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루카 2,22-35
왜 기다리게 하시는가?
관상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신성을 보는 기도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관상기도에서 ‘거둠의 기도 – 고요의 기도 – 일치의 기도’라는 세 단계를 말합니다.
거둠의 기도는 마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에서 다른 세상 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그분의 자취가 있는 곳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 않으면 거둠의 기도가 불가능합니다.
고요의 기도는 마치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시듯 그 기다림이 끝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성령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깨닫고 인내롭게 기다리는 일입니다.
기다림이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다림의 대명사가 나옵니다.
바로 시메온 예언자입니다.
그가 기다릴 줄 알았던 이유는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루카 2,25-26)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는데도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셨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기다림이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했던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물론 묵상기도에서도 기다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나로부터의 정화를 이루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해 본인 스스로 제사를 지내어 결국 그 이유로 왕권을 잃게 됩니다.
기다림은 시간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알게 하여 주도권을 내가 아닌 하느님께 드리게 만듭니다.
기다림이 주제인 대표적인 작품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습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가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고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조차 분명치 않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그들은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지루한 기다림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봅니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질문하기, 되받기, 욕하기, 운동하기, 장난과 춤추기…. 지루함과 초조, 낭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지껄이는 그들의 광대놀음, 그 모든 노력은 고도가 오면 기다림이 끝난다는 희망 속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루해가 다 지날 무렵, 그들의 기다림에 한계가 왔을 때 나타난 것은 고도가 아니라 고도의 전갈을 알리는 소년입니다.
소년은 고도가 오늘도 오지 않을 것이란 전갈만 주고 갑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포조와 럭키를 만납니다. 포조는 주인이고 럭키는 포조의 줄에 목이 메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노예입니다.
며칠 뒤에는 주인이 눈이 먼 상태로 럭키를 끌고 갑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타라공은 고도를 기다리며 그 넘어진 주인을 일으켜 세워주고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소년은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전갈을 남깁니다.
그렇게 연극은 막을 내립니다.
고도가 도대체 누구일까요? 작가가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만약 알면 책에 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타라공은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고도가 오리라는 약속을 믿고 매일 기다립니다.
하지만 포조와 럭키는 내가 주도적이건, 혹은 끌려다니건 바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작가는 도대체 그렇게 살면 뭐가 좋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이 오기를 4천 년이나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이 정화되었습니다.
시간의 주인이 하느님임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영성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놀이는 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기다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기다릴 수 없으면 오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올까요? 믿음에서 옵니다.
두 번째는 나에게 기다려도 시간 내에 끝까지 갈 수 있다는 능력이 있음을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움직여야 할 때는 움직이는 결단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으면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분명히 죽기 전에 메시아를 본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기다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나타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준비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분명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놀이에서 놀이하는 사람은 술래의 목소리와 모습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에 대한 신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으려면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준비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나는 모른다는 믿음 때문에 생깁니다.
사울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기다릴 줄 모르는 게 문제였습니다.
기다릴 줄 몰랐던 이유는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더 믿었기에 기도와 제물을 바침이 의미를 잃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다릴 줄 알기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제물을 잘라놓고 하느님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 기다림을 통해 아브라함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제물을 불사르는 성령께서 그에게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관상기도는 내 안의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집중하는 시간, 곧 ‘거둠의 기도’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고요의 기도’입니다.
고요의 기도는 평화가 오는 시간입니다.
기다리던 분이 오시는 시간입니다.
마치 마시멜로 실험처럼 기다림을 통해 성령에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평화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평화가 옵니다.
성령은 이렇게 기다릴 줄 아는 이에게 오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서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다음엔 ‘일치의 기도’입니다.
다시 그리스도께서 보이시지 않고 그분의 ‘뜻’이 남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복이 되어야 하는 소명이 주어졌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소명 안에서 계속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그 뜻으로 나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을 때는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머무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머무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안에 들어가면 ‘하나’가 되어 상대를 볼 수 없습니다. 볼 필요도 없습니다.
성모님은 태중의 예수님을 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분의 뜻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이것이 일치의 기도입니다.
관상기도는 항상 이 세 단계를 거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집중해야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보여주심을 믿고 그분의 현존에 집중하며 기다릴 줄 아는 능력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기다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심을 위해 가장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믿고 기다리고 기도함이 나를 온전히 정화했다면 그분이 분명 나를 사로잡을 고요의 기도로 올라가게 하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루카 2,22-35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
예수님의 일생은 첫 출발점인 탄생에서부터 고통스런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고 지속적인 하향성의 생애였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지극한 자기 낮춤과 겸손의 연속이었습니다.
전혀 그러지 않으셔도 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극도로 자신을 낮추셔서, 작은 인간들 사이로 육화 강생하신 대사건인 성탄 앞에 그저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올릴 뿐입니다.
이왕 태어날 것, 저 같았으면 멋진 황제의 장남으로 태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구중궁궐 속 따뜻하고 안락하고 넓은 방에서, 주변 사람들의 큰 환영과 박수를 받으며
태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즘 저는 강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어촌에 살면서 외풍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강풍이 불고 강추위가 밀려오면 아무리 난방을 해도 효과가 미미합니다.
방에 누우면 외풍까지 느껴져 코가 시릴 정도입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잠을 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방 한 칸조차 마련하지 못해 외풍 정도가 아니라 찬바람이 숭숭
아무런 여과 없이 들어오는 마굿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가난하고 겸손한 탄생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후, 유다 관습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성전으로 모시고 가서, 주님께 봉헌하는 예식에 참여하십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바친 예물을 보십시오. 산비둘기 한 쌍,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였습니다.
참으로 빈약하고 보잘것없는 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큼지막한 황소나 잘생긴 숫양이 아니라
고작 비둘기였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탄생이요 봉헌 예식이었습니다.
이 땅에 탄생하신 메시아께서 너무 부유하거나 거창한 모습으로 등장하시면 가난한 백성들이 기가 죽을까 봐, 작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고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께 그저 고개 숙여 감사드릴 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 29일 [성탄 8일 축제 내 제5일]
복음: 루가 2,22-35 :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알아봄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체를 받아 모시듯이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시고 나서 제단으로 나가신다. 율법을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하여 “일년 생 어린양”도 아니고 “작은 집짐승 하나도 마련할 힘이 없는”(레위 5,7) 처지였기에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제물은 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이었다. 산비둘기는 순결을, 집비둘기는 은총을 나타낸다.
노인인 시메온과 한나는 깊은 신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맞았다. 그들은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진닌 분임을 알아보았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주님을 기다려 왔고 그분이 오시자마자 신심 깊은 행실이란 두 팔과 꾸밈없는 믿음인 목소리로 그분을 찬미할 준비가 되어있는 모든 남녀 백성들을 나타낸다.
의인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구원은 먼 훗날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현재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구원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분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처녀가 어머니라는 사실이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그리스도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마르키온파가 있으며 에비온파는 남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의 영혼을 꿰찌르는 칼은 그의 슬픔을 가리킨다. 마리아는 당신의 일생 동안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