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프로농구(NBA)가 가장 다채로운 농구인 중 한 명을 잃었다. 전설적인 농구 감독 존 우든 아래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의 두 차례 전국대회 제패를 이끌고 두 차례 NBA 챔피언 반지를 끼어 1993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전당에 입회한 빌 월튼이 암 투병 끝에 비교적 이른 71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NBA가 27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밝혔다. 부상 악령에 시달리지 않았더라면 대학 선배 카림 압둘 자바의 라이벌이 됐을 것이란 평가가 적지 않았다. NBA 후배 선수로 LA 레이커스와 새크라멘토 킹스의 감독이었고 현재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코치로 있는 루크 월튼의 아버지이며 농구 해설위원으로도 좋은 평가를 얻었다.
1952년 11월 5일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동쪽 라 메사에서 태어난 고인은 UCLA 세 시즌을 센터(키가 213cm)로 뛰어 86승 4패란 놀라운 성적을 이끌었다. 세 시즌 내리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당시에는 1학년은 경기에 뛸 수 없어 세 시즌 밖에 뛰지 못했는데 그랬으니 대학 내내 최고의 선수였다는 뜻이다. 농구센스가 대단했다. 88경기 연승이란 대단한 기록도 그가 뛰는 동안 작성했다.
1974년 NBA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지명돼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1977~78시즌 평균 18.9득점 13.2리바운드 활약을 펼치며 첫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MVP) 타이틀을 땄다. 하지만 만성적인 발 부상 탓에 네 시즌 뛸 수 있었던 328경기 가운데 209경기 밖에 뛰지 못했다.
1978~79시즌은 구단이 자신과 동료들의 부상을 얼마나 소홀히 다루는지 항의하며 벤치에서만 시간을 보내다 자유계약(FA) 선수로 샌디에이고 클리퍼스로 이적했다. 하지만 그팀에서도 발 부상 때문에 두 시즌을 통째로 뛰지 못하는 등 여섯 시즌 동안 169경기 밖에 뛰지 못했다.
1985년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한 그는 85~86시즌 80경기에 나서 생애 가장 많은 경기를 뛰었는데 래리 버드, 케빈 맥헤일, 로버트 패리시 등의 식스맨으로 두 번째 NBA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다음 시즌에는 고작 10경기 밖에 뛰지 못하고 은퇴하고 말았다.
애덤 실버 NBA 총재는 "내가 그에 대해 가장 기억할 것은 삶에 대한 열정이었다"면서 "항상 낙관적이고, 귀에 걸린 듯 미소 지으며, 지혜와 따뜻함을 나누려 했다"고 애도했다.
여러 세대의 농구 팬들은 고인을 괴짜 농구 해설위원으로 더 잘 기억할 것 같다. 어린 시절 말더듬이로 남들 앞에 나서지도 못했는데 스물여덟 살 때 비로소 제대로 말하는 법을 익혀 끝내 농구 해설위원으로도 상당한 입지를 일궜다. 하지만 이따금 기분전환용 약물은 괜찮다거나 남들이 궁금해 하지 않는 사소한 일들을 얘기하고 자신이 록그룹 그레이트풀 데드의 광팬이라고 떠벌이거나 정치적 신념을 늘어놓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들 루크가 뛴 레이커스가 2009년과 이듬해 연거푸 우승하자 신이 나서 "루크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라고 팔불출 짓을 했는데 사실 아들은 커리어 평균 4.7득점 2.8리바운드 2.3어시스트에 그쳐 본인보다 훨씬 두드러지지 못했다가 나중에 지도자로 각광받았다.
고인은 평소 동물을 죽여 얻은 먹거리를 먹지 않는 것을 소신으로 내세웠다. 포틀랜드와 UCLA는 그의 등번호 32번을 영구결번했다. UCLA 재학 시절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시위 도중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연방수사국(FBI)을 공개 비난했다가 체포돼 "당신들 세대가 세계를 망쳐놓았다. 우리 세대는 이걸 고치려는 거다. 돈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 난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라고 발언하는 등 전형적으로 20대에 70년대를 보낸 히피 성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