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⑯-2
조선의 농민반란에 대하여, 서울의 일본공사로부터 외무대신 陸奧 宗光에 대한 보고는, 대리공사 杉村 濬(스기무라 후카시)일등서기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주청공사 大鳥 圭介(오토리 게이스케)가 주조선공사를 겸임하게 된 것은 전년인 1893년7월이었다. 杉村는 大鳥가 겸임하고 있는 조선을 비워놓는 사이의 대리공사였다.
陸奧 宗光은 저서 『蹇蹇錄(건건록)』에, 「杉村 濬는 조선에 근무하기 전후 수년, 자못 그 국정에 정통하였으므로, 정부는 물론 그 보고를 신뢰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었다. 남아있는 서간문 같은 것에서도, 陸墺와 杉村의 매우 가까운 관계가 엿보인다. 이 杉村는 뒷날 민비 암살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도쿄 麻布台(아자부다이)에 있는 외무성 사료관 현관홀에 들어가면, 좌측에 네 사람의 외무대신 사진이 있다. 왼쪽부터 陸奧 宗光(무츠 무네미츠), 小村 壽太郞(고무라 쥬타로), 幣原 喜重郞(시제하라 키쥬로), 오른쪽 끝이 吉田 茂(요시다 시게루)다.
陸奧의 사진 밑에, 「淺野家藏」이라고 쓰인 『蹇蹇錄(건건록)』이 놓여있다. 그 설명문에는 「조약(*역자 주:영국 등 구미선진국과 이미 체결한 불평등 조약)개정과 일청전쟁에 전력을 다한 陸奧외상은, 전쟁이 끝나자 지병이 악화되어, 정양과 동시에 일청전쟁에 대한 고심을 상세하게 써서 기록하였다. 일본 외교사에 관한 가장 귀중한 문헌의 하나이다. 건건(蹇蹇)이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실하게 진력하는 것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
陸奧가 건건록을 다 쓴 것은, 그 「서언(緖言)」에 따르면, 「명치28년제야(除夜), 大磯(오이소)에서」이며, 그 내용은 「명치27년 4, 5월이 바뀔 무렵, 조선 동학당의 난이 일어난」 무렵부터 일청전쟁을 거쳐 「마침내 이듬해 28년5월8일을 기해, 일청강화조약비준교환을 이루기」까지의 외교전략 회고록이다. 한학(漢學)에 소양이 깊은 陸奧의 명문이지만, 이 책에서는 현대문에 가깝도록 인용하기로 한다.
『蹇蹇錄』 제1장에는, 「조선의 동학당에 대하여는, 내외국인이 여러 가지 해석을 내렸다. 어떤 자는 유교, 도교를 혼합한 일종의 종교적 단결이라 하고, 어떤 자는 조선 국내에서의 일파정치 개혁희망자의 단체라고 하며, 어떤 자는 단순히 난을 즐기는 흉도의 집단이라고 한다.」로 되어 있고, 陸奧는 일청전쟁의 경과를 기술한 다음, 다른 날 만일 일·청 양국 간의 당시 외교역사를 쓰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 권두 첫 번째로 먼저 동학 난이라는 한 장을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적었다.
陸奧는 1894년(명치27년) 5월, 대리공사 杉村로부터 요지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다.
「동학당의 난은 대 사건이지만, 현재의 정부를 쓰러트릴 정도의 세력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공사관이나 영사관, 또 방인(邦人)의 보호를 위해, 일본으로부터의 다소의 군대를 파견해야 될 필요가 생길지도 모르나, 지금으로서는 서울은 물론, 부산이나 인천도 그런 염려는 없다.」
이 보고에 따라서, 일본정부는 지금 곧 출병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陸奧는 「항상 난잡한 조선의 내치」와 「자칫하면 궤도 밖으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청국외교에 대하여, 미리미리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杉村에게 「동학당의 거동을 충분히 주목함과 동시에, 조선조정의 이에 대한 대처, 또 조선조정과 청국 사신과의 관계를 잘 관찰하도록」 내적으로 훈령했다. 陸奧의 관심은 동학란의 정세보다, 청국이 조선으로 출병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점에 있었다.
제국의회 개회중인 6월1일, 일찍부터 정부에 반대하던 중의원이 「내각의 행위에 관한 탄핵상주안」을 의결했다.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의회해산의 조칙을 주청하기 위해, 이튿날인 2일에는 총리대신관저에서 내각회의를 열게 되었다.
서울의 대리공사 杉村로부터 「조선정부는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다」는 전보가 온 것은 이때였다.
陸奧는 이것을 「용이하지 않은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만일 이것을 묵과하면, 이미 균형을 잃고 있는 일·청 양국의 조선에서의 세력관계를 한층 불균형을 조장하고, 일본은 금후 조선에 대하여, 청국에 되는대로 맡기는 수밖에 없게 될 것으로 陸奧는 생각했다.
6월2일 각의에 참석한 陸奧는, 개회 초두에 杉村의 전보를 전 각료에게 보이고, “만일 청국이 어떤 명분으로라도 조선에 파병한다면, 우리나라도 또한 상당한 군대를 이 나라에 파견하여, 불의의 변에 대비하고, 일·청 양국의 조선에 대한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의견을 말했다.
일동이 이에 찬성하였고, 총리대신 伊藤 博文(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참모총장 有栖 川宮(아리스 가와노미야)와 참모차장 川上 操六(카와카미 소로쿠)중장의 출석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전원의 협의는 홀연 陸奧의 의견대로 끝내고 천황(天皇)의 제가를 받아, 지체 없이 해병 수백 명과 혼성여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일청 양국이 출병하면, 언제 개전이 되어도 이상한 사태는 아니지만, 이 중대결정은 또한 절차탁마(切磋琢磨)로 이루어졌다.
그날 밤, 외무대신 관저에서 陸奧와 참모차장 川上 操六, 외무차관 林 董(하야시 타다스) 들이 조선 문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내용의 요지를 林의 회상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명치15년(임오군란)과 17년(갑신졍변) 서울의 변에서는, 청국에 기선을 제압당해 일본의 세력은 후퇴하였으나, 이번에는 반드시 청국을 제압하여 전번의 손실을 회복해야 한다. 따라서 청국 이상의 병력을 보내어, 이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군부와의 사이에, 의견대립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군부는 이날을 기다리지 않고, 남모르게 출병준비에 착수하고 있었다. 6월2일에 출병을 결정한 정부는, 4일에는 사가휴가(賜假休暇)중 일본에 와 있었던 주조공사 大鳥 圭介를 서울로 귀임시키기로 결정하고, 5일에는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였으며, 5사단에 동원령을 내리는 재빠른 솜씨를 보였다.
陸奧는 「이러한 조치는 외교, 군사상의 비밀이므로, 세상 일반에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묘의(廟議/조정회의의 예스러운 말)가 이와 같이 진행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기관신문이나 연설회에서, 조선에 대한 파병이 급선무라는 것을 외치고, 격렬하게 정부의 태만을 책망했으며, 암암리에 의회해산의 여분(餘憤)을 터뜨리고 있었다」고 썼다.
급거, 조선으로 향한 大鳥 圭介공사는 전 막신(幕臣)이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더욱이 한창때 학문을 수련하고, 또 미국 표류에서 돌아온 中浜 万次郞(나카하마 만지로)를 따라 영어도 배웠다. 명치유신 때에 신정부에 반항하여 榎本 武揚(에노모토 다케아키) 들과 함께 函館(하코다테)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귀순하고 하옥됐다.
1872년(명치5년) 초, 출옥, 같은 해 2월 대장소승(大藏少丞)이 되고, 외채발행 용무로 1년여 구미에 출장하여, 일류 외국통이 되었다.
원세개를 통하여 조선정부로 부너 원병을 요청받은 이홍장은, 바로 이에 응하여 육해군에 도조(渡朝)를 명했다. 청국과 일본의 조선출병 조약상의 근거는, 갑신정변 후의 천진조약 제3조 「장래 조선국에 만일 변란 등 중대사건이 있어, 일청 양국 혹은 일국 파병을 요할 때, 먼저 서로 행문지조(行文知照/행정문서로 알림) 하고, 그 사태가 안정되면 바로 철군하며, 재차 유방(留防)하지 않는다.」에 있다.
이에 따라 청국은 6월7일, 조선출병을 일본에 알리고, 일본도 또한 조선 파병을 청국에 “행문지조”했다. 이때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온 문서 중에 쓰여 있는 「보호속방」이라는 말을 들어, 「일본은 일찍이 조선국을 청국의 속방이라고 인정한 사례가 없다」는 항의문을 부쳤다.
청국의 제1진이 조선의 아산만 마산포에 입항한 것은 6월8일, 그에 이어 약 2.800의 군병이 도착했으나, 그들은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 대부분이 아산방면의 각지에 머물렀다. 청국군은 지방민의 동요를 막기 위해 「조선에 온 목적은 동학군의 토벌에 있다」고 포고했으나, 그 글 중에도 조선을 “속국(屬國)” “번속(藩屬)”이라 부르고, 종주국인 청국은 조선국왕의 의뢰에 따라 원조로 왔다----고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