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5-20 베드로는 모인 형제들이 120명쯤 된 자리에서 유다의 죽음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라며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말했다.
이전 말씀에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묵었던 방에 모여 모두가 힘을 모아 같은 제목을 놓고 힘써 기도했는데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육신의 형제들도 있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120명쯤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죽은 이야기를 하는 내용이다.
15절도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 시작한다. "그 무렵에" 라는 말은 원어를 직역하면 "그 날들 중에" 라는 뜻이다. 그 때 쯤이라는 뜻이 아니고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한 참 지난 뒤라는 뜻이다. 며칠 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모두 함께 모여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런 많은 날들 중에 한 날이라는 뜻이다.
베드로가 모인 신도들 가운데서 일어서서 말했다는 것이다. 모인 신도의 수는 약 120명쯤이었다고 했다. 미쉬나에 따르면 120명이란 당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자체 공회를 결성하기 위한 최소 인원이다(Mishnah Sanhedrin 1:6). 이는 120명이 지방 산헤드린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을 갖춘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랍비들의 전통에 따르면 남자만 120명이다. 14절에 나온 여자들이 나온 것을 볼 때 이 숫자는 합법적인 구성인원을 넘었다는 상징적인 숫자이고 실제는 더 많았을 것이다.
그 때 이미 신도들은 자체 공회 결성 인원을 넘었다는 것이다. 또 120명이란 이스라엘 12지파를 뜻하는 12제자 곱하기 10명이다. 따라서 이는 상징적인 숫자가 모인 신도들의 대표들이지 모든 신도들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5:6절에 보면 오백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16절에 보면 베드로가 모든 형제들 가운데 일어나서 맨 처음 한 말은 원어를 보면 남자들 이란 말과 형제들이라는 말이다. 공식적인 결정 권한은 남자들에게 있기에 “남자들아! 형제들아!” 라고 부르며 시작한 것이다. 베드로가 이어서 한 말은 “성경 말씀이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했다" 라는 말이다. 그 말씀은 성령이 다윗을 입을 통하여 예수를 잡도록 안내자가 된 유다에 관한 말씀이다. 유다가 배신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오래전에 예언된 것이 성취된 것이라는 뜻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고 예수께서 유다를 실수로 잘못 뽑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다윗이 쓴 시편을 통해 성령께서 예언하셨다는 것이다.
17절은 유다는 12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계수가 되었고 섬김의 직분의 한 몫을 맡았다는 것이다. 직분이라는 말은 섬김이라는 뜻인데 구약의 레위 지파들이 각각 나누어 맡아 섬기던 사역을 생각하며 한 말이다. 자신이 새로운 성전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성전에서 섬기는 사역을 유다도 나누어 맡았었다는 것이다.
18-19절은 대부분 베드로가 연설한 내용이 아니고 누가가 유다에 대해 설명한 말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이 이 부분을 괄호 안에 묶어 놓았다. 괄호로 묶어 놓은 이유는 중요 사본에 없다는 뜻이 아니라 베드로의 연설이 아닌 누가의 설명이기 때문이다. 19절에서 자신들의 언어로는 “아겔다마" 라고 한다며 그 의미는 "피의 땅" 이라고 설명한 것도 그 분명한 증거가 된다. 베드로와 120여명의 성도들은 아겔다마 라는 말의 뜻을 설명해 줄 필요가 없었다. 이 말이 베드로의 말이라면 유대인인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자기들 말의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꼴이 된다. 이는 분명히 누가가 베드로의 말을 기록하면서 유다가 누구인지 누가의 청중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18절은 먼저 "이 사람은 불의한 삯으로 밭을 샀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마태복음 27:7절에서는 유다가 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갔기에 제사장들이 밭을 샀다고 했다. 그렇지만 법률상으로는 그 돈은 여전히 유다의 것이기에 유다가 샀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유다의 죽음에 대해 누가는 "그는 거꾸러져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졌습니다" 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27:5절에서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서로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다. 마태는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록한 것이고 의사였던 누가는 죽은 뒤 그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두고 기록한 것이다. 개역은 "곤두박질하여" 라고 했고 새번역은 "거꾸러져서" 라고 번역했다. 영어성경들도 대부분 headlong이라고 번역했다. 다수의 성경 해석자들은 목을 매었던 나뭇가지가 부러졌거나 줄이 끊어져서 머리부터 떨어졌다고 설명한다.
또 어떤 성경 해석자들은 "거꾸러져서" 라는 말이 "부풀어 오르다" 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이 말의 어원은 을 살펴보면 부풀어오른다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배가 터졌다" 는 말은 원어에서 내부 압력으로 인해 터졌다는 뜻을 품고 있기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배가 터진 것이 아니라 시체가 뜨거운 햇빛을 받아 속의 공기가 팽창하여 터졌을 수도 있다.
사실 유다가 어떻게 배가 터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마태와 누가가 보는 관점이 달랐다는 사실이다. 마태는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한 것이고 누가는 의사였기에 해부학적인 묘사를 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배가 터졌든간에 분명한 것은 유다의 배가 터져서 내장이 다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맞을 것이다.
기적을 믿지 않는 서구의 학자들은 예수의 기적 이야기와 가르침은 누군가가 꾸며낸 것이 있었다고 한다.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사람이 그걸 보고 자신들의 교회에 맞도록 고쳤다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가 각자 썼다고 하기에는 공통점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꾸며 썼고 그것을 보고 고쳐 썼다면 마태는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하고 누가는 떨어져 죽었다고 할 리가 없다. 거짓말을 지어낼 때는 서로 입을 맞춰서 그럴듯하게 만드는 법이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들을 서로 다른 목격자들이 각자가 자기의 말로 증언을 했기에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다.
20절은 시편 69:25절과 109:8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시편 69:25절은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라는 것인데 그들을 그로 바꾸어 썼다. 이 구절을 유다에 대한 예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 시편 105:8절을 인용해서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했다.
베드로는 유다의 배신과 죽음을 시편에 예언된 것이 성취된 것으로 보고 그 말씀을 모든 성도들과 함께 나누었다. 다윗은 그 예언의 뜻을 모르고 다른 뜻으로 이 시편을 노래했지만 성령께서는 그의 입을 통해서 유다의 배신과 죽음을 미리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유다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유다로 인해 공동체가 크게 상처를 받은 것을 말씀을 통해 치유하고 이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 이렇게 말씀을 가지고 나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