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반 병
임봉금
그런 순간이 있었겠지
아직 개봉 전인 단아한 소주 한 병 앞에 두고
자못 설레여 눈빛이 청아했던 봄날 이른 아침
그 날 오후 소나기를 짐작 못하고
흠씬 비를 맞고 돌아 왔더랬어
호기롭게 한 잔 쭉 마시고
내 안의 혈관이 아무 이상없이
순환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해서
용기를 얻을 뻔 했어
두 잔째가 그 용기였나봐
오랜 세월 애틋해서 버리지 못한
무디어진 가위를 치웠으니까
세 잔째
새로 장만한 가위를 보자마자 반가움이 앞설거야
구질 구질한 내 일상이 홀가분하기 시작했지
네 잔째 소주는
이상하게 눈시울이 짠하네
치워진 가위도 애잔하고
버리지 못해 십 수년을
제 구실 못하는 무딘 가위질을 하며
지내 온 미련한 시간들도 아프고
이 대목이 늘 치열했지
다시 무딘 가위질을 할 것인가
소주 반 병까지가 늘 이렇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어요
봄에 피는 꽃들은 일제히 아름답고 향기롭다고
단결된 찬사로 얕은 관심을 보여줍니다
한 철이면 끝날 일회성 호들갑이 신기해
꽃들은 형형색색 기를 쓰며 뽐내기에 들어 갑니다
꽃이 아닌 꽃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햇살은 없고 툭 툭 골절된 바람의 가지에 향기를 걸치다 보니
어느새 향기 없는 침묵이 되었습니다
꽃들이 아우성 칠 때 침묵은 외면받고 색채마저 바래
낯달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낮달의 소원은 한없이 작아지다 사라지는 것
누군가의 웃음이 슬쩍 꼬리를 잡네요
꼬리를 잡힌다는 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예요
제 계절에 속하지 못하고 향기 색채마저 잃은 낮달을 보고
아무도 꽃이라고 안 해요
아무도 웃어 주지 않았던 계절
마냥 외로워 할 수는 없어
바람에 바위에 뿌리를 부비며 견디어 봐요
뿌리만 내릴 수 있다면 누구나 꽃이 될 수 있다고
슬쩍 꼬리를 잡아 토닥여 주는
아마도 그는 대중이 모르는 유머
그것을 아는 사람일 거예요
낮달이 사실은 꽃이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