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창 앞에서
김상훈
등짐지기 삼십 리 실 기어 넘어
가쁜 숨결로 두드린 아버지의 창 앞에
무서운 글자 있어 ‘공산주의자는 들지 말라’
아아 천 날을 두고 불러왔거니 떨리는 손 문고리 잡은 채
물끄러미 내 또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고
태어날 적부터 도적의 영토에서 독(毒)스런 우로(雨路)에 자라
가난해도 조선(祖先)이 남긴 살림, 하구 싶던 사랑을
먹으면 화를 입는 저주받은 과실인 듯이
진흙 불길한 땅에 울며 파묻어 버리고
내 옹졸하고 마음 약한 식민지의 아들
천근 무거운 압력에 죽음이 부러우며 살아왔거니
이제 새로운 하늘 아래 일어서고파 용솟음치는 마음
무슨 야속한 손이 불길에 다시금 물을 붓는가
징용살이 봇짐에 울며 늘어지던 어머니
형무소 창구멍에서 억지로 웃어보이던 아버지
머리 쓰다듬어 착한 사람 되라고
옛글에 일월(日月)같이 뚜렷한 성현의 무리 되라고
삼신판에 물 떠놓고 빌고, 말 배울 적부터 정전법(井田法)을 조술(祖述)하드니
이제 가야할 길 미더운 깃발 아래 발을 맞추려거니
어이 역사가 역류하고 모든 습속이 부패하는 지점에서
지주의 맏아들로 죄스럽게 늙어야 옳다 하시는고
아아 해방된 다음날 사람마다 잊은 것을 찾아 가슴에 품거니
무엇이 가로막아 내겐 나라를 찾던 날 어버이를 잃게 하느냐
형틀과 종문서 지니고, 양반을 팔아 송아지를 사던 버릇
소작료 다툼에 마음마다 곡성이 늘어가던
낡고 불순한 생활 헌신짝처럼 벗어버리고
저기 붉은 기폭 나부끼는 곳, 아들 어버지 손길 맞잡고
이 아침에 새로야 떠나지는 못하려는가......
아아 빛도 어둠이련 듯 혼자 넘는 고개
스물일곱 해 자란 터에 내 눈물도 남기지 않으리
벗아! 물 끓듯 이는 민중의 함성을 전하라
내 잠깐 악몽을 물리치고 한걸음에 달려가마
(『문학』, 1946.11)
[어휘풀이]
-조선 : 조상
-삼신판 : 삼신에게 빌기 위해 설치해 놓은 판. 삼신은 아기를 정지하고 산모와 산아(産兒)를
돌보는 신을 말한다. 産神.
-정전법 : 고대 중국의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에서 실시한 토지제도.
-조술 : 선인(先人)이 말한 바를 근본으로 하여 서술하고 밝힘.
[작품해설]
김상훈은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18세기까지 봉건적 서당 교육을 받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근대적 교육을 받았다. 연희전문을 수료할 무렵 징용에 끌려가 원산 철공장에서 1년 반 동안 선반공으로 일하다가 돌아온 후 항일 투쟁에 가담하기도 한다. 해방 직후에는 잡지 『민중조선』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해방기의 짧은 시기에 개인 시집 『대열(隊列)』과 공동시집 『전위시인집』, 그리고 서사시 『가족』을 발간하는 등 왕성한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한다. 그는 해방기의 시인들 중에서 시에서의 리얼리즘 창조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 서사시 『가족』에서는, 시인 주위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가식 없이 시적 제재로 취급한다. 「아버지의 창 앞에서」는 이러한 김상훈의 면모가 본격적으로 드러하는 초기적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의 시는 공통적으로 대상에 가까이 가거나 몰입하여 그것을 주관화시키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시적 자아 자신마저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 시도 이러한 공통적 특징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 시의 화자는 공산주의자로서 ‘등짐지기 삼십 리 길 기어 넘어 / 가쁜 숨결로’ 아버지를 찾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창 앞에’는 ‘공산주의자는 들지 말라’는 ‘무서운 글자’가 있어 그는 차마 문고리를 잡아당기지를 못한다. 그리하여 시적 화자는 물끄러민 상념에 잠긴다. 기나긴 식민지의 질곡을 딛고 ‘이제 새로운 하는 아래 알어서고파’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데, ‘말 배울 적부터 정전법을 조술하’던 그의 아버지는 그의 공산주의적 활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지주의 맏아들로 되스럽게’ 사는 삶을 거부하고, ‘가야할 길 미더운 깃발 아래 발을 맞추’기 위하여 ‘붉은 기폭 나부끼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선택은 곧 아버지와 절연(絶緣)하는 길임을 자각한 시적 화자는 ‘아아 해방된 다음날 사람마다 잊은 것을 찾아 가슴에 품거니 / 무엇이 가로막아 내겐 나라를 찾는 날 어버이를 잃게 하느냐’라고 마음의 고통에 울부짖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쓸데없는 ‘악몽’으로, 한가하게 상념에 젖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금 ‘벗아! 물 끓듯 이는 민중의 함성을 전하라 / 내 잠깐 악몽을 물리치고 한걸음에 달려가마’라고 하여 아버지가 아닌 민중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평이한 서술과 독백체의 화법으로 아버지의 창 앞에서 느끼는 회한을 차분하게 풀어가고 있다. 그러한 점이 오히려 시적 화자의 삶의 선택의 길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 주고 있는 바, 이것이 바로 시인이 의도하는 시적 리얼리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소개]
김상훈(金尙勳)
1919년 경상남도 거창 출생
중동중학 및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46년 김광현(金光現) 이병철(李秉哲) 박산운(朴山雲), 유진오(兪鎭五) 등과
『전위시인집』 간행.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6.25 때 월북
1987년 사망
시집 : 『전위(前衛)시인집』(1946), 『대열(隊列)』(1947), 『가족』(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