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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는, 우리는.'
...
..
나는 예쁘다. 나는 공부를 잘한다. 나는 모두의 사랑을 받는다.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겸손해지고 싶지도 않다. 사실인 거니까.
째깍째깍거리는 텅 빈 교실에는 시계의 규칙적인 소리만이 울려퍼졌고
선생님이 올 거라고 말하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던 그는 계속 오지 않았다.
별 같잖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한 여고생이 자살을 하고 나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학교가 내린 결정. 믿음직만한 학생을 선정해 고민상담사로 나서는 것.
비어있는 상담실 안에 화기를 불어넣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아이들은 슬쩍 투표함에 종이를 넣고서 지나가는 날 보고 웃곤 했다.
그 때는 저 얘들이 왜 그러나 똑같이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해주었는데
내가 압도한 표차이로 상담사가 되었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아이들 앞에서 싱긋. 선생님들 앞에서 싱긋.
아, 제가 정말 상담사가 된거에요? 우와. 굉장한 일이네요.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법을 제시해주고.
...
..
바보 같은 일이다.
이 상담실은 정말 답답하게 생겼다. 풀릴 일도 풀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방이 작년의 교과서들이나 사물함들로 꽉 채워져있고 굉장히 좁았다.
게다가 전구는 언제 갈아끼운 게 마지막이었던지 깜빡깜빡거리는 게 불안했다.
이미 두 개의 전구 중 하나는 방금 깜빡거리다가 나가버려 교실이 어두웠다.
약속시간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 5교시가 시작된 지 한 20분쯤 되었을 것이다.
따각따각.
따각따각.
선생님은 내게 이야기가 길어지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3학년에 올라갈테고 수업할 내용도 별로 없을테니.
살짝 지루하긴 하지만 아이들이 드글대는 그 교실 안에서 속으로는 역겨워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행복하단 듯 친절한 웃음 짓는 것보다는 나았다.
손목시계를 손가락으로 따각따각 두드리다가 이어폰을 귀에 꽂고서 일어섰다.
그 아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열일곱살이라고 했다.
나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학교의 스타였다.
얼굴도 잘 생겼고 공부도 잘 했으며 목소리는 여자들의 마음을 녹였다.
흔히들 말하는 ‘환상의 기럭지’의 소유자였으며 하는 행동도 젠틀했다.
그는 노래를 정말 죽여주게 잘 했는데 학교축제 때만 되면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선생님의 퇴임식에서 그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더니만
그는 쉽게 그에 응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올라가 소리를 꽥 질러댔다.
분명 노래를 부르긴 부른 거였는데 가사를 알아들은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음정, 박자, 가사를 모두 무시한 채 그는 마이크를 잡고 방방 뛰며 소리를 질렀다.
분명히 무언가를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같았는데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 아니다. 딱 두 마디. 선생님들이며 우리 모두를 뻥지게 만들었던 두 마디.
‘이주희 명복!’이라는 두 마디.
그 두마디만 우리는 알아들었다. 선생님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이주희 명복이라고
꽥 외치고서 강당을 서늘하게 만든 그를 아래로 잡아끌었고 그는 순순히 내려왔다.
이주희는 얼마 전 자살한 여고생.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는
유서를 쓴 채 수면제 한통을 꿀꺽 삼키고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어버린 그녀였다.
내가 이렇게 시시껄렁한 고민상담사가 되어야만 했던 것도 다 그녀 때문이었다.
의자에 돌처럼 앉아있은지가 벌써 두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엉덩이가 아파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며 창가로 다가갔다.
쾅.
다른 교실과는 다르게 여닫이문인 낡은 문이 거칠게 열리고
열린 문 저쪽에는 가방을 덜렁 메고 있는 건조한 눈의 그가 있었다.
....
..
그는 계속해서 의자를 뒤로, 앞으로 왔다갔다 하며 라이터를 가지고 놀았다.
원래 저런 애였던가. 나는 그에게 말을 시키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사실 고민상담사로서 할 일은 하자라는 생각에 그에게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무시한 채 자리에 와 털썩 앉아버렸다.
그에게서 몸을 아주 돌려 창가쪽을 돌아보며 mp3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딩동댕동하는 소리가 들렸고 조금 있으면 선생님이 이 곳에 찾아와 얼마만큼의
이야기를 했냐고 물을게 뻔하단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가 이어폰을 빼냈다.
몸을 그에게 돌려 바르게 앉아 잠시동안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도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했다. 우뚝. 그의 의자가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싱긋 웃어보이자 그도 싱긋 웃었다. 그는 다시 의자를 앞뒤로 움직였고 멈췄다
생각했던 라이터의 까딱하는 소리도 다시 규칙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짜증나.
“우선 서로에 대해 알아볼까?”
“...”
“난 민효제야. 너보다 한 살 많고.”
쉬는 시간마다 들리겠다던 선생님은 왠일인지 들리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말 걸지 말걸 하고 그의 입을 보며 후회했다.
굳게 닫힌 그 입은 절대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는 듯 했고
푹 숙인 채 라이터만 바라보는 그의 눈은 날 바라보지 않겠다는 듯 했다.
속으로는 그의 머리를 한 대 쳐주며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쳐주고 싶지만 민효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언니가 있고 엄마는 유명한 작가이며 엄마가 쓴 책은 무엇무엇이 있고
아빠는 사진작가인데 아빠가 내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우스겟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링컨이라고 그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가슴이 울렁거리고 벅찬 느낌을 느꼈다고 하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는 정확히 나 하나만을 담고 있었다.
잠시 갑작스레 고개를 든 채 날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 때문에 놀라
혼자서 떠들던 것과 억지로 짓고 있던 웃음을 거둔 채 뻥져있었다.
“나는…이주희.”
“뭐?”
“내가 존경하는 사람, 부러워하는 사람. 이주희.”
그는 피식 웃더니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비어있는 것 같은 책가방을 들고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
“선재라 있잖아. 걔 진짜 왜 그런데? 미친 거 아니야?”
“그러게. 확 깨더라, 진짜. 아우. 정 떨어져.”
그는 일주일 동안 상담실에 오지 않았고 나는 일주일 동안 아무도
오지 않는 상담실에 홀로 앉아 음악을 듣거나 학원숙제를 했다.
선생님도 상담실에 계속 오는 게 꽤나 귀찮았던지 나를 믿는다며, 선생님이
들리지 않아도 잘 할거라 생각한다고 재차 말해주며 상담실에 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고민상담사 만들자고 제일 먼저 외치고, 그로 인해 학생들에게
많은 음료수며 과자들을 챙긴 게 당신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하진 않았다.
내가 미쳤나?
...
상담실에서 빠져나와 친구가 힘들겠다며 주고 간 막대사탕을 입 안에
굴리며 교실에 가고 있는데 앞에 있는 아이들이 익숙한 이름을 꺼냈다.
그래, 그의 이름이었다. 선재라. 아이들의 이름에 쉴새없이 오르내리는 이름.
그는 아직도 학교에 인기스타이긴 했지만 멋쟁이가 아닌 미치광이로 통했다.
그의 팬카페까지 운영하고 있던 아이도 정 떨어진다며 선재라를 멀리했으며
그를 예뻐라 하던 선생님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아예 그를 무시하는 상황이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싶다며 음악시간만 되면 녹음을 하던 아이들도 이제는 노래만
불러라 하면 일부러 크게 코를 골거나 소리를 지르는 그의 입을 꼬매고만 싶다고 했다.
그가 상담실에 나중에 온다면 담담한 얼굴로 그에게 말해줄 생각이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빨리 정신 차리고 나도 좀 편해져 보자고. 제.발.
그와 상담하는 것만 끝나면 첫번째 고민상담사로서의 나는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다.
그 뒤로 다시 투표해서 두번째도 내가 되면 이번에는 공부 핑계를 댈 작정이었다.
“어? 막대사탕 드시네.”
“아. 해라야.”
“조금 안 어울리는 그림이긴 하네요.”
갑작스레 내 앞에 튀어나와서 눈썹을 찡그리며 내가 막대사탕을
입 안에 넣고 굴리는 게 안 어울린다고 말한 그녀는 휙 사라져버렸다.
거울을 바라봤다. 우아하고 딱딱해보이는 내게 조금 안 어울리기는 했다.
교실로 가려다가 갑자기 아이들 틈에 섞이기 싫어 다시 상담실로 갔다.
나는 피아노와 첼로, 바이올린 연주를 잘 했는데 그 때문에 아이들은
음악실기시험이 다가오면 나를 부러움 반, 동경 반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런 내가 드럼이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아이들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모르는 문제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내게 물어보는 바람에
아주 엉터리로 알려줬는데 그들은 내가 잠시 헷갈렸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효제가 그 문제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라며 그들은 제멋대로 단정지은 것이다.
정말로 몰랐는데. 어째서 그들은 내가 그 문제를 모를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상담실 한 쪽 구석에 무슨 사무실에서 증정이라고 쓰여져 있는 먼지가
뿌옇게 낀 거울에 나의 모습을 비춰보였다. 거울 속엔 내가 있었다.
막대사탕을 입에서 살살 굴리자 거울 속의 막대사탕도 살살 굴러갔다.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자 거울 속의 내 고개도 이리저리 움직였다.
눈을 확 감자 앞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울 속의 나도 눈을 감고 있을테지.
눈을 다시 뜨고서 나는 흠칫 놀랐다. 거울 속엔 나만 있는 게 아니었기에.
“선재라.”
내게 엄청 가까이 다가와 거울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그도 있었다.
나무라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먹다 만 막대사탕을 휴지통에 버렸다.
내가 자리로 가 의자를 빼고 치마가 주름이 생길까 손으로 펴고 의자를
끌어내 빼 앉는 것 모두를 그는 창문에 걸터앉은 채 담담히 응시했다.
기분이 그렇게 썩 좋지만은 않아 그에게 까딱 앞에 앉으라고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그는 저번에도 그랬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더이상 날 보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야, 넌?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갑작스럽게 화가 나서 그에게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역시나 그는 입을 열어 내게 속시원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래. 선생님한테 억지로 끌려와 상담 받는 게 기분 나쁘다 이거지.
나도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구. 하지만 이미지 관리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팔짱을 끼고서 화를 삭히지 못하던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야
다시 항상 내가 짓는 친절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약간 어색했다.
그가 앉아있어야 할 빈 자리를 향해 싱긋 웃어본 다음 다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날 빤히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나는 미세하게 또다시 흠칫했다. 마음에 안 들어.
“선재라…하면 뭐가 떠올라요?”
선재라.
멋진 노래솜씨. 화려한 드럼연주솜씨. 연예인 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수십번도 더 받아봤다는 소문이 들릴 만큼 멋진 외모. 젠틀한 행동.
물론 이건 옛 선재라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것들이고 지금은.
수업 빼먹는 것을 밥 먹듯. 선생님 앞에서도 담배와 라이터를 피는 개깡.
노래를 부르라면 코를 골거나 소리를 지르는 미치광이. 그리고, 이주희.
왜 이주희가 떠올랐는지는 확실하게 모른다. 아마도 그가 존경하는 사람이자
부러워하는 사람이 이주희이고 저번에 강당에서 이주희 명복을 외쳤기 때문이겠지.
그를 바라보며 나는 차근차근 국어선생님이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이라 칭찬해주셨던 그런 목소리와 발음으로 그에게 하나씩 말해줬다.
“내가 누구에요?”
“아까 말해줬잖아.”
미치광이 같고 노래만 부르라면 코 골거나 그런 애.
아까 말해줬잖아라고 짜증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날 새까만 눈동자로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는 나가버렸다.
..
미친놈.
\.
이주희란 아이를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었다. 같은 수예부였다.
그 아이와 친구는 항상 나의 앞에 앉았는데 수다 떨기를 좋아했다.
한 시간 동안 나는 그 시간 동안 할만큼 작품을 했는데 그 아이와 친구는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바늘에는 아예 손도 데지 않곤 했다.
나는 남의 이야기, 특히 여고생들이 하는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내 귀가
들어 괜히 어지러워 지지 않도록 mp3를 듣곤 했는데 그 날은 친구가 가져가버렸다.
mp3를 빌려간 친구는 물건을 한 번 가져가면 꼭 고장내기 일쑤인 아이였으므로
그닥 빌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속 좁은 아이란 소리를 듣기는 싫었다.
아무튼 그 날 나는 귀를 막을 그 무엇도 없었으므로 원치 않게 그 아이들의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될 거란 생각에 그닥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기저기 실들을 찾고 있는데 얼굴이 그닥 밝지 않은 그 아이와 여기저기
노란고름이 잡힌 여드름투성이인 친구가 내 앞에 앉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날 그 아이들의 이야기는 연예인이나 어느 옷가게가 더 값이 싼가하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주희의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였다.
이주희는 더이상 성적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말했다.
뭐가 어때서. 너는 공부 잘하잖아. 머리도 좋으면서. 암기력도 짱이고.
그 뒤로 이주희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고민 털어놓기를 그만 했다.
그 친구는 이주희를 흔들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엔 친구가 삐져버렸다.
...
..
상담실에서 복잡한 수학기호들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날이 떠올랐다.
죽은 아이 생각 해봤자 기분만 복잡해진단 생각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시 수학책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기저기 어지럽게 적혀있는 숫자들이
나의 눈과 머리를 아프게 해 결국에는 샤프를 놓고 머리를 쥐어싸맸다.
\.
그가 꽤나 오랜만에 상담실에 들어왔다.
나는 그를 무시하기로 결심했던 터였다.
나는 그저 고개를 책상 위 영어 독해 책에 콕 쳐박고서 소리만으로
그가 의자에 앉았다는 걸 느끼고 느낌만으로 날 바라보고 있단 걸 느꼈다.
그의 눈빛이 나의 얼굴에 그대로 박히는 걸 느끼고서 얼굴이 후끈해지고
영어독해가 한 곳에서 멈춰 더이상 나가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진 않았다.
그가 답답해서 먼저 말을 건네게 해야지. 먼저 봐달라고 하게 해야지.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그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멋진 노래였다.
고개를 슬쩍 들어 그를 바라보면 그는 노래를 뚝 멈추고 날 바라봤다.
그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음정, 박자 모두 무시한 것이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봤는데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 날 향해 말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나. 노래를 못 부르는 것도 나.”
잘 생긴 것도 나. 못 생긴 것도 나.
공부를 잘 하는 것도 나. 공부를 못하는 것도 나.
...
또르르.
내 손에 꽉 쥐어져 있던 샤프가 또르르 책상 저편으로 굴러갔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자기 쪽으로 굴러온 샤프를 잡아줬다.
그랬다. 그가 노래를 잘 부르던, 못 부르던 그는 변함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무엇을 느끼기를 원하는건데?
나의 앞에 톡하고 샤프게 가볍게 떨어졌다.
“그 날. 내가 어떻게 대답했어야 하는데?”
문을 향해 걸어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봤다.
그 날. 넌 누구냐는 대답에 어떻게 대답했어야 하는데?
그는 새까만 눈동자로 날 응시하며 대답했다.
“난 누나가 좋아요.”
쭉.
삼년 전부터 계속 좋아했어요.
한 번도 그 마음 변한 적 없이 쭉.
나는 누나를 그렇게 좋아해왔어요.
...
그렇게.
누나를.
\.
나는 고민상담사를 더이상 하지 못하겠다고 선생님께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고 선생님은 그럴 것 같았다며 의외로 쉽게 그만하라고 해주셨다.
상담실은 아예 돌아보지도 않았고 나의 머릿 속에서 그를 지워버렸다.
아이들과 다시 웃고 떠들었고 드럼을 배우지 않고 막대사탕을 먹지 않았다.
“야. 이거 선재라가 너 주라던데?”
그닥 좋아하지 않는 친구와 대화하며 억지로 웃어주고 있었는데
어떤 아이가 내게 다가오며 볼품없는 편지를 건네주고 가버렸다.
대화를 중단할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자리를 슬쩍 피했다.
휴지통에 버릴까 하다가 무슨 이야기가 쓰여져 있을까 궁금해 펴보았다.
..
이주희는 적어도 알고 있었어요. 무엇이 잘못 되어있는가를.
자신은 그냥 자신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완벽한 자신을 좋아한단 걸.
그래서 존경했고 부러웠어요. 그 아이가 유서에 적었던 말. 난 나야.
그거. 죽으면서라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존경했고 부러웠어요.
..
편지를 쥔 손에 꽉 힘을 주고서 아이들이 곧 있으면 수업 시작하는데
어디를 가냐는 말을 무시한 채 성큼성큼 상담실을 향해 걸어갔다.
..
막대사탕을 먹는 누나도 누나고 드럼 배우고 싶다는 누나도 누나고
모르는 문제가 있어 걱정하는 누나도 누나고 화를 내는 누나도 누나에요.
..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상담실의 문을 열면 창가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는 선재라가 있었다. 눈이 흐려졌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한걸음. 또 한 걸음.
“노래를 잘 부르는 너도 너고, 노래를 못 부르는 너도 너고
공부를 잘 하는 너도 너고, 공부를 못하는 너도 너야.”
“...”
“넌 그냥 너고 난 네가 좋아.”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입술에 살짝 나의 입술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서 울음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난 누구야?”
“누나는 누나에요.”
너는 너.
나는 나.
우리는 우리.
그냥 있는 그대로.
그대로 사랑받기를 원해.
-
바로 어제까지 장편소설로 쓸
생각을 하고 타카페에서 연재했던
소설을 단편으로 써본 거에요.
갑자기 생각나서 얼마 시간 걸리지도
않고 쓴거라 많이 부실하고 어색해요.
첫댓글 ..뭔가 깨닫게 되는 글이에요...그래..나는 나지..나를 싸고있는 겉모습으로 판단받고 싶지않은데..그냥 나 자신으로 봐주면 좋은데.....선입견과 편견에 세상,,-_-
하키님의 말이 맞다고 느껴져요. 편견. 편견이란 마치 보이지않는벽과같죠. 앞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닥쳐오면 이미 그곳안엔 내가있죠. 편견이란 보이지않는벽안에.
와 멋진글이에요 잘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