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토 무솔리니

<연설중인 베니토 무솔리니>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한때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했던 무솔리니는 1차세계대전 종전 즈음에 파시즘을 이론적으로 구체화시켜 1921년 '국가 파시스트 당'을 창당하고, 1922년에는 파시스트부대인 '검은셔츠단'을 앞세워 정권을 강탈한다. 1차세계대전 전후 무능력한 정부와 노동자와 소작인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활동이 늘어나면서 기득권에 불안을 느낀 지주, 자본가, 군부는 파시스트의 지도자 무솔리니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무솔리니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국유지 불하, 임대법 완화, 노동조합 금지 등의 법안을 통과시켰고, 자신을 '두체'로 부르게 하여 실질적인 독재자로서 군림한다.1928년에 상원을 비롯한 이탈리아 의회를 해산시키고, 헌법을 사실상 폐기시켜 이탈리아를 경찰국가화 시켜 이탈리아를 파쇼국가로서 변모시킨다.

<모든 독재자와 마찬가지로 그도 영웅적으로 사진이 찍히는 것을 좋아했다>
경제는 국가주도하의 전시경제체제로 변모했고, 실업률을 낮추는데 주력하나 국가부채가 증가하는 악영향을 낳기도 했다. 파시스트의 홍보에 주력하여 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교시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교육은 파시스트의 숭배기구로 전락했고, 단체활동을 통한 파시즘 숭배를 가르쳤다. 대외적으로는 '로마제국의 부활'을 외치며 그리스, 알바니아 등지에 이탈리아의 세력을 넓혔으며, 리비아를 다시 이탈리아의 손에 넣기도 했다.

<1940년 이탈리아 최대 판도>
'좋은 신체능력을 보여준 선수가 속한 국가와 민족은 우월하다'

<제 1회 우르과이 월드컵과 월드컵의 아버지 줄리메>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강성함을 선전하고자 월드컵을 이용하기로 한다. 1930년 1회 월드컵이 남아메리카의 우르과이에서 열린 후 2회 월드컵 개최지를 놓고 FIFA의 회의가 1932년 스웨덴의 스톡훌룸에서 있었다. 본래 FIFA는 월드컵이 파시즘의 선전도구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여 이탈리아를 대신하여 스웨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스웨덴이 개최를 포기하고, 당시 무솔리니로부터 반드시 개최권을 따내라고 협박을 받은 이탈리아측 대표의 공세도 있어 어쩔수 없이 이탈리아로 결정되었다.
월드컵이 개최되었을 당시 이탈리아의 경제상황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였다. 파시즘 주도하의 전시경제는 실업률을 감소시키는 효과는 있었지만 국가부채를 증가하게 하는 기형적인 구조였고, 아무리 전쟁으로 자금력이 있는 무솔리니로서도 8개 도시에 경기장을 짓고 축구 인프라를 확장하는 사업은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선전을 위하여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월드컵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고, 결국 이를 따냈다.

<이탈리아의, 이탈리아에 의한, 이탈리아를 위한 대회>
그러나 월드컵 개최만으로 파시즘의 선전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생각한 무솔리니는 월드컵의 우승을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이탈리아 대표팀에 대해 압력을 행사했다.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로 이민가 축구대표가 된 선수들을 다시 귀화시키거나 능력있는 외국 선수들을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귀화시켰다. 또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우호적인 심판을 배정하여 노골적으로 이탈리아 대표팀을 응원했고, 남미의 강호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경기를 일부러 먼거리의 경기장으로 배정해 일찌감치 남미 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

<경기전 국기에 대한 경례, 심판들도 로마식 경례를 하고 있다>
이탈리아 대표팀의 필승을 위한 모든 사전작업을 비롯하여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관심을 축구로 돌리도록 했다. 당시 가난에 허덕이는 이탈리아 민중들은 월드컵에 자신들의 광기와 불만을 분출해냈고, 파시스트는 이를 철저히 파시즘의 선전 도구로 이용하여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과 같은 과격한 응원구호 등을 외치도록 했다. 또 라디오를 통한 중계시스템을 설치하여 월드컵 중계를 실시함과 동시에 중간중간 파시즘에 대한 선전으로 활용했다.

<AC 밀란과 인터밀란의 경기장 '주세페 메아차', 본래 '산 시로'이나 메아차의 서거를 기념하여 명칭을 바꿨다.>
어쨌든 1934년 월드컵은 참가국 16국(아프리카 1, 북미 1, 남미 2, 유럽 14), 8개의 도시,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본래 이탈리아는 우승후보는 아니였지만 무솔리니의 사전작업과 선수단에 대한 협박 등으로 강호들을 격파해 나갔고, 최대 라이벌이자 당시 강호였던 오스트리아도 격파했다. 물론 8강전과 4강전에서 심판들의 이탈리아 편들기는 도가 지나쳤고, 옥의 티로 남았다. 물론 이탈리아가 당시의 약팀은 아니였다. 지금도 인터밀란 팬들 사이에서 전설로 남아있는 '주세페 메아차'를 비롯하여 아르헨티나에서 귀화한 선수들의 활약은 이탈리아를 결승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와~ 살았다! 라는 느낌이 팍팍 전해오는 우승장면>
결승에서 이탈리아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혈전 끝에 2:1로 승리하여 우승을 차지한다. 무솔리니는 결승전을 보기 위해 직접 경기장에서 참관했으며, 이탈리아 선수들은 패배하면 사형당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연장 득점으로 역전에 성공하여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로써 1회 월드컵에 이어 2회월드컵도 개최지에서 우승국이 나왔다. 여담으로 이 대회에 참가한 독일 대표팀은 4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패하면서 결승이 좌절되자 독일의 지배자 히틀러는 선수 전원을 구속시켰다고 한다.
월드컵 이후

<베를린 올림픽 기록화면>
1934년 월드컵을 완벽하게 파시즘의 도구로 활용한 무솔리니, 2년뒤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완벽하게 나치즘의 선전 도구로 활용한다. 이탈리아 대표팀은 베를린 올림픽에서도 우승을 차지하고,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여 2번째 우승을 차지하여 세계를 재패한다. 위대한 '두체' 무솔리니는 1935년 에티오피아 침공을 비롯하여 독일과 함께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세계 제패의 욕망을 불태우나 연합국에 패하여 무솔리니 본인은 파르티잔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처형된 후 매달린 무솔리니와 지지자들. 왼쪽에서 두번째>
이탈리아 대표팀은 패전과 함께 세계 최강의 지위를 상실한다. 이탈리아 대표팀의 부진은 1949년 '수페르가의 비극'이라 불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수페르가의 비극'은 포루투갈의 벤피카와 친성경기 후 토리노로 귀환하던 토리노 선수들이 근교 수페르가에서 탑승하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탑승객 31명 전원이 사망한다. 이 중 토리노 클럽의 주축인 18명의 선수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이였다는 점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이 추락은 뻔한 일이였다. 결국 1950년대 이탈리아 대표팀은 기나긴 암흑을 맞이했고, 월드컵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이 다시 위세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2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수페르가 비극의 추모 포스터. 매년 5월 4일에 이들에 대한 추모가 행해진다>
파시즘의 잔재

<가운데 우승컵을 들고 있는 인물이 베총리>
파시즘의 고향인 이탈리아는 지금도 파시즘적 요소가 곳곳에 남아있는데 대표적으로 정치계와 축구계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인들은 축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탈리아의 2MB, 베롤루스코니가 AC밀란의 구단주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고, 그가 축구를 통해 인기를 얻어 총리에 까지 임명 되었다.
축구계만 보면 그 상황이 심각하다. 세계적으로 훌리건의 국가로 유명한 영국과 함께 이탈리아 '울트라'의 광포함은 상상초월이다. 특히 그라운드의 파시스트의 잔재인 인종주의는 심각할 지경이다. 과격한 서포터즈들은 상대 클럽에 흑인이나 유색인이 뛰는 경우 인종차별적인 현수막과 구호를 외쳐 상대를 자극한다. 2005년 당시 메시나 수비수 마르크 조로(코트디부아르)는 인터밀란의 서포터들이 그에 대해 '원숭이'라고 조롱하자 눈물을 흘리며 경기를 그만두려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서포터들의 야유와 모욕적인 발언은 지금도 세리에A의 문제로 남아있다.

<그저 본인은 로마 경례를 했다고 하지만.....>
2006년 독일월드컵, 이탈리아가 결승에서 프랑스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자 한 극우 정치가는 '다인종국가에 대한 승리'라는 논란성 발언을 하는 등 여전히 이탈리아 축구와 정계에는 파시스트 적 요소가 남아있다. 2005년 라치오의 공격수 파올로 디카니오는 격렬한 로마 더비에서 AS 로마를 상대로 골을 넣은 후 경기 종료 후 파시스트적 경례를 취하여 벌금을 물기도 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본 알렉산드라 무솔리니를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은 '희열을 느꼈다'라고 말하는 등 축구계와 정계에 뿌리깊게 남아있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적 요소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첫댓글 그러고보니 프랑스, 잉글랜드에 비해 이탈리아팀에서는 흑인 선수들을 거의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또 이와 비슷한 경우로 1978년의 아르헨티나 우승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월드컵을 개최한 아르헨티나 군부는 결승전이 벌어지는 날 관중석에서 총성을 울려 공포심을 조장했습니다. 물론 군부측의 짓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무튼 이 날 상대팀으로 나온 네델란드 선수들에게는 충분한 효과를 주었지요. 결국 아르헨티나가 3:1로 우승을 차지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