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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청 아카데미
이슬람과의 만남
김재현
1. 들어가며
이슬람이 오고 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이슬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서점에는 이슬람 서적이 늘어나고 있다. 왜 이슬람을 공부해야 하는가? 이슬람이 중요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2001년 세계 종교 인구 조사 때 이슬람의 인구는 19%였다. 현재 이슬람 인구는 21%이다. 이슬람은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이다. 학자들은 2100년대에는 이슬람이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슬람은 거의 1400여년 가량 존재해 오면서 세계의 역사와 세계 변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종교이다. 따라서 이슬람 공부는 필요하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슬람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종교 문맹>이라는 말이 있다. 종교에 대한 이해가 결핍된 사람을 가리킨다. 박노해는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시를 지었다.
문맹(文盲)은
동정받아 마땅하고
컴맹(com盲)은
도움받아 마땅하나
환맹(環盲)은
지탄 받아 마땅합니다.
인간의 미래를 파괴하는 자
아이들의 미래를 훔쳐다 쓰는 자
오늘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살기 위해
자신의 발 밑을 허무는 자는 결코 용서 받지 못합니다.
종교 문맹(종맹이라고 해야 할까?)은 환맹 못지 않게 위험한 사람이다. 21세기에 가장 필요한 일 중 하나는 이웃 종교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한스 큉은 이를 대화능력이 있는(dialogfahig) 사람, 세계능력이 있는(weltfahig)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는 종교간의 대화 능력과 종교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능력이 세계인이 될 수 있는 주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러한 종교 에티켓이 필요하다.
2.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서양은 오랫동안 무함마드를 자신들의 시각으로 이해해왔다. 그 시각은 다소간 서구 중심적이었고 오리엔탈리즘적이었다. 서양에서 무함마드는 오랫동안 거짓 예언자, 이단자, 사기꾼, 간질병자. 아랍의 신, 적그리스도로 여겨왔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기에 이르면서 그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볼테르와 괴테는 무함마드를 다소간 긍정적으로 그렸다. 볼테르는 볼랭빌리에를 따라 이슬람교를 이성적인 종교로 보았으며, 무함마드를 합리적인 종교의 창시자로 부각시켰다. 볼테르에게 무함마드는 율법의 제정자이기도 했다. 괴테도 <무함마드의 노래>를 시로 써서 주변의 비판을 받았다. 계몽주의자 가운데에는 기번이 무함마드에게 호의적이었다. 기번도 무함마드를 율법 제정자로 높였지만, 예언자의 권한을 악용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칼라일은 무함마드를 영웅으로 보았다. 그는 『영웅숭배론』의 한 장을 무함마드에 할애했다. 서양의 인물들은 이렇게 다양하게 무함마드를 이해했지만 경건한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rasul)이며 마지막 예언자(nabiy)이다.
무함마드는 AD 570년 경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명문 쿠레이쉬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으며, 어머니도 그가 6살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인 압둘 무탈립의 양육을 받았으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삼촌인 아부 탈립의 보호를 받았다. 그후 상인이 되어 살다가 25세에 부유한 미망인이던 카디자와 결혼한다. 무함마드는 25세였고, 카디자는 40세였다. 이후 무함마드는 여유롭게 지내면서 기도와 명상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40세가 되던 610년에 메카에서 가브리엘(지브릴) 천사에게 계시를 받게 된다. 이 때로부터 무함마드는 22년동안 계시를 받았고 이는 후에 꾸란으로 정리된다. 무함마드는 처음 계시를 받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아내였던 카디자는 그를 격려했다. 그리고 카디자의 친척이었던 와라카 이븐 나우팔(그는 한 번은 일신교도로, 다른 한 번은 기독교도로 등장한다. 그는 히브리어를 할 줄 알았고 복음서를 읽었다)이 무함마드의 체험을 모세의 체험과 비슷한 것이라고 해석해 주었다.
최초의 이슬람교 신자는 아내였던 카디자였다.
후와일리드의 딸인 카디자는 무함마드가 한 말을 믿었고, 그에게 하나님이 계시한 일이 사실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일을 도왔다. 그녀는 하나님과 그의 사도를 믿었고,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를 내렸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 후 그의 양자와 친구였던 아부 바크르가 무함마드를 믿었다. 다신교가 성행했던 메카에서는 무함마드를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서도 개종자가 생겼다. 개종은 주로 꾸란의 낭송을 들으면서 이루어졌다. 이슬람 교도들은 꾸란에 "말의 마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꾸란 낭송은 매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종자가 생기면서 박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 무리는 무함마드의 지시를 받아 615년 경에 에티오피아로 이주한다. 무함마드의 보호자였던 카디자와 삼촌 아부 탈립이 죽자 박해는 더 강화되었고 무함마드는 622년에 메디나(원래의 이름은 야스립)로 이주한다. 이를 성천(헤지라)이라고 한다. 이 해가 이슬람교의 시작연도이다. 기독교와 불교는 창시자인 예수와 붓다의 탄신일을 기원년으로 정했다. 반면에 유대교와 이슬람은 이집트와 메카를 탈출한 해를 기원년으로 삼았던 것이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메디나로 이주한 지 2년 되던 해에 유대교인들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유대교인들은 무함마드를 구약성서의 예언자 계통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624년에는 메카(1천명)와 이슬람군(300명)이 전쟁을 벌였는데, 이슬람군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625년에는 초반의 승리와 후반의 패배를 맛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630년에 무함마드는 메카를 점령했다. 그는 카바로 가서 신전에 있던 신상들을 파괴하고 알라는 위대하시다고 외쳤다. 그는 632년에 죽었다.
3. 이슬람의 다섯 기둥과 여섯 신앙
이슬람교는 5가지의 기둥(5주)와 여섯 가지의 신앙(6신)으로 이루어진 종교이다. 5가지 기둥은 다음과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이다(샤하다).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고 고백한다. 유일신 신앙과 무함마드에 대한 신뢰를 뜻한다. 무함마드는 사도이며 마지막 예언자이다. 두 번째 기둥은 기도(예배)이다(잘라트). 예배는 하루 다섯 번 드리는 의무 예배와 매주 금요일에 드리는 합동 예배, 축제일에 드리는 축제 예배, 라마단 때 드리는 단식 예배 등이 있다. 예배 시간은 매번 10분 정도 소요된다. 새벽, 정오, 오후, 저녁, 밤중에 예배가 있다. 단식은 세 번째 기둥이다(사븜). 라마단 한 달 동안 해가 뜬 후에서 해 질 때까지 물과 음식을 먹지 못한다. 네 번째 기둥은 희사이다(자카트). 개신교는 수입의 1/10을 내는 십일조를 강조함에 비해 이슬람은 일년에 한 번 재산의 1/40을 낼 것을 강조한다. 다섯 번 째 기둥은 성지순례이다(하지). 이슬람 교도들은 일생에 한 번 성지순례를 하도록 의무화한다. 이슬람력 12월에 거행된다.
이슬람의 믿음은 6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유일신에 대한 믿음. 이슬람은 철저한 유일신교이다. 그래서 다신교 뿐 아니라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거부한다. 둘째, 천사들에 대한 믿음. 천사, 사탄, 진(정령)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셋째, 성서들에 대한 믿음. 꾸란 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를 인정한다. 그러나 최종적인 복음은 꾸란으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넷째, 예언자들에 대한 믿음. 이슬람교는 아담으로부터 무함마드까지 12만 4천명의 예언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꾸란에 이름이 등장한 예언자는 25명이다. 특히 노아, 아브라함, 이스마엘, 모세, 예수와 무함마드가 자주 인용된다. 다섯째, 내세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 여섯째, 정명에 대한 믿음. 우주의 법칙과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정해 놓은 명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인샬라'라는 말을 자주한다.
4. 꾸란과 하디스
꾸란은 무함마드가 가브리엘에게 받았던 계시를 책으로 수집한 것이다. 총 1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인 수라트 알파티하를 제외하고는 긴 것에서부터 짧은 것으로 정리되어 있다. 1장은 신앙의 문이 열린다는 의미에서 개경장으로도 불리며 이슬람교의 주기도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1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2 온 누리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3 그 분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4 심판의 날을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5 우리는 오직 당신만을 경배하오며 당신에게만 구원을 간구하오니
6 저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7 당신께서 은총을 내리시고 노여움을 받는 자들이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이슬람 교도들은 가급적이면 꾸란을 다 외우려고 한다. 꾸란 전체를 다 외운 사람을 하피즈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대단한 존경을 받는다. 하디스는 예언자의 언행록이다. 원래 하디스는 60만개 이상이 구전되고 있었다. 이를 무함마드 빈 이스마일 알 부카리(줄여서 부카리)가 분류하고 연구하여 가장 정확성이 높은 전승 97부 7300개의 하디스를 출판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그 중에서도 축약된 2230개의 하디스가 출판되었다.
5. 순니파/시아파 그리고 이슬람의 역사
순니파와 시아파의 분리는 이슬람의 지도자인 칼리파 문제 때문에 벌어졌다. 632년에 무함마드가 죽으면서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다. 무함마드 이후에 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스만이 차례로 칼리파가 되었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는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656년 알 리가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지만 661년에 살해되고 말았다. 이 알리의 추종자가 시아파가 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순니파가 되었다. 시아파는 1-3대 칼리파를 정통 칼리파로 보지 않고 찬탈자로 보았으며 알리가 죽은 후에는 칼리파가 끊어졌고, 공동체의 지도자인 이맘이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고 본다. 시아파는 이란을 중심으로 해서 전체 이슬람의 약 10% 정도를 차지한다. 시아파는 12이맘을 따르는 12이맘파가 주류이고, 이외에도 많은 분파가 있다.
이슬람의 역사는 정통 칼리파 시대,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오스만 제국, 근대 이슬람으로 구분된다. 정통 칼리파 시대는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로부터 알리에 이르는 시대를 뜻한다. 알 리가 칼리파일 때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알리에게 도전하였고, 알리 사후에 무아위야는 새로운 이슬람 왕조를 연다. 그것이 우마이야 왕조이다(660-750). 이슬람은 발생한지 30년 만에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거두며 영토 확장을 이루었었다. 우마이야 왕조 때 유럽을 거의 정복할 뻔 했지만 732년 샤를 마뉴 대왕에 의해 저지되면서 유럽은 이슬람화를 면할 수 있었다. 압바스 왕조(750-1258)는 진정한 이슬람 제국이었다. 이 시기에 이슬람은 문화에 있어서 전성기를 이루었고 인류 문명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 900년까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절정에 도달했고 천문학과 과학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서양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슬람 문명을 경험한 이후에 일종의 문화혁명을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스페인은 711년에서 1492년까지 거의 800년 가까이 이슬람 세계에 속하면서 지적 창구의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이는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슬람권 연구자들은 서양의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가 이를 통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오스만 제국은 독일과 함께 가담했던 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말미암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6. 수피파
수피는 알라와의 합일을 지향하는 이슬람 신비주의 일파이다. 신비주의적인 수피즘을 전통 신앙과 융합되도록 이끌었던 사람은 이슬람 최고의 학자인 알 가잘리였다.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수피 종단은 잘랄레딘 루미가 결성한 메블라나 종단이다. 루미는 '세마'라는 회전춤을 통해서 신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수련법을 계발했다. 루미는 열린 종교인이었다. 그의 시를 보자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느냐.
그들이 알라에게 다가가는 길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오라 오라!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
방황하는 자, 우상숭배자, 불을 섬기는 자,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도 모두 오라.
내게로 오라.
약속을 어기고 맹세를 100번이나 깨트린 사람도 좋다.
오라 언제든지 다시 오라.
우리의 길은 절망하는 길이 아니라 진리의 길이다.
그리고 용서하라, 또 용서하라.
나의 어머니는 사랑/ 나의 아버지도 사랑/ 나의 예언자도 사랑/ 나의 신도 사랑
나는 사랑의 자식
오로지 사랑을 말하고자 내가 왔음이라
여성 수피도 있었는데 라비아 알 아다위야가 유명하다. 그녀는 명상과 밤샘기도, 그리고 겸허한 마음 가짐으로 하나님을 찬미했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기도시를 남겼다.
주여!
제가 만일 지옥이 두려워 당신을 숭배한다면,
저를 지옥 불에 태어시고,
천국에 가고자 당신을 찾는다면
천국에서 저를 내치옵소서!
당신만을 사랑하고 조건 없이 당신만을 섬긴다면
당신의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저를 붙잡아 주옵소서.
어느날 누군가 라비아에게 악마를 미워하는지 물었다. 그 때 라비아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라 악마를 미워할 겨를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7. 이슬람의 문화
이슬람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할랄'이고 먹을 수 없는 음식은 '하람'이다. 대표적인 하람이 바로 돼지고기이다. 이슬람 음식문화에서 유명한 것이 바로 낙타 바비큐이다. 라마단이 끝난 다음의 축제를 이들 피트르라고 한다(성지 순례가 끝나고 치르는 축제를 이들 아드하라고 한다). 그 때 낙타 바비큐를 한다. 낙타 안에 양을, 양 안에 칠면조를, 칠면조 안에 닭을 넣고, 닭 안에 건포도, 아몬드, 수수, 녹두와 갖은 양념을 넣고 10시간 이상 천천히 돌려서 바비큐를 한다. 이것이 아람 최고의 명절 음식이다. 아랍인들은 보신탕을 먹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마시는 커피를 보급시킨 사람들이 바로 이슬람이다. 영어 coffee와 프랑스어 cafe도 아랍어 까흐와에서 유래했다. 설탕 역시 이슬람 세계에서 먼저 계발되었다.
이슬람의 결혼 풍습은 서양과 크게 차이가 난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결혼이 가족 공동체의 일이기 때문에 자유연애가 어렵다. 남자는 18세, 여자는 16세 정도에 중매인을 통해서 결혼한다. 최종 결정권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 남자는 4명의 아내를 둘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4촌까지 결혼이 가능하다. 사촌간 결혼은 가족간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사촌 중에서도 작은 아버지의 딸과 주로 결혼하고, 신랑 될 사람이 포기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어렵다. 반면 신랑은 사촌과 결혼이 내키지 않으면 두 번째 부인을 얻는다. 사촌 뿐 아니라 5-6촌 결혼도 가능하다. 하지만 같은 유모의 젖을 빤 남녀는 결혼하지 못한다.
8. 한국과 이슬람
한국과 이슬람의 교류는 12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페르시아의 문헌 <쿠쉬나메>에는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이 기록되어 있다(640년 경의 이야기). 아랍세계와 신라의 교류를 말해 준다. 880년경 처용이 아랍인 혹은 무슬림인가가 논의되기도 한다. 고려시대 개성에는 모스크가 있었다. 세종대왕도 무슬림과 교류했었다. 1427년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세종대왕께서 정초 경복궁의 경회루 앞뜰에서 좌우로 문무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지그시 눈을 감고 한 이슬람 원로가 낭송하는 꾸란 소리에 빠져 계시더라 - <조선왕조실록>
이후 왕래가 끊어졌다가 오스만 제국 시대에 다시 서로 교류하게 되었다.
9.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유일신교는 일종의 가족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혈통으로 보아도 같은 혈통을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이브라힘)이 이들의 공통조상이다. 유대교는 아브라함-이삭-모세-다윗으로 이어졌다. 기독교는 이 계보에 예수를 추가시켰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이스마엘(이삭과 형제이다)-무함마드의 계보를 가지고 있다. 유대교는 모세 중심의 종교이며, 기독교는 예수 중심의 종교이고, 이슬람교는 무함마드 중심의 종교이다.
이슬람교는 BC 200여년에 형성된 유대교, AD 1세기에 형성된 기독교에 비해 수백년 뒤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꾸란에서도 유대교와 기독교를 일정부분 받아들이지만 결국에는 이슬람교가 궁극적이며 완성된 종교라고 주장한다. 꾸란은 예수를 '이사'라고 부른다. 꾸란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믿는다. 예수가 예언자라는 것과 기적을 행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다만 예수가 신이라는 사실과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승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꾸란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와 마리아를 신격화했다고 비판한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처음에는 소소한 갈등이 있었지만 다소간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관계는 최악으로 악화되었다. 영국은 1차 세계 대전을 치루면서 적국인 독일 및 오스만 투르크를 꺾기 위해 유대인과 아랍인 양자에게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팔레스타인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분할은 불합리하여 곡창지대와 공장이 유대인 쪽으로 배정되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해서 중동을 화약고로 만들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된 다음날 전쟁이 일어났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이 때부터 미국도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유럽과 미국은 50여년 동안이나 석유를 값싸게 착취했었다. 갈등의 절정은 9.11 테러였다.
10. 나가면서
이슬람교는 '평화'라는 뜻이다. 앞으로 이슬람과 더 깊이 만나기를 기대한다. 한스 큉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했다.
종교간의 대화없이 종교간의 평화 없고, 종교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
종교에 대한 기초연구 없이는 종교간의 대화도 없다.
이슬람과의 만남은 21세기를 살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이다. 덮어놓고 배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문명사적인 평화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슬람 영성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종교학자 오강남은 종교를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로 나눈다. 심층종교는 종교가 가진 영성의 차원을 말한다. 심층종교의 영성차원은 치유할수 없이 종교적인 인간인 호모 릴리기오수스에게 반드시 필요한 차원이다. 이슬람 영성, 특히 수피즘과 같은 신비주의는 우리의 내면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리라고 생각된다.
참고자료
한스 큉, 『이슬람』, 손성현 역, 시와 진실, 2012
야히야 에머릭,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이슬람』, 한상연 역, 삼양미디어, 2012.
이주화, 『청소년을 위한 이슬람과 꾸란』, 두리미디어,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