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심(從心)이 되었다. 친척 동생과 조카들이 인사차 들릴 때면 선물로 술을 챙겨서 온다. 마음을 주고받는 벗이 해외 나들이를 다녀올 때면 값진 명주를 건네준다. 이래저래 술 첨지로 알려졌나 보다.
감정이 얽히고설키면 기분전환이 숙제다. 제반 사항이 따라주지 않아 마음이 복작거리고 혼란스러울 때가 더러 있다. 공사 발주처 담당자와 입씨름 할 땐 호흡이 거칠어지고 얼굴마저 달아오른다. 공기(工期)가 늦어져 준공 일자를 맞추느라 허겁지겁할 땐 입에서 단내가 난다. 작업하던 인부가 부주의로 사고를 내는 날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가 하면, 나라장터 입찰에 낙찰되어 계약할 때면 기쁨이 고조되어 당면과제를 잠시 깜빡한다. 근심 걱정 없이 한가로울 땐 외로움과 그리움에 사무쳐 잡념이 거미줄을 친다. 그러다가 우울함에 함몰되어 허우적대곤 한다. 이런들 어찌하리, 저런들 어찌하리. 분위기 반전에는 긴급 처방이 따라야만 할 터. 기운 빠져 몸이 새들새들하거나,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띵하거나, 마음 갈피가 오락가락할 땐 곧잘 묘수를 부리곤 한다. 한여름의 빙수나 한겨울의 따뜻한 물 한 모금 이상으로 필요로 하는 게 내겐 술이다. 술 한잔이다.
절친이 전해준 술병을 개봉한다. 각얼음 담긴 컵에 우정의 진액이 주르륵 떨어진다. 주향(酒香)에 흠뻑 실린 정담을 손끝이 먼저 알아챈다. 잔이 깊은 적자색으로 발화하자 입은 벌써 봄맞이하려는 꽃눈이 된다. 닭이 물을 머금고 하늘을 향해 목을 빼 올리는 형상인 술(酒)로 목을 축이려 드니, 오늘따라 봉황(鳳凰)의 날개가 스르르 펼쳐지는 듯하다. 술맛은 머리가 먼저 느끼는가 보다.
의미심장한 술. 영롱한 술잔을 든다. 통신사의 파발(擺撥)을 알리듯 코가 먼저 깃발이 되어 펄럭인다. 대문을 열고 귀빈을 맞아 공손히 예를 올리듯 위아래 입술이 방문객을 깍듯이 대한다. 코와 입술의 찐득한 환영을 받으며 보무도 당당히 등장한 술. 입안에 스며든 에너지원은 혀끝에서 선물한 친구의 심상을 가감 없이 재생한다. 품격 높은 내방자임을 단박에 직감한 혀는 조우(遭遇)의 기쁨에 어쩔 줄 모른다. 방문자를 입속 구석구석으로 안내한다. 몽실몽실 잦아드는 갈애(渴愛)의 향, 입술부터 혀뿌리에까지 생생하게 감도는 변치 않는 관계성의 미각, 심도 높은 이심전심이다. 입속은 여운으로 가득하고 재도약의 답신으로 차오른다. 머리가 시동하면서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릴 찰나다.
이별이 아쉬워 손 흔드는 환송객을 뒤로한 술은 깔딱고개 목젖을 넘는다. 동굴 속 종유석에서 또닥또닥 물방울 떨어지듯 목줄을 두드린다. 물을 넘길 때와는 달리 심한 마찰이 일어나면서 열이 나고 화끈거린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구곡간장(九曲肝腸)을 돌고 돈다. 기꺼운 기운이 온몸으로 서서히 퍼져나간다. 어느새 몸체는 한여름 뙤약볕에 소낙비 맞은 파초잎이 된다. 혼자만의 분위기에 흡수되어 두둥실 떠오르는 양질의 망상들, 그 성취를 위한 다짐에까지 이른다. 몸 기운에 따르는 마음의 해갈(解渴). 내 몸의 한해(旱害)는 사발 물로 해결할 수 없는가 보다. 가뭄의 단비 이상으로 몸을 완충시킨 감례(甘醴), 한잔 알코올만의 작용이 아니리라.
대면한 술을 분해한다. 막연히 목을 축이는 물질의 한계를 넘어 편작(扁鵲)의 처방 약으로 삼는다. 술잔을 들면 한 가지 생각도 오만가지로 퍼져나가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생산적 알갱이로 응축된다. 그때의 추억 건더기는 진해서 꼭꼭 씹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살랑 춘풍에 겹겹의 너테가 녹아내리듯 술기운에 몸이 이완되어 간다. 한 모금 술에 반응된 몸, 두 모금 술에는 엄동설한을 녹인 격이니 새순을 내는 잎눈이 따로 없다.
술과 함께 품에 안긴 책이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의 월든 호수를 두 차례에 걸쳐 법정 스님을 탐방하게 했던 책,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월든》이다. 책갈피에 기록된 죽마고우의 메모, “법정 스님의 습작을 인도한 책이니 글쓰기에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탐독한 책《월든》의 진액을 고스란히 술잔에 띄운다. 맛과 향으로 취하는 방울 방울이 아니라, 재도약 출력의 윤활유요, 희망으로 안내하는 등촉(燈燭)이다. 풍화되지 않은 우정이 술잔을 징검다리로 하여 활력을 불어넣는다.
몸 기운이 묘하다. 파도타기처럼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에너지 고갈의 노곤함, 오랜 시간 지속하는 피로감, 오락가락하는 육신을 생명현상인 양 받아넘기려 한다. 생체리듬 삼아 맨손체조, 산책, 묵상 등으로 심신을 끌어올리려 애를 쓴다. 어떨 땐 고통스러움마저 없으면 무미건조한 삶이라며 위안하기도 한다. 반복되는 일상을 뛰어넘어 상향적 변화의 끈을 잡으려고 이성적 차원에서 애쓰지만 허사다. 그때 환호작약(歡呼雀躍)하며 맞이하는 게 술, 한 모금 술이다.
신비의 액체, 술을 대변한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법화경(法華經) 구절. 기뻐서 한잔, 슬퍼서 한잔, 심심해서 한잔이라는 명분. 첫 잔은 갈증을 풀기 위해, 둘째 잔은 영양을 위해, 셋째 잔은 유쾌하기 위해, 넷째 잔은 발광하기 위해 마신다는 로마의 속된 이야기. 그런가 하면 술은 백약의 으뜸이자 만병의 근원이라는 중국의 격언.
마음으로부터 고귀한 가치를 인정받은 술. 너는 기를 발산시키는 광약(光藥)이요 그리움을 녹여주는 묘약(妙藥)이다. 힘이 빠져 흐느적거릴 때 기운 내라면서 잔이 출렁이고, 마음이 들떠 걷잡을 수 없을 땐 차분하라고 고요를 대동한다. 평정을 뛰어넘는 쾌락의 접근이 아니라 이성을 깨우치도록 자극하는 아가타(阿伽陀)다. 은(恩)과 정(情)과 망(望)의 감정이 허한 심중을 차곡차곡 채운다. 전해준 이의 정의(情誼)에 풍덩 빠져 헤엄치는 또 하나의 희열도 있다.
한 모금 술에 몸은 박명을 삼킨 태양이 되었다. 술은 물로 만든 불이다.
(박순태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