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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사 이야기/ 인상주의 탄생 -
#서양미술의 시작을 고고학적인 발굴에 근거하여 기원전 3만 년경 인간과 동물의 모습을 표현한 동굴 벽화로 봅니다. 이후 이집트 등
고대국가 미술, 그리스 미술, 로마미술, 기독교미술, 르네상스, 바로크미술을 거쳐 18세기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미술로 발전해 나갑니다.
그런데 이때까지의 미술,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이후에도 풍경화, 정물화 등 우리 주변의 사실들을 화폭에 담는 것은 그림 축에도
치지 못했답니다. 황제나 귀족들의 초상화가 화가들의 주 수입원이고 신화나 종교화를 최고급의 그림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90% 이상이 문맹인 당시에는 신화나 종교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품격 있는 행위 그 자체였던 것이며, 화가가
희랍어나 라틴어에 능통하지 못하면 그림의 주 소재인 성경도 호머의 일리어드 오디세이도 읽고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었지요.
19세기에 들어서 미술계는 커다란 변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소위 '그림답다'고 하는 사실주의 미술, 우리 주변의 가까운 현실이 미술과 접목하게 됩니다.
미술의 주요한 소재가 신이나 영웅의 인체묘사에서 우리주변의 자연과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로 변화된 것입니다.
화가들이 화구를 메고 야외로 나가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것은 그 이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外光畵派)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봉건사회의 붕괴, 산업혁명으로 인한 자본의 이동, 자연을 모든 것의 기본으로 중시한 계몽주의
사상 등이 원동력이 되었지만, 파리교외의 퐁텐블로 숲 근처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밀레' 등
바르비종 화가들, 리얼리즘의 대부 '쿠르베', 미술계의 획기적 변화의 단초를 제공한 '마네' 등과 함께 인상주의 화가의 중심에서
활동한 '모네'는 인류의 오랜 미술의 역사에서 새로운 획을 그은 선구자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양미술사에서는 인상파를 기준으로 그 이전을 고전회화, 그 이후를 현대회화로 구분합니다.)
이제 다른 어떤 교훈적인 주제보다도 자연의 순간적인 느낌과 빛이 사물에 닿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다음 세대의 화가들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바로 이러한 시각적인 실증성에 기반을 두고 자연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 고전 회화와 현대회화를 비교하여 감상해 보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변화된 화풍을 느껴 보세요.
# 위 그림은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명세'라는 잘 알려진 그림입니다.
로마건국시대의 이야기인데 로마의 호라티우스 형제에게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라고 아버지가 무기를 나누어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림 속의 여인들은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왜냐고요? 이들은 로마의 옆 동네 사빈나의 여인들로
로마 청년들에게 납치당했지만, 로마 청년들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데, 그들의 조국은 복수를 위해
로마로 진군하고, 이제 자기들의 오빠와 남편이 결투를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기면 오빠가 죽고, 지면 남편이 죽는…….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우선 호머의 일리어드, 오딧세이를, 트로이 전쟁을, 로마의 건국신화를 알아야합니다.
(지면관계상 상세 설명 생략, 1784년 작품 /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 위 그림은 1872년 작 모네의 <인상, 해돋이>입니다.
인상파로 불리게 된 계기가 이 그림의 제목에서 연유 되었다고 하는 데, 예술의 본질은 추구하지 않고 인상 같이 표피적인
부분만 추구한다는 비아냥으로 비평가들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불과 100여년의 차이(물론 동시대에도 고전명화가 득세하는 상황 속에서도)에 그 동안의 미술의 주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보이는 것의 인상 그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현대의 색채추상을 보는듯 한 느낌...
인상파 화가들의 실험정신은 정말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현대미술의 뿌리가 됩니다.
- 클로드 모네 이야기 -
# 이제 클로드 모네의 이야기로 들어가렵니다.
1840년 파리에서 식료품 잡화사의 아들로 태어난 모네는 5세 때 생트아드레스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 바다와 변화무쌍한
노르망디의 날씨를 직접 체험하며 자연에 대한 참신한 통찰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의 그림 속의 여인인 모델 카미유와
결혼하여 아들 장을 얻었으나 40세까지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린다.
Claude Monet 는 43세에 파리 북부 조그만 도시인 지베르니로 거처를 옮겨 1926년 사망 시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지베르니에 정착 후 모네는 곧바로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여 잔디와 정원수를 심고 화려한 색채의 꽃밭을 만들었으며 강의
지류에서 물을 끌어와 연못과 일본식 다리도 설치했다. 이 정원에 대하여 모네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원을
소재로 약 500점의 그림을 그렸다.
모네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지베르니를 가보라’는 말이 있듯이 모네의 정원은 모네의 남다른 빛과 색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화려하고 멋진 화가의 팔레트였다고 표현합니다.
- 다시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을 보실까요.
# 모네의 집은 크게 저택, 꽃밭, 연못이 있는 정원 그리고 아틀리에와 부속온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수련이 가득한 연못일 것입니다. 그의 그림 속 주제의 하나인 수련을 탄생시킨 곳이지요.
빛과 기후 조건, 자신의 흥미가 바뀜에 따라 캔버스를 바꾸어가면서 같은 주제를 되풀이 묘사하는 모네의 유명한 연작 제작
방법도 이곳에서 확립됩니다.
- 연못 사진과 그의 수련 그림들을 비교하여 보겠습니다.
# 숲으로 둘러싸인 연못, 습지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은 보는 각도, 위치에 따라 또 다른 느낌을 맛볼 수 있다.
당시에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지요. 모네는 이곳 연못에서 잠시도 같지않는 빛을 보았고
자연의 변화를 보게됩니다. 같은 장소에서 그려진 그의 수 많은 수련 작품이 전혀다른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 이유죠.
- 모네의 연인 카미유 동시외 이야기 -
# 모네의 예술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그의 아내 카미유입니다.
모네는 25살에 18세의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1847-79)라는 전문 모델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들은 곧 동거에 들어갔고 2년 후 큰 아들 '장'을 임신했으나 모네네 집에서는 결혼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1870년 프랑스와 프러시아 간의 전쟁 조짐이 보이면서 전시 동원령이 내려지고, 미혼인 모네는 동원이 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모네의 가족들은 할 수 없이 둘의 결혼을 승낙하고 이들은 부부가 되어 전시 동원에서 풀려납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모네의 그림 속의 모델로 카미유는 등장합니다.
카미유는 둘째 미셸을 출산한 후 건강이 극도로 허약해져 결국 1879년 사망합니다.
"내게 매우 소중했던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마침내 죽음이 찾아왔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놀라고 말았다.
(아내의 주검 위로)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모네는 아내의 임종 자리에서도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과 색채의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쫓았고,
‘카미유’의 죽음을 작품으로 남깁니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찰나의 빛, 그 순간을 포착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지...
- 카미유가 모델이 된 그림 을 보겠습니다
# 맨위 그림 : '파라솔을 든 여인' (1875년 작 /워싱튼 국립 미술관) - 모델은 카미유와 아들 장입니다. 사진의 역광효과
같은 빛의 처리가 뛰어나다고 평가합니다.
중간 그림 : '일본 의상을 입은 카미유 모네' (1876년 작 / 보스턴 미술관) - 19세기 후반 일본의 민속화가 유럽에 들어오기
시작, 유럽화풍에 영향을 줍니다. 모네도 일본화에 심취했고 그의 저원도 프랑스식이라기 보다는 일본식을 많이
가미한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
밑 그림 : ''임종을 맞은 카미유 모네' (1879년 작/ 파리 도르세 미술관) - 모네의 영원한 모델이었던 카미유는 임종 시까지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합니다.
- 마지막 이야기 -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마법에 사로잡힌 화가가 끌로드 모네,
평생을 수시로 변화하는 빛을 순식간에 포착하여 표현하는데 온통 관심을 쏟았던 화가가 생애후반에 정성 들여 가꾸어온
모네의 집은 1966년 모네의 아들이 미술 아카데미에 기증하였고 1980년 모네 재단이 복원하여 파리근교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연간 약 5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이 곳에서 한 위대한 예술가의 혼을 느껴 보세요.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프랑스 파리인상주의 화가 그는 어린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다. 부댕의 감화를 받아 화가를 지망하였고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카뮈 피사로와 친교를 갖기도 했다. 1862년 파리 그뢰르의 아틀리에에서 르누아르 시슬레 바질 등과 사귀었고
1865년 쿠르베와 1866년 마네를 만나기도 하였다.
1867년까지의 모네의 작품은 다른 화가들의 양식을 배우고 흡수하는 시기였으며 1860년대 말에는 하나의 작품 세계 즉 빛과
색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을 추구하여 야외에 나가 그려야 했다.
보불 전쟁 기간에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여행한 뒤 1872년 전 후 파리교외의 아르장티유로 이사하였다.
여기에서 5년을 지내는 동안 이곳이 젊은 인상파 화가들의 집회 장소가 되었다.
1874년 최초로 인상파 화가 전을 가졌다. 여기 출품된 '해돋이 인상'이 작품에 의해 이 그룹의 명칭이 생겨났다.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도 인상주의 이론을 가장 충실하게 화면에 옮긴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모네는 파리의 시가지 모습이나
[생 라자르 역]같은 산업화된 주제에 관심을 가졌으나 점차 좀 더 순수한 풍경화에 심취한다.
1883년 모네는 파리를 떠나 파리 교외의 지베르니 (Giverny)로 주거지를 옮기면서 주변의 소재에 더 관심을 기울여 포플라,
건초더미, 루앙대성당과 같이 하나의 소재를 연작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말년의 연작 중에서 모네가 가장 열중했던 소재는 지베르니 정원의 연못에 핀 [수련]이었다.
그는 정원에 일본식 다리를 설치해 놓고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수련을 그렸다. 수련연작은 수면 위에 핀 꽃과 잎,
또 물위에 반영된 자연과 광선, 물 밑의 세계가 종합된 일종의 소우주의 의미를 가진다. 모네는 점점 작품의 크기를 대형화하거나
2폭, 3폭으로 연속시켰다.
후기에 그린 수련작품들은 화면에서 수평선이 없어져 버리고 화면은 완전히 거울과 같이 평면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원근법은 모호해지고 화면은 순간적이면서도 영원한 색채로 충만한 서정적 추상에 가깝게 되어 버렸다.
그의 수련 연작은 회화가 더 이상 자연을 모방하지 않아도, 일화적이거나 문학적 내용을 암시하지 않아도 또 사상을 표현하지 않아도,
순수하게 화면의 색채 하모니와 감각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80년부터 지베르니에 있는 그의 집과 정원은 모네 기념관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공개 되고 있다.
클로드 모네의 삶의 여정
1840년 파리에서 출생
1857년 르아브르에서 처음 그림을 선보이다
1859년 파리에서 피사로를 만나다
1861년 알제리에서 군복무하다
1862년 파리 글레이르아틀리에 들어가 르느아르, 시슬레, 바질 만나다
1870년 카미유와 결혼 아들 장을 얻다
1879년 부인이 죽다
1883년 지베르니에 정착 세잔을 만나다
1892년 알리스와 재혼하다
1908년 런던을 여행하다
1911년 알리스가 사망하다
1923년 모네 거의 시력을 잃어가다. 다시 나아지다
1926년 지베르니에서 사망
인상주의 미술
1.개요
인상주의 미술이란 서양 근대 미술에서 중요한 한 획을 긋는 도회적인 미술 사조로써 19세기 후반 주로 1860-9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유파의 하나이다. 고유색을 부정하고 빛에 의해 변하는 순간적인 색채로 그림을 그려 ‘외광파’라고도 한다.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어두운 자연이
아닌 빛에 변화에 따른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자연을 표현했다. 특히 이때는 그 이전까지의 역사나 신화에 대한 소재에서 탈피
하여 도시풍경, 주변 인물들을 그렸는데 당시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대로,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여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작가들 사이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야외로 나가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이런 인상주의 미술을 추진한 화가를
칭하는 말이 바로 인상파이다.
2. 인상주의 미술의 탄생 배경
19세기에는 자유사상으로 과거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려는 경향이 많아지고, 이러한 일은 인상파 후기에 주관적인 표현 방법으로
굳어져 현대 미술과 같이 격렬하고 자유로운 표현 방법을 낳게 하였다. 한편, 이 시대에는 자연 과학이 발전하였으며 그에 따라
사진술과 광학도 나타났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개관적인 사실주의보다 태양 광선에 의하여 시시각각 변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표현
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러한 의도를 나타내려는 새로운 기법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19세기 후반을 일반적으로 인상주의라고
한다. 인상주의는 화풍의 변천 단계에 따라 인상파. 신인상파. 후기인상파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인상주의 그림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밝은 그림’이다. 밝은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변화가 그 원인이라 하겠다.
밝은 사회라는 말의 뜻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1775년 미국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즈음 진행 중이던 산업혁명 등 18세기말과
19세기 초는 인류역사상 유래가 없는 혁명의 시기였다. 이러한 혁명을 거치면서 농노와, 지주, 수공업자로 대변되던 장원제도가
무너지면서 전통적인 귀족이라는 계급이 해체되었으며, 급격한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도시가 탄생되었다. 농노들은 도시로 몰리고
도시는 인구가 밀집했으며, 그들은 시민계급이라는 새로운 중산층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인상주의 화가
모네 [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파리 출생. 소년시절 르 아브르에서 보냈으며, 18세 때 그곳에서 화가 로댕을 만나, 외광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 19세에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피사로와 사귀었다. 초기에는 쿠르베나, 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 런던으로 피신, 이때 터너, 콘스터블등의 영국 풍경화
파의 작품들에 접했다. 1872년 귀국,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살면서 센 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려, 인상파양식을 개척하였다.
1874년부터 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작품은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모네의 인상주의는 눈에 비쳐지는 '순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였던 것이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려는 그의 작화의도는 <루앵 대성당> <수련>
등에서 보듯이 동일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마네 [
파리에서 태어나 한때 선원 견습생이 되었으나 화가를 지망하고 쿠튀르(1815-1879)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러나 스승보다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고전작품을 묘사하는 한편 할스, 고야 특히 벨라스케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현대 미술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1863년의 낙선전에 마네는 <풀밭위의 식사>를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작품은 마네가 파리스의 심판 구도를 이용하여 그린 것이다. 똑바로 앞을 보며 두려워하지 않는 나체의 여인 시선은 보는 이를 화폭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린 방법 역시 색조의 조정에 의해 명암효과를 추구하는 전통방식을 버리고 면면이 강조되고 단일 색채로 크게
처리하여 평면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선보인다. 마네의 의의는 근대회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새로운 양식의 작가로서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의 주제를 채택하여 새로운 회화언어를 추구하는 것은 이제 회화의 문제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에 달려있게 되는 것이다.
드가 [
파리 출생.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앵그르의 제자 라모트에게 사사했고, 앵그르로부터도 직접 가르침을 받아, 평생토록 이고전파의 거장에 대한 경의를
품게 되었다. 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74년부터 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을 주제로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 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드가가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다른 점이라면 의도적으로 야외 광선이 아닌 실내의 인공적인 광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피사로 [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마스섬 출생.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
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몇차례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낙선하고 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때는 런던으로
피난해하여 그곳에서 모네와 함께 터너 등의 영국 풍경화를 연구하였다. 전후에는 파리 북서쪽 교외에 정주하면서 다시 질박한 전원
풍경을 연작, 74년에 시작된 인상파그룹전에 참가한 이래 매회 계속하여 출품함으로써 인상파의 최연장자가 되었다.
그의 작풍은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 수수하면서도 견실성을 보여 모네와 시슬레보다 한층 구성적인 면에 특색을 보였다.
만년에는 시력이 약화되었으나 최후까지 제작활동을 계속하여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하려는 성실성을 보였다.
인상주의자 그룹의 모든 전시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유일한 사람. 1884년 이후에 앙데팡당전시회에서 쇠라 작품에 감명
받아 신인상주의로 전향하나 신인상주의의 한계(제작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며 자신의 감각을 추구하기 어려우며 또한 운동적이거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자연의 아름다운 양상을 추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를 느끼고 1888년부터 1890년경 신인상주의 기법을 버린다.
그 후 연작을 제작하며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한다
르느와르 [
프랑스 중부 리모주 출생. 4세 때 파리로 이사하였다. 집안이 가난한 양복점이어서 13세부터 도자기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그리는
일을 하였다. 이곳에서 색채를 익힌 것이 뒤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점심시간에는 루브르미술관에서 와토나 부셰 등의 작품에
이끌려 화가가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4년 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실직하였다. 1862년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모네, 시슬레
등을 알게 되고 또 피사로, 세잔과도 사귀어, 훗날 인상파운동을 지향한 젊은 혁신화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1874년 제1회 전람회에는
<판자 관람석>을 출품하였고, 계속하여 제2회와 제3회에도 참가하여, 한동안 인상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 더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표현을 전개하였다. <물랭 드 라 갈레트>와 <샤토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인상파시대의 대표작이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 라파엘로나 폼페이의 벽화에서 감동을 받고부터는 인상파에서 이탈하여 재차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
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풍을 확립하였다. 더욱이 1890년대부터는 꽃·어린이·여성상, 특히 <나부>등은 강한 의욕으로 빨강이나
주황색과 황색을 초록이나 청색 따위의 엷은 색채로 떠올리면서 부드럽고 미묘한 대상의 뉘앙스를 관능적으로 묘사하였다.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매고 그렸다.
최후 10년 간은 조각에도 손대어 <모자>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고흐 [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북부 브라반트의 프로트준데르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신교의 목사였으며 16세에 백부의 소개로
화구상의 점원이 되면서 그림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고흐는 종교적 정열에 불타 단기 목사양성소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한 때는 벨기에의 보리나즈 탄광촌을 무대로 정열적인 전도에 몰두했으나 전도사직을 해고당하자 1880년 화가로서의 출발을 결심하였다.
고흐는 27세에서 37세에 이르기까지의 10년동안에 작품들을 창조하였는데 순수색을 사용하고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놀라운 색채 구사법
을 통해 자신이 선택한 소재들을 더욱 뛰어나게 묘사할 수 있었으며 그것들에다 영원성을 부여하였으나 1890년 37세의 나이에 자살을
함으로써 생을 마쳤다.
세잔 [
프랑스의 화가. 남프랑스의 엑스앙프로방스에서 태어 났다. 모자제품업에서 은행가가 된 사람을 아버지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린
시절 친구 졸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엑스의 법과대학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집념 하고되고
1861년 파리로 나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여기에서 기요맹, 피사로와 만난다. 후에 인상파화가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1861년과 1862년의 에콜 데 보자르 입학에 실패하며 그 사이 고향과 파리 사이를 오가면 서도 그림의 길을 걷는다.
피사로영향으로 색채를 밝게 하고 구성도 강한 질서를 잡고 있다. 제1회 인상파전 에는 <목매다는 집> <오베르 풍경>등을 출품했다.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즉 빛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물체의 형체의 세계에 깊이 파고들었다.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고갱 [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고갱은 다른 예술가와 달리 고흐처럼, 예술 외적인 우회적 삶을 보낸 작가이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
하여 피사로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멤버가 되었다. 82년 피사로의 소개로 세잔, 기요맹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
인 화법을 지향하여 세뤼지에, 드니, 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87년 처음으로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왔으며, 이어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 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91년 남태평양의 타이티섬으로 떠났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타이티의 여인들>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타이티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쇠라 [
신인상주의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878년 파리의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레만의 지도를 받다가,
다음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브레스트의 해안에서 병역을 마쳤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고전 작품을 연구하고 소묘에 힘을 쏟는 한편,
셔브뢸, 헬름홀츠등의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연구하여, 1881년경 들라크르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를 해명한 글을 발표하여 세인
의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이론을 창작에 적용하여 점묘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884년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하였으나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일을 인연으로 평생 화우 시냐크와 사귀게 되었다. 1885년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제작하여 다음해에 열린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전작의 수법을 한층 더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인상파의 색채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한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요절하였다.
시냐크 [
프랑스의 화가. 기요맹의 제자. 파리 출생. 모네의 작품을 보고 감동하여 화가가 될 뜻을 세워 1883년 20세 때 아카데미 리브르 드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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