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⑯-3
군함 “八重山(야에야마)”로 인천에 입항한 大鳥공사는, 6월10일, 육전대 400명과 같이 서울에 들어가는 것을 조선 측에 통고했다. 조선정부는 참의 민상호(閔商鎬)와 고문관 리젠더를 인천에 파견하여, 육전대가 서울에 들어오는 것을 중지하도록 요구했으나, 大鳥는 듣지 않고 서울 입성을 감행했다. 다시 이튿날, 조선정부는 大鳥의 서울 입성에 항의하고, 인천의 일본군 퇴거를 요청하였으나, 大鳥는 이것도 거부했다.
그때에 조선정부로서는 일대 낭보가 들어왔다. 전날, 전력으로 공격하던 전주의 농민군과의 사이에 화의(和議)가 성립되고, 6월11에는 농민군과 동학교도 전부가 전주를 퇴거했다고 한다.
이로써 내란이 끝나면, 다른 나라 군대가 조선에 머물 이유가 없고, 각각 본국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조선은 생각했다.
농민군이 화의를 맺은 것은, 전투에 패배해서가 아니다. 평화상태를 회복하여, 일청 양군 침입의 구실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또 그들이 제공한 「폐정개혁조목」을 정부파견 초토사가 수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청 양국의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大鳥(오오토리)는 袁世凱(원세개/웬스카이)에게 「동학란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면, 일본군의 이 이상의 증파는 중지하도록 본국으로 제안하겠습니다. 청국도 이 이상의 병력증발을 중지하는 것이, 평화의 길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원세개는 이에 찬성했다. 오오토리의 의견은, 국제상식에 입각한 정론이었다.
오오타리는 외무대신 앞으로, 「청국군은 서울에 주재하지 않고, 평온무사하다. 동학란도 소강에 들어갔으므로, 추후에 전보를 보낼 때까지 이 이상 군대의 파견은 필요치 않다」 라는 주지의 전보를 쳤다. 다시 그는 「과다한 병력을 조선에 상륙시키면, 외교상의 분분한 의론을 초래할 것이다. 본 공사가 필요로 하는 병력 이외에는, 전부 대마에 대기시켜 명령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타전했다.
이것은 조선으로 귀임할 대 오오토리가 외무대신으로부터 받은 훈령, 「원세개와 협의하여, 되도록 평화적으로 일을 매듭 지우라」는 주지에 따른 것이다. 무츠의 『건건록』에도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은 전력을 다해서 당초의 목적을 관철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되도록 평화를 깨지 않고 국가의 영예를 지키며, 일청 양국의 권력형평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의 문장이 있다. 그리고 무츠는, 이 의견들은 처음에 이토 히로부미와 자기의 숙의로 결정했지만, 「특히 이토 총리가 많은 의견을 냈다」고 쓰고 있다. 그 중에는 「사태와 국면을 일청 양국 간에만 국한하고, 되도록 제3국(구미제국)과의 관계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라」는 일 항도 있다.
오오토리 공사는 문서로 주어진 훈령에 따라서 대처했으나, 이 훈령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たてまえ(다데마에/표면상의 방침)”이었다. 本音(혼네/본심, 속마음)는 「동학란을 계기로 청국 이상의 병력을 파견하여, 조선에서의 일본의 권력을 만회하자」는 것으로, 결국 “평화를 깨지 않고” 될 일은 아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 정부도 군부도 재빠르게 개전을 결의하고,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한 것이다.
무츠도 조선으로 가는 오오토리에 대한 훈령에 「만일 시국이 급박하여 본국정부의 훈령을 요청할 여유가 없을 때는, 독자적인 판단으로 일을 진행하라」는 일 항을 부가했다. 민일 청국 군과의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면, 독자적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하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무츠는, 「생각하건대 이 훈령 중에는 상반되는 2개의 주의(主義)가 포함되어 있는 것같이 보이겠지만, 이런 형세 하에서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에게 비상한 권력을 주는 것은, 실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썼다. “다데마에”와 “本音(혼네)”가 섞여 들어간 이 훈령에는 모순이 많다.
서울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단은, 국왕의 요구에 응하여 출병한 청국에 호의적이고, 일본의 처사를 백안시하는 자가 많았다. 오오토리가 이와 같은 실황을 잘 관찰하여 해 나가는 평화적인 조치와 그 의견은, 무츠 에게도 잘 이해되는 것이었으나, 그는 「그렇기는 하지만」이라고 썼으며, 오오토리의 방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다른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내정을 보면,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가 되고, 중도에 지정병력을 변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욱이 청국이 어떤 간계를 써서 일본을 속일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 무츠는 에정 대로 혼성여단을 보내기로 했다. 그는 그것을 오오토리에게 통지하고, 「가령 외교상에 다소의 분의(紛議)가 있어도 혼성여단을 서울에 들어가게 하고, 조선정부에 대하여 『내란을 조속히 진압하는 것이 상책이며 일본이 그것을 지원 하겠다』고 말하도록」 훈령했다.
이리하여, 외무대신 陸奧 宗光(무츠 무네미츠)와 주조전권공사 大鳥 圭介(오토리 게이스케)와의 사이에 마찰이 일어났다. 이 두 사람사이의 조정에 나선 것은, 大鳥의 귀임 때까지 대리공사로 근무했던 일등서기관 杉村 浚(스기무라 슌)이었다. 이때 외교의 기본전략은 「외교 면에서는 항상 피동자의 지위를 지키지는 것이었으나, 일단 청국군과의 사이에 일이 벌어지면 군사적으로는 전부 기선을 잡자」는 것으로, 진작부터 陸奧와 자주 연락을 취하고 있는 杉村에게는, 일본의 병력증파가 절대 필요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大鳥를 향해서 「일본의 장래를 위해, 이 기회에 조선에서 청국 세력을 일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혼성여단을 조선으로 보낸 陸奧의 고뇌는 깊었다. 내란을 수습하고, 지금은 평온하다는 조선으로 일본이 대군을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하다. 그러나 일이 일어나고부터라면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다. 청국은 산해관(山海關) 또는 대고(大沽)에서 인천으로 직항하면 12, 3시간에 도달하지만, 일본은 우지나(宇品)힝에서 인천까지 40여 시간 걸린다. 미리 상당한 병력을 조선에 상륙시켜두지 않으면, 일단 유사시 “기선을 제할”수가 없다. 陸奧는 『건건록』에 「지금 이것을 돌이켜 생각해도 송연(悚然)하다」고 당시의 “참담한 고심”을 기술하고 있다.
이에 陸奧는 무엇인가 외교상의 수단에 의해 사태의 국면을 일전할 수밖에 없다고생각하여, 총리 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와 협의를 거듭했다. 그 결과, 伊藤(이토)는, 「청국정부에 대하여 『일청 양국이 협력하여 먼저 조선의 내란을 진압하자, 그 후에 또다시 내란이 일어나 동양평화의 유지를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일청 양국에서 상설위원 약간 명을 내어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안하면 어떨까」 하는 안을 냈다.
이에 대하여 陸奧는 「일본은 어디까지나 피동자로 있고 싶지만, 그것으로 주동자의 입장이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주저했지만, 지금은 거기에 구애될 여유도 없다. 그는 伊藤(이토)안에 다시 다음 2조를 추가했다.
(1)청국과 협상을 시작한 후에, 그 결과를 볼 때까지, 이미 조선에 파견한 군대는 결코 철회해서는 안 된다.
(2)만일 청국정부가 우리 제안에 찬동하지 않을 때는, 일본은 독력으로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하게 해야 한다
6월16일 陸奧는 주일 청국공사 왕봉조(汪鳳藻)를 만나, 이미 각의에서 결정한 제안의 내용을 알리고, 이것을 본국정부에 전하여 회답을 바라도록 요청했다. 이때 陸奧는, 그가 추가한 2개조는 숨기고 있었다.
청국공사는 강한 난색을 보이고, 「먼저 일청양국이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그 후에 조선의 선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되풀이하고, 본국에 전달할 것을 승낙하지 않았다. 회담은 오후 8시부터 이튿날인 17일 새벽1시까지 5기간 계속되었고, 드디어 陸奧는 상대를 설득했다.
혼성여단이 인천에 상륙한 것은 陸奧와 청국공사와의 회담과 같은 날, 6월16일이었다. 군대는 조선정부의 반대를 억누르고 서울로 향했다. 이것을 알아도 아산에 주둔하는 청국군은 일거의 움직임이 없다. 따라서 서울의 각국외교단에게 청국군의 존재는 마음에 두지 않지만, 마치 조선이 일본의 점령 하에 있는 것 같이 수도에 입성해온 일본군에게 강한 위협을 느끼고, 의혹을 격화시켰다.
혼성여단 파견을 결정할 무렵 일본의 “의중”을 林 蕫(하야시 타다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혼성여단 병력이 서울에 들어가면, 오래전의 승리에 익숙해진 청국 군단은 반드시 일본군을 공격할 것이므로, 그것을 기회로 평양 부근에서 일전을 치루고 승리한 다음 평화를 강구하여 조선을 일본의 지배하에 둔다,」
청국에 있어서 일본의 대군 파견은 예상외였다. 1890년(명치23년) 헌법 실시이래, 일본정부와 의회사이에 다툼이 그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청국은, 일본은 다른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는 대 결단은 할 수 없다---고 우습게보고 있었다. 주일 청국공사로부터의 본국에 대한 보고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미 약 10.000명의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했다는 조짐을, 청국정부는 귀를 의심하면서 들었다.
6월21일, 청국으로부터 일본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공식회답이 왔다. 거절의 이유는 다음 세 조목이다.
(1)조선의 내란은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일청양국이 협력하여 이것을 진압할 필요가 없다.
(2)조선의 개혁은 조선에 맡겨야 하며, 우리 청국마저 그 내정에 간여하지 않는다. 항차 조선을 자주의 나라로 인정하고 있는 일본이, 내정에 간여할 권리는 없을 것이다.
(3)천진 조약은 「조선의 사변이 평정되면, 각각 그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때 일청양국이 철병하는 것은 당연하고, 의론의 여지가 없다.
陸奧는 청국과의 교섭을 시작할 때부터---기회 있을 때마다 조선을 “우리 속방”이라고 부르고, 특히 임오군란, 갑산정변에 의해서 조선에 있어서의 세력을 증강한 청국이, 일본과 대등한 입장에서 일에 임한다는 제안을 승낙할 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陸奧는, 이 회답의 취지는 이홍장의 의견에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거절”을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陸奧는 이튿날인 22일, 청국이 열거한 항목 전부에 논박을 가한 공문을 청국공사에게 보냈다. 그 가운데는 「현재 조선에 주류하고 있는 군대는 단연코 철수하지 않는다. 금후 청국이 어떠한 방향을 취하더라도 일본은 단독으로 스스로 믿는 침로(針路)를 직진 한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陸奧자신이, 이것을 「청국정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제1차 절교서라고 할 수 있을 것」리라고 쓰고 있다.
「이 이상의 병력파견은 제한해야 할 것이다」라고 의견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성여단을 보낸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부터 大鳥 圭介공사는 마음을 정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다른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마음을 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 후의 大鳥는, 陸奧에 의해서 대표되는 일본의 의향에 따라 강경한 태도로 조선정부에 대하고 있었다.
陸奧는 「조선개혁안」의 내용이나, 그것을 청국공사에게 보이고 본국의 회답을 요구하는 경위 등을, 상세하게 大鳥에게 통지했다. 그리고 6월23일, 그는 大鳥에게 「금후 일본은 단독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加藤(가토)서기에게 훈령을 주어, 서울로 파견한다」고 타전했다.
加藤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6월27일이었으나, 그 전날 大鳥는 국왕을 만나 「조선의 내정개혁 필요」를 설명하고, 일본 안을 검토하도록 서술했다. 그러나 왕은 서울에 있는 일본군의 철거를 요구할 뿐으로, 개혁에 관해서는 분명한 답을 피했다. 그 배후의 병풍 그늘에, 민비가 있었다.
加藤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구두 훈령의 내용은, 杉村서기관의 기술(記述)에 따르면, 「금일의 형세에서는 사태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개전은 피할 수 없고, 따라서 결점을 우리에게 지우려는 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개전의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비난받는 일조차 없었으면, 어떤 수단이라도 취해서 개전의 구실을 만들라---고 陸奧가 초조해 하는 이유의 하나는, 조선 문제에 대하여 타국이 구체적인 개입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