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8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요한
15,12-17)
"This is my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말씀의 초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원로들의 회의가 끝난 다음 그들은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 일행과 함께 안티오키아로 보낸다. 그들은 이방인 가운데 입교하는 이들에게 몇
가지 사항만을 지키라고 권고하였는데, 이 사실을 “성령과 우리”가 결정했다고 자신 있게 알린다.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그 편지에 담긴 내용을 읽고
기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부르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친구인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하고 신자들에게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도들이 무척 부럽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싶어 함께 모여
고민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며 투표하고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사심도 선입견도 없이 온전히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겨 드리고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 가난하고 초라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하기에는 한참 멀어
보일지라도 예루살렘 사도 회의는 교회 안에서 의사 결정이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지를 알려 줍니다. 어제에 이어
사도들의 결정 과정을 되짚어 보면, 바오로 측에서도 양보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코린토 1서에서 그는 올바른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규정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전혀 양보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고집하였거나 아니면 누군가 나서서 피를 먹어도 된다고 끝까지 맞섰더라도, 그것이 결코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발전된 신학을 전개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당시의 문화에 매여 있는 다른 이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도
다른 누구도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서 끝까지 버텼다면 혼자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일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배척하면서 나만 진실과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고 그에 따른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계속 갈라지고, 진리를 찾는 이들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바오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끝까지 관철시키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 공동체가 자기주장을 이해하고 수용한 뒤 그것을 함께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자제하면서 노력하였습니다.
전에 본당신부로
사목활동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간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사무실의 문을 부수고 안에
있었던 약간의 돈을 가져가고 또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지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장님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입니다. 문득 저는 만장회도(慢藏誨盜)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즉, ‘문단속을 잘 하지 않는 것은 도둑에게 도둑질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무장님께 “필요한 사람이 가져간 것이겠지요.”라고 말하면서, “도둑질이 죄이지만, 죄 지을 환경을 만들어 준 것 역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앞으로는 더 문단속을 잘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때의 생각이 나면서 문득 ‘이러한 문단속만 잘 하면 될까?’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의
문단속은 어떠하십니까? 죄, 욕심, 판단, 시기 등등 호시탐탐 우리의 마음을 노리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지요. 무조건 그 유혹들이 나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어떤 유혹에도 의연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의 단속을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마음의 문단속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워낙 유혹이 사방 도처에 널려 있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유혹에 자유롭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정말로 필요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그런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계속
주십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유혹의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자신만만해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스스로 유혹에 자유로울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일미사 참석 하는 것 정도로만 주님과의 관계의
끈을 유지하려고 하며, 바쁠 때에는 세상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주일미사를 건너뛰는 것도 괜찮다는 안일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 정도로 과연 세상의 유혹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가르쳐주십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세상의
유혹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기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다가 오셨듯 우리 역시 사랑의 힘으로 유혹을 물리치고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문단속.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 없이는 그 문단속도 불가능함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이는 꾸준히 목표를 바라보며 한결같이 이를 좇는 사람이다. 그것이 헌신이다(세실 B. 드밀).
주인과 종
언젠가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신부님, 제가 집을 내 놓았는데 잘 팔리지가 않아요. 빨리 좀
팔릴 수 있도록 기도 좀 해주세요.”
얼마나 급하시면 이런 기도를
다 부탁할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하느님께서 이런 일까지 다 신경 쓰셔야 하니 정말로 바쁘시겠다 싶더군요. 그래도 위로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그렇게 자금이 급하게 필요해서
집까지 내놓을 정도니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더군다나 시세보다도 싸게 내놓으셨을 테니 더 마음이 안
좋으시겠어요?”
그런데 이분께서는 정색을 하시면서 “신부님, 그
집을 파는 것도 억울한데 시세보다도 어떻게 싸게 내놓아요? 저는 더 비싸게 내놓았는데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자금이 급해서 빨리 팔려고 하는 것이니 당연히 시세보다
싸게 내놓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더라고요. 부동산 시장이 그리 좋지 않았을 때였으니, 당연히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고요.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도움을 청한다는 이 분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의 희생은 절대로 없어야 하고, 반대로 이득은 극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들의 욕심과 이기심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욕심과 이기심이 하느님을 나만의 일을 하는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해주는 하느님, 결국 자기는 주인이고 하느님은 종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은 진정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매력에 빠지는
거지요.
-이기정신부-
이러지 마라 저러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 등의 부정적인 말이 떠오릅니다. 그러니 규칙이다 법이다 이런 모든 규약들이 제재를 가하니 좁아지지요. 규약들이 서로 얼킨
소쿠리 안에서 갇혀 사는 자그만 사람들이지요.
그 틀을 벗어나
등산도 하고 캠핑도 하고 야외로 국외로 여행해 봅니다. 야호! 하고 외치며 두 팔을 맘껏 펼치며 대자연을 끌어안아 봅니다. 그곳엔 사랑의 하느님
대자연의 미소가 있기에 그 매력에 빠지는 거지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2)”
-조재형신부-
오늘은 어버이
날입니다.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베풀어 주신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라는 날입니다.
자식들은
1년 중에 하루를
부모님을 위해 기억하지만 부모님은 1년
365일을 자식들을
걱정하고,
기억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내색은 하지
않으셔도 어머니께서는 아들 사제의 전화를 무척이나 좋아하십니다.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한 달에 한번 전화
드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 나이도 이제
50이
넘었는데,
어머니는 늘
말씀하십니다.
신자들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하시고,
술을 적당히
마시라고 하시고,
저녁이면 발을 씻고
자라고 하십니다.
어머니의 눈에는
언제나 자식인 것 같습니다.
모든 어머니가
자식들에게는 사랑을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1991년
8월
23일,
저는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제가
5대째 천주교를 믿는
교우 집안이어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375번지,
고향의 교우 촌으로
첫 미사를 갔었습니다.
미사를 드리고
서울로 왔는데 저는 그만 ‘유행성
출혈열’이라는 손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40도가 넘는
고열이어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였습니다.
당시에 김 수환
추기경님께서도 기도해 주셨고,
동창들도 병문안을
와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이
치료를 해 주어서 저는 병이 호전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분들 중에서 가장 저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해 주신 분은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입원한 날부터 난 10분도 제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제 몸을 주물러
주시고,
열이 나면 수건으로
식혀 주셨습니다.
당시에 저처럼
유행성 출혈열로 입원한 분들이 5명
있었는데,
제가 가장 건강한
몸으로 퇴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퇴원을 하면서
결심하였습니다.
어머니께 매일
전화를 드리고,
한 달에 한번은
어머니가 계신 집도 방문하고,
용돈도 드리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건강해진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제가 잘
나서 그리 된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집에도 명절이
되어서야 겨우 가게 되었고,
전화도 어쩌다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아버님께는
효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님께
조금이라도 효도를 하도록 노력하려합니다.
어머니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게 주어진 일을 조금이나마 더 충실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어쩌면 세상
모든 어머니들께서 자식들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낳아 주신
어머니의 사랑이 이토록 크다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의 외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여라
-반영억신부-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증거 되어야 하고, 기회는 많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사랑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상대를
속박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붙잡고 집착하며 기대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후회합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데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모욕과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선언하시며 당신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시고 벗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사실 목숨을 내 놓는다는
것은 모두를 바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미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마지막 남은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두를 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할 기회는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지금 놓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또 다른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아무런 구속이나 강요가 없이
자유를 주는 사랑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날로
기뻐하고 자유롭도다. 사랑은 짐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기에…”(성녀 젤뚜르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데 있습니다. ” ... 사랑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잘 꾸며놓은 연극, 그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번 해 본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피에르신부). 자유를 주는 사랑, 고통을 감당하는 사랑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령과
우리 >
-전삼용신부-
1990년대
후반에 TV
드라마를
각색한 ‘세인트’(The
Saint)라는
영화가 크게 히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미남 배우가 등장해 산업스파이이자 정보 도둑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특전대원,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기자,
신비로운
시인,
여자처럼
나긋나긋한 사무원 등 여러 인물로 바뀌는 ‘변장의
귀재’로
나왔습니다.
그는
산업스파이를 위해 끊임없이 변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항상 성인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그의
변장술은 너무나 정교하고 완벽해 그를 쫓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친한 사람들까지도 꼼짝없이 속고 말았습니다.
어떤
장면에선가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람의 옆 자리에 앉아 그 추적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까지 던집니다.
그래도
추적자는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개신교에서는
물론 마르틴 루터가 개혁의 선봉장으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성경을 읽음으로써 그 깨달음에 견딜 수 없어 바티칸과 맞서 참 그리스도교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루터가 제시한 95개
반박문에 대답할 할 수 없었던 무지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한
사람이 전 가톨릭교회와 맞서 승리한 사람처럼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이들은 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이들의 실수는 단 한 사람의 생각이 온 교회의 생각을 앞설 수 있다고 믿는 오류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나주에서는 어떤 사제들이 미사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추종하는 이들은 교회의 생각이 어리석고 몇 명의 성인처럼 보이는 이들이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카리스마가 성령의 교회를 넘어설 수 없음은 성경 자체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초대 교회 때 이미 교회 내부에 분열을 조장하는 적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교회
내에서 조심해야 하는 적은 ‘순종’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즉,
“지시를
받지도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전한 것입니다.
교회는
항상 ‘성령과
우리’의
결합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명령하시어 교회가 움직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시는 성령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스를 파견합니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이들을 따라야 안전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교황대사로서 파견되어 오신 분이 계십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파견되지 않은 이들은 분열을 시키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성인처럼 보일지라도 교회의 지시가 없이 행동하는 이들을 추종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생각이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듯이 교회의 결정도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대로 이루어지라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교회를 믿는 종교입니다.
어떤
신앙고백에도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할지언정 성경말씀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공식적으로 가르치고 공식적으로 파견합니다.
가르침에
오류가 없는 것처럼 그 파견에도 오류가 없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라고
반복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불순종할 때 ‘성령’께
불순종하고 있음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리
사랑
-서로
사랑하여라-
-이수철신부-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는 쉬워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마치
사랑도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아래로의
사랑이 자연스럽지 위로의 사랑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자식사랑과 자식의 부모사랑을 보면 실감하는 사실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내리사랑'으로 했습니다.
다음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도 내리사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15,9-11).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12).
아버지의
사랑을 그대로 보고 배워 그 내리사랑을 그대로 살았던 예수님처럼,
제자들
역시 스승 예수님의 내리사랑을 보고 배워 형제들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
사랑도 보고 배움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뿌리는 철저히 아버지의 내리사랑에 있음을 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으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또 볼 수 있는 성인들로부터.
부모로부터,
스승으로부터, 선배들로부터 부단히 보고 배워 실천해야 하는 내리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내리사랑을 보고 배우지 못해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또
마음의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내리사랑을 받고, 보고, 배우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래야
순조로운 형제사랑이요 위로의 치사랑도 가능합니다.
그러니
평소 주님의 내리사랑을 배우는 평생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여
우리 삶은 그대로 사랑의 학교가 됩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내리사랑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내리사랑에 충실할 때 우리 제자들은 주님의 친구가 됩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친구들인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음으로 우정을 보여주셨듯이
순교자들
역시 친구인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 놓음으로 우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수도자들 역시 항구한 순교적 삶으로 친구인 예수님과의 우정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 역시 예수님의 친구였음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원로들이 인정합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인정과 더불어 개종한 신자들의 불필요한 짐을 최대한 덜어준 사도들의 현명한 결정에서
그들이
주님의 내리사랑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다음 대목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개종한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사목서간이겠는지요.
사도들
역시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이렇게 사랑의 분별로 개종한 신자들의 삶의 짐을 덜어 줌으로
'삶은
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주님의
내리사랑에 충실하여 그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할 때
말그대로
형제적 깨끗한 사랑이요 비로소 주님의 친구들이 됨을 깨닫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더 이상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
먼저 우리를 친구로 택하셨습니다.
친구인
예수님과의 우정과 함께 가는 우리의 형제사랑의 열매들입니다.
예수님과
우정의 깊이는 형제사랑의 열매를 통해 환히 들어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과의 우정이 날로 깊어간다는 것이며 형제 사랑의 성장과 성숙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이것
빼놓고는 모두가 헛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우정을 깊게 하시어,
형제
사랑에 충실한 당신의 자랑스런 친구로서 살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아멘.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2) -오상선신부-
어버이
날입니다. 모든 어머니
아버지께 축하드리며 감사인사
드립니다.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큰 선물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 어떤 어머니
아버지도 가장 큰 축복과
선물은 자식들이 서로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부모님께
용돈을 얼마나 드리지? 선물은 뭘 해
드리지? 고민하기보다는 형제들끼리 더
우애있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은 가장 기뻐하실
겁니다.
예수님도
오늘 우리에게 그런
당부를 하시네요. 제발 서로
사랑하라고. 이건 나의 명령이고
계명이라고.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나 권고가
아니라 무조건 그렇게
해야한다. 다른 건 못해도
되지만 이것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늘은 무조건 서로
사랑합시다. 부부간에 아무리
꼴보기 싫어도 오늘만큼은 서로
사랑합시다. 형제들 간에
미워하고있더라도 오늘만큼은 서로
사랑합시다.
그래야 어버이 날을 제대로
지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 부모님이
기뻐하고 예수님이 기뻐하실
테니까요. 꼭 그렇게
하실거죠?
뽑힌 이의 내맡김
-기경호신부-
우리는 영성생활을
나름대로 열심히 하면서도 때로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주제 파악을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때가 있다. 삶의 주도권이 주님께 있음에도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양 착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고 말씀하신다. 무죄하게
박해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에, 아버지의 사랑에 생명을 맡겨드렸다. 그분은 하느님께 자기 영혼을 맡겨드리고, 하느님께로 옮아가
하느님의 소유가 되셨다. 우리의 신앙 행위도 그 실천도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며 그분의 손안에 달려
있다.
예수님께 뽑힌
이로서 살아야 할 맡기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겸손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삶이다. 자기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을 존중하고 그에게서 배우며 아끼는 삶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기에 다른 이들이 나와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이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느님의 선을 기뻐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맡기며 사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와 결핍과 죄를 인정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하느님이 주시는 대로 받아들이며 산다.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이웃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 선택받은 이의 참된 삶이다. 그래서 선택받은 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 감사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주님께 희망을 두기에 미래를 희망으로 바라보되 불안해하지 않으며 늘 평화롭고 여유를 지닌다. 이들은 또한 인내로이 기다릴 줄
알며 끝까지 믿어준다.
주님께 뽑혀 그분께
맡기는 사람은 세상 것을 사랑하지 않고, 모든 이를, 만사, 만물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받아들임으로써 사랑한다. 이렇게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사랑함으로써 그의 삶이 하늘나라처럼 되고 하느님처럼 되어간다. 맡기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성을 믿기에 모든 행위에 항구하며 변덕스럽지 않다.
그는 ‘하느님의 완전함’을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뜻에 협력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하느님의 기뻐하심에
참여한다.
맡기는 삶이란
하느님 뜻에 기꺼이 복종하기에 하느님의 뜻이 자신과 피조물, 이웃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열어드리는 삶이다. 선택된 사람은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을 발견한다. 그는 아버지의 뜻 안에 삶과 죽음의 모든 희망이 있음을 알기에 자신을 비우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채운다.
선택받은 이는 예수님께 모두를 내맡겼기에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다. 우리 인생은 시작도 끝도 하느님의 손안에 달려있다. 성 프란치스코도
말씀하신다. “모든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봉헌했고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비인준칙 16,10)
나는 참으로
신앙행위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내가 한다’라든가, ‘내가 선택한 것’이라든가 하는 내 중심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의식에 젖어있지는
않은가?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내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소명임을
깊이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모든 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계시며 중심이 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우리 모두 나 자신도, 나의 가정도, 내가 하는
어떤 일도, 나의 신앙이나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문제 그 어느 것도 내가 주인인양 행세하지 말고 그분의 손길에 맡겨드리도록
하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이영근수사-
주님!
당신께 받은 그
사랑을
서로에게
건네게
하소서.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위하여
내어주고
진심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사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한상우신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모든
것을 내놓기에 모든
것을 나눌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명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랑의
정체성과 일치합니다.
서로 사랑할
때 생명의 공동체와
흔들리는
개인은 저마다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사랑이란 서로를
향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하기에 그리스도께 이를
수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놓아주는 사랑입니다.
놓아주기에 자유롭고 놓아주기에 넘쳐납니다.
같이 살 수 있는
길은 서로 사랑하는
목숨의
길입니다.
목숨을 높히는
것은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처럼 혼신을
다해 사랑해야
할 우리의
시간입니다.
서로 사랑할
때 죽음을
넘어선 부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또한 서로
사랑하는 구원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기도의
열매이며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주님의 가장
큰 명령은 바로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을
시작하는 성모성월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묶여있는 생명을 풀리게 하는
건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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