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을 보면 종들에 관한 내용이 당연하게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대에 노예제도는 국가와 민족을 불문했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노예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전쟁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패하면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헬라 사람들 사이에서 포로와 죄인들과 채무자들은 종의 신분으로 전락했습니다.
Delos 섬에서는 종종 10000명이나 되는 노예들이 하루에 팔렸다고 합니다. 로마제국에서 노예는 헬라사회에서 보다 더 참혹했다고 합니다. 노예는 사람이면서 아무런 권리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국법도 노예들을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노예들에게 친절하였던 주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모든 외국인들을 “야만인들”로 보고 노동을 “자유민과 천민의 하찮은 일”로써 간주하였던 문명이 노예제도를 환영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노예의 소유를 도덕적 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노예들을 가혹하게 취급하는 사람들을 악으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죄악이 만연한 민족들에게 노예의 형벌을 가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창15:16, 레25:44-46). 배상할 능력이 없는 도둑은 율법에 따라 노예로 팔려야 했습니다(출22:1-3). 도둑에 대한 형벌로 하나님의 규칙이었습니다. 그러한 계약은 쾌락이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훔쳐가는 무차별적인 노예사냥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이라”(출21:16). 모세를 빙자하여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것은 정당한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노예무역의 잔인성으로 볼 때 분명합니다. 하루만이라도 “노예선”에서 지낸다거나 노예로서 산다면 노예제도를 옹호하지 않을 것입니다. 통풍도 되지 않는 90cm의 갑판에서 하루16시간 동안 다른 노예들과 쇠사슬에 매여 본다면, 다른 노예들이 병에 걸려서 전염되어 바다에 수장된다거나 주인이나 일터의 감독에게 무자비하게 매질을 당하거나, 가족들이 뿔뿔이 팔려 흩어진다면, 노예제도를 옹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십니다.
1. 어떤 사람이 첩으로 삼기 위해 여종을 샀다면 그 여자를 종으로 대우하지 말라(출21:7-11).
2. 종에 대해 극단적으로 잔인하게 했을 때는 즉시 해방하라(출21:26,27).
3. 도망한 종을 다시 또 종이 되도록 그 주인에게 되돌리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신23:15).
4. 종들에게 친절 하라는 규칙은 이방 종들을 포함하여 최소한 공평과 자비를 보이라 하셨니다. 이러한 규정은 이방 종들을 이스라엘과의 종교적인 교제 속으로 병합되게 하였고, 할례(창17:12,13,22,23,26,27), 그리고 유월절 음식에 참예하게 하였습니다(출22:44).
5.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가난하게 된 사람은 빚을 갚기 위하여 “자기 몸을 팔”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사실 종이 아니라 온순한 품군이나 자유로운 도제였다(레25:39).
6. 이스라엘에서의 기본적인 법칙은 레위기25:42,43에 있는데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바 나의 품군인즉 종으로 판리지 말 것과 너는 그들을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라”(레25:42,43, 느 5:5).
7. 히브리사람이 종이 되면 제7년에는 자유롭게 해방될 것이나(출21:1,2), 7년이 되기 전에 희년이 되었다면 희년에 이르러 자유케 될 것이다(레 25:39-41).
8. 히브리사람이 일정기간을 섬겼을 때 그를 빈민 또는 거지로 보내서는 안 된다. 이에 반대로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한 해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네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신15:13-15).
9. 계약된 종이 자유인이 되도록 허락받았을 때 때때로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나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고 말할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또한 그러한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명백하게 규정을 해 놓았다(출21:5,6).
신약성경에서 백부장의 자기 종에 대한 태도를 보면 종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을 알 수 있습니다(눅7:7). 예수님에 의하여 선포되었고, 적들에게까지도 확대된 그 사랑은(마5:43-48) 신실한 모든 신자의 사고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라는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종위에 있는 상전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편애가 없습니다(엡6:5-9, 골3:1,25).
예수님, 그리고 바울이 모든 노예의 직접적인 해방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당시의 경제적인 문제때문이었습니다.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당시로서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 경제의 갑작스런 대 변동은 생계를 그 주인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대부분의 노예에게 형언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에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었을 것입니다. 종들의 강제적인 해방은 항상 종들에 의해서도 결코 고맙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한때 러시아 제국이 코카서스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황제의 총독이 지방 영주들에게 그들의 종들을 해방하도록 권유했습니다. 이때 노예들은 심히 반항하였고, 노예의 신분은 그들 대대의 권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노예문제에 대해서 바울의 입장은 주인과 종이 서로 우러나오는 사랑이유일한 해결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노예국가의 예를 제외하고는 종이라는 제도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종의 제도가 생겼습니다. 직장의 장소입니다. 경제로서 새로운 노예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 제도는 오랜세월동안 다듬어지고 보완해져서 오늘에까지 이르렀지만, 많은 곳에서 만족한 제도가 되지 못했습니다. 산업혁명이후 생산성에만 열을 올리다보니 노동자들은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산업병, 직업병에 걸려도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말로만 노동현장을 사랑하지 않는 악한 사업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만 알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때문에 사랑이 없어지고 직장의 場(장)이 혼돈의 장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피차 사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