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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성[火旺山城] 700m 경남 창녕
소재지 : 비슬화왕지맥상
들머리 : 창녕읍 교상리 화왕산 주차장 매표소, 옥천리 버스종점
위 치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玉泉里) 가야시대의 석성(石城).
높 이 700m
사적 제64호.1963년 지정. 면적 18만 5724m2. 조선 전기의 기록을 보면 둘레가 1,217보(步:1보는 6尺)이며, 성 내에는 샘이 9, 못이 3, 또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창녕뿐 아니라 영산(靈山) ·현풍(玄風)까지를 포용하는 성으로서 군사적으로 주요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실용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적이 순식간에 대로를 따라 북상하게 되자 이 성의 군사적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곽재우(郭再祐)의 의병 근거지였으며, 그는 이 성을 굳게 지킴으로써 왜군의 경상우도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1596년(선조 29)이나 전쟁이 끝날 무렵인 1598년에 비변사(備邊司)는 이 성의 군사적 가치를 재인식하여 산성수축의 긴급함을 건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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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홍의장군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한 ... 창녕 화왕산성
글쎄. 새벽이면 내가 가는 그곳을 태풍 루사가 통과할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다. 어디 한 두번 떠났는가. 비가 내리는 것은 그래도 약과고 폭설이 내려 빙판길인데도 떠나지 않았던가. 마음을 다독여도 창밖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내 잠은 깊지 못하다. 1959년 이 나라를 스치고 지나갔던 사라호 태풍보다 더 위력이 셀 것이라는 태풍 루사 때문에 온 나라가 떨고 있다. 강원도 강릉에선 900mm에 이르는 기록적인 비가 내렸고, 김천에는 감천과 직지천이 범람해 도시 전체가 물에 잠겼으며 경부선, 전라선, 영동선, 경전선 열차의 운행이 중지되고 YTN에선 포효하는 바다와 정박한 채 파도에 흔들리는 수천 척의 배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태풍은 지금 어디쯤 지나가고 있을까? 물음은 부질없다. 아마도 지금쯤 추풍령을 넘지 않을까? 그 태풍의 뒤를 따라 지리산 자락을 스치는 차창 앞으로는 아직도 비가 남아있는지 가는 비가 내린다. 거창군 가조를 지나며 기어이 길은 끊어지고 국도로 돌아가는 길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있는 묵와고택을 찾아간다. 밤새워 내린 비로 길은 온통 자갈밭 범벅이고 포장된 길조차 달표면처럼 울퉁불퉁하게 솟아 있다.
인조 때 윤사성이라는 사람이 처음 이 집을 지었을 때는 담장 안에 여덟 채의 기와집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솟을 대문과 사랑채 그리고 행랑채, 중문채, 안채와 사당채만 남아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206호로 지정된 묵와고가 사랑채에 들어갔을 때 집을 지키던 후손들은 공동벌초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해 낙동강을 따라 걸을 때 내가 부러웠던 것은 경상도 지역의 문중마다에선 추석 무렵 공동 벌초를 하였던 것이다. 남정네들은 산소를 찾아 벌초하러 나서고 여인네들은 공동 취사를 준비하고 있는 풍경은 전라도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고령을 지나며 길은 창녕으로 이어진다. 박석진교 아래로 쓰레기들이 섬처럼 떠가고 있고 강물은 붉은 황톳물이다. 어디서부터 저 가슴 먹먹한 황톳물은 시작 되었을까?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이라고 노래했던 한하운이나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국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이라고 노래했던 김지하 시인의 절창들이 아니라도 황톳빛 강물도 그냥 장마 때문에 범람하는 낭만의 강물은 아니다. 수많은 목숨이 오고가고 오랜 세월 정들었던 고향의 논밭들이 휩쓸려 가버리는 그 강물의 길에서 멀어지고 길은 창녕 마산 쪽으로 이어진다.
창녕에서 늦은 아침밥을 먹고 화왕산성으로 가는 길에 접어든다. 화왕산성은 아직도 구름 속에 잠겨 있고 골짜기의 시냇물은 요란스레 흐른다. 도성암 아랫부분에 차를 주차한 뒤 산행을 시작한다. 붉은 황토흙이 빗물에 드러나 흡사 태초의 신비를 보는 듯하고 그 길 위를 밤새워 내린 비가 시냇물처럼 흐른다.
매미소리 그치지 않고 시냇물 소리에 문득 한줄기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아! 고적하여라. 이 산길을 자도 제대로 깨지 않은 우리들이 일어나라 깨어나라 무언으로 소리치며 가고 있구나!
무겁게 내딛는 내 발자국 소리에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 둘식 멀어져 가고 개울 하나가 나타난다. 나는 그 개울을 건너며 내가 살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이 건너야 할 강물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지 부질없게 헤아려 보지만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소나무 그늘 밑으로 날은 자꾸 침침해져가고 이러다가 비가 내릴지도 모르겠다. 비가 내릴지도, 또는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이 내려 퍼부을 지도 모를 불확실한 길 위에 서있는 나여! 나는 정녕 한눈 팔지 않고 똑바로 걸어왔는가! 아니다. 내가 가고자 했던 그 길을 제대로 못 찾은 채 얼마나 오랫동안 헤매고 다녔던가.
하물며 내 인생에 봄바람이 불거나 늦은 저녁 무렵 내리던 실비 소리에도 놀라서 화들짝 깨어났던 그 예민함 때문에 얼마나 딴 길로 돌아가고 했던가. 그래서 얼마쯤 가다 되돌아왔던 수없이 갈래진 그 길에서 한고비 또 한고비 넘어가며 얼마나 좌절과 절망의 한숨을 쉬었던가.
생각하면 지나간 순간들이 서글퍼지고 그 서글픔으로 나는 잠시 바위에 앉아 쉰다. 소나무 가지들 사이로 멀리 유어면 일대의 낙동강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담쟁이 넝쿨 우거진 소나무 밑에 축 늘어진 소나무가 서 있다. 금새 운무가 몰아오고 창녕 일대의 낙동강이 어느새 시라진다. 우리들은 지금 깊고도 깊은 운무의 바다속에 숨어 있다. 우우 휘몰아 가는 바람소리 속에 밤새 불었던 바람 때문에 떨어진 노오란 솔잎들이 발에 밟히고 드디어 화왕산 정상에 선다.
화왕산 756.5m. 창녕의 진산이며 기상인 화앙산에서 구름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먼발치로 보일 듯 싶은 비슬산이나 재약산도 그리고 바로 아래 창녕과 낙동강도 그 어느 것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제 꽃을 피우는 억새들이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그 바람 속에 김수영 시인의 시 <구름의 파수병> 중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 산정에 서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내가 파수병이 되어 하염없이 바라보는 운무 속에서 흔들리는 풀잎들이 내게 속삭이는 소리 들린다. '항상 깨어 있으라. 세월은 금새 지나가는 강물과 같은 것이지' 그렇다. 한달에 한두 번 산을 오르고 강을 따라 걷고 몇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러다 보면 한해가 훌쩍 바람처럼 지나가 버리고 벌써 9월인가 싶으면 한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이 닥쳐올 것이다. 그 사이 보이기 시작한다. 발아래 깔린 기암괴석의 절벽들이, 화왕산성이 그리고 이 산성을 쌓았던 조선 사람들의 해맑고 지친 얼굴들이 보인다.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화왕산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녕의 진산이며 창녕의 얼굴인 화왕산(757m)에 화왕산성이 있다.언제 쌓여졌는지 그 연대가 불확실한 화왕산성을 이 고장 사람들은 비화가야 때 쌓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10년(1410) 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중요한 산성들을 수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화왕산 석성은 둘레가 1,127보이고 그 안에 샘이 아홉, 못이 셋 있으며, 또 군창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있다. '화왕산 고성은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5,983척이나 지금은 폐성이 되었다. 안에 샘이 아홉, 못이 셋 있다.' 위의 기록으로 살펴볼 때 성종 이전에 성은 버려진 채 못쓰게 되었던 것 같다.
사적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는 화왕산은 둘레가 약 2700m이고 면적은 5만6천여 평쯤 된다. 이 성은 화왕산의 험준한 바위산을 등지고 남봉과의 사이에 넓은 안부를 둘러싼 산정식 산성이다.
성벽은 안팎을 똑같이 모난 자연석과 다듬은 가공석을 써서 단면을 사다리꼴 형태로 쌓아올렸다. 동,서 두 곳에 성문을 두었으나 서문은 거의 자취가 없고 동문만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성벽의 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은 역시 동문 근처에서 남쪽 봉우리로 이어지는 성벽으로, 동문에 오르면 구불구불 뻗어가는 이 성벽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성에 아홉 개의 샘이 있었다는데 그 자취는 찾지 못하지만 이 성 안에 크지 않은 못 세 개가 남아있다. 산꼭대기 분지에 수량이 풍부한 못이 세 개씩이나 있다는 것은 성이 제 구실을 했던 그 당시로선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 창녕 조씨가 성을 얻게 된 내력이 <창녕현읍지>에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신라의 한림 벼슬을 하던 이광옥에게 예향이란 딸이 있었다. 그녀가 뱃병을 앓는데 그 어떤 약도 효험이 없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화왕산의 못이 영험하니 만약 거기서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면 효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했다. 그말대로 기도를 하자 문득 구름과 안개가 앞을 가려 예향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풀리며 못 속에서 솟아올랐다.
병은 나았고 수태까지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겨드랑이 밑에 '조(曺)' 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 뒤 어느날 밤 한 사나이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알겠는가? 옥영(玉瑛)이 그 이름이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옥영은 신룡(神龍)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광옥이 이런 사실을 임금게 알리자 임금은 예향의 아들에게 '조'씨 성을 하사했다. 용과 예향 사이의 아들 계룡(繼龍)은 나중에 자라서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창성군에 봉해졌다. 그러한 연유 탓인지 화왕산성의 동문 근처에 1897년에 세운 '창녕 조씨 득성비'가 서있다.
성종 때 폐성이 되었던 이 성이 다시 군사적 용충지로 성의 구실을 제대로 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의 정유재란 때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당시 울산, 동래, 거제 등 바닷가에서 주둔하고 있던 기토 기요마사가 왜군 5만 여명을 이끌고 안의를 거쳐 전주로 들어가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때 경상 좌도 방어사로 재직하고 있던 홍의장군 곽재우는 밀양, 영산, 현풍, 창녕 등 4개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화왕산성으로 들어가 왜군을 기다렸다. 그해 7월 가토 기요마사가 거느린 왜군이 성아래에 밀려오자 성안의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다. 이때 곽재우는 "왜장도 군사 쓰는 법을 안다면 우리를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결국 가토의 왜군은 7일간을 버티다 퇴각했고 그 때를 놓치지 않은 곽재우의 의병들이 뒤쫓아가 큰 전과를 거두었다.
붉은 옷을 입고 싸움에 임하였기 때문에 홍의장군이라는 이름을 얻은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손녀 사위였고 당시 조식의 문인들 대다수는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니 그것만 보아도 남명 조식의 실천유학이 얼마나 절절한 것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억새의 명산으로 나라 안에 이름이 높은 화왕산성에선 몇 해마다 한번씩 정월대보름날 억새를 태우는데 내년(2003년)이 바로 억새를 태우는 해란다. 화왕산에서 내려오는 환장고개는 바람도 자고 그 사이 운무도 걷혔으며 홀로 부르는 노래소리만 드높다.
9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들이 피는 소리 꽃잎이 지는 소리
가로수에 나뭇잎이 무성해도
우리들의 가을은 낙엽이 지고
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디선가 부르는 듯 당신 생각뿐
그렇다. 패티김의 '구월의 노래'가 아니어도 그리움의 계절이다. 봄의 화려함도 여름의 그 지난했던 지루함도 다 벗어던지고 푸르른 하늘 하얀 구름 그리고 서늘한 바람결에 실려오는 겨울의 그림자를 예감하면서 누군가를 가슴이 미어지게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계절이다. 그 게절의 초입 우리들은 낯선 길 위에 있고 길은 관룡산 자락의 옥천사 터로 이어진다. 창녕읍 옥천리에 위치한 옥천사 터에서 고려 말의 혁명가이자 승려였던 신돈이 여자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체가 높은 관리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신돈이 어떤 경로를 거쳐 공민왕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공민왕이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진행했던 신돈의 개혁정책은 6년만에 공민왕의 배신으로 막을 내리고 신돈은 요승, 간승으로 역사 속에 기록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돈이 태어난 옥천사 터는 결국 빈대 절터라는 이름으로 남아 폐사지로 남아있고 요즘에야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되고 있으니 역사는 진정 누구의 것인가.
여정은 낙동강의 박진대교로 이어진다. 창녕군 남지읍에서 의령군 낙서면으로 이어지는 박진대교에서 차에서 내린 나는 어지러웠다. 내가 흘러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는가., 다리가 흔들리는가 영문도 모르는 채 헤매다가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자 그 이유는 강의 흐름 탓이었다. 하늘의 구름보다 나는 새보다 빨리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는 저 강이여. 이번 태풍으로 안동, 임하댐이 수문을 열었던 그 낙동강 물이 저렇게 흘러오고 있구나.
새파란 호박도 노오란 호박도 그뿐이랴. 폐타이어에 새카만 돼지까지 쓰레기더미 속에 떠내려가는 박진대교에서 나는 술에 취한 듯 비행기에 탄 듯 어지럽고 내 몸도 어지러웠다.
나는 안다. 강기슭에 기데어 산다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강변에 서서 그 사실을 더더욱 절실하게 깨닫는다. 강은 낭만이 아니다. 강은 조용하게 흐르는 듯 숨죽인 듯 하다가 어느날 스스로를 저렇게 들어내는 것이다. "참 말이 아니다, 참 말이 아니다" 하고 되뇌는 수재민들 앞으로 강폭 가득히 흐르는 낙동강은 하나의 전율이었다.
낙서면 아근리 낙동강의 제방에서 사람들은 제방 둑을 보수하고 있었고 나는 늙수그레한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얼마나 힘이 드십니까?" 그러나 대답은 간단했다. "괜찮아요. 몇 년에 한 번씩 이런데요 뭐" 체념인지 관조인지 모르는 그 말끝에서 나는 천삼백리 낙동강이 왜 낙동강인가, 왜 흐르고 흘러서 자연이 되고 사람이 되고 그리고 다시 영원으로 흐르고 있는가를 나는 강물 위에서 보았다. 9월 초하루였다.
*교통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창녕까지 09:45에서 17:20까지 5회 있고 요금은 18,900원이다. 대구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06:30~20:00까지 26회 있고 요금은 2,900원이다.
*잘 데와 먹을 데
화왕산 들머리인 창녕읍에 여관과 음식점이 많이 있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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