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 김왕노
점묘화가 맞을 것이다. 우리는 비명도 없이 이 도시에서
흡입되거나 자진해 짜부라진 것이다.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는
담은 점, 비밀을 잊은 자물쇠도 점, 무엇을 봉인할 수 없는 점,
도시마저 점묘화 된 점, 우리가 만든 신화나 우리가 최고라
치켜세우는 구조물도 단지 점 하나, 블랙홀의 날름거리는
혀에 우리는 농락당하고 블랙홀의 감언이설로 우리의 이성은
마비된 채 검은 점으로 흐르는 것이다. 흘러와 점묘화를
이루는 것이다.
모두 짜부라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함께
짜부라진 탓이다. 아무리 자기의 영토를 위해 철조망을 치고
접근 금지 구역의 팻말을 세우지만 점 하나에 불과하다.
어디나 작용하는 블랙홀의 법칙,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 든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 블랙홀로 빨려 들어 존재가 지워진다는
것도 엄청난 허망, 하나 전략을 바꾼 블랙홀의 마법에 걸린 듯
우리는 블랙홀에 들어선 것이다. 블랙홀 안에서의 산책,
블랙홀 안에서 바라보는 싱그러운 햇살로 블랙홀이 가진
두려움에 무감각해진 것이다.
명아주 푸른 날은 블랙홀의 날이다. 인동초 열매 익는 날도
블랙홀의 날이다. 파라볼라안테나로 꿈이 송수신되지만
블랙홀 안에서의 일이다. 생리가 순조로운 것도 블랙홀 안에서의
일이다. 블랙홀의 강압 장치 출력을 높이면 점이라 믿던
우리의 존재마저 사라진다. 아직은 그런 일이 없어 빛나는
눈동자, 자잘한 쥐똥나무 열매, 강가에서 읽는 물새 발자국,
으깨어지지 않은 사랑의 가녀린 어깨, 몰락하지 않은
그리움, 아직은 블랙홀의 초기, 우리는 점묘화의 점 하나가
맞을 것이다.
- 김왕노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