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어제와 오늘
강 문 석

우리나라와 중국이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수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시대가 종언을 고한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던 날 톈안먼天安門 광장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변화 덕분이었다. 영국에서 홍콩이 반환되는 것은 155년 만이라고 했다. 뉴스에서만 보아오던 마오쩌둥毛澤東 얼굴이 내걸린 죽의 장막 심장부 톈안먼은 그날 온통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정부 요인들은 홍콩 현지로 몰려갔지만 그와는 달리 광장엔 경축 깃발이 휘날리며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었다. 중국 다롄大連을 거쳐 백두산을 올랐던 우리 일행은 홍콩반환 일자에 맞추어 광장에 당도했던 것이다. 이날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는 ‘항인치항港人治港’을 선포하였다. 외교와 국방만 중앙정부에서 관여하고 나머진 인구 630만인 홍콩에 자율권을 주겠다는 천명이었다.
행사요원으로 광장 중앙에 도열해선 인민군부대를 카메라에 담노라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들이 바로 6.25동란에서 한반도 통일을 가로막은 중공군의 후예였으니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우린 그날 귀국하는 기내에서 홍콩반환기념메달을 하나씩 선물 받았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홍콩이란 이름은 원래 샹장香江이었다가 명나라 때 동완에서 생산되는 향나무를 중계운송하기 시작하면서 샹강香港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곤 샹강의 광둥어廣東語 발음을 영어식으로 부르다보니 홍콩이 되었다. 사오십 년 전 ‘홍콩 간다’는 말은 아무나 함부로 못가는 명소를 찾아간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홍콩은 당시 동양의 진주이자 유토피아요 관광쇼핑의 천국으로 통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한 관광지였다. 일부 몰지각한 이들은 남녀의 정사에다 ‘홍콩 보냈다’는 저속한 표현을 갖다 붙이기도 했지만 그런 말은 별로 오래 가질 못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홍콩도 지금은 여행지로서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쇼핑천국은 싱가포르나 태국과 같은 인근 나라에 넘겨준 지 오래고 동서양 문화가 섞여있던 옛 모습 또한 많이 퇴색한 때문이다. 그런데도 홍콩은 오래 된 가요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시절 따라 흥얼거리던 ‘홍콩 아가씨’는 꽃을 파는 밤거리 아가씨의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지만 의외로 경쾌한 리듬에다 꾀꼬리 같은 가수의 음색 때문인지 전후의 사춘기 소년을 달뜨게 만들었다. 그 노랫말을 통해서 영란 꽃이 홍콩의 국화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성장하여 신병훈련소에서 만난 ‘홍콩의 왼손잡이’는 점심시간마다 확성기를 타고 연병장에 울려 퍼지던 노래로 기억에 남아있다. 1960년대 초반 혜성처럼 나타난 가수는 이 노래로 달포 가량이나 훈련에 지친 병사의 심금을 울리면서 감성을 자극하기도 했다.
30여 년 전의 홍콩영화는 헐리웃 영화의 인기를 웃돌았다.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부산의 남포동 개봉관들도 방학과 명절 때면 꼭 홍콩영화를 틀었다. 리샤오룽李小龍이나 청룽成龍이 나오는 영화는 입장료의 두세 배를 넘는 웃돈이 붙은 암표가 성행할 정도였다. 홍콩영화의 아이콘으로 영화보다 더 극적으로 살다 간 장국영도 떠오른다. 그가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한 곳이 바로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호텔이다. 호텔 스위트룸에서 지내던 그는 15년 전 만우절에 24층 룸에서 몸을 던졌다. 그의 자살이 팬들에게 준 충격은 실로 컸다. 사건보도가 나간 지 9시간 만에 홍콩에서만 6명의 팬들이 그를 따르는 모방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 뒤로도 팬들의 애도는 끊이지 않았고 그의 마지막 연인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끝이 있겠지만 우리의 사랑은 끝이 없다”는 글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호텔을 1963년 처음 오픈했을 때는 호화스러움 때문에 지탄을 받았지만 아시아 최고의 호텔로서 케이트 모스와 케빈 코스트너 톰 크루즈 브루나이 국왕 다이애나 왕세자빈 리처드 닉슨 같은 세계적인 명사들이 찾아드는 바람에 더욱 유명해졌다. 홍콩의 땅값이 얼마나 비쌌으면 오래 전 우리 부부가 찾았을 때 여행가이드는 시신이 든 관을 세워서 묻는다는 말을 했다. 처음 하나를 세우고선 그 옆에다 가족들 관을 다닥다닥 붙여서 추가로 묻는다는 것이다. 그때 난 직립보행을 해왔던 인간인지라 서있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차라리 화장을 한다면 입식묘지 땅 마저도 필요 없을 터인데 전통적인 장례문화가 그랬던 모양이다. 홍콩여행에는 선전深圳경제특구도 들어있었다. 일인당 130달러를 내야하는 선택 관광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전체를 유람할 수 있다는 걸 가이드는 자랑했다.
5백 명이나 되는 출연진이 웅장하고 화려하게 펼치는 민속 쇼가 압권이었다. 거기에서 바로 소인국 민속촌을 둘러보는 코스로 이어졌다. 당시 대대적으로 공단이 들어서고 있던 선전지역으로 향하면서 국경을 지날 때였다. 출국심사는 고속도로 톨 게이트처럼 유리로 된 박스 안에서 여성근무자가 맡고 있었다. 그녀는 사실여부를 한마디도 묻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아내를 국제적인 수배인물이라며 붙잡았다. 그러곤 어딘가와 전화로 한참 동안 연락을 주고받으며 부산을 떨었다. 수배자를 잡았다고 알리는 것 같았다. 아내 때문에 일행이 탄 승합차까지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다. 지문을 보낸 쪽에서 연락이 오고 난 뒤에야 아내는 심사대를 통과했다. 수배인물과 동명이인이었는지 행정착오였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로 반시간 가까이나 붙잡힌 사건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가짜를 많이 만들던 나라에다 업무능력까지 모자라 그러한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주룽九龍반도 스타페리 선착장 공원에서 만난 중년의 길거리화가는 내가 목에 걸고 있는 카메라에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말을 걸더니 우리 부부를 5달러에 그려주겠다며 서보라고 했다. 마침 유람선 출발까진 시간여유가 있었다. 그는 불과 십여 분만에 실루엣 부부상을 완성했고 그림은 탄복할 정도로 섬세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우린 옆얼굴을 보여주면서 그냥 서있었는데 두 사람의 입술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여서 그렸다. 아내의 안경테와 나의 벗겨지기 시작한 앞이마까지도 사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그림은 비록 손바닥만 한 크기지만 홍콩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액자를 만들어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홍콩관광 하이라이트 명소는 빅토리아 피크로 센트럴의 남쪽에 있는 타이핑 산의 정상이다. 여기에 오르면 홍콩 섬은 물론 침사추이의 야경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숲을 이룬 고층건물들과 항만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풍광을 조망하며 열광한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화려한 도시의 풍광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어둠이 내리면 은하계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도심의 불빛을 감상할 수도 있다. 그렇다보니 홍콩 최고의 부자들이 이곳에 모여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겠다. 도심의 카이탁공항이 첵납콕赤蠟角 신공항으로 옮긴지 얼마 안 되어 홍콩을 찾았었다. 그때 거대한 철구를 조립하여 들어선 신공항에 놀라며 앞으로 승객유치가 제대로 안 된다면 공항운영이 힘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청사 안엔 명품매장이 즐비했고 상점들은 전부 면세점이었다. 사실 홍콩은 국제자유무역지대로 상품에 관세가 없기 때문에 면세점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손님들 눈을 현혹시키기 위해서 그런 전략을 쓰고 있었다. 홍콩 시민들이 ‘사법권을 보장하라’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뉴스가 떴다.
영국에서 반환된 후 홍콩의 헌법은 현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병존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50년 동안 유지하기로 되어 있다. 아직 30년이나 남았지만 중국 전국인민대표회의가 ‘충성선서’를 거부한 홍콩의 독립파 초선의원(국회의원) 2명의 자격을 박탈하면서 사태는 벌어졌다. 최루액을 발사하는 경찰에 우산을 펴들고 맞서는 홍콩시민들을 바라보면서 이번 주말로 예정된 광화문 촛불시위가 떠올랐다. 아직도 성난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대통령에겐 화가 치민다. 나라를 걱정하는 어느 인사는 대통령을 향해 '하야하고 망명을 떠나라'는 대문짝만한 광고를 신문에 실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나라를 통째로 없애겠다고 획책하는 세력들까지 날뛰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고난의 역사로 여기까지 온 대한민국인데 또다시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으니 나라를 살리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처해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