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9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요한
15,18-21)
You do not belong to the
world, and
I have chosen you out of the world,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다시 안티오키아에서 제2차 선교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르나바와 함께 가지
않는다. 바르나바는 마르코와 함께 떠나고, 바오로는 실라스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간다. 리스트라에서는 티모테오가 바오로 일행과 동행하기
시작하는데, 그들은 환시를 보고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박해한 세상은 제자들도 박해한다. 제자들은 박해에 당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자로서 당연히 예상하고
받아들여야 할 몫임을 알아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떤 곳에 복음을
전하러 간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의 사도로 뽑아 세우신 바오로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과, 또 비티니아로 가는 것을 왜 성령께서 막으셨을까요?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분명 기뻐하실 일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일을 시작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분께서 함께해
주시지 않으시는 것 같아 길이 막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좌절하기도 하고 주님께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분을 붙잡고 흔들며 매달리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음을 깨닫곤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입니다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매우 평온합니다. 성령께서 한쪽 길을 막으시면 성령의 지시를 다시 받아들여 또 다른 길을 개척해
나가는 지혜가 바오로 사도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지도 않은 마케도니아에서 하느님께서 자기를 부르신다고 확신하게 되자 곧바로 그곳으로
떠날 방도를 찾습니다. 길이 닫히는 데에 동요하거나 구애받지 않고 또 뜻밖의 길이 열리는 데에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는 바오로 사도의 이
자유로움은, 모든 것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요한 복음은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진리와 거짓, 세상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데, 이 선택의 기로에서 어정쩡한 중간 지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 복음이 저술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는데, 오늘 복음은 그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자기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우선 반대하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소중하게 여기거나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입니다. 분명 다르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험을 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야구와 비슷한 놀이가 있었습니다. 요즘의 아이들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야구배트나 글러브 없이 주먹으로 직접 고무공을 치고
맨손으로 공을 받는 ‘찜뽕’이라고 불리는 경기를 참 많이 했었습니다. 내기가 걸린 것도 아니었는데 이기기위해서 참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편이 이길 수
있도록 공격도 잘 해야 하고, 수비도 열심히 해야 했습니다. 만약 상대편이 지고 있다고 불쌍하다며 일부러 아웃을 당한다면 어떨까요? 또한 평범한
땅볼인데도 상대편을 위해서 일부로 공을 뒤로 빠트리면 어떨까요? 아마 우리 팀의 친구들은 “너 어느 팀이야? 너 우리 팀 하지 마. 저쪽 팀이나
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팀을 위해서 부상을 무릅쓰고 열심히 공격과 수비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그때마다 환호를 터뜨리지요. 잘
했다면서 박수를 쳐주고 응원과 격려를 해줍니다.
아마 모든 경기가
다 똑같을 것입니다. 자신의 팀의 승리를 위해 도움이 되어야지, 상대 팀의 승리에 보탬이 되도록 한다면 아마 엄청난 욕을 먹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렇게 우리 팀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같은 팀으로써 끈끈한 동료 의식을 갖게 되며, 같은 팀으로써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팀을 나누는
경기를 떠올리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따져보게 됩니다. 세상과 주님으로 갈라지는 양 갈래에서 우리는 과연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물질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의 편입니까? 아니면 사랑으로 하나 됨을 중요하게 여기는 주님의 편입니까?
세상의 편에 서는
것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 줄 뿐이지만, 주님의 편에 서는 것은 영원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세상의 편에 서는 것은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부각되어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하지만, 주님의 편에 서는 것은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하나 됨이 강조되기에 늘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주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주님의 편에 큰 힘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세상의 편이 아닌
주님의 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주님의 말씀을 잘 지켜야 한다고 하시지요. 주님의 말씀은 곧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주님의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어 참된 평화와 행복을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의 편입니까? 주님의 편입니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두 개의 손을 주셨다. 하나는 받기 위해, 다른 하나는 주기 위해. 우리는 모아 담기 위해 파놓은 저수지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
수도다(빌리 그래햄).
아침기도
우리가 하루하루를
일관성 있게 살아가는데 성공했을 때, 그 하루는 질서와 규범을 지닙니다. 특히 그러한 일관성은 아침 기도로 시작되며 활동으로 이어집니다. 곧
아침기도가 하루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헛되이 보낸 시간, 유혹에 빠진 시간, 용기를 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보낸 시간, 이웃과의 관계에서 무질서와 혼란을 일으킨 시간 등, 그
모두가 아침기도를 소홀히 한 것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위 글은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님인 디트리히 본 회퍼의 글입니다. 아침기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글이지요. 일어나는 순간부터 주님의 편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 자는 그 순간까지 주님의 편에서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이수철신부-
계속되는
부활축제에 신록의 생명 가득한 아름다운 계절 5월 성모성월입니다.
매일매일이
축제같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축제가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어버이날'이기도
했던 어제는 참 행복하고 감사했던 날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수도형제들임을 깊이 체험했던 날입니다.
어제
강론의 요지는 '예수님과의 우정과 형제애는 함께 간다'는 내용이었는데
말씀의
진리를 그대로 체험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하느님의 선물'이 어제 주어졌습니다.
아침미사후
약간 늦게 식당에 들어섰을 때 한 젊은 형제가 제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려했고
이미
가슴에 카네이션을 단 회갑을 넘은 세 형제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맞은
편에서는 또 젊은 한 형제가 사진 촬영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광석화,
순간 떠오른 생각입니다.
처음엔
저 혼자 찍어달라 하였으나 그게 아니다 싶었습니다.
즉시
카네이션 단 세 형제를 불러 내었고,
이어
원장수사도 불러내어 가운데 세우고 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했습니다.
'아,
형제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던지요!'
이런
생각의 선물을 주신 주님께 많이 감사했습니다.
혼자
찍었더라면 참 초라하고 보기도 안 좋았을 것입니다.
꽃
한송이 보다 여러 다른 꽃송이들이 어울려야 더 풍요롭고 아름답듯이 말입니다.
사진이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워 참으로 오랜만에
'수도원의
어버이날'이라는 제하에 요셉수도원을 사랑하는 많은 형제자매들에게 전송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카톡 사진을 보내기는 처음입니다.
목적은
'수도원의 평화의 축복을 나누는 것'과
'받는
모든 분들이 부모님을 생각할 것'을 바라는 마음 둘 뿐이었습니다.
많은
시간 보내면서도 참 행복했습니다.
여러
지인들의 답전 메시지를 일부 소개합니다.
"어버이날이네요.
빠코미오 신부님께서 꽃 달아드렸나 봐요.
빠코미오
원장님의 사랑이 보이네요.
보기
좋네요. 축하드립니다.
기쁜
하루 보내세요.“
"어버이날
꽃을 달으신 여러분을 뵈오니 가슴이 벅차 주님께 감사기도드립니다.“
"보기에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평생
주님만 사랑하신 분들, 저희들 생활의 본보기이며 생활에 어버이십니다. 아멘."
"든든하게
지켜주시고 기도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저희들은
세상속에서도 힘을 받고 살아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참
평화로워보여요.“
"참
보기 좋아요. 평화 그자체입니다.“
"만인의
어버이들 뵈오니 기쁨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함께
계시니 참 아름다워요.“
"편안해
보이고, 가족적인 따뜻함까지 느껴집니다."
"어머머!!!
사진에서 그곳 식구들을 뵈니 저로서는 감격입니다.
이제야
사진 속의 얼굴이 한분 한분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세월이
훌딱 십년이 가다보니 모두 거목이 되어 계시네요.“
오늘
복음의 축복을 체험했던 어버이날이었습니다.
복음에선
제자들이 세상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만,
저희는
세상의 그리스도께 속한 무수한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어
주님은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음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주님을
앞서 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곧이 곧대로 뒤따르는 사람,
주님을
닮아 섬김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의 세가지 특성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
우리가
주님을 뽑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상에서 뽑아낸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대조사회(對照社會)로서의 교회공동체에 속한
바로
이런 특별한 신원이 자유와 기쁨의 원천이요,
때로
세상의 미움을 받기는 해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예언자적 삶을 살 수 있는 조건도 됨을 깨닫습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서 뽑아낸,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2차 선교여행을 성공리에 수행한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 일행입니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의 인도에 따른 선교여행을 통해
철저히
그리스도께 속한 바오로 일행의 제자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로의 선교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더욱 당신께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로 만들어 주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파견하십니다.
끝으로
어제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선한목자예수수녀회 수도가족이 보낸 편지를 소개합니다.
"어버이날
축하드립니다.
뜻
깊은 어버이날, 부모님을 기억하듯 신부님을 기억합니다.
우리
수녀님의 영적 동반자로서 늘 함께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자녀된
마음으로 이 날에 신부님과 공동체를 기억하며 작은 마음을 전합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조재형신부-
한 달에 한번 예전
적성 본당의 청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처음
만난 것은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지난
2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한 아이가 우연히 길에서 저를 알아보았고,
그 뒤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1999년에 적성 본당의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적성에서의
3년은 제게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가장 보람 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적성 본당으로 간
것도 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동창 신부가
주교님께 저를 추천하였고,
저는 주교님의
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인원이
100여명인 작은
본당이지만 제게는 첫사랑과 같은 본당입니다.
처음에 한 일은
미사 참례를 한 신자들 중에서 번호표를 뽑는 것이었습니다.
‘은총과 봉사의
번호표’였습니다.
은총의 번호에
당첨된 분들에게는 선물을 드렸습니다.
성경책,
묵주,
책,
바구니,
주전자와 같은
것들을 드렸습니다.
은총의 번호표에
당첨된 분들은 어린이처럼 좋아하셨습니다.
봉사의 번호에
당첨된 분들은 주보 정리를 하고,
성당 청소도
하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화단 정리를
하였습니다.
봉사를 하는 분들도
기쁘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누가 선물을
받고,
봉사를 할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두 번째 한 일은
태권도였습니다.
본당 교우 중에
도장을 운영했던 분이 있었습니다.
본당에서 도장을
만들고,
도복도 무료로
나누어주고,
수업료도 받지
않고,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성당에
와서 간식도 먹고,
태권도도
배우고,
교리를 배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성당에
나오니 부모님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0여명에 불과했던
주일학생들이 100여명으로
늘었습니다.
이번에 만난
청년들도 그때 성당으로 태권도를 배우러 온 아이들이었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아이들을 위한 간식,
도복을 위한
비용들이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울에서 여름캠프를
오면,
본당에 필요한
만큼의 비용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군 생활을
하셨다는 분이 오셔서 감사헌금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세 번째 한 일은
농산물 직거래였습니다.
신자들 중에는
포도를 재배하는 분도 있었고,
양봉을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쌀농사를
하셨습니다.
서울의 본당들과
자매결연을 하였고,
트럭으로 배달을
하였습니다.
가을에는 배추를
보내 드리기고 하였습니다.
자매결연을 한
본당에서는 사목위원들이 오셔서 피정을 하기도 하셨고,
청년들이 야유회를
오기도 하였습니다.
네 번째 한 일은
본당 신자들을 위한 차량운행이었습니다.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성당에 오려고 해도 여의치 않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을
모았고,
봉고차를 가지신
분들이 주일이면 4곳으로 차량운행을
하였습니다.
본당에서 차량운행을
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편하게 성당에 올 수 있었고,
쌀,
마늘,
고추,
오이,
계란 같은 것들을
가져오셨습니다.
주일미사가 끝나면
신자들이 가져오신 것으로 점심을 해서 먹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여행을 읽으면서 적성 본당에서의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들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감사한다면,
우리가 희망을
가진다면,
우리가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커다란 일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도움을
드리는,
새천년 복음화
사도직 협회는 지난 5월
5일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는
행사를 하였습니다.
평신도들의 힘으로
25년간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복음화 학교를 수료할 수 있게 한 것은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5년을 지내면서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고,
때론 시련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장애물을 디딤돌로 삼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고,
지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이제 복음화 학교는
아시아의 선교를 위해서도 노력하려 합니다.
복음화 학교의
정신과 가치를 아시아를 넘어 세계 교회에로 전하려 합니다.
교회는 세속화의
거친 물살에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25년을 준비하면서
이주민과 새터민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면 낯선 곳에서의 삶에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분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다면 가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새터민들이 복음화
된다면 앞으로 다가올 통일의 시대에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것입니다.
지난
25년 동안 복음화
학교에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화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는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복음화의 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반영억신부-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 맞는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회장이 술집에서 폭행을 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을 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좋고 싫고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이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형태의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에 공감하시고 "매일 공동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일종의 순교와
같다."말씀하셨습니다. 지저분하게 되거나 지치게 되더라도 우리는 현실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되
갚아주시길 다짐하며……'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사도 16,6-7) -오상선신부-
살다보면 참으로
일이 안 풀릴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해도 안
되고 저것을 해도 안
되고 이리
막히고 저리
막히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이리 가려고
하는데 못가게
말립니다. 그래서 저리 가려고
하면 또
말립니다.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하는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오늘 사도들의
길도 그렇게
막히네요. 아시아로 가려는데
안 되고 비티니아로
가려는데 또
막힙니다.
결국 생각지도
않았던 마케도니아로
가서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렇습니다. 이 길이
막히면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저 길이
막히면 성령께서 말리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눈에
좋아보이는 길이 결코 가서는 안 될
길이기에 좋으신
하느님께서 말리신다고 여기면
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통해 상상치도
못하는 큰 축복을
내리십니다.
여러분도
그런 기막힌 체험을
하는 오늘
되소서.
순교자의
마음으로
-양승국신부-
우리
가톨릭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박수갈채와 환호가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세상의 박해와 순교, 배척과 미움 속에서 꾸준히 성장을 거듭해왔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초대 한국 교회 공동체 역시 순교자들의 피를 자양분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환영과
호의가 아니라 피와 고통 속에서 우리 교회가 성장해온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교회의 창립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물든 세상과는 태생적으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신 분입니다.
세속의
권력자들이 언제나 취했던 노선은 한결같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의 번영, 현세적 안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노선은 방향이 정
반대였습니다. 불완전한 이 세상의 몰락이었습니다. 그 대신 외치신 것이 천상에서의 완벽한 복락이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세상 권력자들의
비리와 악행을 만천하에 고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취하신 노선이 이러했으므로 세상으로부터의 미움과 박해는 불을 보듯이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와 음해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유한함을 일깨우시며 하느님 나라의
영원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때로
결코 만만치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처신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다보면 자주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래 전 이러한 현상을 미리 예견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요한복음 15장
18~20절)
예수님을
스승이요 친구, 아버지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또 한명의 순교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순교 영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순교자들의 후예들입니다. 우리들의 피 속에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토록 큰 은총을 입은 우리
순교자들의 후예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더
이상 신유박해나 기해박해가 없는 오늘 날의 이 시대, 우리 선조들이 지니셨던 그 놀라운 순교정신, 순교영성을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서 실천할까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너무나 간단하더라구요.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순교자의 마음으로 정말 용서하기
힘든 그 인간, 정말 꼴 보기 싫은 그 사람을 다시 한 번 용서하고 포용하는 일입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이다.’ 라고 외치며 최선을
다해서 사는 일입니다. 앞으로의 1년을 내 생애 가장 멋진 1년으로 장식하겠다고 다짐하며 불꽃처럼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바로 순교영성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이란 것, 멋진 티브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호화찬란하다거나 특별하지가 않습니다. 때로 지루하고 때로 따분하고 때로 구질구질하고,
때로 엄청나게 구립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은 우리들의 삶입니다.
순교영성을
산다는 것은 이렇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도 활짝 웃으면서, 기쁜 얼굴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인내가 신앙 활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로마서 8장 18절에서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매일의
고통을 기쁘게 견뎌내는 것 그 자체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참여하는 길이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환난에서 모자라는 부분”(콜로 1장
24절)을 채우는 일이며 순교영성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의 소속감과 정체감
-기경호신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살아갈 힘을 주고 삶의 방향을 바르게 해주는 것 가운데 소속감과 정체감이 있다. 이 둘은 실은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다. 내가 어디에 속에 있는가 하는 소속감이 분명할 때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감도 더 명확해진다. 소속감과 정체감이 확고해질수록 자존감이
커가고 영성생활도 성숙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8-27절의 내용은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겪게 될 세상의 ‘증오’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부분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그분의
모범대로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체험할 수 있다고 강조한 앞 대목(15,1-17)과 두드러지게 대조를 이룬다. 곧 사랑의 공동체가 증오의
세상과 직면한 셈이다. 이런 대조는 사실상 두 대목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면서, 사랑과 증오가 뒤얽힌 인간 삶의 실존 상태를 명확히
드러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거든 여러분에 앞서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두시오.”(15,18) 제자들은 예수님께 속해 있으므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도록 제자들을 격려하신다(27절 참조).
예수님께 속한 제자들은 세상의 증오와 미움을 받고 그분께서 걸으셨던 길을 가야만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를 배척하고 하느님을 등진 세상은 제자들마저 적대시하고 증오한다(18-19절). 제자들을 증오하고 박해하는 이들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로서(22-25절 참조) 그들은 예수님을 파견하신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15,21ㄴ). 그러나 이 세상도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구원의 가능성은 있다(14,31 참조).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면서도 구원의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 속한 제자들은 모든 증오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에 예수님을 증언해야 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15,20)는 말씀은 당신의 모범을 따르고 당신의 권위에
근거해서 행동해야 함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나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인가, 아니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예수님을 배척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인가? 세례를 받고 수도자로서 사제로서 축성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이 보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실제로 사랑과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살아냄으로써 그분께 속해
있음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신자인가보다 신앙인인지가 더 중요하며, 박해나 고통 중에도 내가 어디에 소속된 누구인지를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명심할 점은 소속감과 정체감을 명확히 하는 것은 세상을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상황이 어떻든 나는 나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느님께 속한 사람임을 분명히 의식해야겠다. 내가 이런 소속감을 분명히 가짐으로써
신앙인으로서의 자아정체감이 커갈 것이다. 정체감이 분명해질 때 나는 하느님을 등지고 예수님을 배척함으로써 우리를 박해하고 증오하는 세상, 심판의
대상이 되어 있는 세상까지도 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인관계로 눈길을 돌리면 내가 사랑의 사람, 사랑 때문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소속감과
정체감이 뚜렷해질수록 자신을 괴롭히고 분노케 하고 증오하는 이들까지도 품을 수
있으리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이영근수사-
주님!
제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서
비롯되지 않았고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으니
세상의
사랑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속하니,
당신의
사랑에 목마르게 하소서!
세상에게
뽑힌 것이 아니니,
세상의
영예를 따르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뽑혔으니,
당신의
영예를 따르게 하소서!
오늘도
십자가를 등판에 박고
상처를
가슴에 품은 것은
제가
당신의 것,
당신의
소유인 까닭입니다.
당신께
속한 까닭에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은 까닭입니다’(필리
1,29).
하오니,
주님!
믿음이
가져다 준
이
특권을 마다하지 않게 하소서!
그
어떤 세상의 미움과 배척에서도
오히려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그
특권의 한 복판에서
당신을
만나 뵙게 하소서!
아멘
-한상우신부-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막힌
물길을 친히 뽑아서
트시는 주님의
사랑에서 외면할 수
없는 주님을
기쁘게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뽑으셨다.'는
생명의
말씀에서 주님의 강한
사랑과 소속감을
체험합니다.
잊어버린
존재감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생명의
주인이 바로
주님이심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될
때 우리또한
누구인지를 알게될
것입니다.
우리모두는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마다 세상에서
뽑힌 환영받는
존재들입니다.
사랑은 강요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함이며 우리를 향한
주님의 열중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사랑의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걱정을
멈추고 사랑이신 주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세상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건 길을
열어주시고 보호해주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아속에
갇힌 우리들을 뿌리채
뽑으셔서 당신과 하나되게
하십니다.
미움과 불안을
걷어내시고 참 삶을
열어주시는 사랑의
주님을 기쁘게
따릅니다.
주님과
우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사랑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 속한
이들은 사랑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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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