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수괴'이자, 학살자인 전두환이 육사 사열받고, 경찰 경호까지 받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육사는 전두환 사열 받은 이유를 "연장자에 대한 예우"라고 했습니다. 쿠데타로 민주헌정을 유린하고, 무고한 시민을 죽인 학살자를 자기 학교 출신 연장자라는 이유로 최고 예우인 '우로 봐'고 한 것은 육사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것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교훈은 '지(智), 인(仁), 용(勇)'입니다. "'지'는 사리를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으로 군인의 사명을 인식하고 무력 관리라는 부여된 기능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덕목. '인'은 어진 감성과 신의를 바탕으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함으로써 부대의 단결과 전투력을 고양시키는 덕목. '용'은 굳센 행동으로 어떤 위험에서도 옳은 일을 실천함으로써 책임을 다하는 덕목"이라고 육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두환은 민주헌정 유린자와 학살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육사 교훈부터 망각했습니다.
진짜 군인, 정병주 특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한겨레>
이런 자를 고령자라는 이름으로 육사 생도들에게 '우로 바'를 시켰다니 진짜 군인이 아닙니다. 정말 육사가 경의를 표해야 할 이들은 따로 있습니다. 전두환이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맞선 정병주 특전사령관입니다. 정 사령관은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고, 1949년 육사 9기로 입학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제1연대 소대장으로서 참전했습니다. 1961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 일으켰지만 그는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경회루 기둥에 묶여 있다가 영창까지 갔습니다. 전두환이 육사 생도들을 부추켜 지지 행진을 한 것과 비교됩니다.
박정희 쿠데타 거부해 영창, 육사생도 부추겨 지지 행진한 전두환과 대비
이후 1967년 육군 특전사령부 제7공수여단장, 1974년에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면서 대통령 경호실 차장, 1975년에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자 장태완 육군 수도경비사령관과 같이 전두환 군사반란을 막기 위해 온힘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도움으로 준장 계급장을 단 박희도와 최세창에게 배신당합니다. 결국 정 사령관은 진압과정에서 직속 부하에 의해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습니다.

정병주 사령관은 박정희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 전두환이 육사생도들들 부추켜 시가행진을 한 것과 대비된다. 1961년 5.116 쿠데타를 지지하는 육사생도들이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정병주는 마지막까지 군인이었습니다. 전두환은 그에게 공직은 제안했지만 거부했고, 야당이 정치 입문을 제안했지만 이것 역시 거절했습니다. 한 마디로 외골수 군인, 진짜 군인, 천생 군인이었습니다. 군인은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사명인지 권력을 탐하는 것, 특히 오직 국민만이 지도자를 택할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신념으로 여겼습니다.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그는 술로 벗을 삼다가, 하지만 그는 1989년 3월 행방불명된지 130여일만에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1989년 3월 7일자 <한겨레>
정 사령관은 생전에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루 세끼 밥 먹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땅이 있으니 걷고 그리고는 잠자고… 제가 걷기를 무척 좋아해요. 울화가 치밀 때는 술병을 들고 구파발 서오릉 주변을 온종일 혼자서 터벅터벅 걷다가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곤 했어요. 그러다가 서울 북쪽의 검문소 앞을 지날 때는 ‘노태우씨가 저곳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하는 생각이 나고…."-<한겨레21>육사가 경의를 표할 이름은 [2012.06.25 제916호]

1989년 3월 7일자 <한겨레>
장태완 "반란군 놈들, 대갈통을 날려버릴 테니."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함께 전두환 군사반란 때 진압군에 섰다가 끝내 진압하지 못하고 예편당한 또 다른 장군이 있으니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입니다. 장 사령관은 12월 12일 당시 전두환 일당이 직속상관인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 없이 연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조를 총장 공관에 파견하고 한강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신군부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전두환 쿠데타에 동참했던 '반란자'들을 끝내 진압하지 못했습니다.
"1군단장 황영시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 9사단장 노태우 소장, 20사단장 박준병 소장, 71방어사단장 백운택 준장,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 30단장 장세동 대령, 33단장 김진영 대령,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

군사반란 이틀 후인 1979년 12월 14일 군사반란 주역들 사진촬영모습<연합뉴스>
장 사령관은 전두환 일당의 군사반란 소식을 듣고 "나쁜 놈들, 정치군인으로 안하무인격으로 놀더니 이젠 모반까지 해…"라고 했으며, 자신의 휘하부대인 30단장인 장세동과 33단장인 김진영 등이 군사반란에 동참한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30단에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가 있는 것을 알고 "유 선배님, 남의 부대에 들어와서 지금 무엇하자는 겁니까.'라고 분노한 후, "이 반란군 놈들, 꼼짝 말고 거기 있거라. 내 전차와 포를 갖고 가서 모조리 대갈통을 날려버릴 테니."라고 일갈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전두환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12월 12일 그가 수경사령관이 된지 불과 한 달 만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대를 완전히 장악하기 전이었고, 결과는 전두환 반란자 일당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니 하나회의 수경사 장교 450여명 중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60여명뿐이었습니다.
그가 숨졌을 때, 누리꾼 "참 군인이셨습니다."
전두환은 자기 앞길을 막아서려고 했던 장 사령관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고가 고문했고, 강제 전역시켜버렸습니ㅏ다. 장태완 사령관 아버지도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장 사령관 강제전역 소식에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곡기를 끊어 1980년 4월 자살이나 다름없는 죽음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진짜 군인에 그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가족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서울대 자연대에 진학했던 외이들 장성호씨(당시20살)이 1982년 할아버지 산소가 잇는 경북 왜관 낙동강변 산기슭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군사반란자 전두환 일당은 대한민국 헌정만 유린한 것이 아니라 장태완 사령관 가정까지 파괴시켰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전두환을 반란자로 규정했습니다.
"수경사는 대통령령으로 방패계획에 의해 창설됐지. 또 수경사의 사전 허락없이 수도권에 군병력이 절대 들어올 수 없어. 지휘관이 몰래 수경사 예하 30경비단을 장악한 그 자체가 중대 반란이야."-2005.05.16 <서울신문>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前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씨
장 사령관은 회고록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하나회 회원들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을 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 그러나 진압 책임을 맡은 내가 백기를 들 수는 없었다. 죽기로 결심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밝혀 군인으로서 반란자를 진압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회한을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장 사령관은 지난 2010년 7월 26일 폐암으로 생명을 놓았습니다. 당시 그의 죽음에 대한 누리꾼들 반응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에 한 한 획을 그은 군인 이셨습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군인으로 살길 간절히 바란다", "진정한 장수" ,"장태완 장군님은 참군인으로서 역사에 길이길이 전해질 명예를 지키신 분으로 남을 것", "충성 당신을 존경합니다. 수도경비사를 전역한 예비역입니다. 당신이 참 군인이고, 영웅입니다. 이제 편이 쉬십시요"," 같은 사단장 몇 사람만 있었어도 전두환 세력 신군부 쿠테타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고 광주시민들도 처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신군부 쿠테타세력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한것은 우리의 한계다."
이한림 "이 새끼야(박정희) 나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 속이 시원하지?"

정병주와 장태완 만큼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박정희가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려고 했던 이한림 1군사령관이 있습니다. 그는 1921년생으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와 해방 뒤 육사의 전신인 육군영어학교 1기생으로 졸업했습니다.
박정희와는 만주군관학교에서 만난 동기이지 동무였습니다. 하지만 둘은 어울릴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박정희는 헌정을 유린한 쿠데타 주역이었고, 이한림은 의회민주주의자였습니다.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반혁명 주범'으로 구속돼 61년 8월 24일 강제 예편됩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박정희가 61년 11월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자리에서 "야, 이 새끼야 나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 속이 시원하지?"라고 일갈합니다.
하지만 그는 장병주와 장태완 사령관 마지막까지 전두환 세력에게 들어가지 않은 것과 달리 박정희 정권하에서 주호주 대사관 대사, 주터키 대사관 대사, 1969~1971 제9대 건설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29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숨졌습니다. 물론 그는 만주군관학교 출신 등의 이유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로 오르기도 했습니다.
'군사반란자'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참군인' 정병주와 장태완과 이한림
군사반란을 일으킨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이들을 진압하려고 했던 정병주,장태완,이한림 중 과연 누가 군입니까? 초등학교 1학년만 되어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군대는 왜 군사반란자 박정희와 전두환을 군인의 길을 갔던 이들보다 더 추앙합니까? 경의를 표해야 할 이들은 애써 망각하고, 단죄 받아야 할 자들은 추앙하는 이 비극.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