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5일 연중 제6주일 .”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마르코 1,40-45)
Moved with pity, he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him, and said to him, “I do will it. Be made clean.”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and he was made clean.
말씀의 초대 율법에 따르면, 누구에게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그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야 하고 사제는 그를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하였다. 부정한 이로 선언된 사람은 공동체와 격리되어 혼자 살아야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했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코린토 신자들도 그를 본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다 나은 나병 환자에게 율법에 따라 사제에게 가서 자기가 나았음을 입증해 보이라고 명하신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시켜 주신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정상적으로 사회생활과 종교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복음). ☆☆☆ 오늘의 묵상 맹자는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를 우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근거로 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린아이를 보았다면 누구나 놀라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이를 구하려 했을 것입니다. 이는 그 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거나, 비난을 들을까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맹자는 그 이유가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 어려움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못 본 척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라고 설명합니다. 곧 사람은 누구나 불쌍히 여기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져 위험할 때 달려가 그 아이를 구하려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맹자』, 공손추 편 참조). 어느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병을 깨끗이 해 주십사고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딱한 처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을 깨끗이 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행에 놓인 사람이나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시면 연민의 마음,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사랑을 지니신 참사람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거나, 기쁜 일을 보면 이를 널리 알리고 싶어서 잠시도 가만있을 수 없나 봅니다. 치유를 받은 그 환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널리 퍼뜨립니다. ‘자비’(compassion)라는 말은 ‘고통을 함께한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 말 ‘compassio’에서 나왔습니다. 자비는 ‘남의 고민을 덜어 주고 싶은 마음, 남의 고통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자비는 남의 아픔에 함께하는 것, 그 아픔에 대하여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비로운 사람은 남이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고, 외로운 사람이 있으면 그와 함께 외로움을 나눕니다. 그런 자비로운 마음이 분명히 나에게도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선한 마음, 자비로운 마음이 불행에 빠진 이웃에게 전해진다면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날 것입니다.
내 '권위'를 격상시키려면 -서광석신부-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자신을 고쳐 달라고 애원한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깨끗하게 되라"고 말씀하시니 환자는 나병이 사라지고 깨끗이 치유된다.
나병은 정신질환이나 일반적 질병과는 달리 그 사람 본래 모습과 다른 외형적 변화를 가져온다. 사람들 대부분 그런 나병환자를 피하거나 차별해 처우한다. 그러나 이것은 외모를 보고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미성숙한 태도이다. 인간의 존엄한 가치는 외면보다는 내면에 있고, 그 겉모양이 어떻든 무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심은 당신 피조물에게 사랑을 표시하심과 아울러 권위를 보여주신 것이다.
권위는 라틴어로 '만든 자', '저작자', 또는 '창조자'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창조자들은 혼신을 다해 작품을 만든다. 작품에 대한 애정과 사랑 역시 깊다. 이들의 창작하는 달란트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작품에 대해 가지는 애정 또한 창조주 하느님이 당신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단테는 예술가를 '하느님의 조카'라고 칭하기도 했다. 바다에서 살던 새 한 마리가 성 밖에 날아와 앉았다. 이런 새를 처음 본 왕은 그것을 신조(神鳥)라고 생각했다. 신하를 시켜 잡아와 사당을 지어 새를 모셨다. 왕은 그 새를 위해 매일같이 사람들을 불렀다. 요란하게 풍악을 울리며 진수성찬을 차려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왕의 호의에 새는 오히려 겁을 먹었다. 갈수록 두려움에 떨던 새는 온종일 고기 한 점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며칠 후 죽었다.
이 이야기에서 세상의 권력자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한 예를 볼 수 있다. 현세적 권위는 권력자의 주관적 의도가 우월시 되고 그 대상인 객체의 고유한 특성이 배려되지 않는다. 왕이 새를 사당에 모신 것은 생태에 맞게 잘 기른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원의대로 다루며 죽음으로 몰고 간 셈이다.
예화에서 왕은 주위 사람들 의견이나 판단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권력을 독단적으로 행사한 세상 권위자의 전형적 모델이다. 천차만별인 피조물을 그 각자의 본질과 특성에 맞게 고유한 방법으로 보살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권위와는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권력은 남을 지배하여 강제로 복종시키는 힘이지만 권위는 어떤 분야에 뛰어남을 보여 남이 스스로 신뢰하며 복종하게 만드는 힘이다. 즉, 권위는 힘을 행사하는 사람의 인품 또는 품위라면 권력은 힘의 강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신 사랑에 배치되는 권력에 대해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태 20,25)고 말씀하시며 배척하신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라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당신 곁으로 부르시고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4-35)고 하셨다.
사람을 진심으로 섬긴다는 것은 관용과 배려,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 고유한 권위인 사랑이다. 또 창조주의 자리인 옥좌를 비우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인간 삶의 자리로 옮기신 예수님 강생 신비다. 즉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은 그분의 최고 권위를 극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우리 각자는 가정과 사회, 신앙 공동체 어느 분야에 소속돼 주어진 소임과 그것에 상응하는 권위를 가지고 생활한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작품인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충실한 종이 주인을 섬기듯 당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내어 주셨다.
우리도 서로 배려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려 노력하여 그리스도인의 품위, 곧 권위를 격상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 -장재봉신부- 외딴 곳으로 내몰린 예수님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과 치유 받은 나병 환자의 대화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인간의 근본적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몸서리치는 상황을 살아가는 처지에서도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지도 못하며 고작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한 발 물러, 당신의 뜻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고백하는 인간의 품새가 수채화처럼 곱습니다. 아울러 그 가냘픈 청을 고스란히 받아 “하고자 하니”라고 화답해 주시는 주님의 연민에 가슴이 젖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주님의 당부를 어길 수밖에 없었던 나병 환자의 감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치유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린 일이 그분의 길에 걸림이 되었다는 점이 의아합니다. 과연 그분 사랑을 체험한 감동과 감격을 ‘어쩌란 것인지’ 여쭙게 됩니다. 이 기쁨을 왜 숨겨야하는지, 묻게 됩니다.
한국에는 많은 종교가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전 세계의 종교계가 주목하고 부러워합니다. 이처럼 많은 종교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을 보면 상대를 존중하는 민족성을 알 것 같다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종교학자들의 분석은 판이합니다. 한국 땅에 많은 종교가 수용되는 까닭은 어떤 종교든 한국에 뿌리 내리면 여지없이 ‘기복신앙’으로 둔갑을 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믿음은 곧 복 받는’ 것으로 변질된 현상이라는 분석입니다.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은 삶의 고통을 없애주는 비결이 아니며 고난을 면제받는 도구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이한 현상에 마음이 쏠려서 이적과 기적에 솔깃하여 몰려다니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그분께서 일하지 못하도록 그분의 손발을 꽁꽁 묶는 행태입니다. 그분의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못난 짓입니다. 기적이 그분 복음의 전부였다면 그분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온 세상을 개벽시키셨을 것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세상의 고통과 고난이 믿음과 사랑의 걸림돌이라면 깡그리 없애실 수 있었다는 걸 진정 모르십니까? 구일기도를 하면 “무슨 소원이든 다 이루어진다”느니 어느 성지의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며 쫓아다니는 맹신이야말로 그분의 진리를 얼룩지게 합니다. 이렇게 오늘도 그분은 “외딴 곳”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극구 ‘잘못 되고’ ‘오도된’ 주님의 뜻임을 선명히 밝힌 곳에, 쉬쉬대며 쫓아가는 음험한 작태가 어찌 빛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지요? ‘낫더라’고 ‘들어 주더라’며 웅성대니 어찌 잡신을 섬기는 미신행위가 아닐지요. 뭔 냄새가 난다고 코를 킁킁대며 성모님을 귀신 취급하니, 망발입니다. 성모상에서 피눈물을 보겠다고 교회의 명령에 순명치 않는 것마저 마치 선택받고 박해 받는 믿음인양 떠벌리는 일, 중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나 같은 죄인’이 그분의 은총으로 구원된 사실입니다. 놀랍고 기이한 은총으로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승격된 사건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 무수한 허물을 지닌 내가 그분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도구로 변화된 일이 기적입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소문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만 사제에게” 가서 속죄 예식을 거행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많은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교회와 사제에게 부여하신 권위에 복종할 것을 명하신 것이라 헤아립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행위가 그분의 뜻을 가로막고 태클을 걸 수 있습니다. 그분의 움직임을 불편하고 옹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몸소 세우신 교회의 가르침을 묵살하고 무시하는 헛된 행위를 꼼꼼히 살펴야 할 이유입니다. 이 때문에 그분의 자녀는 복음만 자랑합니다.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별 수 없는 존재’가 변화되어 살게 된 일만을 증거합니다. 땅의 것에 얽매여 ‘낫고’ ‘얻고’ ‘되고’ ‘이루는’ 차원을 넘어 ‘변화된 나’의 행복을 기쁘게 누립니다. 참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분께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겸손된 기도를 올립니다. 이렇게 ‘말씀과 은총으로 변화된 나의 삶’으로 기적의 증인이 된 일만으로 충분히 감격하며 살아갑니다. 질병의 다양한 원인과 치유 -문종원신부-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질병으로 부터 오는 고통은 어느 한정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질병에 걸리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매일 병으 로 시달립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고통 을 받습니다. 결국에는 우리 대부분이 병으로 죽게 됩니 다. 그러면 질병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우리에 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아니면 질병은 우리의 삶 안에서 전혀 의미가 없습니까?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질병은 죄에 대한 벌이나 보속으 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구약성 경에서는 엘리사에 의해서 나아만이 치유된 것이(2열왕 5 장) 두드러지게 드러날 뿐 의사나 치유자, 치유에 관한 언 급이 거의 없습니다. 질병에 관한 이러한 신학적인 관점은 예수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으며 제자들의 질문에서 잘 나타납니다.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 로 태어났습니까?”(요한 9,2) 질문은 그들이 여전히 죄 때 문에 질병이 생겼다고 믿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신념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결과로 질병이 생겼다고 하는 제자 들의 견해를 거부하셨습니다.(요한 9,1-7 참조)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이 경우에 하느님의 놀라운 일 이란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베푸신 치유를 말합니다. 또 한, 병이나 장애에도 불구하고 고통 속에서도 창조적으로 삶을 이끌어감으로써 삶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헬렌 켈러와 같은 사람). 왜냐하면 하느님의 능력 과 창조성은 우리가 고통의 한복판에 있을 때 보다 더 선 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희랍 사고에서 치유활동,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 그리 고 땅을 일구는 행위는 서로 관련이 있었습니다. 치유는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건강하여지 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된 여인(루카 8,43-48 참조)에게 말씀하실 때 선택한 단어는 의학적인 용어가 아니고 sozo라는 영적ㆍ종교적인 용어입니다. 이는 모든 부분 곧, 신체적인 것뿐만이 아니 라 영적인 부분으로 온전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나타냅 니다. 이것은 단지 치유만이 아니라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 니다. 넓은 의미에서 죄는 병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병은 단순히 운명일 수 있는데, 이는 병 을 지니고 태어나거나, 질병의 요인을 지니고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유행병으로 생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병이 우리를 온전함과 개성화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질병의 다양한 가능성 때문에, 마음을 열 고 편견을 갖지 않고 질병의 각 경우에 접근하며, 여러 가 지 각도에서 질병의 원인과 그 의미를 탐구해야 합니다. 특히 심리적인 장애의 경우나 심리적인 부분을 동반하는 신체적인 장애는 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앞당겨 서 그 의미를 아는 것은 병이 우리에게 고 있는 진실한 메시지를 가릴 수 있기 문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반명순 수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부정과 정결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 Lectio ) 오늘 말씀은 갈릴래아 전교여행의 전형적인 예로, ‘더러운 영’ 에 대한 승리 ( 마르 1,23 )와 비교되는 나병 치유사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하거니와 나병은 남 보기에 불결하고 전염이 된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고립당해 천형이라 일컬어지던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일까요 ? 그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간청합니다.( 40절 ) ‘하고자 하시면’ 이라는 청원은 예수님의 권능보다 그분의 자비에 의지하여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뜻만 있으시다면 죽은 자와 같은 처지에 놓인 자신을 치유하여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확신이자 신뢰입니다. 나병 환자의 믿음에서 나오는 청원은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 때문에 들어 허락된 보중을 받습니다.( 41절 ) 성경은 모든 악성 피부질환을 나병이라 통칭합니다.( 레위 14장 ) 제1독서에서 나병 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다가오면 피해 가도록 “부정한 사람이오.” 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사회적 · 종교적으로 소외된 죽은 목숨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부정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며” 저주받은 그의 처지를 받아들여 주십니다. 이는 곧 나병 환자가 예수님 앞에 부정한 사람이 아닌 ‘나’ 라는 존재 자체로 설 수 있도록 먼저 그의 영혼을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병 환자의 간청대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41ㄴ절 )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다.” 는 나병 환자의 신뢰는 “하고자 하니” 라는 말씀으로 답을 받은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는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병이 없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 정화된 사람으로 사회와 종교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는, 곧 ‘죽음에서 부활한 것’ 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한테 하신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 44절 )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은 모세율법이 규정하는 율법을 준수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후 後 문맥에 이어지는 안식일 규정에 관한 것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의한 것이라는 이해의 기반을 놓습니다.( 2,1 – 3.6; 7,9 – 13; 12,29 – 40 참조 ) 두 번째는 ‘정화’ 입니다. 정화의 궁극적 목적은 관계의 회복에 있습니다. 사제의 공증을 받아 그는 온전한 사회 구성원이 될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돌려보내시며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 44ㄱ절 ) 하고 굳이 함구령을 내리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유다인들은 나병 고치는 것이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에 버금가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로 여겼습니다.( 2열왕 5,7 참조 ) 그러므로 나병의 치유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죽은 이들의 부활과 함께 메시아 시대의 은혜로 헤아려집니다.( 마태 10,8; 11,5; 루카 7,22 참조 ) 예수님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분명하지만, 당신의 속죄적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의 빛 안에서 당신의 신원이 밝혀지길 원했던 것입니다.( 마르 14,61 – 62; 15,2.39 참조 )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떠나가서 예수님의 권능과 말씀을 알리는 선포자가 되었습니다.( 1,45ㄱ )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상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딴곳에 머무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빛은 어디에 있든지 드러나게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45ㄴ절 )
묵상 ( Meditatio )
사람들은 부정不淨과 정淨의 기준을 인간의 외적인 조건에 둡니다. 보이는 곳의 질환은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혼의 내적 질환은 누가 부정하다고 진단하며, 이제는 치유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 자기 자신의 내적 상처는 곪아 터져도 ‘괜찮다. 괜찮다.’ 하고 덮어놓은 채, 이웃의 작은 상처에 골몰하여 ‘불결하다느니, 전염성이 있다느니’ 하며 부정과 정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외적 상처의 고통으로 인해 내 이웃의 영혼이 정화되어 가고 있을 때, 깨끗하다고 자만하는 제 영혼은 불치의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주님, 저를 깨끗하게 해주십시오.” ( 40절 참조 )
기도 ( Oratio )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을 누리리이다.( 시편 16,2.11 )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많은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까지 만나고 있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실 신학교에 들어간 뒤, 점점 친구들과의 대화가 낯설어졌기 때문이지요.
대학생 때에는 사회 운동 이야기,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취업 이야기,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결혼 이야기와 주식과 부동산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요즘에는 자녀에 관한 이야기만 나옵니다. 이렇다보니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의 대화가 쉽지 않으며, 그들과의 만남에 그다지 큰 즐거움을 얻기가 힘듭니다. 특히 저의 삶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는 친구들과는 점점 더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변함없이 만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보다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친구들이지요. 그들과는 이 사회의 더러운 부분을 드러내며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렸을 때의 순수함을 간직하며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요? 자기 입장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친구야 말로 진정한 친구이며 그 만남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사람을 당신의 친구로 받아주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보통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빚진 것을 예수님께 받아내야 하는 것처럼, 무조건 고쳐달라는 청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입장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치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의 입장에서만 주님께 청하는 기도는 오히려 더 멀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들어있는 기도만이 주님과 나를 진정한 친구 관계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친구가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유순함을 가르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조심성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나에게 자립심을 가르쳐 준다(J.E. 딩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우리가 구원되는 이유> 의료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변변한 치료제도 없던 예수님 시대였습니다. 병에 취약한 유아나 어린이들의 사망률이 엄청 높았고, 평균 수명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이라도 한번 돌았다하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악성 피부병이나 나병에 걸리게 된 사람은 그걸로 인생 끝이었습니다. 마땅한 치료약도 치료소도 없던 당시 격리만이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최선책이었기에 나병에 걸리는 순간 인간 세상을 등져야만 했습니다. 성 밖으로 한번 추방된 나병환자들은 여생을 성 밖 멀리 떨어진 토굴 속에서 추위에 떨며 짐승처럼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멀찍이 피해가거나 돌을 던져 접근을 막았습니다. 나병환자 본인들도 길을 가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멀리서부터 크게 외쳤습니다. “나는 부정 탄 사람입니다.” 전염을 막기 위한 조치였겠지요. 참으로 비인간적이고 어처구니없는 규정이었겠지만 그때 당시 나병환자들은 다들 그렇게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살다가 최후를 맞았습니다. 율법은 어떻게 해서든 보통 사람과 나병환자들의 접촉을 막았습니다. 보통 사람이 나병환자의 몸을 만지거나 손대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함께 말을 섞거나 같이 식사하는 것도 절대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시는 바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나병 환자와 같은 공간에 계셨으며 그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환부에 손을 대시며 치유활동을 펼치십니다.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기신 것입니다. 거의 죽음의 문턱 바로 앞까지 나아갔다가 은혜롭게도 예수님을 만나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나병환자는 어떻게 보면 부분적이고 한시적이나마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배경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가 젊어서부터 나병에 걸렸기에 뭔가 특별하게 사회를 위해 공헌한 바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든 상황이었기에 하느님께 이렇다 하게 봉헌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그가 치유 받고 구원받은 큰 이유는 아마도 그가 지니고 있었던 근원적 결핍 때문이 아닐까요? 그가 지니고 있었던 측은함,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이 너무나 가엾었기에 예수님의 손길이 자동으로 그에게 다가갔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치유된다면, 오늘 우리가 한시적으로나마 구원을 체험한다면, 그리고 언젠가 궁극적인 구원이 우리에게 선물로 다가온다면 그 이유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우리가 뭐 특별한 일을 해서라든지, 대단한 공로를 쌓아서 라든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안타까운 이 현실,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살아가는 부족함, 상시적으로 끼고 살아야 하는 결핍과 측은함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충만한 하느님 은총 안에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세는 오직 한 가지, 나병환자가 보여준 모습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움, 우리의 감추고 싶은 환부, 우리의 이 수치스런 죄를 계속 깊숙이 감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 솔직한 모습, 현재의 이 고통을 가감 없이 하느님께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치는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나병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도 나병환자처럼 부끄럽지만, 송구스럽지만 있는 그대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환부의 상처를 그분께 보여드립시다. 그리고 그분 자비의 손길을 기다립시다. 언제쯤 먹을 수 있을까? -김효준 신부- 현기증이 날 만큼 허기진 상태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아무 음식이나 좋으니 가장 빨리 나오는 걸로 달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그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고, 배불리 먹은 후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자, 문제 같지 않은 문제를 하나 내볼까요? 배고픔에 지쳐 있던 내가 음식을 실제로 먹게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너무 배가 고프니 아무 거나 주세요!’라고 주문하는 그 순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허기진 내 배가 채워지는 때는 나의 주문을 받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내 온 후입니다. 나의 바람과 그것의 성취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치유해 달라고 간청했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럼 나병 환자가 깨끗해진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께 간절히 매달렸을 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 때였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이 다를 수 있듯이, 내가 원하는 때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간격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간격은 하느님에 의해 좁혀지기도 하고 넓혀지기도 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 안에서 기다리는 일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함은? -김찬선신부-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오늘 우리는 놀라운 얘기를 듣습니다. 아니,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전의 나병 환자는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며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사람 사는 곳 밖으로 밀어낸 것이고, 그들은 성한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나병환자들이 다가 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가가신 것보다 더 놀랄 일이지요. 임금이 병들고 가난한 백성을 찾아간 것도 대단하지만 아무 것도 아닌 백성이 임금에게 찾아간 것은 더 대단한 것이지요. 그 백성의 용기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용기를 낼 수 있게 한 임금의 사랑이 대단한 것입니다.
실상 나병 환자를 찾아가는 사랑보다 나병 환자가 거리낌 없이 찾아올 수 있게 하는 사랑이 더 큽니다. 그것은 병문안 가는 것보다 병자를 내 집에 들이는 것이 더 큰 사랑이라는 뜻도 되지만 감히 올 수 있도록 자존감을 키워주는 사랑이 더 크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병이나 생김새 때문에 사람을 피해 숨어사는 사람을 Coming out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부정하고 부끄럽게 생각한 사람, 자기를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고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이제 자신에게서 ‘부정’은 떼어내고 ‘사람’을 회복한 것이며 ‘못생긴 사람’이지만 못생긴 것을 개의치 않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케 한 것이고 병이나 장애나 생김새 등 온갖 외적 굴레에서 자유롭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 여느 인간과 달리 나병 환자에게서 나병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셨기 때문이고, 나병을 혐오의 눈으로 보지 않고 연민의 눈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람을 꽃과 비교하여 더 아름답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과 비교해서 아름답지 않고 사람이기에 아름답다는 것이요, 외양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존재를 보지 않고 존재의 좋은 점만을 보는 것, 이것은 소유적 집착입니다. 존재의 서술어를 보지 않고 서술어의 주체인 존재를 보는 것, 이것이 사랑의 관상입니다. -조명연신부-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실 겁니다. 제가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다이어트 방법으로 자전거 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잘 아실 것입니다. 사실 처음 며칠 동안은 얼마나 이 운동이 지겨웠는지 모릅니다. 아마 모든 유산소 운동이 그렇겠지만, 며칠 지나면서 힘들다는 생각과 함께 갖은 핑계를 대면서 운동을 하지 않게 되는 빈도수가 잦아지더군요. 계속해서 밟는 페달. 더군다나 가파른 경사면을 올라갈 때면, ‘내가 다시는 타지 않는다.’라는 생각까지 난다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시간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싶고, 장보러 갈 때나 읍내를 갈 때에도 자전거를 타고서 갈 정도로 자전거를 너무나도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지겨워했던 제가, 체중을 줄인다는 목표 때문에 마지못해 했던 자전거 타기가 왜 이렇게 즐거운 운동으로 변했을까요?
그것은 새롭게 구입한 mp3 플레이어 때문이랍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자전거를 타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평소에는 따로 시간을 내어서 음악을 감상할 시간이 없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자전거를 타는 순간은 음악 감상하는 시간이 되니 얼마나 이 시간이 기다려지겠습니까? 하지만 이 mp3 플레이어에도 문제가 있더군요. 귀에 이어폰을 꽂아서 들으니 귀가 아파오면서 mp3 플레이어를 잘 이용하지 않게 되고, 그러면서 저절로 또 다시 자전거 타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뒤, 다시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자전거 속도계를 하나 구입했거든요. 제가 타고 온 거리, 시간, 최고속도, 평균시속, 심지어 소모열량까지 표시되는 이 속도계를 통해 자전거 타는 재미를 다시금 얻게 된 것이지요.
이런 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기도생활 하는 것을 지겨워하시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기도 하는 것, 성당 가는 것만 떠올리면 무조건 고리타분한 것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지겨운 마음이 들 때에 어떤 시도를 했는지 한번 떠올려 보세요. 분심이 많이 든다고 그냥 포기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묵상이 되지 않는다면 성서읽기나 각종 염경기도를 통한 기도도 많은데, 그런 시도는 전혀 없이 그냥 포기했던 적은 없나요?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치유방법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머리에 손만 얹어서 ‘치유되어라’고만 하셔도 될 것 같은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방법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방법을 쓰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상하다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하지만 이 새벽.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주님께??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지금 내가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나요? 혹시 ‘나는 기도가 안되어서...’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아예 기도 자체를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안된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나만의 기도를 만들어 봅시다. 내가 하고자 하니 -정 세라피아 수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이 설화는 신라시대 경문왕의 귀 이야기이기도 하거니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동·서양이 문화는 다르지만 인간의 심리는 다 같은가 보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가 예수께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한다. 레위기를 보면, 사제에게 부정한 사람이라는 선언을 받은 사람은 옷을 찢어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야 하며, 진지 밖에 따로 살아야 한다. 온몸이 뭉그러지는 병이 든 것도 서러운데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공동체 밖에 쫓겨나서 살아야 하는 것은 이중삼중의 괴로움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낫고 싶었을까! 그 무엇을 바꾸고라도 낫고 싶었을 터인데, 예수께서 말끔히 낫게 해주셨으니,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아무리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어도 그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 자신이 치유받게 되었는지 입다물고 살려 했다면 임금님의 이발사처럼 병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라고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또 예수께서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환호하였다. 바리사이파들이 그것을 멈추게 하라고 요청하니 예수님은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외칠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즉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이 아니신가? 과연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면 그가 그대로 하리라고 생각하셨을까? 어쩌면 그가 가만히 있지 않을 줄 아시면서도 고쳐주시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청하는 나병환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자 하니”라고. 곤란한 처지에 휩싸이실 것을 각오하신 것 같다. 죽었던 라자로를 소생시키셨을 때도 그랬다. 그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이 결정적으로 수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을 보면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하신 것이다.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서. 결국 예수님은 이 사람 때문에 곤경에 빠지신다. 사람들이 병을 고쳐주는 예수님의 진의를 파악치 못하고 단순히 병 고치는 요술사같이 여길 수도 있었기 때문에 동네에 못 들어가시고 외딴 곳에서 머물러 계셔야만 했다. 좋은 이야기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누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침묵이 말하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기에 베네딕토 성인께서는 좋은 말이라도 삼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셨나 보다.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김영수 신부 - 기적을 이루는 사랑
봄기운 피어나듯
며칠 전에 가까운 산에 산행을 다녀오는 길에 들렀던 작은 찻집에 내걸린 입춘첩 글귀가 벌써 봄이 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선을 쌓은 집 앞에 즐거움이 끝없고, 봄 꽃 아래엔 향기가 넉넉하네’(積善堂前無限樂長 春花下有餘香). 정초에 오는 첫 절기인 입춘이 지났고, 오늘이 정월 대보름날이니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의 삶 속에도 봄기운처럼 따뜻한 사랑의 기운이 보름달처럼 차오르기를 빌어봅니다.
복음은 얼어붙은 세상에 따뜻한 봄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고 마른 가지에 새 생명을 틔우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고 말씀하신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은 성한사람 보다도 병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그분께 다가갔고 그 결과 온전하게 치유되어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시비를 걸고 그분의 행적에 의심을 품었지만 죄인들은 그분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고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나병환자와의 만남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온전한 치유의 과정을 묵상하게 해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병중에서도 나병은 인간이 겪는 가장 고통스런 병입니다. 문둥병이라고 불리던 이 병에 걸리면 병고를 겪고 있는 이나 함께 사는 사람이나 인생의 겨울처럼 혹독한 고통과 쓰라린 시련의 시간들을 견디어 내야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일생동안 자신의 몸이 썩어 들어가며 서서히 죽어 가는 소름끼치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옛날뿐 아니라 최근 까지도 나병이 걸리면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나병이 가져오는 무서운 증상과 흉측한 결과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병으로부터 오는 육체적인 병고보다도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하는 소외감과 관계의 단절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해주는 아름다운 기적은 죽음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도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갔던 나병환자의 치유이야기를 통해 당신께 다가온 사람을 온전히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영적치유의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이의 태도와 예수님의 반응은 온전한 치유의 과정에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묵상하게 합니다.
치유의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치유를 청하고자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 환자의 용기와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된 나병환자가 예수님과 그 일행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길에서 지나치는 사람을 만나면 종을 딸랑 거리며 “나는 부정합니다!”라고 외쳐야 했으며 건강한 사람들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피했고 나병환자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올 때는 돌로 쳐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 나병환자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내려오는 그곳에 감히 달려와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님께 나아가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무릎을 꿇음은 겸손한 자로서 하느님께 대한 경배를 표할 뿐 아니라 삶에 대한 경의, 이웃에 대한 존중, 자기 자신에 대한 겸허의 자세입니다. 나병환자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은 단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무릎 꿇는 행위 안에서 자신 안에 얼룩진 마음과 영혼의 상처를 바라 볼 수 있었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 부정과 자기소외의 어둠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 청하는 나병환자의 모습은 예수님의 마음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불러일으켰고 예수님은 주검과도 같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결정하고 주님께서 따라와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 질것을 믿는 간절한 신앙으로 주님께 의탁하는 일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세인 것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나병환자의 이 믿음이 결국 버림받은 인생을 살리는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춥고도 긴 겨울에도 세상은 봄을 기다리고 준비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힘겹고 혹독한 시련의 겨울일 지라도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손길을 청하면 우리의 삶 속에도 선한 사랑의 기운이 가득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 마을 복숭아꽃 가지마다 맺히는 봄’(玉洞桃花萬樹春)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양승국신부- 어릴 때부터 피부가 몹시 약했던 저는 여러 가지 피부병으로 엄청 고생을 해봐서 피부병이 얼마나 괴로운 병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의 말 못할 고통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질환이 됐는데, '옴'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직도 단체생활을 하는 곳에서는 심심치 않게 발병해서 사람들을 괴롭히곤 하지요. 증상이 진행되면 정말 참기가 어렵습니다. 전염성은 또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언젠가 제가 옴과 유사한 피부병에 걸려 죽을 고초를 겪었습니다. 지독한 가려움증을 이기지 못했던 저는 자는 동안 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엄청 긁어버려서, 그 다음날은 손을 침대에 묶고 잔 기억도 납니다. 너무나 간지러워서 참다 못해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가려움을 참기가 너무 힘들어 'PM'이란 강력한 무좀약을 상처부위에 발라봤지요. '이걸 바르면 좀 따갑겠지만 아마 빨리 나을거야'하는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웬걸, 너무나 쓰라렸던 저는 펄쩍 뛰다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기까지 했습니다.
피부병 중에 별것도 아닌 옴이 이렇게 지독한데, 나병은 얼마나 사람을 괴롭혔겠습니까? 나병은 옴과는 차원이 다른 병입니다. 옴이야 어느 정도 고생하고 꾸준히 치료를 하면 원상복귀 된다는 희망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나병은 특효약이 전혀 없던 불치병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약한 것은 나병에 걸렸다하면 그날로 '인생 종치는' 날로 여겼습니다. 일단 나병에 걸리면 특별한 치료약이 없었기에 즉시 사회로부터 격리됐습니다. 말이 격리지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이었습니다.
나병으로 인한 괴로움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병환자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나병을 천형(天刑)으로 여겼습니다. 뭔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대가로 나병을 얻게 됐다는 인식, 나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벌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보편화돼 있었던 것입니다. 나병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것만 해도 서러운데, '천벌 받은 사람'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자니 억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가족들과 강제로 생이별한 환자들은 성문 밖, 사람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치유에 대한 일말의 희망도 없이 철저한 세상의 변방에서 나병환자들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삶,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삶을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는 병이 진행될 대로 진행된 중증 환자로 여겨집니다. 그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일이었겠지요. '차라리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김없이 아침은 밝아오고 눈이 떠지면 다시금 더욱 문드러져 가고 있는 자신의 삶을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혹시나' 하고 자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는 일이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개울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밤 사이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나병이 낫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단 한번만이라도 예전의 보송보송했던 피부를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이제 마지막 희망을 안고, 무례가 되는 줄 분명히 알면서도, 율법을 어겨가면서 예수님께로 달려온 것입니다. 자비와 연민으로 충만한 예수님 앞에 서니 서러웠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립니다. 꼭 한번 나아보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간곡히 아룁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생의 막장에서,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간절히 부르짖는 나병환자의 외침 앞에 마침내 예수님 마음이 움직입니다. 삶 자체가 슬픔과 고통 덩어리였던 나병환자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권능의 손을 그에게 펼치십니다. 자비의 팔을 그의 어깨에 두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환자의 새 삶을 한번 살아보겠다는 간절한 마음,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메시아임을 굳게 믿는 확고한 신앙이 결국 기적을 불러옵니다.
오늘 저 역시 치유 받은 나병환자처럼 주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깨끗해지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보란 듯이 새 삶을 살고 싶습니다. 구원의 비밀 -노영찬 신부- 오래 전에 어느 본당에서 사목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오후 병자성사를 원하는 가난한 젊은 부인의 요청을 받고 한 종합병원의 병실을 찾았습니다. 그 병실에는 장기 입원 환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병자성사를 주고 나오려고 하는데, 저를 부르는 큰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신부님! 저도 신자입니다!” 한눈에 보아도 병고가 깊은 쇠약한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였습니다. 그는 말을 더듬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몇 십년간 성당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를 위해서도 기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병실 환자들의 시선이 그 남자에게로 향했습니다. “네, 형제님, 그럽시다.” 그런데, 그를 위한 기도가 마치자, 주위의 다른 환자들도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종교적 배경과는 아랑곳없이 그들은 단지 지금, 이 자리에서 기도가 필요하다는 몸짓을 두 손을 모으며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고통스러운 병을 앓고 있지만, 좌절하지 않고 병마와 싸우며 치유되기를 절실히 바란다는 소망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환한 미소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도 예수님을 찾아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간절한 소망을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은 누구나 꺼려하는 질병입니다. 그 옛날에는 더욱더 그랬을 것입니다. 단순한 육체적 질병을 넘어서 사회적인 인간관계가 일절 파괴되는 잔인한 인간소외를 부르는 병입니다. 그런데 치유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실존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병환자는 절망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를 살릴 수 있는 희망과 능력을 가지신 스승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가없는 신뢰를 예수님께 바칩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철저히 예수님이 지니고 있음을 깊이 자각합니다. ‘하고자 하시면’ 언제나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실 수 있는 주님의 자애로운 마음을 믿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그를 ‘깨끗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깨끗하게 되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더러운 상태’에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거기서 벗어나겠다는 결심과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최소한 이 태도는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을 신뢰하며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나병환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공개된 구원의 비밀이 아닐까요! 너무 간단하고 쉬운 것처럼 보입니까? - 서 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 환자 한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서가 소중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분의 믿음과 그분이 믿고 계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신앙이고, 그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외아드님이 알려 주셨다”(1,18). 같은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도 말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14,9).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를 고쳐주십니다. 나병은 예나 오늘이나 법정 전염병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그들을 격리시킵니다. 우리나라에도 소록도를 비롯하여 안양 라자로 마을 등 여러 시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격리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그들을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격리하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병에 대한 진단도 과학적이 아니어서 피부가 불결하면 나병환자로 취급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에도 나병 환자는 마을에 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불결! 불결!”하며 외쳐서 사람이 자기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치신 다음에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요사이 말로 하면 방역당국의 확인을 거쳐서 격리조치에서 해방되고, 공민권을 되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환자는 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그 수속 절차를 밟지도 않고 떠들고 다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드러나게 다니지 못하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임의로 격리에서 해제하여 그 시대의 관행을 무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최근까지도 나병은 불치의 끔찍한 병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렸던 한국의 시인 한하운은 그 끔찍함을 자기 시집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준다.” 인류역사는 이 병을 하늘이 내린 벌이라 불렀습니다. 같은 시인은 그 말이 어처구니없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이 끔찍한 불행 앞에서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세상에 있는지 묻습니다.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없어 사람들은 그것을 하늘이 준 벌, 곧 천형(天刑)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하느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 예수님이 남기신 비유들 안에도 하느님은 언제나 선하고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셨다고 회상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로우셔서 예수님도 그 아버지의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런 장애와 그런 병고가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지닌 경우가 있고, 원인이 설명되지 않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들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혹은 젊은 나이에 죽어 가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선의의 사람들이 짓밟히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반면, 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높은 지위와 재물을 누리기도 합니다. 정직하게 최선을 다 한 사람이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크게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성공하는 경우들을 우리는 봅니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죽도록 노력을 해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불가사의한 일들의 원인을 모릅니다. 우리의 합리적 사고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이런 불가사의한 일에 합리적 해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마귀 들렸다는 사람들에서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모두가 기피하는 나병을 고쳐서 그 환자를 사회에 복귀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도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으며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마르 3,4)을 하며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돌아온 대가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그런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셨고,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에게는 고통이 없고 행복만 있다고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우리의 합리성에서 생각하면 완전하신 하느님에게는 고통이 없어야 합니다. 치통만 조금 있어도 우리는 불행합니다. 우리의 상식에 고통과 행복은 동시에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고통과 기쁨은 동시에 함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를 때 우리는 불행하지만 않습니다. ‘네가 나의 모든 것이다’고 말하면서 자기 삶의 일부를 바치며 겪는 고통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요한 15,13) 사랑은 고통 중에서도 기뻐할 줄 아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른다”고 요한의 첫째 편지(4,8)는 말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 안에 침묵으로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고통당하면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면서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일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죽어 가셨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입니다. “그대들은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시오”(루가 17,10). ◆ 하느님의 모성(母性)’인 측은한 마음 -구요비 신부- 43년 간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던 마리안나와 말가리다 수녀님이 지난 해 말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영구 귀국하였습니다. 한 가족처럼 지낸 주민들에게 헤어지는 아픔을 주기 싫다며 ‘사랑하는 친구·은인들에게’라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새벽에 남모르게 섬을 떠났습니다. 두 수녀님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할 때”라며 “부족한 외국인이 큰사랑을 받았다”고 오히려 주민들에게 감사표현을 했습니다. 수녀님들은 환부에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늘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습니다. 저는 수녀님들의 집에서 여러 번 피정을 하는 은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 없이 떠난 소록도의 두 천사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두 수녀님의 숭고한 사랑에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치유하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환자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1,41).
구약성경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자비)을 헤세드(hesed)와 라하밈(rahamim)이라는 두 표현으로 쓰고 있습니다. 라하밈은 ‘애간장’라는 뜻인데 그 어근은 rahem(母胎, 모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단어를 쓸 때(호세 11,1-8; 이사 49,14-19)는 하느님의 모성(母性)을 표현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이 하느님의 자애로운 사랑인 모성을 예수님의 측은한 마음에서 봅니다. 이 측은한 마음, 곧 애간장이 타는 마음은 예수님의 백성을 향한 착한 목자의 심정을 보여 줍니다. 이는 자기를 떠나 불행을 겪고 있는 상대편과 한 운명체가 될 정도로 이타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인 아가페(1요한 4,16)의 뿌리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고난받는 주님의 종으로서 나병 환자의 운명을 택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마태 8,17).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무십니다(마르 1,45). 우리가 이런 주님의 마음을 닮는 길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 이 가엾어 하는 마음을 다시 회복하고 키우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맹자(孟子)는 “지금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본다면, 다 놀라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진심이요, 생각해서 얻는 것이 아니며, 힘써서 맞춘 것도 아니며, 하늘의 이치가 그러하다”고 갈파하였습니다. 얼마 전 에이즈 환자들과 함께 사시는 외국인 선교사 한 분을 만나 뵙고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나병이나 에이즈는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라 치료가 가능하므로 이런 병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 깊은 관심과 배려를 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전도행적과 메시아의 비밀 -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이 치유 이야기는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실제로 나병은 육체를 기형적으로 바꾸고 잠재적으로 전염성을 갖기 때문에 무서운 공포를 주는 병이다.
제1독서: 레위 13,1-2.44-46: 나병환자에 대한 규정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도 나병은 가장 고통스럽고 혐오감을 주는 병이었다. 제1독서에도 나오지만 나병에 걸리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철저히 격리되어 아무에게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45-46절). 이 규정들은 그냥 말만으로 혹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으로 현실에 있어서는 더 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이 병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병환자들은 항상 도시 바깥에서 살았고, 아무도 만날 수 없게 된 그 순간부터는 시체와 다를 바가 없었다"(J. Flabius, Ahtichita giudaiche, III, 11,3). 즉 떠돌아다니는 시체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느님과 인간들에게 저주받은 자들로 여겨졌다.
복음: 마르 1,40-45: 그는 나병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나병환자의 간청을 듣고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버림받은 인간에 대해 가지신 연민과 느끼신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 한다. "측은히 여기셨다"(41절)는 말씀의 연민은 바로 '뱃속까지' 자극시키는 고통의 의미이다. 또한 그 고통은 그 나병환자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불의한 사회적 상황 때문에 더 컸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손을 뻗쳐' 그 나병환자에게 '갖다 대심'(41절)으로써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시지만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된다.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그를 온통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치유의 기적을 이룬다. 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체험 때문에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체험을 널리 선전하여 퍼뜨리고 있다(45절).
예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그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고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44절) 레위기의 규정대로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진 데 대한 감사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복음에는 그가 사제에게 가서 보이고 감사의 예물을 바쳤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선 우리가 항상 하느님의 은총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감사의 표현은 말로써 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먼저 감사의 표현을 하여야 하겠고 그리고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참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될 수 있다.
"그를 보내시며 엄하게 이르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43-44절).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 이 병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어도 다시 사회에 복귀하기까지는 또 다른 검증과정을 통해 또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 기억은 예수님께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나환자를 통하여 장차 당신에게 닥칠 '야훼의 고통 받는 종', 즉 나병환자처럼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아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이사 53,3-4)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될 운명을 예견한다는 것이다. 즉 당신이 행하시는 사랑과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불결과 깨끗함을 가리는 논쟁에만 힘을 소비하며,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로 이끌어갈 구실을 마련하려고 하여 당신이 베푸시는 사랑의 행위를 왜곡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내적인 아픔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손을 갖다 대는 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의 다른 행위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 기적인 완전한 것이 될 수 있으려면, 인간 사이의 혹은 민족 사이의 갈등과 경계가 모두 극복되어 한 형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마르코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습을 무너뜨리려 하는지를 이렇게 묻고 있다. 그래서 초기교회는 "나병환자들과 더불어 걷고 주막에서 잡수시는 주 예수님"(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 64)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 예수께 그 기적 후에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지만 그분은 백성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또 한번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지금의 모든 가르침은 오로지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서 충만하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때문에 그 때까지는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다. 즉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의 전도사명이 자칫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니즘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자칫 현세적인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기복적인 신앙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나 자신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제2독서: 1고린 10,31-11,1: 나를 본받으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자제와 희생이 요구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나도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구하여 결국 그들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10,31-11,1). 이것을 나병환자의 치유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평범한 생활 테두리를 넘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기는 경우에도 기꺼이 수락하면서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펴 나가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도움을 간절히 청했던 나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치유해주신 예수님과 같이 그리고 모든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초대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