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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조건
참고말씀: 출33:17; 민20:5; 신7:7; 9:5; 수17:14; 삼상8:5; 삼상16:10; 욥1:21; 시37:24; 136:25; 잠14:25; 15:15; 24:16; 막8:6-8; 눅10:21; 요6:11; 11:41; 롬5:6-8; 8:16,17,32; 고후8:9; 살전5:16,18; 요일4:10
읽을말씀: 고후6:8-10
주제말씀: 고후6:8-10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첫째, 흔히 조건이 되어야 감사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25)
사람들은 흔히 감사는 언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어느 정도 조건이 되었을 때입니다. 즉 감사함에 있어서 무엇을 중시하는 것입니까?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러다 보니 ‘조건이 되면’ 감사하지만, ‘조건에 미달하면’ 도무지 감사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이미 단정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흔히 무슨 감사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조건부 감사’입니다. 감사하기는 하는데 ‘조건에 따라서’ 감사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시험에서 합격하면 감사하나 떨어지면 감사하지 않고, 성적이 오르면 감사하나 내려가면 감사하지 않으며, 선물을 받으면 감사하나 받지 못하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이 같은 감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감사하라고 하면 감사의 조건부터 먼저 찾기 때문이요, 감사하자고 하면 먼저 조건부터 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감사생활에는 무슨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입니까?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좀처럼 감사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살다보면 감사의 조건이 채워질 때가 더 많습니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까? 대부분 후자일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게 됩니까? 단순히 ‘감사 안함’으로 끝이 납니까? 아닙니다. 십중팔구 ‘조건이 채워지지 않은 점들을 부각시키면서’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20:5)
굳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까지 ‘조건이 채워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합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수17:14) /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삼상8:5 하)
또 어떤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조건부 신앙’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즉 내가 원하는 조건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면’ 기쁘게 봉사도 하고 예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면 가차 없이 봉사도 예배도 중단하거나 유보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신앙생활이란 자신의 조건을 채우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소위 ‘복 받는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나아가 무엇도 오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떤 식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그분의 일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조건을 만족시켜 드렸기 때문이요, 만일 이 조건에 못 미치는 경우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조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랑으로써,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것이요 무조건적, 일방적, 헌신적인 사랑이라는 점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9:5)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조건부 감사를 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우리가 생각해둔 조건이 되어야 감사할 수 있다고 여깁니까? 물론 전혀 감사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낫겠지만, 이왕이면 신앙의 연조(年條)가 더해감에 따라서 업그레이드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신앙의 본질을 깨달으면서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그렇다면 우리는 조건부 감사 말고 어떤 감사를 해야 합니까? 무조건적 감사, 곧 범사에 감사하기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선(先)감사, 곧 먼저 감사하기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
원컨대 이제부터라도 말씀을 따라 모든 일에 감사하기를 원하고, “...주신 이도 여호와이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하고.”(욥1:21 하) /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삼상16:10 하)
또한 주실 것을 믿으면서 미리 감사하고 먼저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기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6:11) /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막8:6-8) 참고로, 여기서 ‘축사’는 감사와 축복, 기원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조건부 감사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하루아침에 이런 감사생활로 탈바꿈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일에 감사하려고 해도 감사할 수 있는 일들보다는 그렇지 못한 일들이 더욱 많은 게 사실이고, 또한 미리 감사하려고 해도 후(後)감사, 곧 결과를 보고 감사하던 습관 때문에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건부 감사를 탈피하려는 시도나 노력을 중단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본질을 들여다보기를 노력함으로써 감사생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가도록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본질, 곧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습니까? 어떤 관점에서 보고 평가해야 합니까? 여기에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관점이요 둘째는 세상과 불신자들의 관점입니다. 이 둘의 관계는 항상 어떻습니까?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며 상충된 결과들을 만들어냅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사도 바울은 당시의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의 삶을 이 두 가지 관점을 서로 대조해가면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이나 불신자, 적대자의 평가로 보면 어떻다고 했습니까? 욕되고 악한 이름으로 불리며, 속이는 자(사기꾼)나 무명한 자, 죽은 자, 징계를 받는 자,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습니다.
이 평가대로 라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의 온갖 욕을 다 들어도 싼 악한 집단이요, 있지도 않은 천국이나 보지도 않은 예수님을 세일즈 하는 사기꾼이요, 세상의 아웃사이더이자 삼류 변두리 인생이요, 다 죽게 생긴 인생이요, 벌 받아도 싸는 인생이요, 늘 근심 속에 잠긴 인생이요, 가난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인생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정반대입니다. 즉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이름이요, 참되고 유명한 자며, 살아 있고,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며,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이름을 부여받은 인생이요,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요,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잠14:25)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유명한 자요,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33:17 하) 넘어져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 인생이요,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잠24:16 상) /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기쁨으로 살아가는 인생이요,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잠15:15) /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눅10:21 상) 예수님처럼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인생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모든 것을 다 가진 인생임이 분명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6,17)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삶의 기준을 이 땅과 인간의 판단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판단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즉 겉으로 보이는 것들만 보고 섣불리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말고, 오히려 그 너머에 있는 신앙의 본질을 깨닫고 날마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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