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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포도나무요(4)
나는 포도나무 가지
김홍도 목사
오늘 아침에는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포도나무 비유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은혜받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농부시며 우리 믿는 성도들을 가리켜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아무 재미도 없고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나 생각하였고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이제는 이 포도나무 비유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어 강단에 설 때마다 제일 많이 기억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셨고 우리를 거기에 붙은 가지라 하셨는데 왜? 우리를 포도나무 가지라 하셨는가를 깨달으면 큰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1. 가지가 알아야 할 일
<1. 가지는 자기 스스로는 열매를 조금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음을 철저히 알아야만 합니다. 본문 말씀가운데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말라서 아궁이에 던져지는 땔감 밖에는 아무 쓸데가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을 떠나서는 무능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을 떠난 고기는 혹시 살지 몰라도 주님을 떠난 영혼은 승리도 없고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2. 무가치함을 알아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서 열매를 맺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나무에서 떨어지면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책상이나 의자는 물론이고 흔한 지팡이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을 떠날 때 아무 가치없는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는 사람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귀중한 존재로 쓰임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보배를 담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질그릇은 깨지면 다시 사용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양은 그릇은 찌그러지면 펴서 쓸 수 있고 구멍이 나면 때워서 쓸 수 있으나 질그릇은 전혀 쓸 데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질그릇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다음에 가는 위대한 대사도 바울도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할 때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이렇게 누누히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아직도 주님의 필요성을 확실히 모르고 자신이 부족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고 예수님께 연결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내 지혜 내 재능만 의지하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소용되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의지하며 붙어 있을 때 존재의 가치가 인정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볼품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무가지들 중에 포도나무 가지처럼 멋이 없고 볼품없는 나무도 없습니다. 구불구불하고 질겨 소나무나 참나무 가지만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 줄기에 온전히 매달려 있을 때에 생명력이 있듯이 우리 성도들도 언제 강하고 능력있고 존귀한 사람이 되느냐 하면 자기의 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게 될 때 주님께로부터 능력과 힘이 오게 되고 열매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기의 약함과 누추함과 헛점과 부족함을 잘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삼층천까지도 올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수건만 얻어다 병자에 얹으면 낫고 하는 큰 능력의 사람이었으나 그에게는 이상한 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병을 위해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풍족하다. 내 권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려 합니다. 따라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해지며 모욕을 당하며 궁핍과 박해와 곤궁을 당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내가 강한 때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그저 잘난 것 훌륭한 것을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내가 약함을 느낄 때 부족함을 느낄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는구나. 나는 이제부터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 내가 약함을 깨닫고 자랑할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욱 강하고 온전하게 나타난다' 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포도나무 가지와 같이 약하고 누추하고 아무 쓸 데 없고 볼품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히 엎드려 주님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입히우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게 되어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도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처음에 궁중에서 많은 학문을 배우고 무술을 익히고 힘이 세며 애국심이 불탈 때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이름없는 목자로서 40여년 동안 생활하는 동안 자존심도 힘도 미모도 다 깨어져 버린 후, 자신의 무능함을 올바로 깨달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대답하기를 "제가무엇이관대 애굽의 바로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올 수 있습니까? 저는 부족합니다. 입이 둔하고 혀가 뻣뻣합니다." 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니님 앞에서 우리 중심이 바로 서게 될 때야 비로서 지혜가 필요하면 지혜를 주시고 물질이 필요하면 물질을 주시고 재능이 필요하면 재능을 주시는데 아직도 내가 잘난 체 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에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 가지다. 이것을 철저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가지가 해야 할 일 포도나무 가지가 해야 할 일이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 원줄기에 전적으로 붙어 있는 일입니다>
가지는 원줄기에서 1mm만 떨어져 있어도 안 됩니다. 가끔 떨어졌다 붙었다 해도 안 됩니다. 가지는 나무줄기에 붙어 있기만 하면 필요한 영양분을 얻어 성장할 수 있고 열매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도 전적으로 주님께 의지하며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굳게 의지하기만 하면 신앙 생활은 모두 정상으로 되고 승리하며 열매를 맺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일할 때나 설교할 때나 심방할 때나 그 모든 책임과 능력이 주님께 있음을 깨닫고 전적으로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을 보내셔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가끔씩 다급할 때만 의지해선 안 됩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끊임없이 나무줄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주님의 일을 능력있게 하고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어떤 분들께서 가끔 제게 물어 오십니다. 금란교회가 4년만에 육, 칠십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이천오백이 넘는 교회로 부흥된 비결을 묻습니다. 그러나 비결이 뭐라고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가 주렁 주렁 열리는 것처럼 주님만 의지했을 뿐이지 내 재주 내 비결은 없었던 것입니다. 가볍고 얇은 종이라 할지라도 철판이나 나무판자에 붙여 놓으면 그 철판이나 나무판자와 함께 찢어지지도 구겨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전적으로 우리의 나무 되신 주님께 붙어 있는 생활이 되시길 바랍니다.
<2. 가지는 쉬는 것이 일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쉬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겠다고 애를 쓰고 힘들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쉬는 것입니다. 햇빛을 받으려고 혹은 동쪽으로 남쪽으로 뻗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는 열매를 맺겠다고 애쓰고 힘들게 일할 것이 아니라 굳게 주님만을 의지하면 됩니다. 즉 내 인간적인 노력을 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힘과 노력으로 주님의 일을 할려고 한다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피곤함에 지쳐 버리고 말 것이며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의 수고를 중지하고 믿음으로 편히 쉬어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만일 말을 한다면 "나는 보잘 것 없는 가지이지만 나무줄기에 굳게 붙어 있었기 때문에 몇해가 지난 지금 저절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오. 나는 나무줄기에 붙어서 편히 쉰 것 뿐이오" 할 것입니다. 봄이 되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봄이 오면 진액이 적당히 올라와서 싹이 나고 잎이 돋습니다. 여름이 온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더위 속에서도 나무줄기에 붙어만 있으면 적당히 수분이 올라와 생기를 돋구어 주었습니다. 가을이 되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와서 열매를 거두십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 의지하고 편히 쉬기만 하면 우리들에게 필요한 모든 일을 책임지고 해 주십니다. 우리가 수영할 때 몸을 완전히 물에 맡기면 쉽게 수영을 배울 수 있고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에 뜨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죄를 이기는 것도 열매를 맺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고 자신의 염려와 애씀과 노력을 그치고 믿음으로 편히 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려고 애쓰는 인간적인 노력을 버려야 하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외에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고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렘 33:2)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게으르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편히 쉴 때는 불안 초조가 없어지고 더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3. 교통하는 일입니다>
가지가 하는 일은 또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으면서 끊임없이 줄기와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장 7절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거한다'는 뜻은 끊임없이 교통하고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기도 생활을 의미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필요할 때만 나무에 붙고 또 떨어지곤 하면 시들고 맙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기도로 주님과 늘 교통해야만 열매를 맺고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잠재의식 속에 늘 주님을 찾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에 쉬지 말고 설교하라는 말씀은 없지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있습니다.
또 쉬지 말고 찬송하란 말씀은 없으나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주님과의 교통이 끊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와 교통이 끊어지면 진액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주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기도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믿음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고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일찍이 위대했던 모든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모두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기도의 역사인 것입니다.
셋째, 가지의 존재 목적 포도나무 가지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은
가지의 존재 목적 포도나무 가지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보기 좋아서도 아니요, 그것으로 가구를 만들기 위함도 아니요, 오직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본문 11절까지 과실이란 말이 6번 나옵니다. 과실을 맺어서 무엇을 할 깃인가.
농부되신 하나님께서 많은 결실을 맺어 큰 기쁨을 얻으실려고 포도나무를 기르시는 것입니다. 15장 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최고의 생활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많이 돌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린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사람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듯이 우리 성도들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주 서서 이야기만 해도 마음이 기쁘고 시원한 기분을 주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한 5분만 이야기 해도 기분이 우울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0장 31절 이하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유익하게 하는 길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 믿고 구원받게 하는 것임을 알아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는 구원받게 하는 유익을 주는 포도나무가 되시길 바랍니다.-아멘-
내가 참포도나무
김삼환 목사
저는 이번 주간 뉴욕에서 집회를 마치고 라스베가스에 연합집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한 4, 5년 전부터 라스베가스에 있는 교회에서 저를 초청했지마는 시간이 없다가 이번에 뉴욕집회를 이어서 하루 저녁 시간을 내어서 그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라스베가스에 무슨 교회가 있겠는가? 했는데, 한국교민들이 한 만 여명 가까이 살고 있고 교회가 열 세 곳이나 되었습니다. 라스베가스는 죄악이 관영한 도시입니다. 도박의 도시, 음란한 도시, 온갖 죄악으로 유혹하는 미혹의 도시입니다. 그런데도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그곳에도 경건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어찌나 많이 있는지요. 하나님께서 엘리야 시대 때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하는 사람 7천 명을 숨겨두었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보이는 대로 사람을 보아서는 안되고, 또 지역을 보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그런 절망적인 생각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을 제가 이번에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참 귀한 경건한 성도들과 교회를 보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번에 라스베가스 집회를 통해 저는 많은 영적인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라스베가스는 온 세계의 도박꾼들을 불러모으는 미혹의 도시입니다. 올 때는 모두 신나게 당장에 재벌이 될 것 같고, 돈을 많이 벌어서 아주 수지 맞아서 모두 큰 기쁨과 기대를 가지고 오지마는 오는 사람은 하나도 남김없이 만신창이가 되고 상처를 받고 큰 파멸과 불행을 안고 떠나는 도시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러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서 하루에도 수십만명이 전세계 여객기를 타고 라스베가스를 향하여 몰려오고 있습니다.
라스베가스는 미국이 정책적으로 아주 바람둥이들을 몰아붙인 곳입니다. 도박꾼들을 너희는 여기 가서 하라고 사막 한복판에다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주변에 도시도 없고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었어요. 얼마나 더운지요? 45도, 50도 가는 그 더운 도시에 도박장을 만들어서 미국 내에 있는 모든 도박꾼들을 너희는 여기 가서 너 마음대로 하라고 몰아붙인 곳이예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공항 안에도 도박장이 있을 정도예요. 여기도 도박이고 저기도 도박이고 오직 도박, 누구든지 도박하도록, 오직 도박에 빠지도록, 모든 정책이 도박을 사랑하고 도박을 위해서, 모두 이곳에 와서 열심으로 도박만 하도록 도와주는 도시가 바로 라스베가스입니다.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인데요. 직접 보고 들은 것인데요. 라스베가스는 세계 최고로 화려한 도시입니다. 인간이 더이상 화려하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도시가 네온과 불빛과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꾸민 도시가 라스베가스입니다. 호텔 규모도 최고입니다. 객실이 6천 개나 되고, 2천 개, 3천 개가 되고 세계의 10위안에 들어가는 호텔들이 거의 다 라스베가스에 있을 정도로 최고의 시설들을 갖춘 호텔들이, 웅장한 호텔들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그것만 아닙니다. 모든 시설 이용물이 얼마나 싼지 모릅니다. 호텔 이용료가 우리나라 삼류 호텔의 반값밖에 안됩니다. 여기와서 한 팀이 한 50불 정도 내면 하룻밤 잘 정도로 쌉니다. 음식값도 쌉니다. 모두가 쌉니다. 왜? 오직 도박에만 전심전력 하시도록. 열심으로 도박만 하도록 그 외에는 모든 일을 봉사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풀장 온천장 다 무료로 마음껏 쓰시고 오직 열심으로 도박만 하시옵소서. 쇼도 말도 못하게 수십가지 백여가지 세계 각종 쇼들이 여기도 쇼요, 저기도 쇼입니다. 그것만 아닙니다. 공기도 얼마나 좋은지요. 호텔 안에 들어가면 객실이나 도박장이나 깨끗한 산소를 무한히 공급해서 하루종일 앉아있어도 피곤하지 않도록, 이틀이고 사흘이고 피곤하지 않고 오직 도박만 하도록. 가는 사람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분들이 거기에 교인들이 직원으로 종사하는 분들이 많아요. 다 거기에 맞춘다는 거예요.
커피는 얼마나 진한지요. 미국의 아메리칸 커피가 얼마나 순합니까? 맹물 같습니다. 그런데 라스베가스 커피는 취합니다. 독합니다. 왜? 사흘이고 나흘이고 자지 말라는 거예요. 계속 도박만 하시라는 거예요. 먹으면 잠이 안옵니다. 오직 도박만 하시옵소서. 여기에는 소매치기나 강도나 절도범은 들어올 수 없어요. 깡패는 일절 못 들어옵니다. 그 안에 있는 어마어마한 거대한 조직들이 어디에 날아왔는지 들어오기만 하면 그 생명은 간곳없이 안전하게 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도박만 하시옵소서.
이곳에는 슬롯 머신이 수십만 개로 셀수 없을 정도이고, 호텔 안이 서울 운동장만합니다. 가끔가다 복싱 경기를 호텔 로비에서 하는데 15000명이 앉아 볼 정도로. 그러니까 세상에 호텔 로비가 얼마나 크면 15000명이 앉아서 경기를 보고 그러지 않습니까? 수만명이 호텔 안에서 그걸 잡아당기는데 그 당기는 기계앞에 돈넣고 잡아당기면요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다 오고요.수많은 돈쟁이들, 우리나라도 도박 좋아하는 나라가 아닙니까? 거기 가서 항상 우리가 늘 뉴스가 나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은 도박을 다른나라 사람들처럼 재미로 하는 게 아니고 몇 백만불, 몇 천만 불 잃어버리고 오는 사람들이, 재벌 2세들이 얼마나 많은 걸 우리가 늘 뉴스에서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그런데 돈이 늘 잃는 게 아닙니다. 이게 문제예요. 돈을 넣고 잡아당기면요 돈을 딸 때가 아주 많습니다. 들어가서 한 만원 넣으면요 돈이 떨어지는 거예요. 떨어질 때는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예요. 소리를 내면서 '딸딸딸딸딸딸....' '땡땡땡땡땡땡....' '펑펑펑펑펑펑....' 그러면서 도박장 전부다 '딸딸딸딸..땡땡땡땡..' 이 소리가 떨어지니까요 여러분 이게 아주 과학적으로 이걸 한대요.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가서 한번, 몇번, 누구든지 따게 되어있으니까 잃는 것은 생각 안하고 따는 그 소리를 집에 와서 자다가도 '땡땡땡땡' 일하다가도 '딸딸딸딸' '탱탱탱탱' '펑펑펑펑' 이 소리 때문에 다시 안오고는 견뎌나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아주 우리를 미혹하는 사탄의 영입니다. 사람이 모든 죄악이라고 하는 죄악의 맛이 있지 않습니까. 증권에도 한번 가서 증권에서 돈 벌었다는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망하는 것입니다. 모든 도박꾼은 자기가 한번 땄다라고 하는 언제 한 번 딴 것을 평생 돈을 잃으면서도 한 번 딴 것을 기억하는 거예요. 평생 잃는 것, 평생 나가는 것은 생각 안하는 거예요. 한번 따먹은 그것을 '딸딸딸딸' '땡땡땡땡' 이러면서 찾아간다는 거예요.
목사님 이야기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돈 잃고는 시계 다 잡히고 옷 잡히고 자동차 잡히고 카드 다 쓰고는 서울에다 또 연락해서 몸이 아프니까 1억만 보내달라고 전부 거짓말 하는 거예요. 친척들에게도요. 그래서 그 신용있던 분이 있는대로 다 가져다 부어도 들어가는 대로 또 나가니까요 나중에 갈 차비가 없어서 목사님을 찾아온대요. 그래서 목사님이 한번, 두 번은 도와줬대요. 도와줘도 안되는 것이 '목사님, 나는 누구입니다. 지금 돈이 다 떨어지고 집에갈 차비가 없습니다. 지금 배가고파 죽을지경입니다. 밥값만 조금 주세요' 그래 밥값을 예를들어 50불 주면 밥먹으러 가는 게 아니래요. 또 '딸딸딸딸' 그거 하러 간대요. 사람이 그렇다라는 거예요.
한번 죄악에 빠지면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성경에 있는대로 한번 죄에 매이면 죄의 종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수십만명이 라스베가스를 향하여 물밀듯이 찾아 찾아 가고 있습니다. 유혹입니다. 거기에 천국이 있는 줄로 압니다. 낙원인 줄로 생각합니다. 돈만 있으면 다 되고 그돈이 다 내안으로 들어오는 줄로 착각하는 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 땅위에 얼마나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사건들을 며칠동안 보면서 아,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의 포도나무가 되시고 기쁨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고 우리가 일생동안 예수 중심하여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이 시대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긴장했던 온 세계가, 수 세기를 걸쳐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사상적인 온갖 무서운 전쟁과 긴장속에 살았던 우리들은 이러한 긴장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소련이 붉은 기를 내림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군사적인, 정치적인 긴장은 없어졌지마는 이제 우리 인류는 새로운 유혹에 빠져서 흥청거리며 향락의 길에 빠져서 길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긴장했던 때에는 세계는 질서가 있었지마는 세계는 이제 너나 할것 없이 향락과 쾌락과 인간의 욕심을 좇아 만족을 얻기 위해서 라스베가스로, 아니 라스베가스가 거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도 나라 전체가 라스베가스가 될 정도로 향락의 도시 쾌락의 도시 죄악의 도시로 물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정신 차려서 포도나무를 찾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십니다. 교회는 포도나무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참 포도나무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참 포도나무가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매 없는 이 땅위에 우리로 열매 맺게 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오신 포도나무입니다. 죄로 인하여 가시나무와 엉겅퀴같이 죄악의 종노릇하던 우리 인간에게 열매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참 포도나무 입니다. 이 세상에는 참 포도나무가 없습니다. 다 비슷한 포도나무 같지마는 참 포도나무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참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리, 진정, truly, 예수님은 진정한 포도나무 이십니다. 참 길이십니다. 참 생명이십니다. 참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참 사랑이십니다. 이세상에 참이 어디있습니까? 세상에는 어떤 것도 참이 없습니다. 참 사랑이 없습니다. 참된 진리가 없습니다. 참 종교가 없습니다. 참으로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믿을 수 있는 참된 포도나무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하셨어요 '내가 참 포도나무다'
그러면 아버지는 누구냐? 하나님은 누구이시냐? '농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위해서 좋은 나무 되도록, 열매 맺도록 기르는 농부이십니다. 구약성경에 이사야서에 보면 포도원을 위하여 망대를 짓는 농부는 하나님이십니다. 아가서 제 2장 15절에 보면 가꾸고 포도나무를 지키고 거름을 주고 좋은 열매를 맺도록 부지런히 일하시는 농부는 우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포도나무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전능하사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을 이 땅위에 보내시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좋은 열매를 이 땅위에 넘치게 만들도록 그 뒤에서 농부로서의 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열매를 맺게 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그 가지된 성도는 복을 받게 되어져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요 하나님은 농부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절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여기에 두번째로 무슨말씀이 있어요? 농부가 하는 일입니다. 농부는 어느 농부나 마찬가지입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 제해버립니다. 열매맺지 않은 가지, 열매맺지 않은 곡식은 갈아 엎어버리든지 태워버리든지 잘라버리든지 버리게 되어져 있습니다. 모든 과일, 모든 식물에는 오직 열매만 대접을 받고 열매만 사랑을 받게 되어져 있습니다. 열매없는 가지는 하나님께서 지옥불에 던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열매의 종교입니다. 예수 믿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불교에 반야심경이 있는데 이것은 석가모니께서 직접 본인이 도를 닦으면서 주신 아주 귀한 말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260자 아주 짧은 글인데 ' 無 '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 20번이 나오고 ' 空 '이라고 하는 것은 7번 나온다고 합니다. 불교의 목표는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는 무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갑니다.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채우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열매의 종교입니다. 구원의 열매, 모든 삶의 열매, 가정의 열매,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풍성하게 하시고 잔을 채워주시고 넘치게 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은 열매 없는 우리를 무로 돌아가게 하지 않고 천국으로 돌아가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열매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살다보면 인생의 황혼이 되면 허무해 지지마는 기독교의 삶,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면 하루를 살아도 잘 산 것이고 일년을 살아도 돌아보면 열매가 많고 하나님 주신 열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열매의 종교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찍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날부터 나는 이제 좋은 열매를 맺으리라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
찬송가 93장에 보면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친구 되시니 그 은혜를 간구하면 풍성히 받으리 햇빛과 비를 주시니 추수할 곡식 많도다 귀한 열매 주시는 이 주 예수♬ 귀한 열매를 주님이 주셔서 우리로 열매가 가득차 내 창고가 넘치도록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어 열매를 맺었고, 열매 없는 다윗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허무하게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었고, 죄많은 여인도 예수로 말미암아 향유를 뿌려드려서 천하에 열매맺는 여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교회생활 잘하면 열매가 맺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 열매 없는 것은 제해버리지마는 열매를 맺도록 어떻게 하느냐? 깨끗하게 하신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열매맺게 하기 위하여 우리 성도들을 어떻게 하느냐? 깨끗하게 하십니다. 뭐로 깨끗하게 하느냐? 4절에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다' 3절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말씀은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느니라' 에베소서 5장 26절에는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예수님이 나의 포도나무가 되셔서 참 포도나무 가지로 살아가는 성도는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교회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십니까? 말씀을 듣는 중에 여러분의 마음속의 음욕과 정욕과 온갖 더러운 것들이 씻겨져 나갑니다. 말씀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배시간에 말씀 듣고 나가보세요. 나가는 순간에 여러분은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성전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1절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방탕하던 아들이 깨끗한 삶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교도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집어넣습니다. 말씀을 읽고 모두 깨끗하여지고 새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더러움을 잘못된 타락과 불의의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교회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깨끗한 심령과 영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4절, 5절을 한번 읽어볼까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은 나무요 참 포도나무요 하나님은 농부예요. 그 다음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예요. 우리는 뭐예요?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어요.
주님의 하는 일과 아버지 농부의 하는 일을 말씀하시고, 우리가 가지가 해야 할 일이 뭐냐.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해야할 일이 뭐냐? 두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된다,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있어야 된다, 이 두가지를 우리가 지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포도나무는 뭐냐, 포도나무는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 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몸된 성전에 와서 주의 몸에 붙어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몸이라고 말했고 우리 성도를 지체라고 말했는데 본문에는 나무로 비유하면 예수님은 나무요 우리는 가지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몸된 전에 좋은 가지가 되고 좋은 지체가 되어서 주님에게 늘 붙어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나무는 원래 가지가 붙어 있습니다마는 우리 인간은 원래로는 마귀의 가지가 되어서, 가시나무의 가지가 되어서 죄의 열매를 맺고 사탄에게 붙어있던 우리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그 가지가 끊어져서 주님의 몸된 교회와 주님에게 우리가 붙게 된 것입니다. 붙는 일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내가 주님의 나무에 달라붙는 이런 좋은 가지가 되어서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달라붙어야 합니다. 여기에 붙으라고 자꾸 말하고 있습니다. 붙지 않으면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붙으면 열매를 맺는다, 많은 열매가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붙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붙는 종교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달라붙듯이, 거지 바디매오가 달라붙듯이 우리는 주님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나의 평생 자자손손 주님의 교회에 달라붙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달라붙으면 승리합니다. 열매가 맺어집니다. 아무리 문제가 많고 시험이 많을지라도 교회생활에 주님께 달라붙는 일에만 성공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달라붙었습니다. 아무리 핍박이 많아도 달라붙었습니다. 교회는 말도 많습니다. 낙심될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달라붙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말 하나만 들어도 떨어져나갔지마는 교회에 떨어져 나간 것은 교회에만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남이야 어찌하든.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그거였습니다.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님의 용사되리, 남이야 어찌든 나만은 주님의 용사되리♬ 찬송가도 자기 팔자에 맞는 게 있어요. 열심으로 불렀죠. 남이야 어쩌든, 남이야 무슨 말을 하든 나는 그런 말 하나 안듣고 교회에 달라붙었는데 주님은 저를 오늘 이렇게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내 문제를 다 해결했습니다.
내가 가지의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가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못나고 부족해도 여기에 붙기만 하면 놀라운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나무되시는 주님이 영양분을 주어서 교회에 나오면서도 달라붙지 아니하는 가지들이 있습니다. 좀 잘난 줄 아는데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간은 능력이 없습니다. 별것 아닌 것입니다. 조금 돈벌고 조금 성공하면 포도나무를 무시하는 가지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앞에 아무것도 아닌 줄을 알고 절대자 앞에 전능하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포도나무를 귀히 여기고 교회를 귀히 여기면서 끊임없이 달라붙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시내 목사님들이 어느 찬송을 제일 좋아하는지 조사를 했습니다. 그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제일 좋아하는 찬송이 1,2,3 등이 뭐냐, 1등이 뭐겠어요? 우리 서울에 있는 목사님들이 제일 좋아하는 찬송, 주의 종들이 아무래도 영적으로 가장 깊으니까 은혜 많이 받아서, 기도 많이 해서 찬송 가운데 제일 귀한 찬송이라고 꼽은 것이 뭐냐, 첫째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 두번째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세번째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이 세가지 내용이 똑같은 점이 뭐예요? '나'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나는 하나님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자 앞에 죄인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앞에 내 죄가 커야 은혜가 되는 거예요. 아무리 큰 강도라도 감옥에 가 있는 사람들 보세요. 기자회견 웃으면서 하고요, 죄인인 걸 전혀 몰라요. 교회 생활에 왜 은혜가 안됩니까? 내가 죄가 큰 줄 모르기 때문에 은혜가 안됩니다. 죄가 적은데 뭐하러 주님을 만납니까? 주님이 이땅에 죄인을 위하여 오셨는데 죄인 아니라는데 뭐하러 은혜를 주십니까? 내 죄가 크면 클수록 은혜를 받고 크면 클수록 주님을 만나고 내 죄가 클 때마다 예배가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이렇게 신기하고 감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모르고 내 죄가 아닌 사람, 나는 주님과 관계 없는 사람은 교회 와도 감격이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님 은혜 놀라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귀하고 귀하다♬ 죄인은 예수님이 귀합니다. 죄인은 주님을 만납니다. 나는 가지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죄인된 가지이지마는 이 가지에게 은혜를 주시는 거룩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날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주님의 몸된 교회 늘 달라붙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여러분 한주일만 안 달라붙어 보세요, 영양분이 안옵니다.
한 세 주일만 교회에 안 나와 보세요, 가지가 시들시들해 집니다. 교회요, 자주 자꾸 나와보세요, 싱싱해집니다. 가지에 영양분이 날마다 날마다 주님으로부터 충만히 오는 줄로 믿습니다. 잘난 교인은 없습니다. 교인은 교회에 열심히 나와야 돼요. 우리의 할 일은 붙어있어야 됩니다. 그 안에 있어야 됩니다. 밖의 유혹을 받지 말으라는 것이죠. 라스베가스에 '땡땡땡땡' '땅땅땅땅' 유혹이 많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유혹도 받아서는 안됩니다. 예수 안에 다 있습니다. 오늘 본문 다시 한번 밑으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7절, 8절 두절 읽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가지의 할 일이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포도나무를 귀히 여기고 포도나무를 사랑하고 포도나무를 의지하면 포도나무가 우리에게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거예요. 가지의 소원, 열매맺는 축복, 가지의 은혜, 가지의 풍성함을 나무가 채워준다는 거예요. 내가 너희에게 네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 기독교는 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을 소원하면 땅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땅의 소원을 찾으면 영적인 거룩한 가지의 열매는 맺어지지 않습니다.
전에 그런 이야기 들으셨지 않습니까? 멕시코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멕시코가 왜 이리 가난하냐. 저는 참 멕시코를 몇 번 가서 세상에 멕시코가 이렇게 비참한 줄은 몰랐어요. 미국의 국경을 제일 많이 가로지르는 남쪽나라 가운데 하나가 멕시코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서쪽 주들이 거의가 다 멕시코 땅이었습니다. 철조망만 건너면 멕시코입니다. 멕시코에 제가 가서 보니까요 요만한 움막집에 애들이 나오는데요 돼지도 따라나오고요 개도 따라나오고 닭도 따라나오고, 집안에 돼지 같이 먹이는 거 있잖아요.
나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인물도 이렇게 좋고 이렇게 멋지고 좋은 땅을 가지고 왜 이렇게 가난할까, 미국은 왜 이렇게 잘살까. 그때 멕시코 대통령이 중요한 말을 했어요. 미국은 청교도들이 God을 찾아왔고 우리는 gold를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God과 gold를 영어로 보십시요. 글자 하나가 더 있는 것이 바로 gold예요. 그걸 하나 빼야 God으로 돌아가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gold를 찾아가다가 멕시코는 gold도 놓치고 God도 놓치고 다 놓쳤는데 gold를 무시하고 God을 찾았던 미국 사람들은 God도 찾고 gold도 찾고 다 찾았다는 거예요. 소원을 이루어 주신 거예요. 예수를 잘믿으면 땅의 gold도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을 찾아가면 여러분의 가는 모든 길에 부족함이 없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gold를 우선하는 이 시대가 문제인 것입니다.
지난 The Times, 영국의 The Times 11일자 보도입니다. 몇일 안됐어요. 인도 북부 아타르파라테스 지방에 무자파르 나가르 라고 하는 마을에 어느 땅 주인이 땅을 파다가 고대 왕국 인더스 계곡 하가파 문명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을 발견했는데 다이아라든지 루비라든지 얼마나 많은 보화가, 금덩이만 500kg 거기서 나오고 수많은 보화들이 나왔어요. 그런데 이 마을이 뉴스가 나온지 얼마 안되잖아요. 가장 행복하게 평화롭게 살아가던 이 마을이 만신창이가 되는 거예요. 서로 도적질하고 싸우고 서로 내거라 그러고 이 동리가 완전히 수라장이 되어 버렸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무슨 한 번 엄청난 보화를 찾으면 잘될 것 같지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참 보화는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없습니다. 그에게 기쁨이 있고 축복이 있고 열매가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디를 가나요?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나요 발걸음 무겁게 이세상 어디 쉴곳 있나요 머물 곳 있나요 예수안에는 안식이 있어요 평화가 넘쳐요 십자가 보혈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아요 예수믿으세요 예수믿으세요 예수믿으세요 예수믿으세요 주를 믿는 자 그는 행복해요 영원한 생명 얻으리 하나님나라 그의 것이라 어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는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그의 가지입니다. 항상 그 안에 살려 그러고 잘난 척 하지 말아요. 그를 떠나지 말아요. 대단한 능력이 있는 줄 알지 말아요. 그 안에 살아요. 그리고 늘 붙으려고 노력해요. 아이구 내가 좀 여기서 멀어진 것 같애...그러면 더 붙어요. 내가 요사이 너무 약해진 것 같애... 붙기만 붙을 수록 힘이 오고 능력이 오고 주님만 가까이 하면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왜 기쁨이 없느냐? 포도나무로부터 멀어졌어요. 내가 왜 평안이 없느냐? 가정에 왜 문제가 생기느냐? 나무가 멀어졌어요. 내 모든 삶에 능력이 없는 것은 나무가 무너지면 우리의 삶에 갖가지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이제 2000년 새 시대에 여러분의 자자손손 가는 앞날 위에 포도나무로 말미암아 열매를 주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
이성우 목사
‘파랑새 증후군’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1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벨기에의 극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동화극인 ‘파랑새’ 의 주인공처럼 장래의 행복만을 꿈꾸며 현재 해야 할 일에 정열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파랑새’ 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두 남매인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속에서 요술쟁이 할머니가 나타나서 자신의 병든 딸을 위해서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고, 이 두 남매는 파랑새를 찾기 위해서 여행을 떠납니다. 둘은 죽음의 나라, 추억의 나라, 미래의 나라 등을 이리저리 헤매지만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다 남매는 꿈에서 깨어나고, 크리스마스 아침에 그들의 집 문에 달린 새장에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파랑새를 찾게 됩니다. 아마도 이 극작가는 행복은 우리 가까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어떤 형태로도 우리 곁에 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서 자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직을 꿈꾸는 파랑새 증후군이 확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이로 인해 발생하는 욕구불만이나 갈등, 스트레스 등 심리적 긴장이 신체적인 증상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을 지금 여기에서가 아니라 미래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파랑새 증후군과 같은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 질병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 외의 것으로 행복을 찾으려 할 때 행복은 멀리 있게 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만족을 찾아 세상을 기웃거리면 영적인 파랑새 증후군이 오게 됩니다.
신명기 33장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가 임종 직전에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축복한 내용인데, 그 중에서 29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의미를 확대해서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로다.’ 라는 선언과 같은 말입니다. 모세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을까요?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나셔서 활동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자의 모습이십니다. 애급 바로의 손에서 기적적으로 구원하셨으며, 광야의 여러 가지 위험과 홍해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며, 가나안 원주민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시고 그들에게 그 땅을 주신 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과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맛 볼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국방력으로 국민들을 보호해야 국민의 행복이 지켜지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와 칼이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시며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 생활 중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그들을 괴롭히던 모든 족속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통해서 자녀로 삼으시고는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되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승리를 얻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2장 16-18절에서 아들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16)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 약속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항상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물리적으로는 도무지 승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어떤 싸움에서든지 지는 것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마귀와 세상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적들이 복종하게 할 것이고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며 승리하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로 인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 주셨는데, 그 비결이 신명기 6장 4-9절까지 말씀, 곧 ‘쉐마’로 잘 알려진 말씀 가운데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이렇게 살아가는 삶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자녀들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며,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4절 말씀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시며,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보호해 주시는 분이심으로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며 섬길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왜 그토록 중요하며 우리 인생을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유일한 길일까라는 의문에 대하여 성경적인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거대한 건물의 기초와 같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과연 무엇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 소망과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살아갈 것이며, 의지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엇을 기둥으로 삼아서 그것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인지가 결국은 인생살이의 행복을 좌우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우리네 인생살이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되시며, 흔들리지 않는 소망과 목표가 되실 뿐만 아니라 결코 흔들리지 않고 우리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기둥과 같은 존재이심을 성경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숱한 내용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사실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감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살아 있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급에서의 해방과 40년 광야생활,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는 과정 중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보호와 사랑, 돌보심과 공급하심의 놀라운 역사는 한 마디로 말해서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살핌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이 더 없이 행복한 것임을 깨닫도록 실감나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인생을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무얼까 라는 궁금증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분명한 해답을 들려주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이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해답임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으며, 이러한 깨달음을 그의 목회 사역과 그가 기록한 복음 서신들 가운데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표현을 정말 좀 과장해서 말하면 ‘입만 열면’ 이 말을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가 기록한 서신들을 한 번 주의 깊게 읽어 보시며, 이런 표현에 밑줄을 그어 보십시오. 수도 없이 밑줄이 그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당대 최고의 학문을 자랑하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써 세상적인 배움도 남달랐던 사람이며, 유대 사회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지위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으로써 사회적인 지위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적인 행복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누렸던 사람으로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변화된 이후에는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겨 버려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를 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신앙을 빌립보서 4장 13절에 기록된 짧은 한 말씀 가운데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는데, 그 고백은 이렇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놀라운 능력의 품 안에서 행복을 누렸던 사람들이었는데, 그 행복을 오래도록,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잃어버리게 되었음을 성경이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축복의 선물로 주셨던 가나안 땅을 이방 사람들에게 빼앗겨 버리고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가까이 포로생활을 하면서 고난을 겪게 되었는데, 그들에게 이러한 불행이 찾아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한 마디로 정리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들의 행복한 삶의 기초가 하나님께 있었던 것인데, 그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함으로써 그들의 행복한 삶의 기초가 흔들리게 되었던 것임을 분명하게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던 우리 인간의 행복이 깨어지고 고통과 슬픔, 불행과 죽음의 세력 앞에 떨 수밖에 없게 된 이유에 대해서 구약성경 창세기 3장은 그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멀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처럼 높아져 보고자 했던 교만한 마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을 버리게 했던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교만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사랑 가운데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순간 찾아온 것은 원했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끔찍한 불행이었음을 교훈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에게 들려주신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5장 1-11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코앞에 두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 제자들과의 이별을 준비하시면서 하신 말씀으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포도원 농부가 되시며,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가 되시고, 제자들은 포도나무 가지와 같은 그런 관계에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포도나무 가지인 제자들이 앞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제자들도 제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그 원리와 비결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 자신을 ‘참 포도나무’ 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것과 달리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신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본받아서 복음의 열매, 구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도록 부름을 받은 제자들이 앞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면서 그 방법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4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매를 맺기 위한 유일한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포도나무 가지는 원줄기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본문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본문 말씀에는 ‘내 안에 거하라’,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는 표현이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내 안에 거하라’는 표현은 곧 ‘머무르다’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인 영적 교제와 연합의 관계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며,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 안에 계속 머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고 완전한 의미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할’ 이유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의 분명한 근거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주인의 손에 의해서 잘려진 가지처럼 밖에 버려지게 되고 결국은 불에 던져 사르게 됨을 말씀하심으로써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생명과 같이 아주 중요한 문제임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거하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이루게 되며,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기쁨이 충만한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면, 예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거하신다는 것은 영생의 근원으로서 언제나 변치 않는다는 것이며, 또한 어떠한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마지막 절인 11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를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이룬다.’ 는 뜻으로, 타의에 의해서 기쁨이 가득해지고 목적한 바가 완성되어짐을 의미하는 뜻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으로 돌보시며 관심을 갖고 가꾸어 가시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꿈꾸며 소망하는 참으로 행복한 삶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말씀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학원선교 교육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우리의 미래인 다음 세대 사람들을 신앙으로 양육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고 이 일을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 가기 위해서 기도하며 마음과 힘을 모아가는 주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땅 위에 아무리 엄청난 행복의 조건들을 이루어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기초인 땅 밑에서 거대한 충돌이 일어나서 기초가 흔들리는 지진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버리는 놀라운 일을 목격하면서 오늘 아침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고 이 사실을 자녀들과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살아갈 것을 결단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고
김경호 목사
한 선배를 만났습니다. 지금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학생 때부터 박식하고 유능하고 훤칠한 사람이라 많은 인기를 모았던 분입니다. 저에게 요새 생각하는 것에 대해 물어왔고 내가 늘 마음의 과제로 가지고 있는 교회갱신, 기독교 신앙의 정화에 대한 나의 고민들을 대충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항상 궤변 같은 논리로 뒤통수를 치던 선배가 이날은 아주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자네를 보니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직선으로 달려가는 모습, 부럽네"라고 고분고분 이야기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고백 같은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나는 많은 철학적 이론, 사상에 심취했었지만... 사실 내 중심은 갈지자 행렬이었네, 지금 생각해보니 뿌리가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라 할까? 기독교인들은 내가 맹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언젠가는 신앙을 갖게 될 것 같네..."하는 뜻밖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더러 '직선적으로 달려간다'고 했지만 사실 살펴보면 그렇지도 못한 점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선배가 "나는 갈지자 행보를 한다면서 그 동안 자신이 많은 사상을 섭렵했지만 그런 사상의 감상자였을 뿐,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삶의 중심은 아니었다는 고백에서 허전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내 삶의 목표를 예수님 그분으로 하겠다는 고백,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하겠다는 분명한 고백과 목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크리스천은 항상 자신을 살피고... 그 분을 닮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외부에서 볼 때 이런저런 방황없이 항상 직선적으로 달리는 사람으로 보일 수 밖예요.
우리가 사업에 성공하고, 돈을 모으는 것, 출세를 하는 것, 명성을 얻는 것 때로는 이러한 목표로 달려나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사느냐는 삶의 수단의 문제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부산을 가는데 비행기를 타고 가느냐, 기차를 타고 가느냐, 버스를 타고 가느냐하는 것은 다 그 한 방법에 불과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부산으로 간다는 목표입니다. 목표가 분명치 않을 때는 가는 만큼 되돌아와야 할지도 모릅니다. 방향을 모르고 앞으로만 가면 얼마나 괴로웁겠습니까? 여러분은 삶의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의 방법을 절대적인 목표로 혼동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참나무 솔나방의 애벌레들은 번데기 고치를 지을 때면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아 이동하는데 한 놈이 앞에 놈의 꼬리에 머리를 박고 긴 줄로 이어서 나갑니다. 이것은 공중의 새에게 벌레로 보이고 습격 당하면 끝장이니 맹독의 살무사로 위장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면 괜찮은데 또 한 무리가 나타나 두줄이 서로 부딪히게 되어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참 뒤엉키다가 줄을 섰는데 그만 목걸이 같이 되어 서로 꼬리를 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움직이긴 하는데 멀리서 보면 제자리를 계속 뺑뺑 도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가긴 열심히 가는데 진도가 안 나갑니다.
얼마전 서해사건이 났을 때, 한 집사님께서 목사님, 전쟁이 난다고 하면 내가 우리 애를 군인으로 내보내야 하고 그러면 똑같이 생긴 동족을 향해 총을 쏘도록 강요될 테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이 6.25 회상주일인데 50년 지난 전쟁의 상처는 아직 우리를 괴롭히고 있고 단지 휴전상태일 뿐입니다. 요즈음 서해 교전사건이다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씨의 억류다 하는 일들로 또 다시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열심히 나가는데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애벌레들처럼 항상 한반도의 문제는 제자리걸음입니다. 80년대까지 동서 두진영의 냉전상태가 계속되어질 때는 이러한 냉전이 끝나면 세계에 평화가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89년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큰 적이 없어진 상태에서 오히려 그 후에 계속해서 더 큰 전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후세인, 카다피, 코소보 사태,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 로 이어지는 작은 적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때로는 그들에게 무차별 무기 공격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모든 전쟁들에 꼭 빠지지 않고 이들과 상대하여 싸우는 나라가 하나있습니다. 어느 나라입니까? 미국입니다. 왜 그럴까요? 미국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정의감이 강해서 입니까? 미국이 세계를 지키는 정의의 경찰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 전쟁들 뒤에는 미국의 군수산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 없이 미국은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산업구조가 그렇게 되어있고 그래서 미국은 항상 적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 미국은 어느때 보다도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지난 코소보 전쟁에서 중국대사관을 오폭한 일에 이어서 지난 5월 25일에는 미국의회에서 약 700쪽에 해당하는 중국관련보고서인 콕스보고서가 나왔는데 이것이 지금 미국을 반 중국의 열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중국이 지난 20년간 조직적이고 치밀한 방법으로 미국의 핵기술을 훔쳐갔다는 보고서입니다. 중국은 90년대부터 미국 헤게모니의 라이벌로 등장했습니다. 지금의 추세대로 미국이 연간 3%의 성장을 하고 중국이 7-8%의 성장을 한다면 2020-30년에는 중국이 미국을 대신 하여 세계최대경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중국을 악마로 만들지 말라}라는 책이 나온 것은 심상치 않습니다. 만약 미국과 중국이 신냉전시대로 들어가게 된다면 한반도가 큰일입니다. 늘 단골처럼 미국의 악마로 거론되던 북한과 긴장은 더 높아질 것이고 중국을 길들이기 위해서라도 한반도로 엄청난 불똥이 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늘 "적을 필요로 하는 미국"을 경계해야합니다. 저는 미국이 90%가 넘는 인구가 기독교인이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전쟁으로 몰아넣는 악마적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신학이 잘못되어 있고 미국교회가 제 역할을 못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신학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등한히 여기는 오순절 신앙 위에 토대해 있고 천박한 개인주의에 토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그 동안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요 3:16)라는 구절로 중심을 삼았으나 이제 교인이 천만을 넘는 시점에서는 갈라디아 2장 20절을 중심에 놓아야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2,20)
이것은 바울의 중심 신학인 "엔(in) 그리스도-그리스도 안에서"의 신학을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바울 공동체인 안디옥 교회에서 나온 말인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단지 나라는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내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근원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으로 바뀌어집니다. 내가 없어지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대로 예수님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엔 그리스도의 신학입니다. 우리가 은총,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을 위문품 같이 주시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선물 보따리를 특수배달해서 주시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은총이고 은혜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존재를 우주의 미아처럼, 영적인 고아처럼 내버려두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관계 맺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내가 방황하고, 온갖 세상의 고민을 다 짊어진 것 같이 부담스럽고, 또 무슨 짓을 해봐도 허무한 내 삶의 공허를 제거하고 뿌리도, 존재도 없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한 지체로 살게 해주셨다는 사실이 바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우리의 존재의 변화가 은혜입니다. 내 삶의 근본 전제가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그 위에 덕목을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인내, 겸손, 온유, 절제... 이런 것들을 내 위에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쌓아갈 바탕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그분을 따라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덕목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열등감을 가진 분 있습니까? 항상 자신 없어 쭈빗쭈빗 합니까? IMF 때문에 더 기죽습니까? 좋습니다. 여러분 안에 좀 모자라는 그리스도, 반쪽 짜리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여러분 자체가 변한 것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남보다 조금 우월하면 교만하고, 우쭐해집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퍼붓습니까? 이렇게 쉽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다른 사람 우습게 보고 판단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그런 분이라면 계속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자기 안에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을 모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것을 모릅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변했습니다. 마치 변화산에서 변모하셨던 예수님처럼 여러분 자신의 근거가 변해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행위나 나의 공적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총에 의해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집 뒤에 큰 미루나무가 여럿 있습니다. 전봇대의 두배나 되는 큰 나무들 인데 여름에 어느덧 덩쿨이 감고 올라가 나무를 감쌉니다. 그러면 그 큰 나무를 질식시켜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마을에서 가끔 낫이나 호미를 들고 모여 마을 주변을 벌초하는 사역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 나무 밑으로 가서 그덩쿨의 가지를 칩니다. 기껏해야 엄지손가락 정도의 넝쿨인데 그 큰 나무를 질식시킬 만큼 기세가 대단합니다. 둥지의 넝쿨을 잘라 놓고 한 이틀 뒤에 나가 보면 그 기세 등등하던 나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헤벌레해서 주저앉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버 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나의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 5-7)"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가장 큰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수님 곁을 떠나면 물고기가 물을 떠난 것 같이 되어버립니다. 주님 안에서 호흡할 때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헛된 것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잘못된 줄기에 접 붙여 있다면 그 가지와 잎이 성하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뿌리를 내리십시오. 오직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움직이게 하십시오.
신자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요 15:1-12 / 마경훈 목사
『 우리에게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
본문에서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속에 숨겨진 생명에 관련된 진리가 있습니다.
나무는 가지 몇 개가 잘려나가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지 하나 하나는 나무에서 잘려나가면 그 순간 생명을 잃게 되고 죽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없어도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 없이는 사망입니다. 주님에게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치 않을 수도 있으나(물론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주님이게는 저희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가지의 생명은 나무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무가 부실하면 가지는 제대로 진액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죽게 됩니다. 뿌리가 건강하고 나무가 싱싱하면 가지는 나무로부터 늘 신선한 진액을 공급받기 때문에 건강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같은 원리입니다. 나무의 상태에 의해서 가지의 상태가 결정되듯이 주님의 어떠하심에 따라 우리의 어떠함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 가지의 사명은 열매 맺는 것입니다. 』
가지가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를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가지의 존재 이유입니다.
가지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무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나무는 반드시 가지를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의 몸통에 열매가 열리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도 주님 자신의 열매를 맺을 때 신자인 우리들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인을 그리스의 향기요 편지라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보여주는데 신자를 통해서 보여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심판을 받습니다(2,6절).
농부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잘라냅니다. 그래야 다른 가지가 열매를 더 풍성하게 맺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잘려진 가지는 밖에 버려지게 됩니다. 버려진 가지는 마르게 되고, 사람들은 마른 가지를 주워서 뗄감으로 씁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들에게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라는 모양은 가졌는데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께로부터 잘려지게 되고 결국 지옥의 불 속에 들어갈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셋째, 농부의 기쁨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농부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가지에서 크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다면 그것은 농부의 자랑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에 비유됩니다. 성도가 열매를 맺으면 농부이신 하나님께 기쁨이며,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넷째, 열매를 통해서 가지가 무슨 나무의 가지인지 증명되듯이 신자가 주님의 제자인 것이 증명됩니다.
8절에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자요 스승을 배우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제자입니다. 제자인 우리들이 주님의 제자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열매가 증거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주의 제자인 것을 압니다. 신자가 열매 없이 주의 제자라고 말해도 사람들은 그 신자를 예수님의 제자로 봐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그 믿음을 무엇으로 보일 수 있습니까? 야고보 장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맺은 열매로 가능한 것입니다.
『 신자가 열매 맺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첫째, 말씀으로 열매를 맺습니다(2-3절).
2절에서는 농부는 가지로 하여금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하여 가지를 깨끗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농부는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도록 가지치기를 해줍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가지를 쳐주는 방법은 말씀을 통하여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엡5:26을 보면 말씀이 하는 역할을 말씀합니다. 더러운 것을 물로 씻어 내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물과 같아서 인간의 더러운 것을 씻어냅니다. 우리의 내면의 더러운 것이 말씀을 듣게 되면 씻어집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들으면 많이 들을수록 내면의 아름답게 정화됩니다.
둘째,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가 열립니다(4절).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한다고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에 붙어 있고 나무에서 진액을 공급받으면 저절로 열매가 열립니다. 가지가 열매를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저절로 열매는 맺지 못하게 됩니다.
성도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고 주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을 공급받으면 저절로 열매가 열립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저절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해보려고 힘을 씁니다. 그런데 대부분 실패하고 맙니다. 왜 열매가 없는지 모른 채 다시 노력해 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실패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주님께 붙어 있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의지만으로 열매를 맺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 하는데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기도도 어렵지 않고 말씀을 지키는 것도 무리 없이 해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도 단순한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비유는 아닐 것입니다. 냉동창고에 들어가서 땀을 흘리려고 한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일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용광로 옆에서는 노력하지 않아도 땀을 흘리게 됩니다. 땀을 흘리려고 운동을 하거나 노력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저절로 땀이 납니다. 신앙생활의 원리가 그런 것입니다. 주님 없이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면 힘쓰고 애써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 거하면 가만히 있어도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은 노력을 해도 결과는 다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효율적인 노력을 합니다. 미련한 사람은 비효율적인 노력을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 노력하여 선을 이루려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자구 주님 안으로 들어가려고 힘을 씁니다. 주님으로 채우려고 몸부림칩니다. 이런 사람은 저절로 열매 맺는 것을 보게 됩니다.
셋째, 기도로 열매를 맺습니다(7절).
기도는 여러 방면에서 유용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열매맺는 일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신자가 열매를 맺는 것은 자신의 인격이 그리스도화 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여러 방면에 적용이 됩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이 믿는 한 사람 때문에 복음에 대한 거부감을 버리고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것도 열매 맺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불신자들 속에서 선한 행실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냈다면 그것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아 여러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준다면 그것도 열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함으로 고난을 극복한다면 그것도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열매를 맺는데 기도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기도에 가장 적절하게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주의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고, 주 안에 거하는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간구 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원하는 대로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저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미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도에 대해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약속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즉시 응답이 안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혹시 우리가 잘못 구했다면 그것을 바꾸어서라도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는 미국의 목사님들의 하루 평균 기도시간이 5분 정도라고 하더군요.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심지어 목사님들도 기도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원통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경우가 원통할 때입니까? 좋은 기회를 놓쳤는데, 잠시 후에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시간은 지났고 그 방법을 쓸 수 없을 때입니다. 저는 기도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놓쳤다면 이것만큼 원통할 일도 없다고 봅니다. 그래도 기도의 능력을 알았다면 다시 기도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다행스럽습니다.
여러분! 내게 주신 기도의 능력을 사용하십시오, 내가 주의 말씀으로 깨끗하고,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사랑입니다(9-12절). 』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계명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이 임해서 우리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이 사랑에 관한 계명을 가르쳐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11절에서 답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랑의 대상은 셋입니다. 자기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입니다. 저는 사랑의 증거는 봉사와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은 힘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일한 사람은 일했다고 생색내지 않습니다. 수고하고도 그 수고를 감추려고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수고가 노동입니다.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면 11절 말씀대로 수고가 기쁨입니다.
붙어 있으라
요 15:1-16 / 조상호 목사
저는 지난 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더니든순복음교회 창립7주년감사예배와 해밀톤순복음교회 담임교역자 부임예배에 참석을 하고, 3번의 특별집회를 인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니든에 갔을 때, 묵었던 숙소와 해밀톤에서 묶었던 숙소가 똑같은 이름의 Quality Hotel 이었습니다. 아마 오세아니아총회에서 숙소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저렴하면서도 전국적인 체인망을 가지고 있는 Quality Hotel을 택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니든의 Quality Hotel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서 그런지 모든 것이 협소했습니다. 들어가는 진입로나 출입구, 체크 인하는 리셉션과 아침식사를 하는 식당, 자동차를 주차하는 주차장도 매우 협소했습니다. 이튿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대형버스 한대가 호텔정문 앞 Drive Way에 주차하는 바람에 자동차를 주차장에 주차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출입하기에도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해밀톤의 Quality Hotel은 더니든과 달랐습니다. 똑같은 Quality Hotel이었지만, 모든 것이 반대였습니다. 자동차를 주차하는 주차장과 체크인하는 리셉션과 아침식사를 하는 식당과 손님들이 드나드는 출입구, 왔다 갔다 하는 복도, 등 거의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그 숙소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처음에는 제가 머무르고 있는 방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마침 더니든에서 저와 함께 방을 사용하시고 저보다 하루 늦게 해밀톤에 합류하신 모 목사님이 숙소에 도착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이것이 호텔이야. 호텔이라고 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목사님 안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더니든 Quality에는 ‘호텔‘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고, 여기 해밀톤 Quality에 호텔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그 후 저는 그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 영적인 교훈을 얻었습니다. 더니든에 있는 Quality Hotel이 호텔급의 시설은 하지 않은 채 그럴듯하게 ‘Hotel’이라는 이름만 붙여 놓은 것처럼, 우리들이 ‘크리스챤’이라는 이름만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닌지 깊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똑같이 성경책 끼고 교회에 오고, 똑같이 앉아 예배를 드리고, 똑같이 찬양을 부릅니다.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더니든이나 해밀톤이나 똑같은 Quality라는 이름을 달고 있고, 똑같은 로고가 새겨진 간판이 손님들을 반겨주며, 직원들의 복장도 똑같고, 객실 안에 배치해 놓은 가구들도 거의 같을 정도로 더니든이나 해밀톤이나 똑같은 Quality Hotel이었던 것처럼, 언뜻 보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아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살펴보면 실제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을 보고 차이를 알 수 있을까요? 겉모양이 아닌 내면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잎사귀보다 열매를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농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농부는 무엇보다도 과실을 원합니다. 농부는 가지에 달린 잎보다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를 원합니다. 내용물을 중요시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잎사귀보다 열매가 중요합니다.“라고 설교를 했더니 어느 분이 예배 후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요즈음 그 말이 꼭 맞는 것이 아닙니다. 은행나무에 열리는 은행 알보다 은행잎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을 아십니까? 어떤 제약회사에서는 은행잎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징코민인가 하는 약을 만듭니다.” 물론 요즈음 열매보다 잎사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나무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농부는 겉으로 풍성하게 보이는 잎사귀보다 내용물인 열매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열매에 관심이 많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열매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현대는 열매 대신에 꽃을 구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시들어 버릴 꽃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보이는 잎사귀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꽃’이라는 단어가 모두 37회 가량 언급되어 있는 반면, ‘열매’라는 단어는 자그마치 200회 이상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하나님께서는 땅을 지으시면서 “땅이여, 열매를 맺는 과목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다른 것보다, 열매 맺는 것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골로새서 1장 10절에서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시면서 신앙생활에 열매를 맺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할 것은 무성한 잎사귀이나 화려한 꽃이 아니라, 열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16절을 보면 주님의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비록 내가 내 스스로 자동차를 운전하여 교회에 왔다 할지라도, 내가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에 왔다 할지라도, 자녀의 성화에 못 이겨 교회에 나왔다 할지라도, 이웃 친구의 인도로 예배당에 왔다 할지라도 그것까지도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이끄셔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온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무슨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불러 주셨을까요?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는 열매에 관심이 많으신 줄로 믿습니다.
열매란 무엇인가?
그러면 열매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옛날에 자식을 열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를 “내 몸의 열매”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나가는 것을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돈 많이 벌고 번성한 것을 보고 열매가 많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많은 종교적인 업적을 남기는 것을 열매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아”라고 책망했습니다. 주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열매’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열매란 인격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열매 맺는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주님의 성품을 닮은 모습이 삶의 현장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란 말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입니다. 언뜻 보면 굉장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홉 가지의 열매가 있으면 복수가 되어야 하는데, 단수라니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홉 가지의 열매가 각기 다르지만, 한 인격에서 나오는 아홉 가지 모습이라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정말 풍성한 사랑과 진정한 기쁨과 흔들리지 않는 화평과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끝없는 자비와 선만을 추구하는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같은 성품들이 보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열매란 사역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내가 어떠한 삶을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 또 내게 생명과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전도함으로 새로운 영혼을 구원했다면 전도의 열매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열매란 인격적인 것과 사역적인 것, 두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이 열매 맺는 사람입니다.
열매 맺는 방법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포도나무 꽃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건축에 쓰지도 못합니다. 땔감으로도 가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오직 열매를 맺기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면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인격의 열매와 사역의 열매는 어떻게 맺을 수 있습니까?
1) 주님 안에 거하라
첫째로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가지가 스스로 과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가 어떻게 해야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까?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의 원줄기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뿌리로부터 뽑아 올린 영양분과 수분을 공급받습니다. 가지는 그것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어 있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단 한번도 그렇게 그리스도인을 정의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지난 화요일 더니든순복음교회 창립 7주년 감사예배를 참석할 때, 교민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제 기억하기로는 개인 사정으로 한국에 가는 바람에 딱 한번만 빠지고 더니든교회 창립예배 때부터 지난 7년 동안 계속해서 창립감사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분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행사에 참석한 손님일 뿐입니다. 그러면 믿는 부모님을 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역시 아닙니다. 성경은 단 한번도 그렇게 정의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을 때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내가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 내가 무엇을 이루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 믿음의 초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리의 방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되는 싸움을 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우리는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시중에 이런 농담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다.” 그러면 뛰는 놈 위에 누가 있습니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나는 놈 위에 누가 있습니까? “나는 놈 위에 붙어 다니는 놈이 있다 저는 “나는 놈 위에 붙어 다니는 놈이 있다”는 이 말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3박4일 동안 저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더니든, 그리고 더니든에서 웰링톤, 윌링톤에서 해밀톤, 모든 행사를 마치고 해밀톤에서 웰링톤, 웰링톤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긴 거리를 여행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3박4일 동안 여기에서 더니든까지는 걸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제 힘만으로 걷는다든지, 헤엄을 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3박4일 동안 북섬의 해밀톤까지 다녀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3박4일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도시를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요? 나는 놈 위에 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혼자 힘으로 날을 수 없지만, 날을 수 있는 비행기를 5번이나 탔기 때문에 3박4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도시를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우리는 강한 존재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으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지면 연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5절 하반절을 보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성도는 영적 무능력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6절을 보면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무슨 말입니까? 원줄기를 떠난 가지는 불속에 던져지는 죽음을 당할 뿐입니다. 이 포도나무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 붙어서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넘치는 생명과 사랑과 모든 능력을 공급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열쇠는 “열매를 맺읍시다. 열매를 보여 줍시다”하는 구호에 있지 않고,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느냐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4장13절에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은 누구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합니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즉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우리의 가정이, 우리 교회가, 우리 민족이 승리하려면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묶여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묶는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고, 우리의 믿지 않는 아내와 남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고, 소망 없이 방황하는 청년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와 아내와 남편과 청년들이 다시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이 땅 크라이스트처치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으면 이 도시가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죽어가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묶어 주기만 하면 다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2)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열매 맺는 두 번째 비결은 깨끗한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말씀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실을 맺을 수 있는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작고 쓸모없는 가지들을 잘라버리라고 요구하십니다. 또 이사야 18장 5절을 보면 “추수하기 전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 버려서”라고 말씀하시면서 풍성한 열매를 위해, 많은 추수를 위해 자를 것을 자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한 가지 목적, 곧 ‘거룩한 생산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씨가 있는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를 위해서는 ‘잘라야 할 것을 자르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옛날 한국에 있을 때 보면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이 모이기만 하면 지겹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사람 대부분이 즐기는 고스톱입니다. 때때로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저는 예의상 고스톱을 치곤했는데, 그 때 마다 돈을 잃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돈을 따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스톱을 칠 때마다 귀가 따갑도록 친구들한테 들은 말이 있습니다. “상호야, 비풍초 똥팔삼. 이렇게 버려라.” 웃으시는 분들은 고스톱을 아는 분일 것입니다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겠습니다. 고스톱을 치다가 따먹을 것이 없으면 “비풍초 똥팔삼 순으로 버리면 산다.” 것입니다. 이 말이 100% 맞는 말은 아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버림의 중요성입니다. 이 자리에서 고스톱 강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버리면 산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잘 버리지 못하면 오히려 죽습니다. 포도농사를 짓는 농부가 포도열매를 많이 거두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서 전지(剪枝)를 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지치기를 잘해야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죽은 가지는 사정없이 잘라주고,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없는 가지라고 생각되면, 그것도 가차 없이 잘라주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병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면 건강한 가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가지를 그대로 놓아두면 나중에 다른 가지들이 열매 맺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다 도둑질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닮아 가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사역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한국에 가면 종종 보게 되는데, 식탐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밥 한 끼 먹으려고 2시간 동안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 식탐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무슨 호피 가죽인지, 배비램 가죽인지 하는 코트를 사기 위해 카드 빚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사치를 잘라 버려야 합니다. 올빼미가 되어 밤늦게까지 빈둥빈둥 놀다가 아침 늦게까지 자다가 학교에 지각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그러한 게으름을 과감히 잘라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음란물이나 폭력물이나 잡기들과 같은 경건한 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자르고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자주 드리는 예화이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소개합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남군에 비해서 전세가 불리 할 때였습니다. 링컨의 한 참모가 링컨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하나님은 우리 북군 편일까요, 남군 편일까요?” 이 질문을 받은 링컨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다네. 내 고민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가 적군 편에 계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하나님 편에 서 있나 하는 것이네.”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를 원합니다. 풍성한 축복과 열매를 맺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과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만, 축복과 기적은 순종과 행함으로 받는 줄로 믿습니다. 버릴 것을 버리므로 성결한 삶을 살아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열매를 맺으면?
그러면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때,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결과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열매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매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싫어하시는 습관과 행동을 제해 버리고 항상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한 포도나무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영국 햄프턴에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포도나무는 상당히 잘 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실을 잘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무 주인은 매우 실망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에 줄기가 부러질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포도송이가 그 나무에 열렸습니다. 전문가들이 그 이유를 조사한 결과 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템즈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포도나무 뿌리가 그곳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포도나무는 수분이 있는 곳으로 계속해서 뿌리를 내리어 그 해에 템즈강까지 뿌리를 계속 뻗치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곳으로부터 수분을 흡수하여 그 해부터 엄청나게 많은 포도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뿌리를 깊이 박고 살아가면 놀라운 능력과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3월에 들어왔습니다. 뉴질랜드에서의 3월은 4월과 5월과 함께 추수의 계절인 가을로 여겨집니다. 추수의 계절을 맞이하여 무성한 잎사귀가 아닌, 풍성한 열매로 주님께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화려한 꽃이 아닌, 열매로 주님께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