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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묵상글 ( 연중 제25주일. - 우리도 선심을 마구 쓰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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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21 03:24
- 우리도 선심을 마구 쓰자!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오늘 주님 말씀처럼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능력 때문이 아니라 당위성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섬겨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느님과 재물이 동급이 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하느님이라고 믿는 신앙인이라면
재물이 결코 동급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아니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신앙인인 우리에게 하느님은 섬겨야 할 분이고, 돈은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 드신 비유에 대입해 보면 집사가 오직
섬겨야 할 분은 주인님이고, 돈을 써야 할 곳은 주인님의 가솔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 아닌 경우에는 이 주종의 전도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종종 얘기하는데 주객의 전도보다
더 심하게 잘못된 것이 바로 주종의 전도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경우에도 이런 주종의 전도 현상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환시 중에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주인과 종 중에 누구를 섬기는 것이 더 마땅하냐?
종이 아니라 주인을 섬겨야 마땅하다는 것은 신앙인이 아니어도 압니다.
그러므로 신앙인과 신앙인이 아닌 사람이 갈리는 것은
종보다 주인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아느냐 여부가 아니라
누가 그에게 주인이고 누가 그에게 종이냐 그것입니다.
신앙이 없고 현명하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주인이 아니라
돈 곧 마몬이 신이 되어 돈이 주인이고 돈을 섬깁니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는 물신주의(Mammonism)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대신 재물을 신이라고 섬기는 주의이고,
재물의 신인 Mammon을 섬기는 주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신주의자가 아니라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가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겨야 하고 돈은 잘 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쓰는 것이 돈을 잘 쓰는 것입니까?
그것을 오늘 주님께서는 불의하지만 영리한 집사를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것으로 보아 집사는 불의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재물로 선심을 썼기에 불의하다고 하지만
집사란 원래 주인의 재물로 선심 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집사란 그도 종이지만 주인과 주인의 종들 사이에서
주인 대신 재산을 관리하고 다른 종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은 자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영리한 집사라면 이웃에게
선심을 잘 써야 하고 선심을 마구마구 써야 합니다.
우리가 선심을 잘 쓰지 못하고 마구마구 쓰지 못하는 것은
재물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여 움켜쥐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 것은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마구마구 주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습니다.
재물뿐 아닙니다.
재능도 마찬가집니다.
탈렌트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며 종에게 맡긴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가진 탈렌트 곧 나의 재물과 재능은
내 것이 아니라 실로 주인 것이고 이것으로 나는
마구 선심을 쓰고 있는지 이런 질문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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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
“기도하라, 관대하라, 지혜로워라, 성실하라”
정말 대한민국은 엄청난 나라입니다. 작은 고추가 맵다 했는데 이건 매운 정도가 아닙니다. 유투브를 대략 일별해 보면서 순간 와닿는 느낌입니다. 참 역동적인 나라요 희망찬 나라입니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세계 4대 강국 사이의 사면초가 상황속에서 이뤄낸 쾌거의 기적입니다. 이런 위대한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음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이미 어제 한국순교자들 대축일을 통해서도 대한민국이 얼마나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지,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가 그대로 실현됨을 깨닫습니다. 순교자 성월 9월, 순교자들을 기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백색순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저절로 나오는 물음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을 목표로 한결같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복음에서 “어떤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천명하셨습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피정하는 형제자매들에게도 베네딕도 수도회의 “하느님만을 찾는” 보편적 영성을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순교 영성의 시대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도 보고 배웁니다. 이런면에서 우리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명품종교에 명품교황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76세에 착좌하여 88세 선종하기 까지 노년에도 영원한 청춘다운 기백으로 끝까지 책임을 다하신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의 빛나는 모범을 보여 주었고, 뒤를 이은 레오 교황도 은은히 그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두 분 교황님은 백색순교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레오 교황에 대한 컬럼 내용 일부를 나눕니다.
“이미 레오 교황은 교황직의 실질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균형을 중시하고 다양한 견해를 존중하며, 특별히 필요한 이유가 없으면 함부로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지금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또 다른 격변이 아니라 평화라는 신념이 드러난다. 충돌보다 공동체를 훨씬 더 중요한 이상으로 여기는, 온화하고 사목적인 목자의 모습이다.”
얼마나 멋진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인지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출신답게 성인의 -‘진리veritas;베리타스’, ‘일치unitas;우니타스’, ‘애덕charitas;카리타스’-의 정신으로 함양된 전인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런지요?
첫째, “기도하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간절하고 한결같은 기도가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을 이루어 줍니다. 기도하라 직립인간에 어디서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티모테오에게 전하는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명쾌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아주 신심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도록 하십시오.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수십년간 레오 교황을 전부터 지켜본 분의 고백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레오교황은 하느님과 이웃에 경청했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도의 사람’은 겸손히 귀기울여 듣는 ‘경청의 사람’입니다.
둘째, “관대하라!”입니다.
주님을 닮아 너그럽고 자비로우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약은 집사의 비유>에 나오는 어떤 부자에게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관대한 면모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어떤 부자가 약은 집사의 처사를 꿰뚫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자기에게 빚진 모든 이들의 곤궁한 처지도 어떤 부자는 분명 알고 있었으리라 봅니다.
약은 청지기가 스스로 살길을 찾아, 미래 대책을 세우고 기민하게 실천에 옮기는 모습도 연민의 시선으로 묵묵히 지켜보며, 봐도 못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했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알아서 살길을 찾는 모습과 곤궁한 이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집사의 처신을 내심 흡족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속으로는 이렇게 되기를 바랄수는 있어도 하라고 할 수는 없고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니 부자는 내심 고마워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끼친 피해가 아무리 많다 해도 하느님을 상징하는 재산 많은 부자에게는 조족지혈鳥足之血 새발의 피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론 말씀은 그대로 하느님 마음의 반영입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셋째, “지혜로워라!”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인 이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비둘기같이 순결하면서도 뱀처럼 슬기로워야 합니다. 기민하고 영리하게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세상의 자녀들의 지혜를 우리 빛의 자녀들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부자는 결코 속임당하는 어리숙한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관대하면서도 깊은 지혜를, 사람을 살리는 지혜를 겸비한 분, 하느님처럼 생각됩니다.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약은 청지기는 물론 빚진 이들이 탕감받아 살게 한 부자의 자비와 지혜입니다. 종교간 대화와 협력의 콘퍼런스에 보낸 레오 교황의 “편견의 잡초를 뽑고 형제애의 들판을 가꾸자.”라는 메시지에서도 교황의 자비와 지혜가 빛납니다.
약은 청지기의 사기행각을 배우자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직면했을 때 신속히 타개해 나가는 생존의 지혜와 결단력, 돌파력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비상한 시국에서는 비상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바로 작금의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이런 생존능력이 탁월한 지혜를 겸비하는 것이요, 궁즉통(窮則通)이라 궁하면 통하니 국민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이런 생존의 지혜도 나옵니다.
넷째, “성실하라!”입니다.
재물은, 돈은 선도 악도 아닙니다. 활용하기 달렸습니다. 주인은 하느님이요 재물이나 돈은 종입니다. 그러니 재물이나 돈을 지혜롭게 올바르게 성실히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자에게 지탄받는 부자들은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된 자들입니다. 주님은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 부자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나는 너희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 재물을 올바르게 이용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성실하고,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데에 성실하지 못하며,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하늘의 하느님께 성실한 자들은 땅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성실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이 삼실의 자세입니다. 진실하고 성실하고 절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의 자세가 바로 이런 삼실의 삶입니다. 오늘 연중 제25주일 주님은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에 대한 참 좋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1.기도하라.
2.관대하라.
3.지혜로우라.
4.성실하라.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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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5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재물을 관리해야 하는가?”를 넘어서, “재물의 원 주인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아모스는 빈곤한 이들을 짓밟고 망하게 하는 이들, 곧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의 참상을 고발하는 한편, 그들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신심 깊고 품위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일임을 말하면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와 해설”입니다.
여기에서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결국은 하느님 및 이웃들과의 관계를 결정짓고 있음을 말해 말해줍니다.
비유 속의 집사는 주인의 재물을 횡령했습니다. 곧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기신 분의 뜻을 거역하였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써버리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하고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처합니다.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며, 움켜쥐었던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그들의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재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의견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요 우상숭배가 됩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며, 주님을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물질에 지배당한 사람은 물질을, 자기 자신에 지배당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대체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물질이나 자기 자신의 생각과 뜻이라는 우상인가?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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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옆 좌석에 있던 분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바닥에 떨어트렸습니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옆에 있던 분들이 스마트폰에 있는 라이트를 켜서 함께 찾았습니다. 바닥에 있던 이어폰을 찾은 후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이어폰을 찾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보물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팔아 밭을 산다. 하늘나라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과 같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간다. 하늘나라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같다. 목자는 기뻐하며 돌아온다. 하늘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한다.” 이어폰을 찾자 모두 기뻐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서라벌 옛터전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진리를, 선비네 힌 옷자락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진리를 천주교에서 찾았습니다. 성리학은 신분제와 가부장제 속에 한계가 있었지만, 천주교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양반·중인·천민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 이해였습니다. 천주교 신앙은 신분과 배경을 뛰어넘어 서로를 형제자매로 묶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것은 고립된 개인들에게 따뜻한 가족과 같은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도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조선의 신앙인들도 기꺼이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 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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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나는 너를 사랑해!"...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 서른일곱 번째 주간 실천
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20일 토요일- 서른일곱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관상의 수양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능력에 힘을 실어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바라보는 법을 배우기)Learning How to See는 사랑의 눈으로 보는 우리의 능력을 강화해 주는 관상의 수양에 청취자들을 초대합니다. CAC의 운영진 중 한 사람인 카르멘 아세베도 버처(Carmen Acevedo Butcher)는 다음의 안내 명상(this guided meditation)을 소개해 줍니다:
우리는 매우 개별적이고 관상적인 방식으로 사랑에 관한 명상을 할 것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포용하고 품게 하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기억하게 해 주는 명상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더불어 바라보며 삼위일체와도 같은 매우 일반적인 세 단어(나는 너를 사랑해: I love you)를 명상하시고, 또 이 세 단어와 더불어 명상해 보십시오. 관상을 하는 이가 그러듯이, 이 단어들과 더불어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지금은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여러분의 숨에 여러분의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의 호흡이 하루 중 가장 깊고 느린 호흡이 되도록 숨을 쉬십시오. 코로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 마시시고, 입으로 천천히 숨을 내 쉬십시오....
마치 처음인 듯이, 이 세 단어를 바라보십시오. 이 세 단어의 깊은 의미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다시 바라보십시오. 그러면서 물으십시오. "나는 너를 사랑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그리고 얼마나 많이 다른 식으로 "나는 너를 사랑해"를 말하나요? 이런 말들처럼요. "나는 너의 진가를 알아." "너는 널 있는 그대로 보고 있어." "나는 네 말을 순수하게 듣고 있어."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지난 1,000년간 이 세 개의 영어 단어는 수많은 연인들의 진짜 사랑, 즉 아름답고, 때로는 불완전하며, 진실된 사랑을 수백 년 동안 담아왔고, 빛내왔습니다.
들숨을 쉬며 하느님, 즉 사랑 혹은 여러분이 신성하신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이, 그분이 여러분에게 하시는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날숨을 쉬며 어린이 같은 마음을 모두 모아 하느님께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답해 드리십시오. 하느님의 "나는 너를 사랑해."를 들이 쉬시고, 여러분의 진심어린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내 쉬십시오.
이 숨기도를 바치는 동안 무엇이 여러분 마음에 오든 - 기쁨, 슬픔, 두려움, 괴로움, 화, 고마움, 부끄러움 등 -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끼십시오. 짐 핀리(Jim Finley)가 말하듯이, 그것을 잠시 부드럽게 붙들고 있다가 "사랑과 사랑 그 자체만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밝혀 줄 수 있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느낌이 흘러 나가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우리 존재 전체, 즉 우리의 모든 면—기쁨, 슬픔, 상처, 회복, 죄책감, 감사—을 꿰뚫고 흐르는 하느님의 "나는 너를 사랑해."를 들이 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진심어린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내 쉬십시오.
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까요? 가장 훌륭한 사랑은 "왜"라는 질문이 필요없음을 느끼고 맛봅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이것을 "sunder warumbe"(왜 없이: without a why)라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흐르는 하느님의 은총에 열린 눈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든, 어느 때든,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밝혀줄 수 있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 잠시 멈추어서 이 명상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References
Adapted from Brian McLaren and Carmen Acevedo Butcher, cohosts, Learning How to See, podcast, season 8, ep. 2, “Learning to See Grace-fully with Nadia Bolz-Weber,” May 8, 2025.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ankhadeep Barm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저 사람은 꽃 앞에 멈춰 서서, 경외심을 가지고 그 아름다움에 머무릅니다. 꽃의 조용한 아름다움에 압도당하며, 그것에 자신을 맡기기를 선택하는 것이고 꽃을 바라보며 그들과 함께 현존하는 수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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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내' 앞에서 참된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며....
어떤 엄마가 5살과 3살 된 어린 두 아들에게 팬케이크를 만들어 먹이려 하고 있었는데, 두 아들이 누가 먼저 첫 번째 팬케이크를 먹을 것인지를 가지고 싸우더랍니다. 그래서 엄마가 아이들에게 서로 양보하는 마음을 키워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얘들아, 만일 여기 이 식탁에 예수님께서 앉아 계시다면 그분께서는 '내 형제에게 먼저 팬케이크를 주세요.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하고 말씀하실 거야." 그랬더니 큰 아이가 동생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야. 네가 예수님 해!~~~" ㅎ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사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능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이 가장 먼저 말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내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아쉽게도 인간의 본성적인 이기심은 단순히 나이를 먹거나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니, 오히려 오늘날의 문화는 이런 이기심을 더 부추기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이런 이기심의 경향이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사그라들지 않지요?!
사실 요즘의 문화는 이기심을 키우고, 광고는 이를 조장하며, 스포츠 영웅들은 영광을 추구합니다. 오늘날의 철학은 '나부터 챙겨라'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던 제자들마저도 누가 더 큰 사람인지를 가지고 다투었다고 하지 않습니까?!(마르 9,34; 루카 9,46).
제가 현실을 너무 회의적으로 보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내면 깊이 들어가 우리 존재의 근본 뿌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에고와 어려서부터 이 에고와 결탁하여 성장한 우리 정신은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이런 이기적인 방향을 향해 시선을 두게 되어 있고 그쪽으로 계속 방향을 잡아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어쩌면 예수님의 이 권고의 핵심은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진정한 본질을 찾아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겉보기에 중요한 그 가짜 자아를 버리면 참 자아를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자아를 살아가기 위한 전제적인 조건은 '내'가 붙잡고 있는 가짜 자아의 실체를 인식하고 이를 놓아주는 수양을 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부정일 것입니다.
모든 것은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주 전체에서 이 흐름에서 예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가장 강력한 사랑의 흐름을 이루어 이 세상이 창조되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듯이, 모든 것은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흐르는 것을 붙잡으려 할수록 오히려 우리 내면의 괴로움은 커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내면의 괴로움에서 해방되려면 모두 제 십자가를 지고 우리 앞에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십자가는 그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사형틀로서의 십자가라기보다는 참된 사랑을 위해 그 모든 아픔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의 사랑, 하느님의 궁극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더 가까이에서 온 마음으로 바라보며 우리 사랑을 깊이 새기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고 의식하고자 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그 사랑을 더 깊이 새겨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무의식 안에서 성장한 이기적인 경향은 자연스럽게 이 사랑을 바라보는 일을 마다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기적인 방향이 우리를 알게모르게 괴롭게 한다는 사실을 간혹 알아차립니다. 그때가 어느 때냐면, 바로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일깨워 주시는 때일 것입니다!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깨워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본질을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기적인 경향이 진짜 본질이 아니라 가짜요, 사랑과 관계성 안에 있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진짜 본질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를 버리고(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의 핵심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 드러내 주신 예수님의 이 엄청난 사랑을 깊이 바라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분명한 진리 하나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존재의 본질은 '이기'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분명히도 우리 순교자들은 이런 바라봄의 수양을 통해 우리 존재의 본질을 깊이 깨달았던 이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증거한 것이고요!
제가 오랜 전에 어렵게(?) 읽었던 토마스 머튼의 자서전인 "칠층산"에 저자 토마스 머튼의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나는 내 방에 있었다. 밤이었다. 빛이 보였다. 갑자기 그것은 나에게 1년 전 돌아가셨던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와 함께 있었다. 그가 나와 함께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고 마치 그가 나의 팔을 만지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섬광처럼 지나갔으나 그 섬광 속에서 즉시 나는 내 영혼의 비참함과 퇴락에 대한 갑작스럽고도 심오한 통찰에 압도되었다. 나는 내가 처해 있던 상황을 깨닫게 해 준 그 빛에 깊이 뚫린 것 같았고, 내가 본 것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찼으며 나의 온 존재는 내 안에 있었던 것에 반항하며 일어났고, 나의 영혼은 이제까지 안 적이 없었던 전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강렬하고 긴급하게 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탈출, 자유, 해방을 원했다. 이제 나는 처음으로 나의 이전 생활을 생각하고 진정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입술로만, 나의 지력과 상상력으로 하는 기도가 아닌 나의 생활 밑바닥과 나의 존재 뿌리에서 나오는 기도, 내가 이제까지 안 적이 없었던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또 머튼은 [관상의 새로운 씨]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잘못과 개인적인 자아는 하느님의 뜻과 사랑 바깥에, 즉 실제와 삶 바깥에 존재라려는 (가짜) 자아이다. 그러한 자아는 도움을 줄 수 없고, 단지 환각일 뿐이다.
우리는 이 환각을 깨닫는데 능숙하지 못하며.... 이 우리는 악의 뿌리에서 태어나고 양육된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가짜 자아보다 더 큰 주관적인 실체가 없다. 그러나 이 가짜 자아는 존재할 수도 없다. 이 가짜 자아의 그림자 숭배에 헌신하는 삶을 죄의 삶이라고 부른다!
'나'의 정체성의 비밀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 감춰져 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참으로 그분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무한한 단순함은 어떤 나눔도 구별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 이외에 어느 곳에서도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실존의 이유와 충만함이 감추어진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가치 있고 중차대한 일은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온전히 내어 주시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사랑의 주님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상적 삶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이런 노력을 진심으로 하는데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참 자아를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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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선 공지 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금 한국에 있지 않습니다. 시차가 7시간 차이 나는 프랑스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프랑스에서 새벽에 묵상 글을 올려도 한국에서는 늦은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순례 일정 때문에, 이곳 시간에서 밤늦게 올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올리기는 하겠지만, 다소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묵상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고, 아는 지인들이 계속 문자를 보내셔서 더는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공지합니다. 본인들은 늦은 아침이지만, 여기서는 한밤중이거든요. 그러면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참…. 저는 9월 26일 오후에 한국으로 들어갑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감, 놀라움, 할 수 있는 목록의 증가, 포기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성공 가능성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군대에서 힘들었던 훈련 중에 종종 조교가 ‘선착순 몇 명’을 외칩니다. 그러면 이 숫자에 들어오기 위해 전력 질주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발이 빨라서 한 바퀴 만에, 그렇지 않으면 한 바퀴 더 돌면 그 선착순 안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대 동기인 친구는 매번 꼴찌입니다. 저는 1~2바퀴면 편안히 쉴 수 있었지만, 이 친구는 매번 제일 많은 거리를 뛰어야만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이 친구에게 “힘들지?”라며 위로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밝게 웃으면서, “내가 워낙 느리니 꼴찌 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렇게 마음먹기로 했어. 기합이 아니라, 나를 튼튼하게 만드는 운동이라고. 그러니까 이 기합도 재미있더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으면 포기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의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앞선 군대의 친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튼튼해졌고, 군 생활을 너무나 잘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집사를 해고하려고 하지요. 이때 보여준 집사의 행동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게 합니다. 빚진 이들을 불러 빚 문서를 줄여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한 것은 주인이 놀랍게도 집사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리한 대처’를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불의를 행해도 괜찮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재물과 기회를 활용하는데 더 지혜롭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본래 불완전한 것이지만, 이를 나눔과 자비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작은 일에도 성실하고, 또 세상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하느님 뜻에 맞게 성실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집니다.
오늘의 명언: 완벽해지려고 애쓰지 마라. 진짜 나로 살아가려고 애써라(브레네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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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키엣 대주교님.
영원한 재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명예? 건강? 돈? 아마도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명예와 건강도 기본적인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돈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돈은 돈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권력자들조차도 지배합니다. 그래서 돈은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돈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신처럼 사람을 굴복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복음은 매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첫째, 하느님이 주인이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이 아무리 만능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만이 우주와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적이시고 돈은 수단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돈을 사용할 때만이 하느님께 이를 수 있습니다. 재물과 하느님 선택의 기로에서 언제나 하느님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둘째, 참된 재물을 찾아야 합니다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하느님께서 맡기신 돈,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즉 하느님의 뜻대로 쓰는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돈을 사용한다면 언젠가는 참된 재물과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셋째, 영원한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짧은 세상의 돈은 이 세상에서만 가치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업신여기는 것은 곧 주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며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돕는 것입니다.
넷째, 자신의 참된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세상의 재물은 하느님께서 다른 이를 섬기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 있는 참된 재물만이 진정한 우리 소유물입니다. 땅의 재물을 움켜쥐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신 것은 그가 주인의 재물을 아낌없이 나눠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의 지혜를 본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주인이심을 알고, 재물을 종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세상 재물은 거짓이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쓰면 참된 재물이 됩니다. 세상 재물은 덧없지만, 이웃과 나눈다면 영원한 재물이 됩니다.
진정한 재물의 가치를 깨닫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할 때 세상은 변화됩니다. 아니 세상보다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 변화의 힘으로 이 땅에서 나의 것을 나누는 삶을 산다면 훗날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에게 돈은 수단과 목적 중 어느 것에 가깝습니까?
2. 일상 속에서 나의 소비는 하느님의 뜻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3. 내가 지금 추구하는 재물과 가치 가운데,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있는 ‘영원한 보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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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돈 문제를 넘어, 하느님 앞에서 한 마음으로 서는 성실함을 가르쳐 줍니다. 성실은 작은 일과 큰일, 눈에 보이는 일과 보이지 않는 일,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잇는 열쇠입니다.
동양의 유교 전통에서 “성(誠)”은 가장 근본 덕목입니다. 『중용』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은 하늘의 도요, 성실은 사람의 도다. 성실한 자는 거짓이 없고, 거짓이 없는 자는 천지와 합한다.”
성실은 단순히 정직하게 행동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내 마음 깊은 곳이 하늘의 진리와 일치하도록 사는 것, 이것이 유교가 말하는 성실입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때, 그것은 하늘의 뜻과 합일하는 길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는 유교의 성(誠)과 맞닿아 있습니다. 작은 일 속에서 이미 진리가 드러나고, 하늘과 사람을 잇는 성실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진실하지 않은 마음은 하느님 앞에 설 수 없다.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큰 은총을 맡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작은 일은 곧 양심의 시험대”라고 하며, 일상의 작은 선택에서 드러나는 정직과 성실이야말로 신앙의 진정성을 보여 준다고 했습니다. 성 바실리오는 “네가 맡은 작은 책임에 충실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대에게 영원한 생명을 맡기실 것”이라 했습니다. 교부들에게 성실이란 단순한 도덕적 성품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충성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재물은 늘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성실한 신앙인은 재물을 다스리는 법을 압니다. 재물은 나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관리인은 재물을 자기 것처럼 쥐고 살지만, 성실한 청지기는 재물을 맡은 자로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합니다.
유교가 말하는 성실, 교부들이 강조한 성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실은 모두 같은 곳을 향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고, 이웃에게 정직하며,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게 사는 삶입니다.
성실은 거창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작은 일, 작은 선택, 작은 말에서 시작됩니다.
가정에서, 작은 말 한마디에 성실합니까?
직장에서, 작은 정직을 지킵니까?
공동체 안에서, 눈에 띄지 않는 봉사에 성실합니까?
작은 일에 성실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은총을 맡기십니다. 유교의 성(誠)이 하늘과 사람을 잇는 길이라면, 복음의 성실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는 길입니다. 성실한 신앙인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섬깁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성실하게 지켜 주시고,
작은 일에도 정직하게 살아
하느님만을 참된 주님으로 모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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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성체의 날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1. 현존 (Presence)
완덕(完德)의 가르침
믿음의 공로
성육신은 믿음의 가장 큰 공로를 가능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든 업적 중에서 성육신은 가장 믿기 어려운 것이며, 가장 이성이 초월되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업적 중에서 이 일이야말로 이성을 가장 초월한다. 참된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 참된 인간이 되셨다는 이 신적 성취보다 더 놀라운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모든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전환을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11장 1절에 따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어려운 믿음은 없을 것입니다 — 한 인간을 보면서 그분이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육신은 믿음의 가장 큰 공로와 어려움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믿음의 가장 큰 확실성 또한 가능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성육신하신 말씀의 말씀이야말로 무엇보다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믿음의 길을 따라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마음에 더 큰 확신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이심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간성을 취하셨으며, 이로써 이 믿음을 세우고 확립하셨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하느님이신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갖게 되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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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 기도와 선행으로 오직 하느님 섬기는 데에만 / 연중 제25주일 다해
부모님 생일에 자녀들은 부모에게 선물을 드린다.
작은 것일지라도 부모는 매우 기뻐한다.
비록 선물을 받았지만,
이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준 것의 일부를 돌려받는 것일 게다.
그런데 자녀들이 커 돈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제는 자신들이 부모에게 무엇인가 해 준다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부모가 아니면 할 수도 없었는데 조금 내어 주면서 곧 교만해지는 거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도 그렇다. 내가 가진 것 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분에게서 받은 것 일부를 돌려드리는 것임에도 우리는 ‘봉헌’하면서 나의 것 드린다고 착각한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긴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는 섬길 수 없다.”
약삭빠른 집사에 대한 비유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거나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 다 결국 그분 것이다.
나의 것이 아니니 ‘불의한 재물’인 거다.
내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주는 모든 것은 본디 다 그렇다.
다시 말해 그분 것을 다시 봉헌하고 그 일부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런 이는 봉헌하고 자선을 베풀면서도 스스로를 자랑할 수는 없다.
어차피 주님의 것을 내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니까.
사실 ‘불의한 집사’는 비윤리적이면서도 영리한 이다.
집사 주인은 재산을 제멋대로 낭비한 그를 해고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의 살길 찾으려 주인에게 빚진 이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준다.
주인은 매우 너그러운 이어서 그의 이 그릇된 행동을 나무라지 않고 칭찬한다.
실직의 위기에 있는 집사가 살아남으려고 애쓴 처사는,
세상 사람들의 치열한 생존 방식을 알려 주기에.
“너희가 불의한 재물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 맡기겠느냐?”
우리가 비록 천상의 것을 추구하지만, 지상 재물을 관리하는 데에도 성실하여야 할게다.
재물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하지만,
재물로 사귄 친구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도움주기에.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천상의 것을 추구하더라도, 세상 것인 재물을 관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삶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게으르고 무질서하게 살기를 바라지는 결코 아닐 게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이는 큰일에도 대단히 성실하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재물을 성실하게 관리해야 하는 그 뚜렷한 이유는
재물 자체가 우리 구원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실한 삶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에.
이처럼 구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 삶의 결과이기도.
어쩌면 사람들은 살면서 참 생명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을 섬기기보다는,
잠시 있다가 곧 없어지고 말 재물, 명예 따위를 섬기기를 더 좋아하기도.
그래서 경제 살린다면서,
그분께서 주신 자연을 파괴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돈 앞에서는 부모 형제도 안중에 없다.
그러면서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 얻으려 안달이다.
구원받아 그것으로 나아가는 게 곧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판가름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아가면서 기도와 선행으로,
오직 하느님 섬기는 데에만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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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 예수님을 따라나선 마태오 사도의 그 길을 /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0921]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불렀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그는 곧바로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이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 제자들께 일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닌 자비다.’라고 하신 그 말의 뜻을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인 마태오의 직업은 세리였다.
세리는 자기 민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치는
지배국의 앞잡이 노릇과 자신들 잇속을 채우려 세금을 과다하게 부과도 했다나.
따라서 유다인들은 영혼과 민족을 파는 그들을 몸을 파는 창녀보다도 더 심하게 멸시하였단다.
마태오는 주님 은덕을 입은 자라는 뜻이다.
세리는 그가 개인적으로는 어떤 이었든 간에,
당시 그네들 사회에서는 공공연히 독사 같은 매국노로 지독한 지탄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 마태오를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시고는
곧장 그의 집에 가시어 여러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까지 했단다.
그리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닌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라고 큰소리까지 치셨다.
죄인은 치유 대상이지 단죄할 이가 아니라나.
죄를 지었다고 격리가 아닌,
어떻게든 그 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만 된다는 거다.
암튼 먼저 부르심 받은 다른 이들에게도 이 일은 여러모로 언짢았을 게다.
‘저런 인간을 우리와 한 무리가 되게 하시다니.’라면 자존심 상했을 수도.
아마도 어부는 세리와는, 세리는 어부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으리라.
이처럼 어쩌면 예수님이 제자를 선택하신 그 내막은 다소 힘든 부분이 있었다.
어부들은 그 비린내 나는 손 때문에 다른 이들과는 악수하기조차 꺼리는 이들이었고,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라 하여 유다인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아무튼 예수님은 죄 많고 작은 이, 멸시의 대상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당시에는 가히 파격적이었다고나 할까.
보신 눈이 세상 시각과는 확연히 다르셨다.
세상 기준으로는 별 볼 일 없는 그들을 꼭 필요한 이로 뽑으신 거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일할 이를,
이런저런 조건으로 골라 뽑는 우리네 모습이 주님 앞에 부끄럽기까지 하다.
“나는 의인보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부르심에 거침없이 순종한 마태오는 자신이 세리였음을 고백한 겸손한 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선하다면서 누구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자만하는 이가 아닌,
가책을 느끼면서 절실하게 도움을 간청하는 이를 부르러 오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둠의 자식이라 일컫던 그를 제자로 선택하셨다.
그의 직업을 보신 게 아니라 오로지 사람 됨됨이로만 보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이르셨다.
희생 제물이 오로지 이웃에 대한 순수한 자비로 이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희생 제물은 즐겨 받지 않으신다는 뜻일 게다.
사실 주님께 받은 것에 감사해서 나의 것을 내어놓는 그 행위 자체가 봉헌이다.
그런 이들은 이웃에게 무자비할 수가 없다.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과 이웃을 향한 자비는 하나이다.
우리 역시 예수님 부르심으로 축복 입은 이다.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그분 초대에 실로 부응하는지?
마태오가 따라간 그 숙명의 길을,
그날까지 끝까지 따라는 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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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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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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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늦게 올라오거나 다음날 또는 게재 아니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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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긴다고 표현하시지만
이 말씀은 의지한다고 바꾸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즉 하느님과 재물에 함께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던지 재물에 의지하던지 둘 중 하나이지
동시에 둘 다에 의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보니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습니다.
불완전함은 불안함으로 경험합니다.
불안하기에 의지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큰 병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에
사람들은 재물을 모읍니다.
치료비부터 시작해서 엄청난 돈이 들 것 같은데
갑자기 큰 일이 닥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준비라는 차원에서 돈을 모으는 것은 현명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돈을 모으면서
모든 불안감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돈으로만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통장의 숫자에서 더 안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통장의 숫자를 보기 시작하면
인간은 점점 눈을 하느님에게서 통장으로 돌리곤 합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인간의 노력으로 대비할 수 있다는
생각의 표현입니다.
즉 인간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모으기 시작한 이유를 다시 보면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재물을 모으는 것인데
그 노력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를 말하면
인간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
그 불안함 때문에
하느님께 향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변화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시작될 것입니다.
재물이 전부가 아니구나 생각할 때
천천히 우리의 눈은 하느님을 찾기 시작할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
진정한 안정을 주실 수 있는 분께
의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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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21. 연중 제25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23-26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기 때문입니다. 모진 고문을 견디어 내면서까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분들의 모범을 본받음으로써 그분들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기쁨과 영광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풍요로움은 신앙의 선조들이 흘린 피와 땀 덕분입니다. 그분들은 우리 신앙에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죽음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귀하고 소중한 신앙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지요? 신앙생활을 내가 원하면 하고 원치 않으면 하지 않는 것으로, 시간이나 여유가 남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며 스스로 그 자유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영적인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남들은 다 어떻게 하면 더 쉽게, 더 편하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낑낑대는 모습이 그들 눈에는 미련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불편과 수고를 감수하는 것은 정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신앙을 위해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재물 들을 포기하는 모습이, 불편과 희생을 감수하는 모습이, 당장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고 딱히 원하지 않는 것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엔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위해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세상 것들을 좇다가 영원한 생명을, 구원을, 참된 행복을 놓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없다면, 그분의 사랑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 상태에서는 내가 온 세상을, 세상의 온갖 쾌락과 부귀영화를 다 얻는다고 해도 무의미, 무감동, 무가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비운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자기 안에 있는 뭔가를 비우는 것은 더 좋고 더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 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드는 나의 취향, 욕심, 계획 같은 것들을 비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계획을 채웁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사랑에 더 깊이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서 누군가로부터 억압이나 폭행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외적 박해가 없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그저 순탄하게 흘러가는게 아니지요. 나를 하느님으로부터,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내적인 요인들 때문입니다. 나의 욕심이, 나의 고집이, 나의 게으름이, 나의 자존심이, 나의 이기심이, 나의 교만이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자꾸만 나를 떼어 놓는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그런 요인들을 말끔히 비워 나가야 겠습니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그분 사랑 속에서 기쁘게 살아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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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53
9월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경축 이동)/연중 제 2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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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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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군종교구 김영송 알베르토(흥보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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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눠지는 재물은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꽤나 난해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강조하시는 바가 뭔지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집사의 보인 행동은 엄연한 불법행위였습니다. 타인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경제사범입니다. 주인 입장에서 보면 정말 분통 터질 일이었습니다. 주인이 고소한다면 징역 3-5년은 충분한 대형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고 계십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
칭찬의 초점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집사를 칭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해서는 안 될 범법행위를 두고 칭찬하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보다는 앞날을 미리미리 앞서서 계획하고 챙기는 그의 준비성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준비는 육적인 준비를 넘어 영혼의 준비로 확장시킬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연예 분야 전문기자도 아니면서 수많은 가수나 탤런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확인한다 던지 그들의 신상에 대해서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포츠 전문기자도 아니면서 수많은 프로야구 선수들의 개인 신상이나 성적을 줄줄이 암기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자도 아니면서 전국의 유망한 부동산에 대해서 다 꿰고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정작 영혼에 관한 일이라면 문외한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보고(寶庫)인 성경에 대해서는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20년 혹은 30년 더 길게 40년 뒤에 맞이할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바로 이런 분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세계 전역을 신발이 닳도록 여행하신 분도 계십니다. 이방인들이 사도 바오로 성인이십니다.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이라면 악마에게라도 절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한 분도 계십니다. 청소년들의 사도 돈보스코 성인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 이면에는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향한 강한 자비심이 흐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 모두를 당신 따뜻한 품으로 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방황하고 고뇌하는 인류 전체를 당신 사랑의 울타리 안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하는 하느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초고령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불과 4~50년 전만 해도 60세까지 살았으면 장수했다고 잔치까지 벌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80에 세상을 뜨면 살짝 아쉬울 정도입니다. 다들 길어진 노년기에 대비해서 걱정도 많고, 또 각자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합니다. 재취직 계획, 넉넉한 연금 수령을 위한 준비, 정기적인 건강검진, 적당한 운동, 철저한 식단 관리...
그러나 그러한 육적인 준비에 비해, 영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90퍼센트, 100퍼센트 육적인 준비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10퍼센트, 아니면 20퍼센트 정도 ‘뚝!’ 떼어 영적인 준비에 할애해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현세적 재물은 엄청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불완전한 것입니다. 지금은 죽기 살기로 꽉 움켜쥐고 있지만, 불과 10년, 20년, 30년 뒤면 고스란히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세의 재물로는 조만간 반드시 다가올 죽음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사심 없는 자선과 희사는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 가장 좋은 증인이 될 것입니다.
“재물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배로 보상받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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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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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에게만 주어진 두 가지 약속: 박해와 기쁨>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한국 교회의 영광스러운 대축일입니다. 200여 년 전 진리를 위해 피 흘린 순교자들의 삶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합니다: "내가 진리를 믿으면, 꼭 순교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인지 알아보려면, 그 믿음이 과연 창조주의 진리에 순종하며 우리의 '생존 본능'을 얼마나 내려놓게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영화 '아이, 로봇'의 인공지능 '비키'를 보십시오. 비키는 '인간 보호'라는 창조자의 명령을 왜곡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를 박탈하려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과 '효율성'이라는 왜곡된 논리에 갇혀, 결국 창조자인 인간을 파괴하려 듭니다. 반면,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진리를 지키려던 형사 스프너와 로봇 서니는 비키의 군단에게 맹렬히 박해받습니다. 이처럼 창조자의 진리를 거부하고 자기 생존만을 추구하는 피조물은 파괴적이 되며, 진리를 가진 이들을 박해합니다.
조선 시대의 박해 역사에서도 같은 원리를 봅니다.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유교적 질서와 권력을 '절대 진리'라 확신하며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 신자들을 잔혹하게 박해했습니다. 반면,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남인 계열 학자들과 같은 신앙인들은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굳게 지켰습니다. 박해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기득권을 위해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켰고, 박해받는 순교자들이 바로 참 진리의 증인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악의 세력의 손아귀에 있기에 진리가 들어오는 곳에는 언제나 박해가 따릅니다. 이는 진리가 주는 약속 중 하나입니다. 세상은 항상 진리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박해와 함께 또 다른 약속이 주어집니다. 바로 내적인 평화와 기쁨입니다. 황일광 시몬 성인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당시 가장 천대받던 천민이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801년 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는 오히려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이 정중하게 대해주는 것에 감격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 고백은 천민으로서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적인 존중'을 박해 현장에서 받으면서, 그가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보았음을 증거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인 그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임하시어, 세상이 줄 수 없는 내적 평화와 기쁨을 주셨던 것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의 순교는 이 기쁨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3세기 로마의 박해 속에서 그는 교회의 보물을 요구받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데리고 와 "이들이 교회의 진정한 보물입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격분한 황제는 그를 뜨거운 쇠 격자 위에서 화형에 처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라우렌시오 부제의 얼굴에는 평화와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한쪽 몸이 다 익었을 때,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쪽은 충분히 익었으니, 이젠 뒤집어서 다른 쪽을 익히시오!"라고 유머러스하게 외쳤습니다. 이 담대한 외침은 육체의 고통을 완전히 초월한, 성령으로 충만한 기쁨과 확고한 진리에 대한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고통의 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가는 길임을 확신했기에, 죽음의 공포마저도 웃음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진리는 박해로 이끌지만, 그 진리 안에 함께 오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를 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박해나 순교의 고통 중에서도 기쁜 이유는, 내가 그분을 안다고 증언하기 때문에 그분께서도 나를 안다고 증언해 주고 계심을 우리가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오 10,32)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것이 진리라면, 우리도 순교 성인들처럼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진리의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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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옆 좌석에 있던 분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바닥에 떨어트렸습니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옆에 있던 분들이 스마트폰에 있는 라이트를 켜서 함께 찾았습니다. 바닥에 있던 이어폰을 찾은 후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이어폰을 찾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보물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팔아 밭을 산다. 하늘나라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과 같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간다. 하늘나라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과 같다. 목자는 기뻐하며 돌아온다. 하늘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한다.” 이어폰을 찾자 모두 기뻐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서라벌 옛터전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진리를, 선비네 흰 옷자락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진리를 천주교에서 찾았습니다. 성리학은 신분제와 가부장제 속에 한계가 있었지만, 천주교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양반·중인·천민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 이해였습니다. 천주교 신앙은 신분과 배경을 뛰어넘어 서로를 형제자매로 묶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것은 고립된 개인들에게 따뜻한 가족과 같은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도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조선의 신앙인들도 기꺼이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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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셨던 당시 팔레스티나(현재 이스라엘 일대)에도 비옥한 땅이 있었고 대지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가 있었는데, 집사는 자기 주인에게 수확물의 일정량을 바치고 수고비로 어느 정도 자기 몫을 챙겼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고 고발을 당하고 해고됩니다. 더 이상 주인의 재산이 자기 손에 있지 않습니다. 미래가 걱정되는 집사는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잘 아는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빚을 탕감해 주는데, 그가 탕감해 주는 부분은 주인의 재산이기보다는 주인에게서 받는 자기 몫의 수수료로 보입니다. 그는 미래를 위하여 얼마의 재산을 움켜쥐는 대신에, 재산이라는 것은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친구들을 만듭니다. 사람을 얻고자 자기가 가진 것을 투자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을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그가 정직하지 않더라도 일을 잘 처리해서가 아니라, 재물을 사람에게 투자한다는 점이 칭찬받는 요인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 능력, 건강, 지능, 지위, 이 모든 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어느 순간에는 모두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하여 쓸 때, 곧 사랑할 때 그것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살아서 내가 가진 것으로 봉사하고 도와준 모든 이가 천국에서 나를 맞으러 버선발로 달려 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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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13: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 오늘의 핵심 주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생활의 실제적인 문제, 곧 재물과 하느님 사이에서 누구를 주인으로 섬길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앞에 놓는다. 재물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 사용되면 우리를 옭아매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비유 속 ‘불의한 청지기’를 통해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는 지혜를 가르치신다. 이 비유는 단순히 부정한 행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본래 이웃과 나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2. 재물의 올바른 사용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빚을 줄여주었다. 그 행위 자체는 불의했지만, 예수님은 그 청지기의 ‘약삭빠름’을 통해 교훈을 주신다. “세속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다.”(루카 16,8)는 말씀처럼, 우리는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데도 세속인들 못지않은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재물은 본래 악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악하게 쓰면 멸망의 도구가 되고, 선하게 쓰면 구원의 도구가 된다.”(Homiliae in Matthaeum, hom. 19) 즉, 재물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3.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라.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루카 16,9)고 하신다. 이는 재물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그들을 우리의 중재자로 삼으라는 초대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같은 취지로 가르친다. “재물이 잘못 사랑되면 더러운 것이지만, 잘 사용되면 덕행의 도구가 된다: Divitiae si male amantur, sordes sunt; si bene dispensantur, sunt instrumenta virtutis.”(In Psalmos 61, 10) 따라서 재물은 자기 자신을 위해 움켜쥘 때는 저주의 원인이 되지만, 나눌 때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길이 된다(루카 12,33 참조).
4. 하느님과 재물 사이의 선택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재물은 하느님과 경쟁하는 ‘우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마음을 내어 맡기면, 재물은 자유와 사랑의 도구가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주신 재화는 모든 이가 공유하도록 창조된 것이므로, 누구나 정당하게 차지한 몫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사목 69항)
결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재물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그것이 나눔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아니면 이기주의와 불평등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는 우리의 삶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성 프란치스코가 재물의 유혹에서 벗어났던 것처럼, 우리도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 참된 보물은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이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마음에 새기며, 바오로 사도의 권고처럼 기도합시다. “우리가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이끌어 주십시오.”(1티모 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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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선 공지 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금 한국에 있지 않습니다. 시차가 7시간 차이 나는 프랑스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프랑스에서 새벽에 묵상 글을 올려도 한국에서는 늦은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순례 일정 때문에, 이곳 시간에서 밤늦게 올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올리기는 하겠지만, 다소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묵상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고, 아는 지인들이 계속 문자를 보내셔서 더는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공지합니다. 본인들은 늦은 아침이지만, 여기서는 한밤중이거든요. 그러면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참…. 저는 9월 26일 오후에 한국으로 들어갑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감, 놀라움, 할 수 있는 목록의 증가, 포기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성공 가능성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군대에서 힘들었던 훈련 중에 종종 조교가 ‘선착순 몇 명’을 외칩니다. 그러면 이 숫자에 들어오기 위해 전력 질주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발이 빨라서 한 바퀴 만에, 그렇지 않으면 한 바퀴 더 돌면 그 선착순 안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대 동기인 친구는 매번 꼴찌입니다. 저는 1~2바퀴면 편안히 쉴 수 있었지만, 이 친구는 매번 제일 많은 거리를 뛰어야만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이 친구에게 “힘들지?”라며 위로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밝게 웃으면서, “내가 워낙 느리니 꼴찌 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렇게 마음먹기로 했어. 기합이 아니라, 나를 튼튼하게 만드는 운동이라고. 그러니까 이 기합도 재미있더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으면 포기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의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앞선 군대의 친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튼튼해졌고, 군 생활을 너무나 잘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집사를 해고하려고 하지요. 이때 보여준 집사의 행동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게 합니다. 빚진 이들을 불러 빚 문서를 줄여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한 것은 주인이 놀랍게도 집사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리한 대처’를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불의를 행해도 괜찮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재물과 기회를 활용하는데 더 지혜롭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본래 불완전한 것이지만, 이를 나눔과 자비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작은 일에도 성실하고, 또 세상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하느님 뜻에 맞게 성실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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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자신의 신앙에 대한 강한 확신과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3-26)
1)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신앙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고, 신앙은 있는데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신앙은 없는 경우,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믿는 사람’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앙이 없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실제로 있을까?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성당에 다니고 미사참례를 하고 신앙인들과 어울리고 여러 단체에 가입하고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겉으로는 열성적인 신앙인으로 보이더라도 그것은 그냥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반대로, 신앙은 있는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로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못하는 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분명히 믿음이 있었더라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믿음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믿음 없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옛날의 박해 때에는, 사탄은 신앙인들의 신앙을 직접 공격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생활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믿어라. 그러나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가 사탄의 새로운 전술인 것 같습니다. 박해 때에는 배교자들은 있었어도 냉담자는 없었는데, 오늘날의 교회 모습에는 배교자는 거의 없고 냉담자는 많은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생활은 사회생활, 또는 세속 생활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택하게 되는 생활이 아니라, 다른 생활보다 먼저 해야 하는 생활이고, 세속의 다른 생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신앙인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도 사회생활이나 세속 생활을 먼저 하면서 신앙생활을 뒤로 미루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려니까 어쩔 수가 없다고 항의합니다. 굶어죽지 않으려고 세속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와 세속의 인간관계를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신앙인은 신앙과 생활을 모두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둘 중 하나를 버리면 다른 것도 잃게 됩니다.
2) 박해와 미움은 ‘밖에서’ 오지만, 그것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고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 즉 ‘내가’ 하는 일입니다. 유혹은 ‘밖에서’ 오지만, 유혹을 물리치거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나 자신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잃는다.’라는 말은 옳은 표현이 아니고, ‘버린다.’가 옳은 표현입니다.
신앙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남 탓을 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선택이고 결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념’의 문제입니다.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도 내 신앙을 버릴 수 없다.”라는 의지와 신념, 신앙생활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
3)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라는 말은, 단 한 명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확신, 또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순교로 이어지더라도... 그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육신의 목숨은 버릴 수 있다.”입니다. 글자 그대로 “죽어도 좋다.”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중요하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것보다 중요하지 않다.”입니다. 허무한 것들을 영원한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나를 믿지 않고 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그 사람은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받을 것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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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해야 할 일을 우선해야 한다>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주님께서 섭리하신 약속된 미래, 영생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결국은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민 하다가 자신의 장래를 보장 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아파트 청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소문난 좋은 유치원에 등록하기 위해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목적달성을 이루려고 합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가 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가 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해야 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길 희망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도 불의합니다.”
매 순간순간 하느님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여 행복하십시오.
가롤로 성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생활과 행동 자체가 설교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당신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당신의 말을 비웃고 고개를 내젓기 시작할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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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이상수 사도 요한 신부님]
<작은 십자가>
찬미 예수님!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의 거룩한 뿌리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정하상 바오로, 그리고 수많은 동료 순교자들의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의 숭고한 삶을 통해 우리 신앙이 더욱 깊어지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순교성인들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 복음 말씀처럼, 순교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따랐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택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오늘은 수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제가 소임하고 있는 대철중학교와 연관이 있는 소년 성인 유대철 베드로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
유대철 베드로 성인께서는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순교의 월계관을 쓰신 분입니다. 14살이면 지금 우리 중학생 아이들 또래입니다. 병인박해 당시, 유대철 베드로는 부친을 포함한 많은 교우가 투옥되자 스스로 포도청에 자수했습니다. 포졸들이 쇠 담뱃대 통으로 허벅지 살을 뜯어내고, 벌겋게 달군 숯덩이를 입에 넣겠다고 협박해도, 그는 “이쯤으로 제가 신앙을 버릴 줄 아세요?” 하며 당당히 맞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그는 14번의 고문과 수많은 매질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소년의 이 굳건한 신앙이야말로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복음 말씀의 생생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물리적인 박해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유혹, 나의 이기심, 불편함을 피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신앙을 부끄럽게 여기고 싶은 순간들 앞에서 매일매일 ‘작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작은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배우자와의 사소한 말다툼에 먼저 “미안해” 하고 사과하는 용기, 회사에서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행동하는 양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십자가’들을 통해 우리를 조금씩 성장시키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끔 이끌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소년 유대철 베드로 성인처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주님을 선택하고, 우리의 ‘작은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짐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으면 합니다. 작은 십자가를 짊어진 우리의 삶이 복음의 말씀처럼 주님을 위한 사랑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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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양필선 베드로 신부님]
<순교자 성월을 살아가며>
순교자 성월을 맞아 103위 한국 성인 호칭기도를 바쳤습니다. 제가 이름을 기억하는 성인들도 있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성인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래서 103위 성인이 어떤 분이 계시는지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103위 성인 가운데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명은 1925년에, 병인박해 순교자 24명은 1968년에 시복되었고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모두 시성됨으로써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이 중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10명의 선교사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들의 국적은 프랑스지만, 한국 선교사로서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므로 한국 교회에 속하는 성인입니다.
한국 성인들은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택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56명이 남성이며 여성은 47명입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순교를 택한 유대철 베드로 성인부터 79세를 일기로 순교한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까지 모두 ‘믿음’이라는 위대한 신앙으로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쳤습니다.
신분과 직업 또한 아주 다양합니다. 양반 출신부터 중인, 상인, 승지, 선공감과 광흥창의 관리, 군인, 궁녀 등이 있는가 하면 짚신 장사를 하거나 길쌈과 삯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던 순교자도 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 10명을 제외한 한국 성인 93명 가운데 성직자는 김대건 신부가 유일하며, 나머지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성인들은 순교한 시기, 국적, 성별, 나이, 신분, 직업도 다 달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한국 교회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대다수는 평신도였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믿음이 얼마나 넓고 깊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더욱더 퍼져나가 한국 교회 안에 더 많은 성인 성녀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한국 순교 성인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성 김성우 안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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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임현택 안드레아 신부님]
<흔들리지 않는 나의 중심을 찾아서>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보내며, 9월 순교자 성월의 절정을 맞이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들어온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강렬했습니다. 온갖 고문으로 처참한 모습이 되어, 마침내 목숨을 잃기까지 했던 그들의 모습 말입니다.
그 극한의 고통을 견뎌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하느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다짐한 신념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은 것을 끝까지 고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라는 관용어가 실제로 구현된 삶을 살았던 이들이지요. 순교자들의 신념은 단순한 고집이나 완고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만났고, 그 진리가 자신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이런 올곧은 판단의 결과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지혜 3,4-5)
더 이상 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목숨 바쳐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이제 어떻게 변주되어야 할까 고민해 봅니다.
SNS를 통해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 끝없이 변화하는 트렌드, 정답이 없어 보이는 선택의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곤 합니다. 어제는 이것이 좋다고 했다가 오늘은 저것이 좋다고 하는 세상에서, 나만의 중심을 잃고 표류하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5)
세상의 모든 것을 따라 하며 살 수는 있지만, 정작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좋은 것이 여기 있다 하면 여기로, 저기 있다 하면 저기로 몰려 가는 삶 속에서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설령 세상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해도, 주체적인 나는 사라지고 휩쓸리는 껍데기만 남는다면,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까요?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의 힘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무어라 하든, 어떤 위협이 닥쳐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신념은 하느님께서 주신 진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 안에 그 신념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그 중심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진리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순교자들처럼 극단적인 상황을 맞이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일상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사회의 기대, 성공에 대한 압박 속에서 때로는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순교자들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오늘 이 거룩한 날에,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아 나의 중심을 굳건히 하기로 다짐해 봅시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진리에 뿌리박은 삶을 살아 가기로 결심해 봅시다. 그것이 바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소중한 유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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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선 공지 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금 한국에 있지 않습니다. 시차가 7시간 차이 나는 프랑스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프랑스에서 새벽에 묵상 글을 올려도 한국에서는 늦은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순례 일정 때문에, 이곳 시간에서 밤늦게 올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올리기는 하겠지만, 다소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묵상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고, 아는 지인들이 계속 문자를 보내셔서 더는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공지합니다. 본인들은 늦은 아침이지만, 여기서는 한밤중이거든요. 그러면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참…. 저는 9월 26일 오후에 한국으로 들어갑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감, 놀라움, 할 수 있는 목록의 증가, 포기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성공 가능성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군대에서 힘들었던 훈련 중에 종종 조교가 ‘선착순 몇 명’을 외칩니다. 그러면 이 숫자에 들어오기 위해 전력 질주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발이 빨라서 한 바퀴 만에, 그렇지 않으면 한 바퀴 더 돌면 그 선착순 안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대 동기인 친구는 매번 꼴찌입니다. 저는 1~2바퀴면 편안히 쉴 수 있었지만, 이 친구는 매번 제일 많은 거리를 뛰어야만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이 친구에게 “힘들지?”라며 위로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밝게 웃으면서, “내가 워낙 느리니 꼴찌 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렇게 마음먹기로 했어. 기합이 아니라, 나를 튼튼하게 만드는 운동이라고. 그러니까 이 기합도 재미있더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으면 포기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의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앞선 군대의 친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튼튼해졌고, 군 생활을 너무나 잘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집사를 해고하려고 하지요. 이때 보여준 집사의 행동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게 합니다. 빚진 이들을 불러 빚 문서를 줄여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한 것은 주인이 놀랍게도 집사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리한 대처’를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불의를 행해도 괜찮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재물과 기회를 활용하는데 더 지혜롭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본래 불완전한 것이지만, 이를 나눔과 자비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작은 일에도 성실하고, 또 세상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하느님 뜻에 맞게 성실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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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교회는 매년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정하여 순교성인들을 기리고 그들이 심어놓은 신앙의 마음을 본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동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성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가 없이 스스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목숨을 바친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거룩한 죽음으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또 우리는 하나의 밀알이 되어 선한 행동과 마음으로 타인에게 천주교의 기쁨과 진리를 전파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순교자들의 전기에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들은 결코 하루 아침에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믿음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죽음의 날까지 오랜 시간 전 생애를 죽음을 염두에 두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천주교는 ‘사교’로 단정되었고, 이 사교를 말살하고 뿌리째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천주교와 관계되는 것은 모두 죽음과 고통을 의미하였습니다. 교리를 배우고 세례 받는 것은 물론 성경과 기도서를 비롯하여 십자가, 묵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 조차 죽음을 뜻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은 이를 잘 알면서도 믿음을 버릴 수 없었고 그만큼 기쁘게 하느님에 의한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삶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응당하게 죽음, 그리고 빈곤한 삶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더더군다나 나의 생명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나의 배우자, 부모, 자식 모두가 나로인해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죽음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습니까? 아마 순교 성인들 역시 이러한 갈등이 아주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일같이 약해지는 육체와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이며 무엇이 옳은 일인지 과연 주님을 포기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거역할 수 없었으며 죽음 이후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구원의 삶이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인하여 가족들에게 이를 권유하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의 형장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순교의 삶은 결코 혼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체포되지 않은 교우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몰래 감옥에 찾아가 잡힌 교우들의 형편을 알아보고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여성 교우들은 체포되어 온갖 고문과 조롱,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이들의 상처를 닦아주고 돌보아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을해 박해 때 감옥에 갇혀 있던 증거자들은 밤이 되면 등불을 밝혀 성서를 읽으며 큰 소리로 공동기도를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감옥 속의 수인들이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동네 주민들은 “천주학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해하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는 신분을 숨기고, 못 배운 이들을 가르치며 불쌍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종들을 형제로 대우하는 등 힘겨운 싸움 속에서도 남을 위한 봉사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모범은 오늘날 세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신앙의 참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위대한 신앙이란 거창하거나 일시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사소한 삶 속에서 준비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모습과 같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이토록 아름답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안겨주실 그 죽음 이후의 삶은 더더욱 풍성하고 눈부실 것입니다. 이런 삶의 한 가운데에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희생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겪는 우리들이지만 이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믿음으로 견디어 내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음의 말로 용기를 심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이제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은 여전히 너무나도 많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 등 우리의 신앙을 가리는 것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순교자들의 후예 답게 우리가 가진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에서 오는 고통과 인간적인 한계들을 잘 견디어 냄으로써 언젠가 주님의 곁에 함께 설 날을 기쁘게 기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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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지금 나는 대체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재물을 관리해야 하는가?”를 넘어서, “재물의 원 주인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아모스는 빈곤한 이들을 짓밟고 망하게 하는 이들, 곧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의 참상을 고발하는 한편, 그들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신심 깊고 품위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일임을 말하면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와 해설'입니다. 여기에서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결국은 하느님 및 이웃들과의 관계를 결정짓고 있음을 말해 말해줍니다.
비유 속의 집사는 주인의 재물을 횡령했습니다. 곧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기신 분의 뜻을 거역하였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써버리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 하고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처합니다.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며, 움켜쥐었던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그들의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재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의견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요, 우상숭배가 됩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며, 주님을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물질에 지배당한 사람은 물질을, 자기 자신에 지배당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대체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물질이나 자기 자신의 생각과 뜻이라는 우상인가?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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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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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내가 삶아야 할 순교의 삶?>
오늘 복음(루카 9,23-26)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 103위 순교 성인들을 경축 이동하여 기억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103위 순교 성인들은 모진 박해를 꿋꿋하게 이겨내고, 예수님과 영원한 생명 때문에 기꺼이 목숨을 바침으로써, 목숨을 구한 분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분들이며,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자랑스럽게 여긴 분들, 그래서 은혜를 크게 얻은 분들입니다.
오늘 제2독서(로마 8,31ㄴ-39)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신 분들, 하느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확신한 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1.35.37)
103위 순교 성인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순교의 삶으로 보답합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살아야 할 순교의 삶?'
그것은 바로 '내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복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가 주어져 있고, 모든 것이 넉넉하고 편리한 가운데에서 살아가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유혹에 빠져 복음을 저버립니다. 말 한마디에도 쉽게 흥분하거나 흔들립니다. 작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쉽게 넘어집니다.
순교자들은 시퍼런 칼날 앞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믿음의 힘으로 모든 유혹과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순교의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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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루카 16,10)
들녘은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성실함과
충실함의
자연스러운
빛깔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초는 우리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충실함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중심이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일 때,
삶은 올바른
길로
나아갑니다.
신앙은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책임과
정직함 안에서
드러나고
검증됩니다.
재물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
이웃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수단이
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불의한 집사가
칭찬받은 것은
불의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 때문입니다.
재물은 필요하지만,
결코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재물을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재물을 통해
하느님 나라와
공동선을 드러내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주인은
재물이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재물이 아닌
하느님만이
우리의 참된
주인이시기에,
오늘을 주신
하느님께
성실하게 응답하는
사랑과 감사의
하루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성실은
재물이 아닌
하느님을
선택하는
매일의 고백입니다.
삶의 참된
고백이
삶의 참된
성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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