에 대한 정답입니다. 여러분도 이 문제를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본문에 의하면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이고 주님은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이십니다. 그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은 목적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열매를 맺기 바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열매’라는 단어를 6회나 기록하여서 하나님은 아주 간절히 우리에게서 열매를 바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본문을 보면,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인데도 열매가 없는 가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관련을 맺고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인데도 열매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열매를 잘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관리해주십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버리십니다. 나무에 달려있는 가지는 맞는데,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있으면 그 가지를 잘 보살펴줄 리가 없습니다. 도리어 잘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행복과 보람과 승리가 없는 이유는, 나한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라는 답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쓸모없는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붙어있기는 하는데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다면, 신자는 맞는데 쓸모가 없는 신자라는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과 같고, 빛을 잃은 등과 같습니다. 에베소교회가 빛을 발하지 못하니까 촛대를 옮긴다고 하셨듯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 같은 신자는 주님이 멀찍이 던져 놓으시기 때문에 그의 삶에는 기쁨이나 보람이나 행복이나 승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 행복이 없고 고난만 있는 이유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열매 없는 가지는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열매를 더 잘 맺게 하려고 약을 쳐주고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열매를 맺는 신자는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복을 주시어 그의 기도가 다 응답되고 형통하게 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의 관심에서 영영 멀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삶에는 점점 더 불평과 원망과 불행이 늘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불행의 악순환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에게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인가에 관심이 없으면, 필연적으로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하나, 왜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가? 하는 생각만 하게 되고, 그것은 원망과 짜증을 낳고 남을 향한 원망과 분노로 표출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초점을 옮겨야 합니다. 내 형편과 상황은 왜 이런가? 왜 내게 복을 주시지 않는가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말고,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삶과 행동이 무엇인가, 그것을 묻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7장에 보면 네가 무할례자로 부름을 받았느냐 할례받으려 애쓰지 말고 그대로 주님과 함께 생활하라. 네가 종 된 상태에서 부름을 받았느냐 자유인이 되려고 몸부림칠 것도 없다. 그 형편 그대로 신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라고 강조합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상황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요셉은 팔려가서 종살이 하면서도 종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데만 관심을 쏟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가서도 역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을 했더니 하나님이 그를 총리로 높여주셨습니다. 그는 총리가 된 자리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만 맺었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신자의 바른 자세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입니다.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것, 오늘, 현재의 상황은 열매를 맺기 위한 기회입니다. 내 모든 시간과 내 모든 환경은 열매를 맺으라고 주신 기회이고, 우리의 삶의 의미는 열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열매를 맺으라고 우리에게 삶의 기회를 주신 것이지, 제 소원이나 성취하라고 주신 기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말합니다. 누구나 맺을 수 있는 것이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 놔두고 부모가 출타를 하면 어린 아이들이 제 세상을 만납니다. 그동안 부모가 하지 말라고 해서 하지 못했던 행동도 해보고 싶고, 형제간에 싸움도 일어납니다. 부모가 없으니 내가 대장이라는 생각으로 형이 동생을 못살게 굴기도 하고, 동생이 형에게 대들어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 행동들은 그 부모가 기대한 행동일까요?
자기 상황에만 관심을 쏟으면 남만 못한 환경에 대한 불만이 생기고 남들이 하는 일도 밉게만 보이고 비판적이 됩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을 달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생활하면서도 모든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달고 삽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교회는 여러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단체생활인데 앞에서 이끄는 분들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애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불평하는 사람들과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입을 딱 닫아버려야 합니다. 그래도 불평하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않으면, “사랑과 겸손과 침묵이 우리교회 생활규범 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느냐”고 한마디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우리가 맺을 열매입니다.
제가 없는 동안에 혹시 원망하고 들이받고 싸우진 않았습니까? 그런분은 없을 것으로 알고 감사합니다. 한가람 전도대원들은 날마다 모여서 전도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주님께로 이끌었습니다. 누구는 남몰래 이웃을 섬겼습니다. 남몰래 이웃을 도와주고나면 아무도 모르는 것 같지만 내 마음 안에는 기쁨이 가득 차고,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누구는 힘든 일을 당한 이웃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늘 맺어야 하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제가 어릴 때 농사를 해보니까, 나무에는 열매만 맺히는 것이 아니라 벌레집도 달립니다. 어떤 벌레집은 열매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영양가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갉아먹어 죽일 벌레가 가득합니다. 성도는 열매를 맺어야 할 가지인데, 열매는 없고 벌레집만 맺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한테는 벌레집이 있는지 열매가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볼까요? 여러분은 왜 나만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이유를 몰라서 화나고, 그것 때문에 원망스런 기도를 해보셨습니까? 그것은 내 삶을 더 힘들게 하고 하나님의 복을 쫓아버리는 벌레집입니다.
혹시 남들과 함께 불평을 해본 적 있습니까? 그래서 내 불평을 들은 사람도 불평의 동지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벌레집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말 한마디를 했더니, 화났던 사람의 마음에 평화가 생기고,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을 되찾게 되고,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이웃에게 감사를 고백하게 되던가요?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도 원하시는 열매입니다.
집에서 부모에게 불평이 많고 회사에서 상사나 거래처에 불만이 많고 교회에서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부장님에게 불평이 많은 사람은, 열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명입니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시선이 잘못 고정되었다는 증명입니다. 그리고 그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씀을 흘려버린 사람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백번 낫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불평을 하고 자기 주장을 하는 것보다 지도자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더 의롭고, 그것이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교회는 개척교회 3년 만에 피아노를 샀는데, 그 피아노를 왼쪽에 놓자는 사람들과 오른쪽에 놓자는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지 않아서 깨어졌답니다. 두 편 다 이유야 있었겠지만 그게 무슨 싸워서 교회가 갈라져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에서 생기는 불만과 불평의 이유가 다 그런 수준의 것들입니다. 교회는 혼자 신앙 생활하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 성도가 모여 함께 신앙생활 하는 신앙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사람들의 생각과 이해가 엇갈립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보하고 순종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에 관한 것은 목사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교회생활에 관한 것은 장로님들과 함께 결정한 당회의 결정과 지도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선하고 잘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가 그런 것입니다.
벧전 5:5-6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남겨주신 설교입니다. “너희들 지난 3년 동안 참 수고했다. 이제 내가 하나님께로 올라간 뒤에는 너희 자손 대대로 살도록 돈 버는 기막힌 비결을 알려 주마” 하시거나, 세상에서 출세하는 비결을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만을 남기셨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은 포도원 농부이고, 그분은 간절히 열매를 바라신다. 그리고 나는 나무이고 너희는 가지이다. 그러니 너희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 설교입니다. 너희의 상황을 변화시켜서 잘살게 되고 출세하는 것보다 열매 맺는 문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를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남겨두는 이유는, 잠시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 맺어 영원한 영생과 상급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초점은 어디에 맞추어져 있습니까?
태양빛을 받지 않고도 열매를 맺는 나무는 없습니다. 모든 식물은 태양을 봐야 열매가 열립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의의 열매는 의의 태양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히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이 맺은 것은 모두가 암덩어리이고 벌레집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번 돈, 하나님 등지고 얻은 명예, 성공 그것은 열매가 아니라 단지 벌레집입니다. 돈 벌었다고 자랑하고 성공했다고 뻐기십니까? 나중에 그 속에서 자신을 해롭게 할 것들이 스물스물 기어 나와서, 그동안 했던 자랑과 교만과 생을 갉아먹는 날,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벌레집도 겉으로 보기에는 열매와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짜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주님과 관련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일하면서, 말하면서, 생각하면서, 걸어가면서, 차를 몰면서 늘 주님을 부르고 상의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께 딱 붙어있습니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까? 주님을 불러 대화하지 않고는 마음이 안 놓입니까? 주님 말씀 없이는 어떤 것도 결론을 낼 수 없습니까? 주님과 상의 하지 않고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습니까?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말씀의 답을 얻지 않고는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이 주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때 열매는 내가 아니라 나무이신 주님이 맺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있다는 것, 즉 삶의 기회는 열매를 맺으라고 주신 기회이고, 오늘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시간은 회개의 기회입니다.
눅13장7절에 보면 포도밭에 무화가 나무가 심겨있어서 주인이 3년 동안 열매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합니다. 여러분이 주인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인은 농장지기에게 찍어버리라고 하셨는데, 농장지기가 주인에게 사정해서 올 한해만 더 기다려보자고 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눅13장에서 주님이 다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18명이 너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오늘로 말하자면 중국의 쓰촨성 지진으로 죽은 수 만 명이나, 인도네시아의 쓰나미로 죽은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과연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청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산할 것이 무엇입니까?
‘내 형편은 왜 이러냐. 왜 나는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느냐’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관심을 옮깁시다. ‘이 상황, 이 형편에서 내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인가요?’ ‘오늘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무엇인가요?’ ‘제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나요.’ 이것만을 묻고 그 열매를 위해서 산다면, 조이스 마이어를 통하여 큰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더욱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열매 맺으라고 오늘을 살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살면서 자신이 맺어야 할 열매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이 맺은 열매에만 감사하며 살아서, 세상에 가장 선한 영향을 끼치고 하나님께 가장 큰 상을 받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