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고백(19회)-국민그룹 god·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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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런 god 동생들의 고백 시간이 끝나고 어느새 내 차례가 돌아왔다.go d의 맏형으로서 정신 없이 지내 온 지난 2년.도무지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 었다.
이번 고백을 준비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내 과거를 되짚어볼 수 있었다.길 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6년여의 내 인생,이제 그 ‘격변의 장(?)’으로 여 러분을 안내하겠다.
나는 74년 7월 20일 서울 성북동 제일병원에서 태어났다.태어나자마자 할 머니,어머니,형,누나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결국 난 ‘미국인’으 로서 성장하게 된 셈이다.다섯살 때 잠시 한국에서 유치원에 다닌 것 외에는 97년 초 귀국할 때까지 거의 미국에서만 살아왔다.
어린 시절은 하와이에서 보냈다.누구나 그렇겠지만 이 시절은 생각나는 일 이 거의 없다.초등학교부터의 학교 생활은 캘리포니아주 LA 인근의 타운에서 보냈다.당시에는 미국에 동포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한국 친구는 없었고 두명의 일본인 친구와 친하게 지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바로 위기를 맞이했다.그것은 바로 ‘인종차별’.지 금은 미국에 유색인종이 많아져 나름대로 권리를 찾아가고 있으나 당시에는 극소수였던 까닭에 백인들의 박대를 피할 길이 없었다.
동급생들에게 맞는 일이 수도 없었다.입고 다니던 옷이 문제였다.아버지가 사업을 하신 덕분에 유복했던 우리집은 정장 스타일의 고급스런 옷을 내게 사주셨다.애들은 그게 싫었나보다.매일 같이 맞았고,옷이 찢기는 일은 다반 사였다.난 그들 사이에서 점점 ‘왕따’가 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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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백인 동급생 세 명이 귀가하는 길까지 나를 쫓아와 구타했다.때마침 어머니가 나와 말리셨는데 이놈들이 호스로 어머니께 물을 뿌리는 게 아닌가.그 순간 난 정말 보이는 게 없었다.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 셋 다 흠씬 두들겨 주었다.다음날부터 아이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아마 ‘오리엔탈 파워’란 걸 알았을 것이다.그때부터 난 아이들을 리드할 수 있게 됐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난 키가 18㎝나 커 버렸다.지금 내 외모가 이즈음 잡힌 것 같다.학교에서는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그림을 그리는 데는 남다른 자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운동에 재미를 붙인 것도 이때쯤이다.무엇보다 서핑 실력은 당시 인근에서 최고였다.거의 매일 해변으로 나갔고 수많은 여학생이 나를 보기 위해 모이 곤 했다.그 가운데 가무잡잡한 한국 여자애가 있었는데 참 마음에 들었다.하 지만 멋진 서핑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쇼맨십만 앞서 그애에게 말을 붙여보지 못한 건 지금도 후회막급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는 다시 한번 위기를 겪게 됐다.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다.순식간에 가세가 기울고 나는 조금씩 성격이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애들과 싸움이 잦아졌다.수도 없이 어머니께서 학교에 불려 가셔야 했다. 아버지 없이 홀몸으로 우리 3형제를 보살펴 주신 어머니.난 그분의 고생을 몰랐던 것이다.어느날 밤인가 홀로 눈물짓고 계신 어머니를 보았다.그리고 난 “이래서는 안된다”고 깨달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데뷔곡 ‘어머님께’ 는 바로 내 사연이 담긴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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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음악 외적인 것만 이야기한 것 같다.사실 춤과 랩을 빼면 내 인생은 의미가 없다.토요일마다 ‘솔트레인’이라는 TV 댄스프로를 가장 좋아하던 나는 친구들과 브레이크댄스팀까지 만들 정도로 춤을 좋아했다.날마다 친구 들과 몰려다니며 거리에서 춤추고 랩을 하는 게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께서 날 조용히 부르셨다.어머니는“준형아,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렇게 괴상망측한 옷을 입고 이상한 춤만 추고 다니느냐” 고 질책하셨다.당시엔 못마땅했지만 어머니의 충고가 진심어린 것임은 잘 알 고 있었다.어쨌든 나의 고교시절은 춤과 랩으로 가득 찬 채 지나갔다.
졸업 후 캘리포니아 롱비치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난 순수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어머니께서 장래성 있는 디자인을 권유하셔서 난 그대로 따 랐다.
열심히 실용미술을 배운 대학생활,하지만 그리 즐거운 시절은 아니었다.기 억나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재닛 잭슨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것이다.어느 날 길을 가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몸매도 좋고 춤도 잘 추니 한 번 비디오에 출연하라고.난 싫었지만 친구들이 부추겨 어쩔 수 없이 참여했 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대스타와의 만남이었고,좋은 경험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나는 디자인 일을 했다.그러던 중 한국에서 일하던 누나 에게 전화가 왔다.한국에 나와 가수생활을 해보라는 것.“이것이 나에게 오 는 첫번째 기회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항상 ‘모 아니면 도’이 던 나,미국생활을 즉시 청산하고 가벼운 짐만 꾸린 채 96년 말 큰 뜻을 품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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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정훈탁 사장님 앞에서 오디션을 받았다.결과는 O.K. 난 백스트리트 보이스 같은 그룹을 하고 싶다고 당당히 말했고,사장님은 그 룹을 결성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할 수도 없어 ‘유레카’라는 광고회사에 들어갔다.그 곳에서 나를 한국 매스컴에 처음으로 알린 ‘오비 라거’ 광고에 출연하게 됐다.처음엔 디자인을 하러 입사했지만 우연히 광고주에게 스카웃돼 출연했 고 예상외로 CF가 빅히트해 박중훈 선배님과 함께 출연하는 영광도 얻었다.
이즈음 god의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데니와 호영이 먼저 들어오고 이어 계 상이와 태우가 뒤를 따랐다.앨범 출시를 목표로 일산 연습실에서 두문불출하 며 연습을 거듭했다.그러나 곧 IMF가 터지고 우리의 데뷔 음반 출시는 기약 없이 미뤄졌다.정말 잊기 힘든 고생스러운 나날이었다.
그 후 1년여가 지나서야 ‘어머님께’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이날만을 기다리며 연습에 목숨 걸고 배고픔을 참아야 했던 우리는 정말 열심히 노래 했다.팬들에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우리만의 ‘팀 컬러’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2000년 드디어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됐다.비로소 정상급 가수의 반 열에 오르게 됐고,KTV에서는 ‘가요대상’의 영광까지 안겨주었다.그날 우리 가 흘린 눈물은 단순한 기쁨의 눈물은 아니었다.그간의 고생이 머리 속에 주 마등처럼 스치며 흘러나온 사연이 있는 눈물이었다.
이제 고백을 마쳐야 할 것 같다.끝으로 항상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린다.그리고 ‘익을수록 고개를 숙일’ 줄 아는 god가 될 것 임을 독자 여러분께 굳게 약속한다.
정리 원정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