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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묵상글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나는 어떤 사람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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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20 03:46
-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받아야 할 것과 받지 말아야 할 것을 잘 식별하는 것도 그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돈이나 물건을 준다면 그것이 뇌물인지 선물인지 잘 식별하고,
뇌물이면 단호하게 받지 말아야 하고 선물이면 감사하게 잘 받아야겠지요.
그래야 그 사람은 지혜롭고 그래야 행복하겠지요.
제가 자주 얘기하는 상처를 예로 들 수도 있겠습니다.
누가 상처를 줘서 상처받았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때 저는 ‘준다고 다 받니?’ 하고 핀잔을 줍니다.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고 상처 준 사람에게 탓을 돌리는데
어렸을 때는 혹 그럴 수 있지만 커서도 그러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 아무리 상처를 줘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하고 지혜롭지요.
그런데 상처는 이렇게 줘도 받지 말아야 지혜롭고 성숙한 것인데
박해는 받는 사람이 지혜롭고 잘 받는 사람이 성숙하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쓸데없이 박해받을 필요는 없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박해받고,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하여 곧 나의 행복을 위해 박해받아야겠지요.
이렇게 하느님 사랑 때문에 박해받으면 벌이나 시련에 관한 생각이 바뀝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것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국 순교자들이 받은 박해를 벌 받은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당시 벌을 내린 것은 임금이고 그러니 임금으로부터 벌을 받는 거지요.
그러나 순교자들은 임금의 벌이 아니라 천벌을 받은 겁니다.
우리는 천벌을 나쁘게 생각하고 가장 중한 벌을 천벌이라고 하지만
순교자들은 임금의 벌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벌을 기꺼이 받았지요.
순교자들은 벌을 벌이 아니라 상이요 월계관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실은 벌이 아니라 상을 하느님께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이렇게 지혜롭게 살았습니다.
벌을 하느님의 상으로 받았고,
모욕을 하느님의 칭찬으로 받았으며,
세상 시련을 천상 낙원을 위한 단련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니 고통을 받아 고생스럽긴 해도 결코 불행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했으며
단련이 고달프긴 해도 고달픔만큼의 큰 기쁨과 고달픔보다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늘 하느님이 계셨기 때문이고,
그것은 순교자들이 늘 하느님을 관상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받아도 고통만 보지 않고 그 고통 안에 계신 하느님과
고통 너머의 하느님 사랑과 상급을 관상했으며
그래서 사랑으로 현재 행복했고 상급으로 미래 행복을 예감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생스럽기만 하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관상을 할 줄 모르고 보이는 대로만 보는 사람이고
예감을 할 줄 모르고 현재의 고통과 불행만 보는 사람입니다.
누가 지혜롭고 행복합니까?
박해를 받은 순교자들입니까?
박해를 거부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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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교 영성의 시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오늘은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가 한국순교성인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참으로 자랑스럽고 영광스런 날입니다. 만세칠창에 “대한민국 순교자들 만세!”하나 더 추가합니다. 오늘 우리는 9월 순교자 성월의 절정을 이루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위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미사를 봉헌합니다. 가톨릭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한국가톨릭교회의 순교사입니다.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무려 거의 1세기 동안 일만여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중 극소수인 103위만이 시성되었지만 일만여명 순교자들 역시 순교성인들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 합니다. 순교자의 교회, 순교자의 나라, 순교성지의 거룩한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이를 요약한 애국가 한 구절,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도 면면히 흐르는 순교영성의 유전자(DNA)임을 믿습니다. 대표적 순교성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25세 꽃다운 청춘 나이에 순교했으며, 성인이 남긴 서간은 지금도 생생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45세에 교회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 순교했고 두분 다 순교자 가정 출신입니다. 두 분 외에도 세분의 주교와 일곱분의 사제들, 그리고 각계각층 무수한 남녀노소를 비롯한 영웅적 평신도들로 이뤄진 103위 순교성인들이요, 순교성인들에 관한 감동적 일화들도 차고 넘칩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여 두 경우가 생각납니다. 1984년 5월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시성식때 장충동 분원에서 학업중 청원자로 참석했던 기억입니다. 바티칸 밖에서의 시성식은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입니다. 교황의 한국순교자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짐작하게 합니다.
또 하나의 추억은 2023년 9월20일 한국 순교성인축일날, 미국 미네소타주 성 요한 수도원에 머물 때의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아침성무일도 독서시는 영문으로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서신을 들었고 미사후 여러 수도형제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고 많이도 감사, 감동, 감격했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얼마전 읽은 ‘순교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또 ‘성지순례는 곧 삶이다’라는 말마디도, ‘순교자 영성 따라 걷는 길, 신앙은 깊어지고 삶은 새로워진다’는 말마디도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순교에는 피흘리는 ‘적색순교’만 있는게 아니라,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살리는 방향의 ‘녹색순교’도 있고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살아가는 ‘백색순교’도 있으니 결국은 순교영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순교영성의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혜서의 다음 말씀도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무엇보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확신에 넘치는 주님 사랑의 고백이 우리 모두 백절불굴, 용기백배, 자발적 기쁨의 순교적 삶에 항구할 힘을 줍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입니까?...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시련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해마다, 오늘 축일을 지낼 때 마다 늘 반복하여 인용하기 수십년이 지났지만 늘 새로운 감동과 힘을 줍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 체험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사랑을 실천하게 하며,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게 합니다. 순교영성을 요약한 오늘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외없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보편적 구원의 길,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천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되는 길은, 성인이 되는 길은, 생명과 진리의 구원의 길은, 이 십자가의 길 하나뿐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끝까지 이기적 자기를 버리고, 제 책임의 십자가, 제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 하나뿐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순교영성을 견고하게 하시고 주님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여정에 항구할 힘을 주십니다. 늘 바쳐도 늘 새로운 순교 영성의 요약과 같은 다음 좌우명 고백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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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순교한 이들 중에 11명의 성직자와 92명의 평신도, 모두 103 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고, 그 외에도 약 1만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성인품에 오르지 않은 모든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으며, 진정한 사회개혁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오늘 <제1독서>는 의인들이 비록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며, <제2독서>는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랑의 대헌장”을 들려줍니다.
이는 순교의 본질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교부 테리툴리아누스가 말한대로,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하느님 사랑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선조들이 걸은 이 “순교”의 길은 비록 그 모습은 다르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오늘 <복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순교와 희생의 삶이 일회적이 아닌 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교는 매일의 삶 속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사건이요, 또한 “참된 삶은 긴 순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순교와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의 녹색순교로 죽음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는 것은 죽음에로 부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 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
당신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이 길을 갑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을 믿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께 신뢰를 두게 하소서.
제 몸에 당신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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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노래가 기억납니다. 여행 스케치의 ‘별이 진다네’입니다. 26년 전 적성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서울에 다녀오면서 본당에 돌아올 때면 ‘별이 진다네’를 들었습니다. 노래 간주 중에 개구리 울음소리가 나오는데, 본당 근처 논두렁에서 듣던 개구리 울음소리와 비슷했습니다.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가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어제는 별이 졌다네/ 나의 가슴이 무너졌네/ 별은 그저 별일 뿐이야./ 모두 내게 말하지만/ 오늘도 별이 진다네/ 아름다운 나의 별 하나/ 별이 지면 하늘도 슬퍼/ 이렇게 비만 내리는 거야/ 나의 가슴 속에 젖어오는/ 그대 그리움만이/ 이 밤도/ 저 비 되어 나를 또 울리고/ 아름다웠던 우리 옛일을/ 생각해 보면/ 나의 애타는 사랑/ 돌아올 것 같은데/ 나의 꿈은 사라져가고/ 슬픔만이 깊어지는데/ 나의 별은 사라지고/ 어둠만이 짙어가는데/ 어둠만이 짙어가는데.” 2025년 사랑하는 후배, 친구, 선배가 별이 지듯이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사랑하는 동창 이동훈 시몬 신부는 6월 20일에, 아름다운 마음을 지녔던 후배 이동원 야고보 신부는 7월 18일에, 존경하는 선배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님은 8월 15일에,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먹먹한 동창 박종성 그레고리오 신부는 8월 18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며 그리움을 남기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했고, 주님의 제단에서 봉사하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동훈 신부님은 제주도를 사랑했습니다. 동창회장을 맡았을 때는 동창들의 축일을 꼭 챙겨 주었습니다. 동창의 성격과 취향에 맞는 화분 준비해서 찾아왔습니다. 섬세한 성격으로 영신 수련 피정 자료를 정리해 주었고, 신학생들이 읽어야 할 영적 독서를 정리해 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저는 동창 신부의 신발 끈도 풀어줄 자격도 못 됩니다.
이동원 신부님은 신학교에서 같이 배운 기억은 없지만, 신부님의 인품을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화방송에 있을 때입니다. 열정으로 방송을 제작하다가 제작비가 초과하여 고민하던 제작자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어느 날, 제작자를 찾아와서 부족한 만큼의 비용을 주었다고 합니다. 몸이 아파 투병하고 있으면서도 늘 직원을 먼저 챙겼다고 합니다. 이기적인 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인품입니다. 유경촌 주교님은 1년 선배여서 신학교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연극반도 같이했습니다. 맑은 물에서만 살 수 있는 물고기처럼 주교님은 청빈했습니다. 안개 낀 거리를 걷는 것처럼 혼탁해진 저로서는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영성입니다. 박종성 신부님은 통증을 주는 사랑니와 같은 친구입니다. 첫 보좌 신부를 옆 본당에서 함께 했습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과 함께 산책도 하고, 스키장도 다녔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사제 생활은 기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의 첫 출발은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친구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게 시작했습니다. 고난받는 야훼의 종처럼 34년 사제 생활이 힘들었습니다. 20년이 넘게 휴양해야 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더 이상 슬픔도, 고통도 없는 위로와 위안 얻기를 바랍니다. 친구는 그래도 될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는 별이 졌지만, 천상에서는 새로운 별이 떠 올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별이 되어주는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친절하게도 그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 성서 말씀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밭은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들 마음의 밭에서 좋은 결실을 보려면 우리들 마음의 밭이 좋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밭이 좋은 밭입니까? 잡초가 무성하고, 자갈이 많은 밭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는 아닐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양분이 가득하고, 토질이 좋으며, 잘 다듬어진 밭이 좋은 밭입니다. 우리들 마음의 밭도 그렇게 가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들 마음에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내 마음의 잡초들을 뽑아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의 밭에 기도의 거름, 나눔의 거름을 뿌려 주어야 합니다. 주님! 달릴 길을 다 달렸던 이동훈 시몬, 이동원 야고보, 유경촌 디모테오, 박종성 그레고리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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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반복적으로 치유의 약을 제공해 주는 사랑!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19일 금요일- 서른일곱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것(cherishing)은 사랑이 행동으로 옮겨진 형태를 의미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팟캐스트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으면서도 모두에게 속해 있는 것(Everything Belongs)에서 홈바디 인더스트리스(Homebody Insdustries: 갱단 출신 재활 직업 훈련 기관)의 창설자인 예수회의 그렉 보일 신부(Fr. Greg Boyle)는 리처드 로어와의 대화에서 사랑이 어떻게 우리를 치유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일전에 한 팟캐스트에서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인터뷰 진행자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 청취자들은 당신이 순진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잠시 "글쎄요..." 하며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사랑이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자신의 삶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본면, 결국에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랑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증명하기 어렵지만, 누구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사랑이 작동했던 순간들이 결국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사랑이 실패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직 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이것에 대해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든 간에 사랑을 끌어안지 않는 것이 더 똑똑하고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할 필요가 있을 때에 우리는 머리로 그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이 구체적인 행동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의 원천이며, 진정한 변화는 이 둘이 함께 작동할 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에고가 사랑을 방해할 때, 자기 인식을 통해 다시 사랑, 친절, 온유함, 연결감과 같은 감미로움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영적 수양을 해야 합니다.... 사랑, 온유함, 친절함, 그리고 생명력을 끝까지 붙드십시오. 사랑에 대한 그런 확신은 삶 속에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바로 진정한 연결감과 공동체적 유대로 이끌리는 순간입니다.
저는 늘 "소중히 여김"(cherishing)에 대해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말은 본래 그 말이 지닌 힘을 잃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이미 행동으로 옮겨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깊은 관조의 태도입니다. [홈바디]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여지는 안전한 장소를 창출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도 소중히 여겨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치유라는 것입니다.
보일은 자기가 창설한 [홈바디]가 어떻게 해서 사랑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치유의 통로인지 믿게 되었는지를 회상합니다:
초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총알을 막는 가장 강력한 것은 일자리다!" 이 말은 폭력의 원인이 단순히 범죄 성향이 아니라, 기회 부족과 절망이기에, 일자리를 제공해 줌으로써 사람에게 희망과 선택지를 부여해 줄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직업을 구한 갱 조직원이 다시는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를 시작하듯이, "제대로 교육을 받은 갱 조직원은 절대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선한 기대가 현실에서는 제대로 작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교육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사람의 내면이 치유되지 않으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마 20년이나 25년 전쯤부터(총 37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오랜 시행착오 끝에 어떤 철학적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치유된 갱 조직원은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요. 이외에 다른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장에서 수천 명의 사례를 통해 확인된 경험적 진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실천의 중심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이외에 부차적인 일들도 합니다: 고용과 실질적인 일자리 제공, 교육, 문신을 지우는 일과 상담 치료와 같은 이외의 다른 모든 일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사랑을 계속해서 받는 치유의 공동체를 최우선으로 하고 나서 하게 되는 부차적인 일들입니다. ("넌 소중해!" "넌 괜찮아!"와 같은) 안심시켜 주는 말 긍정의 말을 해 주고, 애정을 표현하고 포옹해 주는 행위와 같은 사랑의 행위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의 내면이 변화합니다. 과거에는 누군가가 마약에 다시 손을 대거나, 갱단 생활로 잠시 돌아가거나, 감옥에 가는 일이 생기면 걱정하고 불안해했지만, 지금은 그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 사람은 다시 돌아올거야!" 그러나 아무도 지금 당장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돌아와!" 그리고 그들은 모두 돌아옵니다. 저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었다고 봅니다. 그들은 돌아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진심으로 소중히 여겨지는 경험을 맛보았다면, 그것이 너무 강력해서 결국 그 사람은 [그것에 온전히 마음을 열고]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요 근래에 사랑을 품고 세상에, 특별히 제가 사랑하는 이 나라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해왔는데, 이런 갈등과 고통 속에서도 예기치 못한 회복과 희망의 은총이 종종 찾아왔습니다. 저는 최근에 제 보청기에 대한 점검과 조정을 받았는데, 청각 전문가가 매일 큰 소리로 글을 읽으라고 권장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나이가 듦에 따라 청각을 잃어갈 때 뇌 건강을 향상시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매일 묵상을 큰 소리로 읽습니다. 이것이 제 뇌와 제 영에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매일의 선물인 이 매일 묵상을 빠르게 읽는 것보다 소리 내어 천천히 읽는 것이 훨씬 더 깊은 감동을 주기 때문니다!
—Cynthia C.
References
Adapted from Mike Petrow and Paul Swanson, cohosts, Everything Belongs, podcast, season 3, ep. 6, “Bonus: Fr. Richard and Greg Boyle Reflect on Lives Committed to Loving Action,” June 13, 2025.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ankhadeep Barm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저 사람은 꽃 앞에 멈춰 서서, 경외심을 가지고 그 아름다움에 머무릅니다. 꽃의 조용한 아름다움에 압도당하며, 그것에 자신을 맡기기를 선택하는 것이고 꽃을 바라보며 그들과 함께 현존하는 수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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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좋은 땅이 되어가는 여정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이미 주신 사랑과 자비의 힘을 확신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땅은 우리의 마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이 받아들여지고 숨겨 있는, 겉보기에 눈에 띄지 않는 장소입니다. 이 장소는 신선한 변화와 새로운 생명을 위한 가장 적절한 시간이 될 때 그 씨앗, 즉 하느님 말씀의 싹이 트고,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는 근본적인 토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려는 핵심은 오늘 복음 말씀 맨 나중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거듭 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르고 착한 마음'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말 그대로 '바르고 착한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만, 이 말씀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저는 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마음]은 신선한 변화와 새로운 생명을 위한 가장 적절한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삶의 방식이나 영적인 삶의 태도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늘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시간이 필요하냐면, 우리의 오래된 습관, 고정관념, 죄책감 등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했던 시간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시간은 하느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당신의 사랑과 자비라는 좋은 씨앗을 뿌려 주셨다는 확신 안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시각을 정화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정은 마음 속의 혼란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씻어내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하느님은 물론이고 세상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조금씩 쌓아가는 수양의 여정입니다.
그러니까 이 수양의 여정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삶 전체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깊은 마음의 전환을 이루기 위한 여정인 것입니다. 마치 우리 영혼이 숨이 막혀 있다가 다시 숨을 쉬도록 에고로부터 탈출하고, 에고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우리 정신이 오랫동안 지향했던 부정적 방향에서 새로운 방향, 즉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정을 인내 안에서 걷는 데 있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내면과 정신에 이런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 주셨다는 믿음을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일입니다!
이 믿음이 근본적인 전제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내 힘으로 그 일을 이루려고 발버둥치다가 나가자빠지는 어리석음을 끊임없이 범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땅이란 단순히 나의 힘으로 선업과 공로를 쌓는 삶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근본에서부터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 굳건한 신뢰심을 두는 마음과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우리로서 당신의 선과 사랑을 실현해가실 것입니다!
[잠재의식의 힘] 등을 저술한 아일랜드 출신의 조셉 머피 박사(Dr. Joseph Murphy: 1898-1981)의 체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가 54세 되던 해에 그의 삶의 전환점을 갖게 해 준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서재에 앉아 연구를 하던 중 어머니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단숨에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의사는 이제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말하더랍니다. 며칠 정도, 아니면 최대 한 주일 정도 사실 거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간절히, 또 간절히 치유자이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여러 영적 스승의 조언을 받아 온갖 기도를 다 바쳤는데, 어머니는 계속 악화되어만 갔습니다. 어느 날 밤 무릎을 꿇고 다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하느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저는 바른 일을 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당신의 말씀을 깊이 연구했고, 사람들에게 봉사도 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왜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으십니까? 왜 제 어머니를 치유해 주시지 않습니까? 제가 더 뭔가를 하기를 원하십니까?"
한동안 그렇게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마저 들더랍니다. 그런데 그때 하느님께 완전히 항복하게 되었고, 더 이상 다른 말도, 어떤 기도도 나오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더랍니다. 한동한 침묵의 순간이 지나가고 물리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어떤 위대한 사랑의 현존으로부터 오는 목소리가 마음으로부터 들리더랍니다. 그는 그 목소리를 귀가 아니라 자신의 온 영혼으로 들을 수 있었답니다. "내 아들아, 나는 멀리 있지 않단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단다. 나는 너를 떠난 적이 한 순간도 없었단다. 나는 네가 여기 있는 동안 다른 어떤 곳에 있지 않았단다. 나는 네 존재 바깥에서 너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란다. 나는 너를 통해 나를 표현했고, 너로 살아왔으며 너를 통해 사랑을 했단다. 네가 찾고 있는 힘은 너인 바 바로 그 힘이란다. 네가 갈망하고 있는 사랑은 네가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사랑이란다. 네가 그토록 바라는 치유는 이미 너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단다."
그 순간 그는 자기가 하느님에 대해서나 기도에 대해, 그리고 현실의 본질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완전히 뒤집혔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제 삶에서 처음으로 늘 거꾸로 되어 있었던 것이 바로 선 느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
그러고는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내가 하느님과 하나라면 하느님의 힘이 나의 힘이야. 하느님의 사랑은 나의 사랑이고, 하느님의 지혜는 나의 지혜야. 그렇다면 하느님께 치유를 청하기보다는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치유의 본질을 인식하는 거야...."
그런 다음 그는 어머니가 누워계신 침대 곁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죽어가는 어머니를 본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아주 다른 무언가를 보았답니다. 어머니의 존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본 것입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생명(하느님의 생명)에 일치되어 있는 어머니를 본 것입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어머니 이마에 손을 얹고는 자기로부터 이미 흘러나오는 힘을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기도했답니다. "아버지, 이미 어머니에게 주신 완전한 건강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지금 어머니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힘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함께하는 사랑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치유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3일만에 의식을 회복했고, 그후 12년을 건강하게 더 살다가 귀천했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깨어 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조셉아, 나는 놀라운 꿈을 꾸었어. 환한 빛으로 가득 찬 정원을 거닐고 있었는데, 엄청난 평화와 사랑을 느꼈단다. 그런데 한 목소리가 들리더구나. 아직 나의 때가 아니라고, 이 세상에 주어야 할 사랑이 더 있다고...."
머피 박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이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치유의 힘 등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 바깥쪽에서 무언가를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로서, 우리를 통해 당신 사랑의 일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좋은 땅이 되기 위한 여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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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토양을 경작하시는 유일한 분
철학을 곁들인 그리스의 기초 교육도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기름진 땅과 거름 더미와 지붕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와 같은 것이었지요. 밀과 잡초가 같이 싹을 튀웁니다. 무화과나무와 잡목들이 무덤 위에서 같이 자랍니다. 그것들은 같은 빗물을 먹고 비슷한 모습으로 자라지만, 기름진 땅에서 자라는 것들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시들거나 뜯어 먹힙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설명하신 씨의 비유도 이런 경우입니다. 사람안에 있는 토양을 경작하시는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처음부터, 세상이 생겨났을 때부터, 잠재력을 지닌 씨앗들을 뿌려 오셨으며 당신의 말씀이라는 최상의 형태로 때에 맞추어 비를 내리신 분이지요. 다만, 말씀을 받아들이는 때와 곳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3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자 하느님의 어머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콘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 보시오.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 불리게 되었으니 과연 그분 자녀들입니다(1요한 3,1).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보는 것과 하느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이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보고 아는 만큼, 우리는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알려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조명을 받은 공기는 빛을 발하게 마련입니다. 이는 빛을 발하는 공기가 조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로 하여곰 그분 자신을 보고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대들은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내가 그대들로 하여금 보게 할 것이니 그대들은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나를 보고 앓으로써 “그대들의 마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으로 넘칠 것"(.요한 16,22)이다.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산의 등정로는 다양하지만 호연지기는 서로 통한다
1970년대 이후 제 3세계 국가들 안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경제적 빈곤, 정치적 억압, 문화적 소외 속에서 시달리고 있는 현실에 대해 종교인들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고 그 극복을 위해 실천적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자각이 크게 높아졌다. 현재에도 60억 인류 중 12억 가까운 사람들은 생존 자체의 위기를 겪으면서 굶주림과 질병과 전쟁의 희생자로 고통당하거나 죽어가고 있는데. 종교간의 대화가 한가한 이론적 담론이나 펼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론적 논의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지만.종교의 일차적 동기와 목적은 ‘이론에 있지 않고 ‘실천적 삶 에 있다는 것과,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위와 같은 세계 종교계의 각성은 과거 종교 전통들이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현세적 힘과 지배 이념에 기생하거나 편을 들어주면서 종교의 올바른 기능을 상실해 왔다는 자기 빈성이 바팅이 된다.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이 실질적으로 유익하고'의미 있으려면, 이론적인 관심보다는 실천적인 관심으로 전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종교계의 경험도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 국내외 가난한 자들에 대한 식량과 의료 지원, 남북 평화 협력 증진을 위한 협동, 자연 생태계 회복 운동과 녹색 문화 창달을 위한 대화와 협동.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공동 전선 구축 등의 실천적 체험을 통해서 , 한국의 종교들은 매우 긴밀한 유대감과 대화 협력의 정신이 증대됨을 체험하고 있다. 여하튼 세계와 한국의 현실 속에서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는 가운데, ‘등산 모델'의 비유는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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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작년 가을, 본당에서 가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평화방송과 함께하는 음악회였습니다. 담당 PD에게 오프닝으로 우리 본당 유소년 아이들의 율동을 넣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쁜 우리 성당 아이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유소년 아이들은 텔레비전에 자기들이 나온다고 정말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음악회의 오프닝을 정말로 멋지고 예쁘게 장식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아이들의 율동 공연이 통편집되어서 방송에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음악회 시간이 너무 길어서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더군요. 아이들이 정말로 아쉬워했고, 제게 격렬한 항의까지 했습니다.
사실 우리 삶에는 통편집의 순간이 너무나 많습니다. 열심히 했고 또 좋은 결과도 얻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억울하고 아쉽다고, 이럴 바에는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모르겠다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통편집되는 부분만 나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멋진 삶이 우리 삶에는 많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대신 갚아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주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상관없습니다. 축구 경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상대 팀의 파울을 응원하는 사람이 본 것이 파울로 인정될까요? 그 경기의 심판이 본 것이 파울로 인정될까요? 당연히 심판의 인정만이 파울로 판정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과거의 순교자들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자기 목숨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는가? 왜 스스로 그 고통 속에 빠져드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을 왜 선택하는가? 어쩌면 세상의 기준으로는 통편집되는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순교를 선택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셨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욕망, 집착, 자만심 등을 모두 내려놓았고, ‘날마다’라는 표현처럼 한순간의 결단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제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승의 가르침을 단순히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승이신 주님의 삶을 함께 사셨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통편집이 이루어져도 괜찮습니다. 주님만 알아주신다면, 우리는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굳세게 밀고 나가라(로잘린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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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복음에 담긴 진실과 정의를 지키는 백색 순교를 /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특히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 받아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이 땅에 탄생하였다.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하는 다른 나라의 교회와는 매우 특이하다.
또한 당시 우리는 전통중시의 유교사상에 뿌리를 두어 그리스도교와는 크게 충돌하였다.
결국 제사 등에 대한 교회의 반대로 천주교는 박해를 받아 거의 만여 명이 순교를 당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였다.
이에 한국 천주교는 9월 20일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낸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에 싸여 올 때에는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게다.”’
무릇 모든 생물에는 한계가 있듯이 우리 인간도 한계를 지니는데,
그것이 바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죽음일 게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을 완성시킨다는 것도 안다.
죽음이 하나의 현실이므로, 이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위축되지 말고,
오히려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삶을 더욱 보람 있고 알차게 살아가야 하리라.
그렇지만 인생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우리 순교자들은
누구보다도 삶을 아끼고 사랑하던 분들이었지만,
죽음을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제2의 세례로 여겨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했다.
순교란 하느님이 계신다는 신앙 때문에 목숨 바치는 거다.
죽음 다음에도 분명 내세가 있다고 믿기에.
그들은 그런 믿음을 지녔기에 기꺼이 그 길을 가셨다.
그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인내할 수가 있었다.
그 믿음은 불굴의 힘을 안긴다.
또한 순교는 주님의 은총도 분명 함께 했으리라.
우리도 저 십자가를 지고 선뜻 나설까?
우리의 순교자들은 다 그렇게 하였단다.
그러기에 그분들의 삶을 본받게 해 주십사고 기도드리자.
예수님은 목숨을 구하려면 잃을 것이고,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이는 목숨을 구할 것이란다.
사실 교회는 저 피 흘리는 순교보다 땀과 노력,
봉사와 희생이라는 새로운 ‘백색 순교’를 요구한다.
그래서 결혼과 가정생활에도 피 흘리지 않는 순교가 요청되기도.
하느님과 진실과 정의를 위해 평신도 신분이나
마치 수도자처럼 사시는 분들도 종종 만난다.
그 삶이야말로 백색 순교, 곧 순교자의 길을 걷는 것이리라.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기억하는 날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순교의 기회가 거의 없단다.
그래서 순교 정신이 멀게만 느껴진다나.
그렇지만 순교 없는 신앙은 없다.
매일의 작은 순교가 목숨까지 내어 놓는 큰 순교에 이르게 하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것도 작은 순교이다.
성경 한 줄 읽으며 주님 뜻 찾는 것도 순교다.
내 몸이 원하지 않는, 더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는 그것이 순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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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씨앗을 우리에게도 골고루 /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이에 대해 비유를 드시면서 많은 군중이 모인 곳에서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이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밟히고, 또 새들이 먹어 버렸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자라다가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졌는데, 같이 자라면서 숨이 막혀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씨앗을 받아들이는 밭은 세 부류다.
첫째는 길바닥에 떨어져 오가는 이들에게 짓밟히기도 하고,
새들이 먹어 버린다.
시련이 닥치면 쉽게 주저앉아 버린다.
둘째는 바위나 가시덤불에 떨어져 물기가 없어 메말라 버리거나,
자라면서 가시덤불에 막혀 제대로 숨도 막힌다.
세상의 재물과 쾌락이나 걱정 등에 얽혀
삶 자체가 복잡해져서 주님을 잊어버리는 이들이다.
그러나 셋째는 좋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잘 맺는다.
여기서 두말할 나위 없이, 씨 뿌리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며,
씨는 당신 말씀이고, 그 말씀을 듣는 밭은 우리이리라.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어떤가?
물론 좋은 땅이어야 할게다.
주님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는 이는,
세상의 그 어떤 시련이나 유혹도 거뜬히 물리치고 일어설 수가 있을 게다.
우리는 주님 말씀의 밭이지만,
거기에는 미움과 세상 걱정, 타인으로 말미암은 상처들이 함께 자란다.
세상의 쾌락과 욕심으로 우리가 열매 맺지 못하는 밭으로 변화되기도.
우리는 땅에서 왔고 흙으로 빚어진 자다.
모든 곡식이 땅에서 자라듯, 우리에게 심겨진 주님 말씀은 자라 열매 맺는다.
하느님 숨결로 만들어진 우리 영혼육신은 천상의 밭으로 자란다.
말씀을 가슴에 품고 인내로 극복해 좋은 땅 되리라.
허나 우리는 삶의 짐 가볍게 하려고 재미있는 것만 찾는다.
편한 것에 빠져서 겉모습만 좇는다.
길가 바위에 떨어진 씨앗마냥 진배없다.
알찬 열매는 뿌리가 튼튼해야 열린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열매를 결정짓기에.
자연의 법칙이다.
성공한 이들에게는 공통 요소인 인내가 있다.
아무도 모르는 고통을 그들은 잘 참아 냈다.
아무도 모르는 시련을 그들은 극복하면서,
말씀이 좋게 오래뿌리내리도록 좋은 땅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꽃은 여건이 형성되면 언제든 피어난다.
노력 없는 곳에는 은총마저 없는 법이니까.
그 옛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마치 귀농한 분 마냥,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단다.
수확을 많이 하려면 땅이 기름져야 할게다.
쉽고 편한 방법으로는 좋은 땅을 만들 수가 없다.
좋은 땅을 만들려면 어려움이 반드시 따르리라.
그 과정이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기도하고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는 거다.
기도와 묵상으로 우리 마음의 밭은 차츰 비옥하게 변할 테다.
그 기름진 마음의 밭에는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리라.
이렇게 좋은 땅은 만들어진 거다.
처음부터 좋은 땅에 태어난 이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땅과 씨앗을 주셨다.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는지가 중요하다.
자연의 땅도 가꾸지 않으면 버려진다.
정성과 애정을 기울여야만 된다.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땅 되는 비결이다.
우리 신앙 삶도 흐르는 물과 같이 앞으로 나아갈 게다.
지나간 것에 얽매여서도 안 된다.
지나간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금 새롭게 시작해야만 새 땅 될 게다.
이것이 좋은 땅으로 가는 삶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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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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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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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늦게 올라오거나 다음날 또는 게재 아니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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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싶은 것은
내 목숨일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자기 목숨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목숨이지만
때로 우리는 내 목숨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 목숨이 지닌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사랑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가치가 더 높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서
사랑을 선택하다보니
내 목숨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위험에 빠진 다른 사람을 구하다보니
자기 목숨을 잃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자기 몸을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셨고
몸소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즉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았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구하는 것은
때로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내 목숨이 중요하기에
위험에 빠진 사람을 보고도 눈을 감습니다.
그를 도와주다가 내 목숨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나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목숨을 구하려는 마음은
이렇듯 우리를 더 큰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유를 잃고
나로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생명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내 삶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내 목숨이 아닌 다른 가치를 선택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그러한 용기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입니다.
우리가 더 큰 가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청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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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8,4-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한 해의 전례력에서 워낙 자주 나오는데다가 사람들 사이에 많이 알려져 있다보니 매번 강론 준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게다가 오늘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아예 당신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뜻을 직접 풀이까지 해 주시니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한 말씀에 뭔가를 덧붙인다는게 사족처럼 느껴지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순 없으니 예수님의 비유풀이 중에 중요한 포인트만 짚어봅니다.
길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은 악마가 마음에서 앗아가 버린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길’은 하느님의 말씀에 무관심한 상태를 의미하지요. 좋은 말씀을 들어도 관심이 없으니 한쪽 귀로 들은 것을 반대쪽 귀로 흘려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분께서 나를 위해 해주신 ‘내 얘기’라 생각하지 않고 ‘남 얘기’로 여기니, 감동도 자기 반성도 없지요. 그러니 귀한 말씀을 악마에게 쉽사리 빼앗겨 버리는 겁니다.
바위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은 뿌리가 없어 한 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간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바위’는 ‘신앙’과 ‘생활’을 분리하는 모습을 가리키지요. 성당에 앉아 있을 때에는 하느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성당 문 밖으로 나가면 그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금새 세속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즉시 실천하여 그것이 주는 기쁨과 보람을 통해 그 말씀이 내 삶 안에 뿌리내리게 해야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는데 그러질 않으니,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고통과 시련을 마주하면 그것을 영적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은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걱정과 재물과 쾌락은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욕심,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가지려 드는 ‘탐욕’으로부터 우러나오지요. 마음 속에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으면 당장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들에는 소홀해지는 게 우리입니다. 그러니 말씀의 씨앗도 내 마음 속 우선순위가 저 끝으로 밀려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쳐박혀 있다가 시들어버리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땅’이란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는 바르고 착한 지향으로 말씀을 듣고, 들은 그 말씀을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워도 인내로써 그 난관을 극복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하느님께 받은 말씀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기쁨과 행복이라는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지요.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공정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당신 뜻을 따르려는 우리의 노력에 넘치도록 후한 ‘덤’을 얹어 돌려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나태함과 자포자기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끝까지 걸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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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52
9월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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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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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작은형제회 최영준 베르나르디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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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풍성한 결실을 맺고자 한다면...>
팔레스티나 지방 농법과 우리의 농법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기 전에 먼저 이랑을 잘 만듭니다. 씨앗이 묻힐 골도 적당히 파줍니다. 그리고 나서 씨앗을 심고 흙을 덮어줍니다.
그러나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들은 파종 때가 오면 큰 씨앗통을 들고 무작위로 여기저기 흩뿌립니다. 재수가 좋으면 좋은 땅에 떨어져 살고,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면 그걸로 끝입니다. 무척이나 성의가 없어 보이지만, 그들 나름의 농법입니다.
눈높이 교육의 전문가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런 구체적인 삶의 배경들을 놓치지 않고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총 4부류의 사람들로 분류하셨습니다.
① 길에 뿌려진 씨: 말씀을 들을 기본적인 준비가 안 된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인 시선, 세속의 논리로만 말씀을 대하니 도무지 먹히지 않습니다. 말씀을 선포해봐야 목만 아플 뿐입니다. 마치 길에 뿌려진 씨 같습니다.
씨를 뿌리자 마자 득달같이 새들이 날아와 먹어치우니 괜한 헛고생입니다. 말씀을 향한 마음이 굳게 닫혀 있으니 그 어떤 명 설교도 허사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② 돌밭에 뿌려진 씨: 선포되는 말씀을 우선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 이해한다는 표정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깊이 뿌리내리지를 못합니다.
씨앗이 돌밭에 뿌려지다보니, 말씀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환난이나 박해, 고통이나 십자가 앞에 즉시 좌절하거나 실망합니다.
③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잡목들을 제거하다 보면 정말 괴로운 것이 가시덤불입니다. 뾰쪽뾰쪽한 가시들을 피해 가면서 일하려니 얼마나 성가신지 모릅니다.
신앙 안에서 가시는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쓸데 없는 걱정이나 근심입니다.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집착입니다. 시선이 온통 그리로 가 있으니 말씀이 제대로 뿌리 내릴 수가 없습니다. 풍성한 결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④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얼마 간의 수분과 바람과 햇빛에 힘을 얻어 무럭무럭 성장을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활짝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말씀을 굳게 믿습니다. 선포되는 말씀과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고 무한 노력을 다합니다.
작은 씨앗 하나, 작은 모종 하나 심었을 뿐인데, 몇 달 지나고 나면 얼마나 큰 결실을 맺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린 결실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기분이 흐뭇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마음도 흐뭇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백배의 열매를 맺는 비옥하고 탐스러운 토양처럼 되고자 한다면, 가만히 앉아있어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우선 인생과 신앙의 농사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가시 덤불들(불신과 의혹, 미움과 상처)을 걷어내야죠. 작물들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돌들(게으름과 나태함, 분노와 악감정)을 말끔히 골라내야 합니다. 양질의 퇴비를 흩뿌린 다음, 뒤집고 또 뒤집어야 합니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 보다 자주 우리 인생의 밭을 뒤집어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물구나무서기를 해야겠습니다. 기존의 고착화되고 편협된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과감히 뒤집어야겠습니다. 그것만이 좋은 삶의 토양을 마련하고, 백배의 열매를 위한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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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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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땅이 되는 길; 하느님은 정의로우시다는 믿음>
몇 년 전 돌아가신 한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1등을 놓쳐본 적이 없고 서울대에 들어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못 하는 것이 없었던 분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을 접고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문제는 이분이 칼뱅의 ‘예정설’에 지나치게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도 예정설을 바탕으로 해석합니다.
예정설은 좋은 땅을 만들어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는 땅이 아니라 농부이고 그 농부가 뿌리는 씨라는 것입니다.
예정설은 주님께서 나쁜 땅도 구원하고 싶으면 구원하고 좋은 땅도 구원하기 싫으면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길이나 돌밭에 씨가 뿌려져도 그 씨가 길을 부드럽게 만들고 돌을 깨서 좋은 땅이 되게도 하며, 그 씨가 뿌려지지 않은 땅은 땅이 좋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씨가 땅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좀 억지가 심합니다.
이분은 결국 좋은 땅이었는지, 나쁜 땅이었는지는 몰라도 우울증을 겪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인을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는 없겠으나, 어쩌면 참 좋은 땅이었음에도 잘못된 믿음으로 점점 나쁜 땅에 되어버린 사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땅을 좋게 만들려는 노력보다는 씨의 힘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좋은 땅이 되어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노력해서 좋은 땅이 되면 그만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믿음입니다. 하늘은 땀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공평한 분이시라 노력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농부는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베트맨으로 유명한 ‘크리스찬 베일’은 궁핍한 가정형편 때문에 연기를 일찍 시작한 배우입니다. 어렸을 때는 명성을 얻었지만, 청소년기는 그저 연기가 평범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의 연기가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 이유는 그의 연기에 대한 자세의 변화 때문입니다.
극사실주의 연기자로 변신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를 메소드(인물 몰입형) 연기라고 하는데, 극 중 인물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는 55kg, 81kg, 100kg의 몸무게를 영화 때마다 맞춰 만들어냈습니다. 싸이코를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매일 싸이코처럼 살았고, 배트맨을 연기하면서는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목을 긁어댔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하루 두 시간씩만 자며 살았습니다.
물론 좀 지나친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혹사하는 데는 하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노력한 만큼 보답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참치 한 캔과 사과 하나만 먹으며 체중을 55kg으로 감량했을 때, 그는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느낀 것입니다.
이런 감정이입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연기 때문에 오는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땅을 만들면 그만큼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씨가 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열매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씨는 어디에나 뿌려집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느님이 공평하다는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흙수저, 금수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은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뇌성마비로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가 ‘나’라는 유명한 시를 쓴 이유는 주님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해주시니 행복하다는 내용입니다. 그때 “공평하신 하느님”이라는 말은 좀처럼 쓸 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저항하다 그 글을 썼을 때 한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가 유명해지자 미국에 사는 한 부부가 그녀를 고쳐주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송명희씨는 “저는 주님께서 주신 몸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주신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해설을 제자들에게만 해 주십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를 반복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신다는 불공평한 말로 들리시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각자의 자유였습니다. 하느님은 그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그래서 가리옷 유다 같은 사람도 사도로 뽑혔을 것입니다. 당신께 더 머물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노력에 합당하게 보답해 주시는 이것은 예정설과 같은 차별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노력에 합당한 보답을 주신다는 주님 정의로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여 맺은 열매를 들고 주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로또처럼 요행을 바라지 맙시다. 열매는 주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노력이 결정합니다.
주님은 노력한 만큼 갚아 주시는 정의롭고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이 믿음이 우리가 점점 더 좋은 땅이 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땀은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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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노래가 기억납니다. 여행 스케치의 ‘별이 진다네’입니다. 26년 전 적성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서울에 다녀오면서 본당에 돌아올 때면 ‘별이 진다네’를 들었습니다. 노래 간주 중에 개구리 울음소리가 나오는데, 본당 근처 논두렁에서 듣던 개구리 울음소리와 비슷했습니다.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가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어제는 별이 졌다네/ 나의 가슴이 무너졌네/ 별은 그저 별일 뿐이야./ 모두 내게 말하지만/ 오늘도 별이 진다네/ 아름다운 나의 별 하나/ 별이 지면 하늘도 슬퍼/ 이렇게 비만 내리는 거야/ 나의 가슴 속에 젖어오는/ 그대 그리움만이/ 이 밤도/ 저 비 되어 나를 또 울리고/ 아름다웠던 우리 옛일을/ 생각해 보면/ 나의 애타는 사랑/ 돌아올 것 같은데/ 나의 꿈은 사라져가고/ 슬픔만이 깊어지는데/ 나의 별은 사라지고/ 어둠만이 짙어가는데/ 어둠만이 짙어가는데.” 2025년 사랑하는 후배, 친구, 선배가 별이 지듯이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사랑하는 동창 이동훈 시몬 신부는 6월 20일에, 아름다운 마음을 지녔던 후배 이동원 야고보 신부는 7월 18일에, 존경하는 선배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님은 8월 15일에,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먹먹한 동창 박종성 그레고리오 신부는 8월 18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며 그리움을 남기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했고, 주님의 제단에서 봉사하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동훈 신부님은 제주도를 사랑했습니다. 동창회장을 맡았을 때는 동창들의 축일을 꼭 챙겨 주었습니다. 동창의 성격과 취향에 맞는 화분 준비해서 찾아왔습니다. 섬세한 성격으로 영신 수련 피정 자료를 정리해 주었고, 신학생들이 읽어야 할 영적 독서를 정리해 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저는 동창 신부의 신발 끈도 풀어줄 자격도 못 됩니다.
이동원 신부님은 신학교에서 같이 배운 기억은 없지만, 신부님의 인품을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화방송에 있을 때입니다. 열정으로 방송을 제작하다가 제작비가 초과하여 고민하던 제작자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어느 날, 제작자를 찾아와서 부족한 만큼의 비용을 주었다고 합니다. 몸이 아파 투병하고 있으면서도 늘 직원을 먼저 챙겼다고 합니다. 이기적인 제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인품입니다. 유경촌 주교님은 1년 선배여서 신학교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연극반도 같이했습니다. 맑은 물에서만 살 수 있는 물고기처럼 주교님은 청빈했습니다. 안개 낀 거리를 걷는 것처럼 혼탁해진 저로서는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영성입니다. 박종성 신부님은 통증을 주는 사랑니와 같은 친구입니다. 첫 보좌 신부를 옆 본당에서 함께 했습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과 함께 산책도 하고, 스키장도 다녔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사제 생활은 기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의 첫 출발은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친구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게 시작했습니다. 고난받는 야훼의 종처럼 34년 사제 생활이 힘들었습니다. 20년이 넘게 휴양해야 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더 이상 슬픔도, 고통도 없는 위로와 위안 얻기를 바랍니다. 친구는 그래도 될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는 별이 졌지만, 천상에서는 새로운 별이 떠 올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별이 되어주는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친절하게도 그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 성서 말씀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밭은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들 마음의 밭에서 좋은 결실을 보려면 우리들 마음의 밭이 좋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밭이 좋은 밭입니까? 잡초가 무성하고, 자갈이 많은 밭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는 아닐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양분이 가득하고, 토질이 좋으며, 잘 다듬어진 밭이 좋은 밭입니다. 우리들 마음의 밭도 그렇게 가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들 마음에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내 마음의 잡초들을 뽑아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의 밭에 기도의 거름, 나눔의 거름을 뿌려 주어야 합니다. 주님! 달릴 길을 다 달렸던 이동훈 시몬, 이동원 야고보, 유경촌 디모테오, 박종성 그레고리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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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아름드리나무도 손톱만 한 씨앗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씨앗도 자기를 품어 주는 흙이 없으면 자라날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 말씀도 엄청난 힘이 있지만, 열매를 맺으려면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함께 도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네 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씨가 길에 떨어진 경우입니다. 이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주위의 여러 요인으로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표면이 딱딱한 길이라면 씨가 속으로 파고들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길은 하느님 말씀이 가르치는 것을 따르기에는 어려운 환경입니다.
둘째로, 씨가 바위에 떨어진 경우입니다. 이 씨는 싹이 자라기는 하지만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지만 묵상하지 않는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묵상을 하며 말씀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게 한다면 내 삶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고 잘못된 선택을 뉘우치며, 새롭게 살아갈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씨가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입니다. 이 씨는 뿌리를 내려 자라기는 하지만 이내 가시덤불 때문에 숨이 막혀 버립니다. 가시덤불은 씨보다 더 빨리, 더 크게 자랍니다. 삶에서 만나는 걱정과 재물과 쾌락 등이 삶에서 마주치는 가시덤불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묵상하며 하루를 어떻게 살지를 결심하지만, 정작 생활에서 이런 가시덤불을 만나면 말씀을 잊고 거기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들은 이 말씀이 내 삶 안에서 때마다 필요한 답을 준다는 것을 온전히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넷째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경우로 말씀을 자신의 생각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잘 받아들이고, 삶에 잘 적용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말씀을 삶에서 되새기고 기억하면서 차근차근 실천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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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23-26: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을 거룩하게 지내며,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우리 선조들을 기리는 날이다. 그들의 순교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진리 증거의 완전한 표현이었다.
1. 말씀 해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카 9,24-26) 순교는 단순히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는 행위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했다: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 Non poena sed causa facit martyrem.”(Sermones, 233,4)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표현한다: “순교는 피의 세례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닮는 삶이다.”(Homiliae in Matthaeum, 57)
순교는 고통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행위이다. 순교는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완전한 신앙의 행위이다. 우리 한국 교회는 성직자 없이도 신자들의 적극적 참여로, 자생적으로 성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거름이 되었다. 그들의 삶은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제자의 자세는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이를 실천하였고, 참된 구원의 삶을 보여 주었다.
2. 교부들의 증언과 교회의 가르침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순교자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생명 최고의 봉헌이다.”(Sermones, 233,4)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순교는 피의 세례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닮는 삶이다. 죽음으로 증거한 사랑은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다.”(Homiliae in Matthaeum, 5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42항은 이렇게 선언한다: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바치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증거로서 교회의 본보기가 된다. 모든 신자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 삶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3. 삶의 적용
오늘의 순교 성인들을 본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나 자신의 나약함과 죄를 직시하고, 하느님 뜻을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는 결단을 실천하여야 한다. 신앙생활 속에서 매일의 십자가를 지며,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참된 생명에 참여하며, 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증거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도 순교 정신을 살아내고, 한국 순교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우리가 되도록 하면 좋겠다.
4. 마침기도
“주님, 한국의 순교 성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믿음과 사랑을 본받게 하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십자가를 지며, 자신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시어, 그들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참된 생명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또한 이 나라와 교회를 위해 순교자의 정신이 살아 숨 쉬도록 지켜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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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사랑이 되어갑니다>
루카 8,4-15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그때에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내가 사랑이 되어갑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님께서
정성스럽게
뿌려주신
내 품의
작고 여린
사랑의 씨앗
잿빛 미움이
앗아가지 못하게
홀로 살길이
버리지 못하게
헛된 탐욕이
짓밟지 못하게
내가
사랑이
되어갑니다
더디더라도
쉼 없이
나
오롯이
사랑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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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떻게 끝나게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4-15)
1) 악마가 와서 말씀을 빼앗아 간다는 말은, 악마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는 뜻이고, ‘말씀’은 듣지 않고 ‘악마의 말’만 듣는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말씀’은 듣지 않고, 인터넷에 떠도는 거짓말만 듣고 그 말을 믿는 것, 그런 것과 같은 경우가 바로 ‘악마의 말’만 듣는 것입니다. 인터넷 자체가 ‘악’은 아닌데, ‘악’에 점령당한 것 같은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거짓말에 쉽게 속는 것은, 거짓말과 참말을 구분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4ㄴ-15)
사탄은 자기가 사탄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는 천사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밝히지 않고 자기들이 하는 말은 참말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앙인들은 더욱더 조심해야 합니다. 사탄은 충실한 신앙인들만을 노리기 때문입니다. 악마에게 홀리지 않으려면, 항상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생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다는 말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지만 ‘실천’은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 또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대로 사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3)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 걱정들과 세속 생활에 마음과 시선을 빼앗기고, 그래서 끝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걱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9-31)
이 말씀에 대해서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걱정이 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고 항의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걱정되니까 걱정하는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까지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고, 저축을 하고, 만일의 일에 대비해서 보험을 드는 등의 일은 ‘선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하고,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4) 비유에 나오는 ‘길, 바위, 가시덤불’은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각 개인이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걸림돌들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날 때에는 백지 상태이고, 살아가면서 ‘좋은 땅’이 되기도 하고, ‘나쁜 땅’이 되기도 합니다. 또 ‘좋은 땅’과 ‘나쁜 땅’의 상태를 왔다 갔다 하기도 합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지도 말고, 방심하거나 자만하지도 말고,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끝까지 잘 가려고 충실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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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좋은 땅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진흙땅에선 미나리가 자라고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랍니다. 기름진 땅에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각기 주어진 땅에서 알맞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도 관리하지 않을 때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수고와 땀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준비된 씨앗도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마음의 밭은 선합니다. 선하신 분께서 당신의 숨, 얼을 불어 넣어주셨으니 당연히 선합니다.
좋은 밭입니다. 이 좋은 땅이 어느새 길바닥으로, 바위로, 가시덤불로, 방치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땅을 결코, 쓸모없는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다 좋은 땅이 분명한데 관리를 하지 못해 폐허가 된다면 그 책임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할 땅이라면 지금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잃어버리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주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루카 8,15)을 두고 하는 말이니만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바닥이라는, 바위라는, 가시덤불이라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워 말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발 내딛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이신 그분을 만나려면 사랑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하느님의 숨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왜 주저하고 좋은 밭을 묵혀 두려 하십니까?
풍성한 열매를 기대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신 말씀입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듣는 데 익숙하다면 들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내 말을 적게 하게 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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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순교한 이들 중에 11명의 성직자와 92명의 평신도, 모두 103 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고, 그 외에도 약 1만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성인품에 오르지 않은 모든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으며, 진정한 사회 개혁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오늘 제1독서는 의인들이 비록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며, 제2독서는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랑의 대헌장'을 들려줍니다. 이는 순교의 본질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교부 테리툴리아누스가 말한대로,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하느님 사랑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선조들이 걸은 이 '순교'의 길은 비록 그 모습은 다르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오늘 복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순교와 희생의 삶이 일회적이 아닌 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교는 매일의 삶 속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사건이요, 또한 '참된 삶은 긴 순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 순교와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의 녹색 순교로 죽음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는 것은 죽음에로 부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순교 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 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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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 당신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이 길을 갑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을 믿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께 신뢰를 두게 하소서.
제 몸에 당신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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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나는 어떤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받아야 할 것과 받지 말아야 할 것을 잘 식별하는 것도 그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돈이나 물건을 준다면 그것이 뇌물인지 선물인지 잘 식별하고, 뇌물이면 단호하게 받지 말아야 하고 선물이면 감사하게 잘 받아야겠지요. 그래야 그 사람은 지혜롭고 그래야 행복하겠지요.
제가 자주 얘기하는 상처를 예로 들 수도 있겠습니다. 누가 상처를 줘서 상처받았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때 저는 ‘준다고 다 받니?’ 하고 핀잔을 줍니다.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고 상처 준 사람에게 탓을 돌리는데 어렸을 때는 혹 그럴 수 있지만 커서도 그러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 아무리 상처를 줘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하고 지혜롭지요.
그런데 상처는 이렇게 줘도 받지 말아야 지혜롭고 성숙한 것인데 박해는 받는 사람이 지혜롭고 잘 받는 사람이 성숙하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쓸데없이 박해받을 필요는 없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박해받고,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하여 곧 나의 행복을 위해 박해받아야겠지요.
이렇게 하느님 사랑 때문에 박해받으면 벌이나 시련에 관한 생각이 바뀝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것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국 순교자들이 받은 박해를 벌 받은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당시 벌을 내린 것은 임금이고 그러니 임금으로부터 벌을 받는 거지요.
그러나 순교자들은 임금의 벌이 아니라 천벌을 받은 겁니다. 우리는 천벌을 나쁘게 생각하고 가장 중한 벌을 천벌이라고 하지만 순교자들은 임금의 벌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벌을 기꺼이 받았지요.
순교자들은 벌을 벌이 아니라 상이요 월계관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실은 벌이 아니라 상을 하느님께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이렇게 지혜롭게 살았습니다. 벌을 하느님의 상으로 받았고, 모욕을 하느님의 칭찬으로 받았으며, 세상 시련을 천상 낙원을 위한 단련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니 고통을 받아 고생스럽긴 해도 결코 불행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했으며 단련이 고달프긴 해도 고달픔만큼의 큰 기쁨과 고달픔보다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늘 하느님이 계셨기 때문이고, 그것은 순교자들이 늘 하느님을 관상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받아도 고통만 보지 않고 그 고통 안에 계신 하느님과 고통 너머의 하느님 사랑과 상급을 관상했으며 그래서 사랑으로 현재 행복했고 상급으로 미래 행복을 예감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생스럽기만 하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관상을 할 줄 모르고 보이는 대로만 보는 사람이고 예감을 할 줄 모르고 현재의 고통과 불행만 보는 사람입니다.
누가 지혜롭고 행복합니까?
박해를 받은 순교자들입니까?
박해를 거부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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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내 장애의 중증 정도는?>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외치셨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비유를 듣고 오늘은 "외치셨다."는 말씀이 유독 마음에 꽂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외치셨을까요? 외치지 않으면 못 듣기에 그러셨을까요? 못 듣는 것입니까? 안 듣는 것입니까?
어법상 못 듣는 것은 능력 부족인 것이고 안 듣는 것은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안 듣는 것 그러니까 의지 부족이거나 의지 없음이기에 안 듣는 것이 더 문제겠습니다.
물리적으로 얘기하면 못 듣는 것은 귀에 장애가 있는 것이고, 안 듣는 것은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는 것이니 안 듣는 것이 더 문제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외치시며 들으라는 것은 당신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말씀이니 영적인 귀가 있으면 들으라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귀는 멀쩡이 뚤려있지만, 영적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영적 장애를 고치고 당신 말씀을 들으라고 외치시는 것인데 그렇다면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영적인 장애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 주님께서 예로 드신 세 가지인데 그중 첫 번째가 장애가 제일 심한 불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씨가 길에 떨어진 것을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풀이하십니다.
믿지 못함은 영적인 장애 중에서 제일 중증의 장애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교만과 제일 관련이 클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하느님도 안중에 없기에 하느님 말씀을 무시하고 길바닥에 내다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의 성경 책을 내다 태워버리는 것처럼.
두 번째 영적 장애는 믿기는 하지만 시련에 믿음이 흔들리는 경우입니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두 번째 장애는 불신은 아니지만 약신弱信입니다. 약신이란 물론 제가 만들어낸 말인데 약한 믿음이고, 약한 믿음은 시련에 약한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되는, 하느님을 믿겠다고 세례를 받긴 했는데 집안에 우환이 닥치거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점쟁이한테 갔더니 예수를 믿어서 그렇다는 말을 들으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그런 믿음입니다.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순교와 배교로 갈리게 되는데 박해 곧 시련은 이렇게 순교와 배교로 갈리게 하지요. 그렇기에 하느님께서는 종종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시는데 시련의 때에 우리는 이 시련의 의미를 영적으로 깨닫고 이 시련을 오히려 영적 건강과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영적 장애는 가시덤불 속의 믿음인데 제 생각에 욕심 때문에 그리된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풀이하십니다.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식 걱정과 같은 것은 사랑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욕심이 많을 때 걱정이 많은 법이고, 쾌락도 육적인 욕구와 만족을 채우려는 것이니 우리는 오늘 수없이 걱정하며 믿는 나는 아닌지 성찰하고, 욕심에서 비롯된 걱정들을 가난으로 비워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고, 더 넓게는 내 영적 장애의 중증 정도는 어느 정도인지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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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신앙과 사랑은
시들지 않는
생명으로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순교는
패배가 아니라,
신앙의 빛나는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순교자들의
신앙 유산을
기억합니다.
이 땅의 순교는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새롭게
발견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세상적 안전과
이익을 내려놓고,
복음과 예수님을
기쁘게
선택한 그들의
결단을 만납니다.
자기 고집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는
순간이 오늘날
우리 삶 속의
작은 순교입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생명을 걸고
지켜내는
사랑의 참된
고백입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교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이 땅에 스며들어
한국 교회를
자라게 하고
우리에게 신앙을
이어주었습니다.
순교의 본질은
죽음이 아니라,
신앙을 향한
가장 뜨거운
사랑의
증언입니다.
삶의 의미는
목적과
가치를 위해
우리 존재를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살아 있는
순간 전체가
순교의
연속이었음을
그들은
보여주었습니다.
순교자들은
국가와
사회적
압력 앞에서도
인간의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지킨
상징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하느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그리고
모든 순교자들의
신앙과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순교의 오늘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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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가 전하는 첫 선포, 하느님의 향기로 물들다!>
(최원철 티모테오 신부/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https://youtu.be/PkjlPKDgMr8?si=pRYX3faj5fMr5a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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