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원고를 불사름
이규보(李奎報 : 1168~1241)
어린 시절부터 시를 지어서
붓을 잡았다 하면 그만둘 줄 몰랐지
아름다운 보배라고 스스로 말했으니
그 누가 감히 흠을 찾아내 논할까
뒷날에 다시 들추어 보니
편 편마다 좋은 글귀 하난 없구나
시 보관 상자 더럽히는 것 참을 수 없어
새벽 밥 짓는 아궁이에 불살라 버렸네
작년에 쓴 시도 금년에 살펴보고
예전과 같이 던져 버렸네
옛 시인 고적도 이런 까닭에
쉰 되어서야 시 짓기를 시작했네.
焚藁(焚三百餘首)분고(분삼백여수)
少年著歌詞(소년저가사) 下筆元無疑(하필원무의)
自謂如美玉(자위여미옥) 誰敢論瑕疵(수감논하자)
後日復噚繹(후일부심역) 每篇無好辭(매편무호사)
不忍汚箱衍(불인오상연) 焚之付晨炊(분지부신취)
明年視今年(명년시금년) 棄擲一如斯(기척일여사)
所以高常侍(소이고상시) 五十始爲詩(오십시위시)
[어휘풀이]
-焚藁(분고) : 원고를 불사르다.
-汚箱衍(오상연) : 글 상자를 더럽히다.
-棄擲(기척) : 던져 버리다.
-高常侍(고상시) : 중국 당나라 시인 고적(700~766), 나이 쉰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한
뒤 벼슬살이와 시작(詩作)을 하였다. 상시(常侍)는 그의 마지막 벼슬의
직책이다.
[역사 이야기]
이규보(李奎報)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으로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며 시와 술과 거문고를 너무 좋아새 자칭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고 했다. 그는 명문장가로 그가 지은 시는 당대를 풍미했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 격퇴하기도 했다. 저서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가전체 소설로, 술을 의인화하여 지은 『국선생전(麴先生傳)』, 『동명왕편(東明王篇)』 등이 있다.
이규보는 1168년 태어났다. 이 해가 의종 22년이었는데 그로부터 꼭 2년 뒤 무신의 난이 발발했다. 그는 9세에 시를 짓는 신동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울분을 술로 달래며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20대 초반까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이규보는 백운거사(白雲居士)로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심취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실권을 잡은 것이 1196년, 무신정권은 최충런에 이르러 방향을 잡게 된다. 이규보의 나이 28세 때이다. 이규보는 현실적인 길을 찾기로 했다. 이규보는 최충헌의 동향을 유심히 살피며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최충헌에게 시문을 지어 보냈다. 그를 알아본 최충런이 이규보를 등용한 때가 이규보의 나이 32세 전후로 알려져 있따. 이규보는 1207년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고 1230년에는 판위의시사(判衛尉寺事)를 지냈다.
문인이라곤 시골의 서당 선생 하나도 남기지 않고 내몰아친 무인정권으로선 중국에 보낼 공문 하나 만들기 어려웠다. 그런 그들에게 거부감을 갖지 않는 문인 실력을 갖춘 신하가 절대적으로 절실했는데, 거기에 이규보가 등장한 것이다. 이규보의 문학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했다. 그가 25세 때 지은 『동명왕편(東明王篇)』에서 그의 재능을 나타냈는데 이은 오늘날 민족영웅 서사시로 평가받는다.
그 당시 무인정권시대는 왕은 있으나 허울뿐이고 무인끼리도 힘 있는 ㅈ가가 약한 자를 죽이는 난맥상이 펼쳐져 국가기강은 무너지고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았다. 비극적인 시대에 태어난 이규보는 가슴 설레는 영웅, 동명성왕 고주몽을 만난다. 민족영울 서사시 동명성왕으로 인해 고구려의 역사를 다시 살려 냄과 동시에 역경을 이겨 낸 슬기로운 왕의 모습을 통해 민족의 자긍심을 키워 주게 되었다.
출처 : 한기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