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5월과 또 하나의 5월
5월이 가기 전에 꼭 적어 남기고 싶다.
1961년5월16일, 혁명이 일어났다.
2023년5월16일, 5.16혁명 63주년 기념일이다.
5월16일 이른 새벽 일단의 군부가 한강을 건너왔다. 젊은 군 장교들의 안광은 형형했으며, 비장한 결의에 차 있었다.
아직 잠을 깨지 않은 새벽 공기를 타고 긴장된 어조로 KBS 방송이 흘러나왔고, 「혁명공약」이 발표되었다.
박종세 아나운서의 목소리였다.
혁 명 공 약
1.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 정비 강화한다.
2.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 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패한 국민 도의와 민족 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 시킨다.
4.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 력을 경주한다.
5.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올 것이 왔다” 이 말은 윤보선 대통령 혼자의 말은 아니었다.
4.19학생들의 젊은 피가 얼룩진 그 바탕 위에서 집권한 민주당은 신⦁구파로 나뉘어 간단 없는 정쟁을 일삼아 국민의 기대를 몰각 하였다.
아직 전쟁의 여진이 슬어지지 않은 살 풍경한 도시에서 마음껏 비상하고 싶은 젊은이들은 절망의 늪을 기면서 앞날이 암울했다.
경향을 막론하고 깡패들이 발호하여 정치와 경제 분야 까지 모리의 폭력을 휘둘러 불안이 가중되었다.
날이면 날마다 일어나는 데모 등쌀에 시민은 공허하였고, 정신적인 진공 상태에 함몰되고 있었다. (심지어 국민학생들 까지 거리로 나와 “데모 하지 말자는 데모까지 일어났다.)
한창 보릿고개를 넘고 있던 그 시기에 사람들은 배가 고팠고, 특히 농촌에서 춘궁기에 아사자가 빈발하였다. 배고픈 아픔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으랴.
4.19를 전매특허처럼 앞세우는 일부 학생들의 토족은 국회의사당까지 점령하여 의정을 농단하였고, 남북 통일 회담을 한다면서 북한 학생들을 판문점으로 손짓하고, 이쪽에서도 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사회에 희망의 새싹이 트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때 군부가 발표한 혁명공약은 신선하였고, 암흑으로 밀폐된 공간에 한줄기 빛으로 비쳐, 나온 탄성이 “올 것이 왔다”였다.
처음, 한강을 건너 온 일단의 군사 행동은 쿠데타였다.
“올 것이 왔다”는 사람들의 기대 속에 쿠데타는 군사혁명으로 영글어 갔고, 마침내 국민혁명으로 승화 되어 갔다.
새마을 운동, 중화학공업, 자주국방, 자립경제, 수출입국, 압축성장, 국위신장.....
유사 이래 이어져 온 보릿고개를 면하고 빈곤과 기아로부터 해방되었다.
당연히 혁명의 성과였음을 부인할 자 있는가?. 절망의 늪에서 혁명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룰 수 있었으랴.
특히 새마을 운동은 농촌에 국한되지 않고, 도시 새마을 운동, 공장 새마을 운동, 직장 새마을 운동 등으로 확산되어 국민의 의식 개혁과 자조, 자립, 협동정신 함양에 기여하였으며, 전 국민이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국민혁명의 표상이라 함이 마땅할 것이다.
5월에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 5.15, 오후, 서울의 봄의 절정으로 서울역 앞 10만명 학생 데모의 연장선 상에서 일어난 것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었다. 진압군과 학생을 필두로 한 시민군 사이에 일어난 대립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신 군부의 통치를 반대하는 국민의 민주화 열기는 뜨거웠고, 특히 광주의 저항 정신은 단연 돋보였다. 진압 군경의 희생도 지울 수는 없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의 열기는 제5공화국의 권위적인 강압 정치 하에서도 지열처럼 이어졌고, 다소의 시간을 격하여. 6.29선언(대통령 국민 직선)을 이끌어내는 촉발제가 되었다. 드디어 이 나라 정치사에 87년 체제를 형성하여 3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광주 민중 항쟁을 5·18 민주화 운동’에 관한 특별법 제정(1995).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 - ‘5·18 민주화 운동’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1997) - 역사 교과서에 정식 명칭 으로 5.18민주화 운동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5.16혁명을 기점으로 이룩한 산업화와, 5.18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이룬 민주화는 세계 사상 거의 드문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의 동시에 이룸으로써 선진 국민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근본 지향점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은 것이다.
모든 선진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하듯이 산업화는 민주화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주의 깊게 통찰 해야 할 것이 있다. 무릇 역사 인식에 균형 감각이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캘린더와 수첩을 펼쳐보라. 5월 18일은 「5.18민주화 기념일」이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5월 16일에는 아무런 표기도 없다. 이 얼마나 균형이 결여된 현상인가.
필자가 느끼기로는, 조선조 말기의 퇴영적 사고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간에 습성화된 노예근성을 탈피하여, 자주적 개척정신을 함양하고 "하면 된다"는 신념과 자신감을 지니게 한 것은 5.16혁명에서 비롯 되었음을 확신하고 있다.
5.16혁명과 5.18민주화 운동은 양자 공히 우리 역사 진운에 참으로 소중한 모멘트였다.
5.16과 5.18은 역사상 획을 그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불균형에 균형을 잡는 시도와 노력은 필수적이다.
당연히 5.16 혁명 기념일이 있어야 하고, 국가 기념일로 정해야 한다. 역사 교과서에 엄연히 근대화의 점화, 5.16혁명이라고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5.16혁명에 참여했던 이나 그 후손이 보상금을 요구하지는 않을 듯 싶다.
좁은 나라의 동쪽과 서쪽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에 매치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매화낙지(梅花落地)의 명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한 가정의 안채는 함양에 속해 있고 사랑채는 전라도 아영에 속해 있었다. 이렇듯 동과 서는 결코 멀지 않은 것이다.
국민을 하나로 모으고, 동쪽과 서쪽이 허심탄회하게 손을 잡아야 한다.
오늘 이 시대에 「5.16」과 「5.18」의 악수는 국민 화합의 명이고 실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상호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역사 발전의 보완 관계임을 합의해야 한다.
근대화와 민주화는 역사 발전의 지향점이 같기 때문이다.
「5.16」과 「5.18」의 악수, 5월의 화두에서 진 일보 하여 21세기 중반의 화두가 되기를 바란다.
본인은 「5.16」혁명에 직접 관여한 바는 없다. 다만 새마을 운동에 선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5월에 역사 인식의 불균형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공허하여 소회를 적어보는 것이다.
그때 그 시대를 살았고, 오늘 이 시대에도 살아있는 우리 세대가 당연히 깨우쳐야 될 증언이다. (‘23.5.28)
첫댓글 내용은 이해가 되나 "한창 보릿고개를 넘고 있던 그 시기에 사람들은 배가 고팠고, 특히 농촌에서 춘궁기에 아사자가 빈발하였다. 배고픈 아픔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으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과장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시의 신문보도를 찾아보면 농촌의 춘궁기 아시자가 드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에 보도되지 않은 사례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