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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음악 :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Emperor'' mov.2, mov.3,
Piano, Friederich Gulda Münchner Philharmoniker
*클릭 : https://www.youtube.com/watch?v=Y1R05cdxVeU&feature=player_embedded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Emperor'' mov.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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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Lacan, 그 원숭이놈의 불협화음 교향곡
맑은 샘
원숭이들은 ‘나(我)’를 모른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로
그들의 모습, 마음, 꿈, 욕망 모든 것을
해석하고 있을 뿐이라
로고스 자체에 대해
알려는 방법이 틀렸고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 원숭이에서
더 이상 생각의 진화(進化)를 할 수 없구나
시(詩)는 나(我)와 로고스를 그리는 것
뿐만 아니라
나(我)의 의식과 무의식도
그리는 것인데
우리들의 무의식은 상징체계(의식체계)를
변화시키는 미지의 원천이요 바다이지
상징체계가 나를 만들고 규정짓는다면
나는, 우리들은 더 이상
시인(詩人)일 필요가 없다
시(詩)는 무한한 시(時)의 그림들이건만
저 무지한 털복숭이들은 인간인 우리를
원숭이로 만들려 한다
하늘의 벌이 내리리라
원숭이들은 하늘의 말씀들이 자신들을
원숭이로 국한시킨
무지막지한 감옥이라고 떠들지만
말씀의 샘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늘 새롭게 인식되고 깨달아지는
황홀한 비경(祕境)은
님의 로고스가 무엇인지
불멸(不滅)의 예술혼(藝術魂)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는데도 말이다
Jacques Lacan, 원숭이 녀석아
너는 더러운 허세의 바이러스를
담은 털만 날릴 뿐
원숭이의 돌대가리로 어떻게
저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언어의 뜻을
이해할 것인가?
고정틀의 원숭이놈 검술(劍術)이
아무리 현란한 9단이라도
정도(正道)의 인간은 나뭇가지 하나로
'톡' 놈의 심장을 갈라버리니
시인들이여! 진정한 언어의 작곡가들이여!
이 원숭이들의 시대를 찢어버리고
황홀한 춤을 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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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필자(맑은샘)가 바라본 ‘라캉’의 사상과 글쓰기 입장에서의 문제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을 떠나서 철학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현대 프랑스 철학이 안고 있는 큰 특징중 하나다. 근대서양철학은 '주체'의 발견을 통해 가능했다. 인간의 감각경험을 통해서건 또는 뇌를 통한 사유를 통해서건 세상이 우리에게 의미있게 읽혀질 수 있는 것은 경험하고 사유하는 주체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는 인간의 의식을 통해서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사고의 변화는 근대서양인들에게 스스로 지니고 있는 “자유”를 의식하게 했고, 이 자유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각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실현해야 할 자유”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19세기의 낭만주의나, 포이에르바하의 유기론(有機論), 니체의 실존주의적 철학을 통해 발전된 이성비판 혹은 주체비판은 20세기의 학문으로 출현한 정신분석학, 구조언어학 등과 또 결합하여 근대적 주체(이성, 의식)중심적 사고에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주체는 존재의 근원 또는 기원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과 언어를 통해 형성된 결과물임을 주장하게도 되었는 바 그것이 지금 프랑스의 구조주의로부터 비롯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의 한 부분이고 그 중심에 문제의 ‘라캉’이라는 원숭이가 존재한다.
라캉(J.Lacan ; 1901~1981)의 사상은 그의 잡문 Ecrits 속에 집약되어 있고 누구 못지 않게 헤겔과 하이데거 등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작업은 프로이트로 되돌아가 프로이트가 발견한 내용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집중되었는데 나(맑은샘)는 여기에 엄청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바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정신의학, 사회학, 발달 심리학, 지금은 다 지나간 유행적 학문인 문화 인류학 등에 수용되면서 본래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변형ㆍ왜곡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라캉도 그 창시자인 프로이트의 근본정신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기는 하였다. 그는 정신분석을 수행할 수 있는 수단은 말(언어)뿐이므로 그 이론을 더 세련되게 발전시키기에는 언어학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라캉이 언어학을 모형으로 정신분석학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프로이트의 진의를 더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 까닭은 정신분석이 단지 말을 통한 '치유법'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무의식은 곧 타자의 언술이고 동시에 '언어처럼 짜여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캉은 발화 행위(말을 하는 행위)가 어떤 보편적 법칙에 선험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구조언어학에 관심을 가졌고, 언어학을 수단으로 '언어'와 '무의식의 관계'를 해명해 보려고 하였다. 무의식을 해명하기 위하여 라캉이 언어학을 적용한 것은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é)'에 관한 그의 이론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물론 용어 자체는 소쉬르의 것이었지만 라캉이 다룬 문제는 라캉이 생각한 '프로이트의 문제'였다. 라캉은 언어학의 소비자에 그치기 보다 정신의학이라는?(필자는 이를 과학으로 믿지 않는다) 임상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언어학에 깔린 형이상학적 전제를 폭로하고, 특히 시니피앙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언어학의 '실재론'을 강하게 비판하였다(폼도 폼도 이런 원숭이폼이 없다). 라캉은 '언어적 전회'를 통해 무의식의 구조가 언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욕망을 읽어내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라캉의 작업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짜여져 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그의 두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와 같은 구조로 짜여 있다고 보아, 무의식을 해명하는 일에 언어적 모형을 적용하였다. 라캉의 이런 작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한편으로 라캉은 프로이트를 언어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프로이트 사상에 담겨 있던 상징론을 발굴해 낼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라캉도 대체로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이론에서 출발했지만 정신분석이론과 임상경험을 통해 이들의 실재론적 또는 본질주의적 언어이론에 그럴듯한 수정을 가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은 표상적 의식으로 포착될 수 없는 '무의식적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의식적 생각은 원천적으로 감추어져 있다.> 무의식적 생각은 개인의 심리상태에 줄곧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변형된 모습으로 바깥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의식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신체부위의 고통(신체 언어)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꿈의 경우와 같이 해독할 수 없는 표상(그림 언어)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대개의 경우 무의식적 생각의 표출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언어규칙에서 벗어나 있다.
실제로 독자들이 밤에 잠을 주무실 때 꾸는 꿈의 환상과 이미지를 여기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시라! 당장 생각해도 잘 연결이 되지 않거나 생각이 확실하지 않다면 의식적으로 이글을 읽고난후 자면서 꿈을 꾸고 난 후 그 꿈을 기억하며 다시 대입해 보시라! 대게 무의식적인 꿈을 꾸고 나면, 그 꿈의 환상이나 이미지들은 깨고난 후의 현실세계의 실제 이미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기괴한 영상들이나 이미지가 기억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생각인 꿈의 경우와 같이 실제의 현실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고 해독할 수 없는 표상(이미지)인 무의식적 생각이나 환상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잘 정형화된 언어규칙에서 벗어나 있기도 하다. 프로이트의 이말은 맞다.
그런데 필자가 지적하는 바는 이런 것들을 해석하고 설명하는데 있어 프로이트도 라캉도 다 엉터리라는 것이다. 우선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으로 설명하는 각종 ‘컴플렉스’ 들도 틀렸고 게다가 라캉도 당연히 더 엉터리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꿈을 꾸어보면 기억나는 기괴한 무의식 세계에서의 이미지들이란 것들도 현실세계와는 맞지 않지만 ‘말(언어)’도 하고 무의식이지만 무슨 스토리들도 있다.
무의식 속에서도 항상 ‘나’라는 자아와 엮어져 어떤 스토리로 연결되기도 하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 내가 의식적으로 그 스토리의 구성을 만들거나 하지 않아도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희안한 내용의 스토리로 전개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현실세계의 의식으로 해석하기 위해 프로이트도 라캉도 무척 노력했지만 나는 다 엉터리라고 본다. 우선 프로이트의 성적 리비도 이론도 엉터리다. 이 이론이 정확하다고 그 누가 확증할 수 있는가?
과학적으로도 물질세계에서 인간은 처음 정자와 난자가 어머니 자궁속에서 착상해 태아가 될 때에는 일정기간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아직 性이 결정되지 않은 “중성”상태의 생명이다. 그래서 그 이론은 억지로 프로이트가 갖다붙인 프로이트만의 거짓말 즉, 그만의 상상이 만든 내용인 것에 불과하다. 다만, 무의식이 작동하는 수면상태라도 뇌(腦)가 깨어있을 때만큼 작동은 하지 않아도 수면상태의 뇌(腦)도 작동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현실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기괴한 이미지가 작동은 한다. 또 꿈에서 전개되는 의도하지도 않은 스토리도 말(언어)도 작동은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해석하는 것은 ‘심리학’의 더 정확한 다른 영역에 맡길 일이지 프로이드가 100%옳다고 증명된 것은 아니라고 나는 본다.
예를들어 밤에 같이 잠을 자는 부부 기혼자들이나, 미혼자들이라도 친구나 낯설지 않는 절친한 친구인 다른 사람과 함께 잠을 자며 실험을 해 보시라! 내옆의 존재가 잠을 잘 때 내가 깨어있어 잠을 자고 있는 존재를 보면 이해가 간다. 사람이 피곤하여 깊은 잠을 잘 때는 거의 꿈을 꾸지 않고 어떤 이는 드러렁 거리며 코를 곪기도 하는데 완전히 깨어 있지도 않고 완전히 깊은 잠에 빠지지도 않은 상태 즉, 반쯤 자는 가수면 상태에서 꿈이 선명하게 잘 꾸어진다. 필자의 경험으로 어느 잘 아는 친구녀석과 캠핑을 갔는데 이녀석이 마침 꿈을 꾸는데 나는 깨어 있었던 경험이 있다.
그때 꿈을 꾸며 자는 녀석이 하는 말이 가관이다. “어봐바바, 시이키가 팍 마 밟았뿐다,,,,이니리리리리 콱고악 찌지시이키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깨어있고 의식있는 내가 그 친구의 말을 보면 완전히 비정상이다. 하지만 꿈을 꾸는 그 친구는 비합리적 비현실적이지만 어떤 이미지와 말을 하며 어떤 스토리에 끌려가며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 친구를 깨워서 “네 무슨 꿈을 꾸었는데 그런 말을 하니?” 라고 물으면 그 친구는 멍하니 고개를 흔들다가 자기가 꾼 비현실 무의식 세계에서의 꿈에 나타난 이미지나 스토리내용, 등장존재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생각이 일부 나면 나에게 꿈이야기를 말로 하기도 한다. 이때 그 친구는 현실세계의 합리적인 말을 한다. 나의 입장은 정제된 문법의 언어법칙의 현실세계에서 꿈꾸는 그 친구나 마누라를 보고 생각하는 것이고 꿈꾸는 사람 입장에서는 황홀하거나 끔직하거나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불합리의 이미지 파편들 또는 이상한 이미지, 얼그러진 이미지들이 활동하는 스토리의 무의식 세계를 그의 정신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무의식의 표출인 증상이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무의식적 생각이 자유로운 낱말 연상을 통해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수 있는데, 다시 말해 말로 발화되는 증상을 통해 표현된 것은 말로 옮겨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즉 라캉의 가설적 생각이 발생한다. 무의식의 증상에 담긴 의미는 개개인의 내면세계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그것이 현실의 언어로 옮겨질 때는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성을 띠게 된다.
무의식이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언어자체는 그 고정된 형식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가 지닌 보편적 형식(각 언어들이 가지고 있는 문법체계) 때문에 무의식은 이때 가능한 것으로 조정되어 표현된다. 만일 고정된 언어형식을 빌리지 않으면 무의식은 생각이나 환상, 어떤 이미지의 기괴한 파편들이나 덤불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은 이해될 수 없는 무규정성에 지나지 않게 된다. 바로 여기에 프로이트와 라캉의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현실 언어와 같은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는 무의식의 본질이 아니라 다만 무의식을 독해 가능한(그것도 상당히 왜곡된) 텍스트로 만들어 줄 뿐이다. 이글을 읽는 독자들 자신의 꿈이나 환상, 무의식을 가지고 생각하거나 적용해 보시라 ! 프로이트 자신도 자유로운 낱말 연상작용은 여러가지 면에서 조현증(정신분열증) 환자의 언어사용과 흡사하다고 지적한 바 있지만, "무의식이 언어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웃기는 원숭이 <라캉의 노력은 언어의 고정된 법칙성(예를들면 문법으로 잘 조형되거나 정형화된 현실언어)와 무의식으로부터의 의미규정이 모든 의미현상과 동시적으로 출현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무척 노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캉은 무의식의 진상과 그것의 현현방식을 도식적으로 그리기 위해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필자가 보기에는 베껴 사용, 억지로 남용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무의식이 의식에 떠오르는 단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삼분법에 근거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삼분법은 첫째, 구체적인 표상을 통해 완전히 재현할 수 없는 무의식적 사고내용, 둘째 무의식이 표면화된 증상, 셋째, 증상을 출발점으로 무의식을 언어화하는 언어표상, 이 세 가지 구분을 말한다.(그런데 이것은 프로이트가 설정한 가설일 뿐이지 완벽하게 증명된 구조라고 누가 확증할 수 있는가?)
라캉은 의미표현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는 그 자체로 계속 감추어진 무의식적 사고내용을 '시니피에'라 부르고, 무의식이 일정한 꼴로 표현된 증상과 언어표상을 '시니피앙'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구분한 증상과 언어표상을 라캉이 꼭 같은 것으로, 즉 모두 무의식의 의미를 드러내는 시니피앙으로 취급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삼분법은 라캉에 의해 시니피에(무의식적 사고내용-정형화로 설명될 수 없는 이미지나 환상, 환청)와 시니피앙(그 증상과 언어적 시니피앙)의 양대 축으로 환원되었다. 라캉은 여러 시니피앙 가운데에서도 언어가 가장 중요한 시니피앙이라고 생각했다.(억지로 정형화된 골수 바른언어 돌덩이론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의미가 이해가능한 것으로 독해되려면 무엇보다 언어의 형식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와 같은 구조로 짜여 있다", 혹은 "무의식은 타자의 언술이다"라고 과학적으로 논증, 확증되지도 않은 채 선언해 버렸다. 그런 라캉의 잘 알려진 명제는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 명제들은 무의식이 곧 언어적인 시니피앙임을 주장하기 보다는 무의식이 의미있는 것으로 현현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형식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강조한 것이었다.(이것이 과연 과학적인가? 이도 사실은 프로이트의 오류들과 마찬가지로 라캉만의 오류 아니겠는가?)
정신분석학을 통해 새롭게 구성된 라캉의 언어이론은 무의식의 주체인 인간의 욕망구조를 드러내는 데 곧바로 적용된다. 라캉은 인간의 주체성의 생성과정에 관심을 가졌고, 이 과정을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하여 첫 단계를 '상상적 단계(혹은 거울단계)', 두 번째 단계를 '상징적 단계'라고 부른다. 두 단계를 거치면서 주체는 각각 상이한 과정을 거쳐 구성되지만, 공통적인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다른 대상)와의 동일시를 통해서 주체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나(맑은샘)는 여기에 라캉의 모든 유물론적 인식과 수준낮은 변증법적 사고가 가진 모순과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어린 유아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통해 자기자신의 몸을 통일된 전체로 인식하는 과정이 '거울단계'이다. 아이가 확인한 '자기'는 자기 자신 속의 내재적인 자아가 거울에 비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타자를 통해 비로소 구성된 자아임을 라캉은 강조한다. (이것은 지극히 유물론자들만이 생각할 수 있는 구성가설일 뿐이다.) 따라서 거울단계는 자아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표상에 동일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결과물임을 보여주고 그것을 강조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라캉은 자기가 아닌 타자를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오인하는 '상상적 질서' 속에서 자아의 구성이 완결된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런데 라캉이 더 웃기는 것은 인간의 자아는 '상상적 질서'에서 '상징적 질서'로 이행함으로써 좀더 성숙된 사회적 자아로 형성되어 나간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라캉은 인간의 자아, 즉 주체는 근본적으로 타자(내가 아닌 다른 대상)를 통해, 즉 자기 자신과의 분리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이런 얼빠진 엉터리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주체라는 인간자아의 실체와 실존을 아예 부정하고 빼버리거나 왜곡한 오류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도 레비스트로스와 마찬가지로 근본적 인식론 자체가 유물론자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당신이라면 어떤 거대한 체제나 로고스가 당신의 영혼과 정신을 부정하고 왜곡하며 노예화하면 가만히 있겠는가?)
라캉이 말하는 '상징적 질서'는 인간의 언어와 문화로 형성된 보편적 질서의 세계이다. '상징적 질서'는 의미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고 구분을 지으며 상품과 가치의 교환을 조정하고 가족관계의 규칙을 제정한다. 그런데 언어의 질서라는 것은 어린아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질서이다. 아이는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타인들의 언술의 주체가 되었고, 태어날 때 이미 '타자의 언술'의 체제그물 속에 들어오게 된다. 이 언술의 그물이란 언어를 통해 매개되는 금지와 명령, 욕망과 기대, 의무와 가치 판단들의 체제를 뜻한다. 아이는 이 언술의 질서 속에 들어가며 이 질서에 의해 그 존재의 삶과 욕망이 조정된다. 즉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타자(내가 아닌 다른 대상)의 욕망"이 되는 것으로 조정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라캉에 의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의식한 나, 즉 의식된 자아는 타자(내가 아닌 다른 대상)와의 동일시를 통해 만들어진 상상적인 산물에 불과하게 된다. 또한 자아는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에도 현존하여 있다.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내가 아닌 다른 대상)의 언술이다"라고 말한다. 왜 우리 지식인들은 여기에 의문과 오류의 문제를 지적하지 못할까? 내가 그렇게 보는 이유는 쉽게 말해서 라캉이라는 원숭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했는 지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하여튼 각설하고 라캉에 의하면, 즉 나는 내가 스스로 의식할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에 나 자신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타자(내가 아닌 다른 대상)의 언술은 나를 사로잡고 있으며, 내가 스스로 만든 무의식적 언술의 결과인 증상들로 인해 나의 동일성은 흔들리게 된다.(정말 그럴듯 하다. 그러면 "언어란 인간이 태어나서 학습되는 것이다" 라는 명제는 성립하고 설명이 되는데 문제는 무의식을 여기에 끼워 맞추어야 겠으니 그 오류가 들통나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과학을 더 확증하기 위해 정도(正道)로 실험하는 것이 아니라 라캉이 의학도였다는 것을 팔아먹고 언어학자의 가면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엉터리 언어업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라캉의 작업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주체 안에 내재한 타자성을 증거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나의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간에 나는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이거나 타인이 만들어놓은 체제나 시니피앙의 결과물”인 것을 증명한다) 주체 안에 미만한 단절ㆍ공허함은 그러한 타자성의 표현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스스로 내부에 아주 낯선, 신기한, 이상한 측면이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무슨 라캉의 오류를 가지고 필자가 그것을 지적한 것을 무슨 대단한 지적성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누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필자가 맞고 라캉이 틀렸다는 것을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 이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갑자기 ‘로빈슨 크루소’처럼 어느 누구도 없는 무인도에 떨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 당신은 당신이 배운 언어는 알고 있지만 그 언어를 당신 자신 말고는 쓸 수 없기 때문에 혼자 중얼거리거나 의사소통할 대상이 없어 쓸 필요가 없는 이상 당신이 쓰는 언어를 잊어버렸다고 가정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당신은 살기위해 각종 나뭇가지나 도구를 사용해 물고기를 잡아 먹거나 나뭇잎들을 이용해 움막을 치고 비를 피하는 행동을 할 것이다. 그것이 깨어있는 의식이든 잘 때 꾸는 무의식의 꿈이든 즉 인간은 그의 인식과 의식작용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또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아기가 버려져 늑대나 개 , 고릴라 등 다른 동물에 의해 젖먹고 키워져 생명을 이었다면 그 존재도 인간의 말과 문화, 문명은 모를지언정 나름대로 감정의 의사표시를 하고 인식과 의식작용은 하며 생명을 이어간다. 즉 철저히 인간은 태어나서 자라고 학습한 문화권, 또는 로고스의 체제가 달라도 영혼(靈魂=육체를 이끄는 정신, 정신을 이끄는 두 영혼(기독교의 가르침=나는 이를 인정한다.)이 존재하는 실존과 실체의 주체 자아이고 그 개별 인간만의 인식, 의지작용과 그에 의한 행동이 있는 존재인 것이다.
라캉을 제대로 안다면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라캉에 의해 정의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상징계 자체가 타자의 영역이므로, 상징계 안의 욕망은 타자가 지정해 주는 것에 대한 욕망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보라. 선호하는 직업, 선호하는 배우자 등등은 모두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타자들이 욕망의 대상으로 지정해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캉에 의하면 인간 욕망의 “주체는 타자의 장에 종속된 상태로서만 주체일 수 있다.” 우리는 욕망의 대상을 발명하지 않고, 타자로부터 지정 받는다. 그리고 이 점은 [정신현상학](1807)에서 헤겔이 이미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있던 바였다. “사실상 욕망의 본질은 자기의식이 아닌 타자에게 안겨지는 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기의식에게 욕망의 진상이 밝혀진다.” 이렇기에 라캉은 ‘오늘날의 헤겔’이라 불리기도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아울러 라캉의 생각처럼 ‘주체’가 ‘타자의 장’에 귀속한다면, 데카르트의 ‘코기토’같은 주체,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같은, 성찰이나 반성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주체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반성’은 거울에 비추어보듯 자신을 객관화해서 대상으로 보는 자신을 대상화하는 이자적 관계이다.
그리고 반성하는 자는 반성된 형태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즉 생각하는 자는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라캉은 “생각함과 존재함이 일치하는 동일성을 지닌 이 주체의 지위는 ‘상상된 자아’, ‘상상을 통해 오인된 자아’이다. 왜냐하면 주체의 사유란 타자의 장인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고 규정짓는다.
즉 주체는 내가 아닌 곳, 즉 타자의 영역에서 생각하고 타자의 영역인 이 상징계에서 소외된 무의식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이 라캉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정식이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철학에 대한 라캉의 기여는 자기반성이라는 이자적 관계(나와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데카르트적 자아가 상상적인 것임으로 규정했고, 주체의 참다운 위치는, 제삼자에 해당하는 객관적인 질서(언어적 질서)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밝힌 점이다.“
그러나 과연 이 생각이 옳기만 한가? 나(맑은샘)은 아니라고 보며 옳더라도 지극히 부분적으로 옳은, 그 시각으로만 본 편협한 시각이라는 것이다. 이런 유치한 생각은 어떤 사람이 윤리적이거나 사회가 배제하는 범죄를 저질러놓고 절대로 그 스스로 진심으로 회개하고 아, 내생각이 잘못되었구나!”하는 반성의 기회와 실제를 부정한 것이다. 문제는 진심의 반성도 나라는 “주체”가 하기 때문이다. 대게 진심어린 반성이란? 나를 둘러싼 상징계의 영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잘못했다고 깨달을 때에만 의미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캉에 의하면, 상징계 안에서 인간 욕망의 주체는 ‘소외’와 ‘분리’라는 근본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욕망이 상징계 안에서 잃어버린 것의 대체물만을 움켜쥐고 불만스러워하는 까닭은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면, 욕망은 늘 ‘교집합을 가지는 양자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 받기 때문이다. 가령 ‘자유냐, 목숨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해보자. 노예와 같은 인간은 목숨을 선택할 텐데, 이 때 목숨은 교집합에 해당하는 자유를 상실한 목숨이 된다. 즉 욕망은 자유로부터 소외된 목숨을 성취할 뿐이다. 주인은 자유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자유의 성취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이 알려주듯, 이 선택에서 주인의 욕망은 ‘목숨(교집합)이 떨어져 나간 자유’를 얻을 것이다. 즉, 그는 자유인으로서 죽는다. (라캉에게 끼친 헤겔의 영감은 매우 풍부한 것인데, 그는 이런 소외의 논리 역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정신현상학]의 다음과 같은 묘사에서 착안하고 있다. “공동체의 자유가 이루어낼 유일한 작업과 행위란 ‘죽음’에서나 찾아질 수 있다.”)
우리현실에서 쉬운 예를 하나 보자! 공주병에 걸린 어떤 여자의 환상은 남자들의 눈에서 결여된 공백을 발견하고 그 결여를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채워 넣는 데서 완성된다. <출처 : NGD> 이처럼 소외를 겪는 욕망의 주체는 상징계를 지배하는 타자와의 ‘분리’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이 분리는 주체가 자신 뿐 아니라 타자에게도 결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타자의 영역인 상징계는 언어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언어는 주체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해올 것이다. 그런데 주체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 타자의 언어에 대해 ‘왜?’라고 질문한다. 엄마가 원하는 게 뭐야?, 라는 질문에서부터 애인이 원하는 것이 무얼까? 에 대한 의혹을 거쳐 심지어 경전의 언어를 앞에 두고 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도 의혹에 빠진다. 나를 둘러싼 상징계가 완벽했다면, 즉 타자가 만들어낸 언어적 질서가 완벽했다면 우리는 결코 의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왜?" 라는 의혹을 가질 새 없이 타자의 언어가 답을 마련해놓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우리의 ‘왜?’라는 의혹은 결국 타자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이냐 또는 타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한 의혹이다. 타자의 이 결여란 ‘주체 서로간에 본질적인 것이지 라캉처럼 어떤 상징계가 완벽해서 우리에게 영향만 주는 것은 아니다. 가령 신앙인이 신의 뜻에 대해 의혹에 휩싸이는 것이, 경전의 수정 가능한 결함 때문인가? 오히려 애초에 경전은 그런 의혹을 허락하는 결여를 본성상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징계 또는 타자의 결여 역시 그런 것이기에 그 결여는 주체가 어떤 ‘실재물’을 제공해서 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본래적 결여는 오히려 ‘주체가 갈망하는 것’으로 채워지는데 이를 ‘환상(fantasme)’이라 한다. 예를 들어 공주병을 다시 생각해 보시자 ! 공주병에 걸린 여자의 환상은, 남자들의 눈에서 결여된 공백을 발견하고 그 결여를 자신이 갈망하는 것, 즉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채워 넣는 데서 완성된다. 이렇게 보자면 환상이란 주체의 욕망을 지탱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는 항상 이런 환상의 보호 속에 살고 있다.
이처럼 라캉의 사상은 잃어버린 원초적 대상(대상a)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어떻게 인간의 욕망이 탄생하는지를 해명하려고는 한다. 이는 잃어버린 이데아를 찾아 헤매는 일로 현세의 삶을 이해한 플라톤 이래, 삶의 과정을 상실한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본 것은 서양 철학이 가진 한 근본적 경향이었으며, 라캉 역시 이 경향의 넓은 영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말년인 1970년대 라캉은 상징계 안에서 결여를 겪는 욕망 보다는, 상징계 안에선 출현이 불가능한 ‘실재’와 어떻게 조우해서 즐거움(주이상스, jouissance)을 얻을 수 있는지에 몰두한다. 이는 프로이트가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에서 말한 정신분석식 계몽의 표어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Wo es war, soll Ich werden)’를 라캉이 오랜 성찰을 거쳐 창조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충동이 있는 실재계의 차원에 주체가 자리 잡아야 한다.” 즉 타자의 질서인 상징적 질서내지 문화의 질서 안에서 욕망을 길들이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 교화되지 않는,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의 즐거움을 주체에게 찾아주는 것이 정신분석의 사명이 된다. 그 ‘즐거움’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문화의 교화 바깥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이 주는 선물일지도 모르고 질서 속에서 누리는 통상적 즐거움 이상의 ‘전복성’을 지닌 보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의 세계가 아닌 무의식의 세계에서 온 ‘환상’일 뿐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무식한 신경숙이 어떻게 살다가 남편도 원하는대로 만나고 어줍짢게 공주병의 대작가도 되었으나 그녀의 ‘표절’이 밝혀지면서 그녀의 무의식적 환상의 욕망세계는 끝나버리며 비참하게 자살할 정도의 부끄럽고 참담한 세상으로 추락했다. “갱숙이 이 미친 가시나야 그만 꿈깨거라이!” 라고 말이다. 또 신경숙을 그렇게 세뇌시키도록 그들의 '상징계'를 보쌈한 자들, 즉 남편, 창비, 문동관계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꿈깨고 엿먹어라!"는 우리의 사회적 반성이 당연히 숙고되는 것이다.
라캉의 문제는 자율적이며 이성적인 인간의 주체관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참된 말'의 달성을 정신분석학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결국 라캉의 이론은 서구 철학에 깊이 깔려 있는 로고스 중심주의를 한치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라캉은 이것을 더 강화한 셈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본질적으로 언어를 통해 표현될 수 없다고 강조했지만, 라캉은 무의식조차도 언어적인 구조로 파악한 결과, 언어를 벗어난 어떤 현실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런 엉터리 억지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어떤 이미지나 자극에 의해서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했을 때 흔히 그 대상이 말하는 당신을 보고 "정신 차려라!"라는 말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그 말의 의미는 어떤 인간들의 문화 체제이든간에 어떤 세계이든 간에 "너 자신의 정신을 차려라,,,," 또는 "너의 자아(영혼과 정신)에 물어보라!" , "그 생각이나 대상에 현혹되지 말고 너 자신과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바에 물어보라!" 그 말 아니던가?
라캉사상으로 어떤 고정된 체제나 세계에 무의식마저 지배받는다면 어떻게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변화,발전 하겠는가? 또 라캉의 엉터리 이론을 베껴 더 마르크스주의로 조작, 변용한 지젝은 라캉보다 더 엉터리다. 이것은 유물론자들의 허위와 오류, 거짓 그리고 실패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은 인간이 인간의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인식으로 변화,발전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렇다고 나는 단언하지만 오류와 엉터리들로 변화, 발전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 실패로 가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무의식"도 엄연히 인간이 가진 뇌(腦)의 활동이지만 그것은 뇌(腦)의 활동에 의한 인간 의식과 그로인한 의지의 작용중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인간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발동시킨다. 그것을 베낀 '인공지능'을 당신의 눈으로 보시라!
라캉식의 성서해석
"라캉식으로 성서를 해석한다는 것은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상호성에 따른 현재화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말과 같다. 20세기 신학은 텍스트와 콘텍스트 간의 연결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토론했다.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얼만큼의 콘텍스트 연구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신학적 토론은 2천년 전부터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라캉식 성서 해석은 이렇게 논의된 신학적인 내용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가령 기독론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 기본 전제가 된다. 이런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을 다루는 데도 중요하다. 라캉식 해석 방법은 가령 이천 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전해져 온 기독론과 콘텍스트 연구로 얻어진 자료에 근거하여 본문을 해석하여 나온 기독론을 종합하는 방법론이 될 수는 있다. 즉 그것은 과거의 역사적 문헌과 현재 거론되는 성서 본문, 이 둘을 아우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짜인다'고 말한다. 이 말은 당연히 의식은 언어처럼 짜인다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분명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의식적인 수준에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무의식에도 통사론적 법칙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의식적 수준에서 의미의 교환을 가능케 하는 언어체계가 은유의 축과 환유의 축으로 짜인 것처럼, 무의식적 수준에서 의미를 교환할 수 있게 하는 언어 체계 역시 은유의 축과 환유의 축으로 짜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 과연 독자들의 무의식 내용이 그 무엇이든지 간에 과연 그런지를,,,,,!
의식과 무의식은 둘다 뇌(腦)의 활동으로 일어나기는 하지만 엄연히 분리되어 있는 다른 표상의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영혼(靈魂)은 엄연히 존재하는 실체의 세계다. 필자의 소설 "하늘의 DNA"를 읽어보고 생각해 본 독자는 다소 이해가 갈 것이다. (특히 마지막편 부분). 나는 "라캉은 인간 철학의 오류인 유물론에서부터 출발해 프로이트와 소쉬르, 레비스토로스를 베낀 학문적 허세의 사기꾼일 뿐이라고 본다" .
그들의 유물론으로 해석한다해도 내가 아닌 타자(다른 대상이나 세계의 로고스)를 나의 오감을 통해 뇌로 받아들여 작동, 내가 해석해서 다시 말(언어)이나 행동으로 표출될 때에 나의 뇌속에서 작동 연상되는 의식과 무의식에 대해 깊히 주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보기에 인간 영혼, 정신의 실체와 존재를 바로 보고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라캉은 자기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원숭이일 뿐이다. 아직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은 “인간의 무의식” 그것은 인간의 상징체계(의식체계)를 변화시키는 미지의 원천이요 바다이고 창조적 예술(藝術)의 좋은 소재거리이기도 하다.
솔직히 필자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신경숙사태 때문이다. 진정한 창작자는 도저히 이토록 수준낮은 라캉식 이론의 굴레에 얽매일 수도 없고 얽매여서도 안된다고 본다. 왜냐? 창작자는 모방으로 새로운 인식이나 자신만의 독자적 의지를 이끄는 진실의 수호자이자 예술가이지 엉터리 사기꾼이면 곤란하다. 또 적어도 진정한 창작자라면, 라캉정도의 사상본질과 그 오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본다. 왜냐 나는 어떤 얼치기 평론가가 감히 라캉 번역본을 읽은 것을 가지고 필자의 졸작에 대해 그 틀로 이러쿵 저러쿵 할때 엄청 가소로운 점들을 많이 느꼈기 때문이다. (필자 앞에서는 가라로 읽은 놈들은 좀 너희끼리 노시고 이번 신경숙 사태에 대해서 불어 원전 읽은 분들이 좀 뭐라 하셔야 겠다.)
신경숙 사태로 일어난 새롭게 알려지고 있는 평론그룹들에 필자도 어느정도 일부분 사회적 공익적 인식과 생각에 박수를 보내지만 그것을 넘어 지젝처럼 사회주의로 그런 자기수용 비판검토없는 안경평론만 가지고 피땀흘린 작가들의 작품에 원숭이안경 레고놀이 하는 것도 우습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신경숙이 자기변명이나 합리화를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표절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중에,,,나도 모르게 그런 문장이 표절되었나보다?" 라고 변명한다면 내가 비판한 라캉생각으로 보아도 라캉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필자도 모두 신경숙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무의식도 그 내용표현을 할때는 지극히 현실세계에서의 의도된 뇌활동으로 글쓰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신경숙은 필자가 틀렸다고 지적하는 '라캉 딸랑이 평론가들' 수준도 못되는 한심한 일을 저질렀다. 그런 라캉 딸랑이 평론가들 수준도 못되는 창비그룹, 표절작가 신경숙 따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신경숙과 창비의 행위는 그런 졸평 수준들에도 한참 못미치니 너무나 창작자로써도 나는 더 그들이 불쌍하고 한심하게 생각될 뿐이다.
또, 더불어 21세기는 정보와 지식의 세상이다. "인간이 로봇과 인공지능을 만들었지, 로봇이 인간을 만들고 규정짓고 노예로 부리나?" 엉터리와 왜곡과 오류의 라캉이 더 설치면 그럴 수도 있겠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무의식의 세계는 엉터리 라캉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직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를 오용, 남용해 한국땅에서도 사기치고 있지만 말이다,,,,, (맑은샘)
*다음 에세이 예고 : "작가의 표절, 창작윤리와 예술적 모방의 문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