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영명연수(永明延壽) 찬(撰)
"종경록"은?
중국 송대 항주(杭州) 영은사(靈隱寺)의 승려인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선교(禪敎) 이문(二門)의 요지를 논술한 책. 일심(一心)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일심위종(一心爲宗)에서 종(宗)을 따고 만법을 비추는 것이 거울과 같다는데서 경(鏡)을 따 종경록(宗鏡錄)이라 하였다. 대승경론(大乘經論)이나 인도, 중국의 3백여 언론(言論)을 모은 것이다. 종경록은 전체를 3장으로 나눈다. 첫째가 표시장(標示章)이요 둘째가 문답장(問答章)이요 셋째가 인증장(引證章)이다. 표시장은 총론이고 문답장은 심(心)을 종(宗)으로 삼는다는 요지를 설명하고
모든 만법의 근원은 마음일 뿐(종경록 서문)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께서 저술한 종경록 백권은 세상에서 성대하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 책에 수록된 문자가 방대하고 그 이치마저 끝없이 질펀하였기에, 마치 거대한 바다를 바라만 보고 탄식하면서 물러나듯 하는 경우가 허다 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동가(東嘉)의 담분(曇賁)스님은 그 가운데서 백에 한둘을 엮어 보아 그것을 <宗鏡撮要>라고 명명하였다. 위대하다. 연수선사께서는 모든 만법의 근원이 마음일 뿐임을 환하게 사무쳐 걸림없는 변재로써 일심의 근본이념을 다방면의 언어로 부연하였고, 담분스님은 자기의 안목을 바로 잡고 나서 훌륭하고 교묘한 지혜의 능력으로써 많은 언어의 의미를 묶어서, 다시 일심으로 구성하였다. -無依子 慧諶 刊記에서 이끄는 글 불교를 공부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선 그 교전(敎典)의 광대함과 그 속에서 전개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편문의 기로에서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해 전진해야 할지 망연자실하지 않는 자가 아마도 거의 드물 것이다. 불자들은 흔히 팔만대장경이라는 말로 불교의 방대 심오함을 은근히 과시하는 말을 곧잘 하지만, 그러나 낱낱이 빠짐없이 모두 다 갖춘 여유로운 언어의 잔치가 어리석은 범부들에게 오히려 오리무중의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 정작 아이러니가 아닐는지… 그 방대하게 펼쳐지는 교전의 말씀들은 모든 중생들 각자가 처해있는 차별적 상황들을 남김없이 그물질하여 그들 모두가 삼계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안락한 열반의 경지로 도달하게 하려는 고구정영한 방편설이긴 하겠으나 그 풍요로운 완전함이 오히려 하근기의 중생들에겐 어리석음만을 더하는 병폐가 적지 않음은 오늘날에도 흔히 보는 일들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들은 진여일심을 삼계만법의 근본이념으로 삼았고, 일체 중생들이 부처님이 깨달은 불도를 믿는 데는 이러한 근본이념인 일심에서 자기의 실제적 모습을 조감해 본다. 따라서 그 근본이념인 일심의 경지에 있어서 무명의 생사를 반복하는 중생의 세계가 바로 모든 부처의 경지와 절대 평등한 진여일심법계(眞如一心法界)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절대 평등한 근본이념에서 중생들은 그 둘이 아닌 진실한 일심의 이치를 미혹했기 때문에 부처를 간직한 중생이 되었고, 모든 부처님은 보편평등하여 중생과 부처가 두 모습이 아닌 일심중도의 근본이념을 깨달았기 때문에 중생의 일심을 떠나지 않은 부처가 되었던 것이다. 불교의 근본이념인 일심진여는 마치 밝은 거울처럼 그들 두 모습이 아닌 삼라만상의 실제 모습을 분명하게 비추며, 따라서 부처와 중생, 열반과 생사라는 상대적인 모습으로 떠오른 실제 하지 않는 허구적인 명칭과 모습들은 그 거울에 비친 허상의 그림자일 것이다. 만법의 근본이념이자 그 자체이기도 한 진여일심은 고요한 경지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일체 존재하는 사물과 그 이치를 상황에 알맞게 관조하는 지혜의 광채를 항상 발현하면서도 그 자체는 늘 고요하기만 하다. 이러한 근본의 일심에서 그 관조하는 작용을 따라서 일어난 실제하는 모습 없는 허구적인 명칭뿐인 부처와 중생이라는 차별적인 언어와 그에 따른 모습들은 그 근원인 근본이념에 있어선 애시 당초 두 모습으로 대립된 차별이 없었던 것이다. 팔만대장경에 수록된 부처님의 장광설(長廣舌)과 역대 조사들이 후학에게 행했던 일체의 지시(指示)의 기연(機緣)들이 이러한 근본이념을 밝혀주는 허구적이고 임시적인 방편의 언설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도 대다수의 불자들은 그러한 이치는 까마득히 미혹하였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시작 없는 이래로 지금까지 어두운 생사의 길에서 반복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두고 법화경에선“종일 다른 사람의 보배를 헤아린들 끝내 자기 몫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오대시대(五代時代)에 오월(吳越)지방의 영명사(永明寺)에 연수선사(延壽禪師)라는 위대한 육신보살이 계셨다. 선사께선 불교의 근본이념인 최상승요의(最上乘了義)를 철저하게 증득하고 팔만교전을 끝까지 참구하였다. 그는 근본이념에 있어선 달마선종(達磨禪宗)을 심오하게 통찰하였고, 현실수행에선 계율을 근엄하게 받들어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두루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대사는 어느 날 능가경을 읽던 중“부처님 말씀은 일심이 그 근본이념이 된다[佛語心爲宗]??는 대목에 이르러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윽고 <宗鏡錄> 백 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대사는 저술을 하는 형식에 있어서 의심할 바 없는 근본이념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상대적인 질문이 끊긴 일심에서 문답의 형식을 가설하여, 불교의 광대한 의미를 빠짐없이 언표(言表)함으로써 마침내 삼계생사의 긴 밤에서 갈 길 몰라 헤매는 중생들에게 영원한 큰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대사의 밝기만 한 그 인도하심을 따라서 모든 중생들이 근본이념의 거울로써 존재의 실상을 비춰본다면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이 모든 수행의 근본이 되어 일체 존재해 있는 현상사물들의 실제적인 모습들을 조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성문(聲問)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ㆍ여래(如來)의 안락한 경지가 이를 따라 출현하여. 모든 선류(善類)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확신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가령 유정들이 번뇌 망상으로 작용한다면 탐진치 삼독(貪瞋癡 三毒)의 모든 악업이 근본이 되어 수라(首羅)ㆍ방생(傍生)ㆍ지옥(地獄)ㆍ아귀(餓鬼)의 괴로운 세계가 이를 따라 출현하여 일체의 알류들이 두려워하여 떨지 않음이 없으리라. 이처럼 절대 평등한 진여일심을 어느 쪽으로 비추느냐에 따라서 선업과 악업의 인과가 사성육범(四聖六凡)의 차별세계로 천지 현격하게 구별된 모습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그러나 그 근본이념에 있어선 모든 차별상이 단절한 동일한 진여법계(眞如法界)인 것이다. 모든 차별상이 끊긴 근본이념으로 돌이켜 관조해 본다면 그 자리는 신령하고 밝고 맑고 고요하기만 하여 모든 구별된 모습들이 일심진여의 세계에서 걸림 없이 융합소통하게 된다. 걸림 없이 하나의 모습으로 융합 소통하는 진여일심의 경지엔, 망상의 분별로 일으키는 인위적인 작위가 없고, 집착심으로 안주할 대상도 없으며, 일심 밖에 따로 실재하는 수행과 증득의 모습도 없다. 따라서 그 어떤 번뇌의 티끌에도 오염됨이 없으므로 새삼스레 수행 연마 할만한 모습도 없는데. 바로 이러한 진여일심이 일체만유의 근본이념이 된다. 이처럼 간이 명백하기만 하여 도무지 기로라곤 없는 근본이념이긴 하나 중생들이 처한 개별적인 상황을 따라서 그에 걸맞게 제시한 방편의 언표들은 너무나도 방대하게 서술되어 백 권의 종경록을 펴고 마주하는 사람이라면 미상불 장탄식을 하면서 망연자실한 채 물러나지 않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저간의 이 책에 대한 인식이었다. 대사가 원래 저술했던 근본의도와는 크게 어긋나는 이러한 점을 민망히 여긴 나머지 소흥(紹興) 연간에 동가(東嘉)의 담분(曇賁)스님은 그 호한하게 언표된 많은 내용들 가운데에서 그 핵심적인 강령만을 순서 있게 가려 뽑아 한 권의 책으로 묶고 그것을 이름 하여 『宗鏡錄撮要』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연수선사께서는 만법의 근본이념인 진여일심을 끝까지 환하게 밝히신 바로 그 바탕에서 갖춘 걸림 없는 변재로써 다방면에 걸쳐 광대하게 그 의미를 부연 설명하였고, 담분스님은 그가 깨달은 안목으로 그 많은 언어 속에서 일이관지(一而貫之)하는 하나의 근본이념을 간략한 내용으로 묶음으로써 그들 언어를 다시 그 근본이념인 진여일심으로 귀결시켰다는 점이다. 이 『宗鏡錄撮要』가 우리나라에 유입됐던 시기는 권말에 조계산 송광사에서 주석했던 무의자 혜심(無依子 慧諶)국사의 刊記가 붙어있는 걸로 미루어 국사께서 이 책을 간행 유포했던 고려 중기 이후 근역(槿域)의 불자들에게 성대하게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근래에 이르러선 이처럼 훌륭한 책을 접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뜻있는 어떤 산중 스님이 고맙게도 이 책을 구해서 보내주었다. 이윽고 역자는 이 책을 직접 마주하고 읽게 된 그 환희심을 마지 못하여 역자의 고루함은 되돌아보지도 않은 채 감히 번역을 시도하였다. 이것이 역자가 이 책을 번역하여 세상에 유포하게 된 연기(緣起)이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의 중간 부분에 한쪽의 낙장과 약간의 결함이 있어서 그 완전한 모습을 다 보지 못한 점이 매우 유감스럽긴 했으나 달리 이본(異本)을 구해서 참고대조할 길이 없어 우선 있는 그대로나마 번역해 두기로 하였다. 번역을 함에 있어선 간삽한 직역의 형식을 피하고 그 대의가 바로 드러날 수 있도록 의역을 시도하였으며, 각 문단마다 원문엔 없는 소제목을 따로 붙여서 읽는 이에게 내용파악이 쉽도록 하였다. 그리고 완전한 원본이 하루속히 입수되어 약간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으며, 끝으로 이 책을 통해서 많은 불자들이 하루속히 불교의 정맥을 찾고 이고득락하기를 삼보전에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1991년 11월 普門蘭若에서 東玄學人 송찬우 씀
언어의 집착을 떠나서 불교를 탐구하라
가령 부처님의 교승(敎乘)을 연구하고 싶어 한다면 법보(法寶)인 삼장(三藏)을 펴서 살피고, 그것을 낱낱이 소화하여 자기에게로 귀결시킨다면 그 언어들 모두가 진여일심(眞如一心)에 그윽이 하나의 모습으로 합하리라.
그러나 단지 의미상의 문자만을 굳게 집착하여 언어에 따른 이해만을 하지 말고, 모름지기 언어로 설명한 그 이면의 근본이념을 탐구하여 그 근본이념에 하나의 모습으로 일치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 스승 없이도 본래 아는 지혜(無師智=根本智)가 목전에 나타나서 천진(天眞)한 도가 어둡지 않으리라. 이는 마치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했던 <일체의 존재하는 사물이 일심인 자성에 상즉한 모습을 안다면[知一切法 卽心自性] 깨달음을 경유하지 않고 모든 사물의 자체 몸인 지혜법신(智慧法身)을 성취하리라[成就慧身 不由他悟]>라고 했던 것과 같은 경우이다. 자유자재한 경지는 언어를 떠나 있다
다함이 없어 오묘한 근본이념은 천박한 지혜로 알 경지가 아니다. 더구나 우주만유가 우리의 일심연기(一心緣起)에서 일어났다는 오묘한 성기법문(性起法門)을 하열(下劣)한 이해로야 어떻게 조감할 수 있으랴. 이를 비유하면 작은 제비나 참새가 새들 가운데서 가장 높고 멀리 나는 큰 고니새의 의지를 어떻게 알았으며, 우물 안의 개구리가 푸른 바다를 어찌 알 수 있으랴 했던 것과 같다. 이는 사자가 크게 포효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너구리가 흉내 내지 못하고, 코끼리 가운데서 왕인 향상(香象)이 걸머진 큰 짐을 작은 나귀가 감당하지 못하며, 비사문(毘沙門 또는 普聞天ㆍ種種聞天이라고도 한다. 四天王 가운데 하나로 염부제 북방을 수호하는 신. 수미산 제4층 북쪽에 머물면서 야차, 나찰 등을 거느리고 나머지 3면을 수호함. 항상 도량을 수호하면서 불법을 듣기 때문에 多聞이라 호칭함. 두 귀신을 발로 짓밟고 왼손엔 寶塔을, 오른손엔 寶봉을 지니고 있다. 이 신은 복덕을 수여하기 때문에 七福神의 하나이기도 하다)의 보배는 가난과 평등하지 않고, 용을 잡아 먹는 금시조(金翅鳥)가 나는 세계는 일반적인 새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인 것과 같다. 중생들은 오직 허망한 감정만을 의지하여 주관적인 견해를 일으키고, 그 견해로 객관의 사물을 쫓으면서 의식도 따라서 옮긴다.
그리하여 혹은 생멸하는 속제의 유(俗諦有)를 설명하면 생멸하지 않는 진제의 공(眞諦空)을 섭렵하지 못하고, 혹은 반대로 공을 설하면 그곳에서 유까지를 해괄하지 못한다.
혹은 유 무를 설명하는 담론이 간략하면 그것은 많은 담론 밖에, 즉 많은 언어의 설명과 상관없이 서로 동떨어진 하나의 간략한 담론이라 여기고, 혹은 자세한 논리를 수립하면 하나의 담론 밖에 따로 존재하는 많은 언어의 논리라고 여긴다.
혹은 말이 없는 경지를 떠나서 언어의 설명을 하면 그 허구적인 말이 실제의 진리인 양 집착을 하고, 혹은 허구적인 언어의 설명을 떠나서 말 없는 고요한 경지를 보여주면 그 말 없는 고요함에서 실재를 추구한다.
혹은 현실의 사물 밖에서 따로 존재하는 본질의 이치에 의거하기도 하고, 혹은 이치 밖에서 현실의 사물을 실재인 양 집착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들은 자유자재하고 완전한 근본이념[自在圓宗]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자유자재하며 완전한 근본이념은 광대한 언어로 부연한다고 해서 많아지지도 않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절대평등성인 하나의 모습 가운데서 설명하는 많은 차별[一中之多]이기 때문이며, 간략히 표시했다 해서 절대평등성인 하나의 모습만도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많은 관계성 가운데서의 하나[多中之一]이기 때문이다.
절대평등성인 진제의 편에서 모든 세계의 참모습은 자성이 공하다고 담론하나, 그 공은 아무런 작용이 없는 영원히 죽은 단멸(斷滅)이 아니라, 이는 상호관계성인, 살아 활동하는 속제의 유(有)에 하나의 모습으로 상즉한 공이며, 상호관계성인 속제의 유를 담론한다 해도 그것은 영원히 상주불변하는 유가 아니라 평등성인 공과 하나의 모습으로 상즉한 유이다.
혹은 절대평등성인 공에서 차별적인 언어의 설명을 한다 해도 옳은데, 왜냐하면 이것은 말 없는 가운데서 언어의 집착이 없이 설명하기 때문이며, 혹은 언어의 설명이 없다 해도 옳은데, 왜냐하면 언어의 설명에 상즉한 가운데 그 말에 집착이 없는 묵묵함이기 때문이다.
혹은 절대평등성인 본질로서의 진제의 이치와 상호관계성인 현상으로서의 사물인 이 둘이 하나의 모습으로 상즉[理事相卽]했다 해도 옳은데, 왜냐하면 이 진여성공인 이치[眞如性空理]는 현상을 떠나지 않고 그들 사물을 성취한 이치이고, 그들 사물은 그 이치를 환하게 현실로 나타내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치와 이치가 서로 상즉관계[理理相卽]라고 해도 옳은데, 왜냐하면 한결같은 모습으로 걸맞을 뿐, 두 개의 이치가 상대적으로 걸맞음이 없는 진실한 성품은 항상 하나의 모습으로 융합하기 때문이다.
혹은 현상의 사물마다 사물 그 개체로서 하나의 모습으로 상즉관계[事事相卽]라 해도 역시 옳은데, 왜냐하면 전체의 이치의 모습으로 발현한 사물이므로 사물 개체마다가 바로 진여성공이다. 따라서 그들 개체의 사물들은 평등한 진여의 이치이므로 그 이치에 있어선 서로서로가 장애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본질인 이치와 현상인 사물은 서로가 새삼 상즉하지 않았다[理事不卽] 해도 옳은데, 왜냐하면 전체 사물 그 자체로서 이치[全事之理]이므로 따라서 본질인 이치는 새삼 사물의 의지할 대상은 아니며, 그 이치를 객관으로 의지하는 주체인 사물은 의지할 대상인 진제의 이치를 숨기지 않고 사물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 전체의 이치로 이루어진 현상의 사물[全理之事]이므로 진여의 이치는 사물을 대상으로 해서 그것을 상대적으로 의지하는 주체가 아니며 따라서 사물도 이치가 의지할 따로의 대상은 아닌데, 왜냐하면 속제의 사물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사물 있는 그대로의 진여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이치와 사물을 동시에 긍정하고 동시에 부정하는 것이 하나의 모습으로 맞닿아 있으며[存泯一際], 평등성에서 차별상의 은둔과 관계성에서의 상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남이 동시[隱顯同時]이다.
이는 원각경(圓覺經)에서 보안(普眼)보살의 법문을 천양(闡揚)했던 그 모두가 평등한 이치 속의 의미였던 것과 같고, 대천경권(大千經卷)이 마음 밖의 문자를 표시하지 않는 것과도 흡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를 대상이 실물로서 실제 있다고 여기고 분별하는 마음인 의식(意識)으로 취향해 감이 있다면 그 지혜는 상대성을 떠난 조작이 없는 천연의 진실을 등질 것이며, 이와는 반대로 그러한 경지는 얻을 것도 귀의할 곳도 없다고 깡그리 무시한다면 허무단멸(虛無斷滅)의 허망한 마음이 나오리라.
단지 속제의 차별상인 유에서 그 현실적 응용을 구하지 않는다 해도 진실한 법도는 완연하고, 평등한 무라 해도 그곳에 현실의 사물은 자연히 만족하여, 오묘한 근본이념이 환하게 밝으리라. 그렇다면 고요하게 귀의할 바가 있고 편안한 마음은 간단이 없어 상대적인 이치와 사물의 집착을 단박에 초월하여 유와 무, 그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을 것이니, 이야말로 진실하게 귀의하여 지극한 도와 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번뇌가 없으면 세계가 고요하다
대상의 세계에서 감촉을 받아들이고 그 인상이 즐겁다고 느껴지면 기뻐하고, 괴롭다고 느껴지면 싫증을 내는, 이러한 허망한 마음이 나왔다 하면 육진에서 마음의 수고로운[塵勞] 자취가 일어나리라. 그러므로 옛날의 훌륭했던 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근본 실마리 끝내 무엇에서 나와 유와 무의 즈음을 따라서 일어났다 사라지는가 한 털끝만큼의 번뇌라도 유, 무로 움직이는 세계를 걸으면 무너질 듯이 큰 산만큼의 번뇌를 이루리 本端竟何從 起滅有無際 一微涉動境 成此頹山勢 단지 마음 안에서 한 털끝만큼의 번뇌도 외부의 환경을 따라서 나오지 않는다면 밖의 모든 만유(萬有=六塵)는 따라서 없으리라. 즉 인식하는 주관적인 마음이 이미 안에 없는데 그 인식의 대상인 외부의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랴. 번뇌의 소굴을 막고 생사의 부리를 절단하고 싶어 한다면 단지 안으로 본래 고요한 진여일심(眞如一心)을 관찰하라. 하나의 망념도 외부의 세계를 따라서 분별하는 망상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헛꽃과 같은 삼계(空華三界)는 마치 바람이 연하(煙霞)를 쓸 듯하고, 허깨비 그림자인 육진(六塵)의 세계는 끓는 물이 눈을 녹이듯 하리라. 그리하여 주관과 객관이 툭 트여 이 둘이 서로 상대적인 대립성으로 맞닿는 즈음이 없는 유일한 진실한 마음일 뿐이다. 무명을 끊으면 생사의 흐름이 단절한다 생사의 흐름을 단절하고 싶어 한다면 그 근원을 막고, 번뇌가 나오는 것을 면하고자 한다면 그 최초의 일념인 근본무명(根本無明)만을 절단할 뿐이니, 이는 많은 수행공부가 필요치 않다. 이것이 마음 공부하는 데 있어서 수고로운 힘을 더는 요점이다. 그러므로 통심론(痛心論)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번뇌의 속박은 마음의 속박이니 속박에서의 해탈도 마음에서 해탈하라 해탈과 속박은 마음을 따르므로 그 나머지 방편을 여는 것은 필요치 않다 縛從心縛 解從心解 解縛從心 不開餘處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론 마음의 이치를 관찰하는 관심법(觀心法)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마음을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면 모든 수행공부를 끝낼 수 있으리라. 생사의 흐름을 단절하고 싶어 한다면 그 근원을 막고, 번뇌가 나오는 것을 면하고자 한다면 그 최초의 일념인 근본무명(根本無明)만을 절단할 뿐이니, 이는 많은 수행공부가 필요치 않다. 이것이 마음 공부하는 데 있어서 수고로운 힘을 더는 요점이다. 그러므로 통심론(痛心論)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번뇌의 속박은 마음의 속박이니 속박에서의 해탈도 마음에서 해탈하라 해탈과 속박은 마음을 따르므로 그 나머지 방편을 여는 것은 필요치 않다 縛從心縛 解從心解 解縛從心 不開餘處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론 마음의 이치를 관찰하는 관심법(觀心法)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마음을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면 모든 수행공부를 끝낼 수 있으리라. 마음이 있으므로 세계가 있다 안으로 인식하고 분별하는 주관적인 마음이 있으면 그 즉시 인식의 대상인 밖의 세계도 객관으로 있게 되고[心有卽有], 주관적인 마음이 없다면 그 즉시 객관의 세계도 없게 된다[心無卽無]. 그렇다면 세계가 있고 없는 것이[有無] 마음을 따라서 성립할 뿐인 이 문제를 모름지기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굳이 이 문제를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자기의 마음을 따라서 있고 없는 세계에 속임을 당하리라. 이미 마음의 모습인 세계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시는, 마음일 뿐 마음 밖에 따로 실재함이 없는 외부의 세계에 집착심으로 머물지 말라. 그리하여 마음의 그림자일 뿐인 실재하지 않는 대상의 세계에서 그것을 분별하고 자기의 주관에 의해서 그 경지를 좋아하고 싫어했던 시비의 마음을 일시에 모두 버린다면, 마음은 대상의 세계를 따라서 집착심으로 머묾이 없게 된다. 마음이 집착으로 머무는 대상의 처소가 없으면 분별하는 주관적인 마음이 없게 되고, 이미 주관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면 역시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는 의식마저도 없게 된다. 그리하여 유심(有心)과 무심(無心) 모두가 결국 총체적으로 없게 되면 육신과 마음이라는 상대적인 모습이 없어지고, 육신과 마음이 다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상대적으로 의존했던 세계와의 대립이 단절하여 그 모든 세계와 일제히 하나로 통일된 모습이 된다[一眞法界]. 나와 세계가 이미 하나의 모습이 되었다면 그 세계는 차별적으로 분별해서 인식할 모습이란 없게 된다. 이처럼 절대평등성인 근본에 합하여 하나의 모습으로 그윽이 합하면 분별이 없는 고요한 세계에서 현실의 상황을 현묘하게 조감하고, 현실의 상황을 현묘하게 조감하면서도 하나로 합한 경지에서 고요하지 않음이 없다. 번뇌가 고요한 하나로 합한 세계를 그 자체로 하였기 때문에 그 자체인 번뇌가 텅 비지 않음이 없으며, 번뇌가 텅 빈 고요한 세계는 다함이 없어서 차별 없고 한계 없는 진여법계(眞如法界)와 동일한 모습으로 간격 없이 소통한다. 진여법계에서 생멸하는 인연을 따라서 일어난 우주만유(法界緣起) 그 자체는 인위적인 조작이 끊긴 자연 아님이 없다. 그 세계는 인연을 따라서 왔다 해도 인연으로 일어나 그 세계가 바로 진여법계이므로 실제로는 나오지를 않았고, 인연의 분리를 따라서 사라진다 해도 사라진 것은 인연일 뿐, 그 당체인 진여법계는 아니므로 새삼 따로 사라져갈 대상도 없다. 또 진여법계는 단정적인 일정한 모습이 없이, 평등성인 진실과 관계성인 허망이 마음을 따라서 성립하므로, 마음의 인연을 따라서 일어난 진실과 허망이 그 인연의 분리를 따라서 다하면 다시 법계와 동일한 근원이 된다. 따라서 그 경지엔 다시 법계와 따로 구별되는 근본이념[宗旨]이란 없다. 망상의 모습은 시간, 공간 어디에도 없다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고[憶], 현재 대상과의 접촉에서 받아들여지는 느낌에 대해서 인상 지워지지만[想], 그 모든 것을 분별하는 망상의 실제 모습을 돌이켜 관찰해 보았더니, 우리의 진여일심은 끝내 그러한 망상의 모습을 따라서 나옴이 없다[無生]. 분별하는 망상의 모습을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에서 추구해 보았으나 그 실제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고, 공간적으로 시방세계(十方世界)에서 더듬어 보았으나 그 흔적이란 없다.
이미 망상으로 일어난 주체적인 마음이 없다면 역시 새삼 사라질 망상의 모습도 없으리니,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함께 떠나서 떠났다는 주관적인 의식마저 공적해진다면, 주관적인 마음과 그 그림자의 모습으로 떠오른 세계가 하나의 모습으로 막힘없이 툭 트이는데 그러한 경지를 두고 열반의 도를 본다[見道]라고 말한다.
열반의 도를 본 가운데서는, 상대적인 의존관계에서만 성립이 가능한 진실과 허망이 스스로 하나의 모습으로 융합되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치료해야 할 망상과 치료의 주체인 수행하는 마음 모두가 단절된다. 이처럼 주관과 객관이 다한 곳에선 자연히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고[成佛] 분별하는 마음의 망상이 쉬어 일심에 번뇌가 고요해지면 진실한 앎[眞如]은 저절로 나타나겠지만, 그러나 분별하는 마음으로 진실과 허망을 비교해서 헤아린다면 헤아리는 마음이 전환할수록 허망한 마음만 따라서 더하리니, 단지 진실과 허망이 둘이 아닌 일심진여(一心眞如)를 오묘하게 깨달을 때만 모든 망상의 모습으로 생멸하는 인연이 스스로 단절하리라.
이는 옛날의 부처님이 오도송(悟道頌)에서,
보리수 밑에서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곤 하나 因星見悟 깨달음의 행위가 끝난 순간 깨달음의 경지는 별에 있지 않았네 悟罷非星 이처럼 객관의 사물을 쫓아가진 않지만 不逐於物 그렇다고 무감각한 무정물도 아니라네 不是無情 라고 했던 경우와도 같다.
옛 사람은 말하기를
<이 일은 번뇌가 고요한 듯 하나 고요한 가운데서 외부의 인연이 부딪쳐오면 그 응용은 현실의 상황에 알맞게 일어나므로 그것은 실제로 공적한 것이 아니며 [此事似空不空], 현실의 응용을 따르므로 있는 듯도 하나 그 응용은 공적한 자체를 떠나지 않으므로 그것은 있다 해도 정말로 있지 않다[似有不有]. 은은하게 고요한 자체에서 항상 현실의 응용으로 나타나므로[隱隱常現] 그 실재하는 처소를 공과 유에서 구해 보았으나 공과 유, 그 어느 쪽에서도 얻지 못한다 [只是求其處所不可得]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가령 자체는 번뇌가 고요한 평등성이라 해서 그것을 실재하는 공의 모습으로 단정한다면 그는 생명의 작용이 없는 단멸의 견해[斷見]로 되돌아가고, 만일 현실의 느낌이 외부에서 부딪쳐오는 대로 감응하는 작용이 있다 해서 그것을 실재라고 집착한다면 그는 상주한 다른 허망한 마음[常情]에 떨어지게 된다.
가령 공과 유는 실재하는 처소가 따로 구별되어 있다고 집착한다면 그는 있지도 않은 실재의 세계를 허망으로 이루리라.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은 이처럼 공과 유인 상대성을 떠난 세계는 망상심으로 헤아 릴 바가 아니며, 분별하는 지혜로는 알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향엄화상(香嚴和尙)이 비교해서 헤아리는 전념(前念)과 후념(後念) 그 중간의 지점에 안치 하려느냐 擬議前後 安置其中
그렇다면 어느 한 법도 얻지 못하고 깊은 번뇌의 샘에 빠지리라 不得一法 沒溺深泉
이같이 하지 않는다 해도 현재의 나를 실재하는 나로 여기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리니 都不如是 我我現前
시방세계에 불법을 배우는 자들아 어떻게 참선을 해야겠느냐 十方學者 如何參禪 가령 이같이 말해 준다면 어떻게 알아야 하겠느냐 若道如是 如何會耶
라고 했던 경우와도 같다. 이 때문에 옛 사람은 말하기를 〈곧장 유,무에 얽매이지 않고 오묘하게 그 경지를 깨달아야만 옳으리라[直須妙會始得]〉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식으로 알지 않는 진실한 앎이여서 유, 무가 둘이 아닌 중도에 오묘하게 일치한 경지인 것이다.
동산화상(洞山和尙)은 이러한 경지를 게송으로 노래하기를,
중도에 오묘하게 일치한 경지를 이것이라고 단정해서 지적해도 옳지 않은데 這箇猶不是
하물며 다시 이것저것이라고 하는 경우이랴 況復張三李
그것은 진여성공인 무라든가 그것은 생멸의 인연을 따르므로 진여성공이 아닌 유라 하여 眞空與非空 상대적인 유, 무의 모습을 가져온다면 이 모두는 유, 무를 떠난 중도와는 닮지 않았다오 將來不相似
이 경지는 목전에 있는 듯 분명하여 了了如目前
털끝만큼 비교해서 헤아리는 마음도 용납하지 않는다네 不容毫髮擬
라고 하였던 것이다. 중도를 단지 이것만이라고 단정해도 그것을 옳다고 긍정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나머지 기교적인 마음으로 잘못 이해한 경우를 더 말해 무엇하랴. 융대사(融大師)의 게송에선 말하기를,
눈이 먼 개가 무성하게 자란 띠 풀을 보고 짖자 할狗吠묘叢
눈 먼 봉사는 호랑이가 해친다고 부르짖네 盲人唱賊虎
소리만을 따랐기 때문에 미혹에 이르러 간 것이니 循聲故致迷
이는 실로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네 良由無目都
라고 하였다. 가령 마음의 눈이 열려서 진여의 이치를 관조할 땐 분별하는 모든 주관적인 견해가 단절한다.
따라서 이것은 생멸하지 않는 깨달음의 법[佛法]이므로 이 법만이 옳다는 견해도 갖지 않고 저것은 생멸하는 세간법[世法]이므로 틀렸다는 견해도 갖지 않게 되는데, 왜냐하면 자성 가운데에서는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언어와 사고의 길이 단절하였기[言思道斷] 때문이다. 이는〈옳다고 여길 객관의 모습 없는 것이 보리이니, 이러한 깨달음의 보리도를,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으로 옳다고 여기는 어느 한 쪽에 안치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던 경우와 같다.
가령 지금이라도 깨달음의 도를 어느 한 쪽과 일치해야겠다는 분별적인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그 자체는 스스로 번뇌가 텅 비고 현묘하게 된다.
그 경지를 비유하면 마치 유리로 만든 보배 그릇이 있는 곳마다 따르나 그 자성만은 잃지 않는 것과 같다. 만일 이 일을 알아 차렸다면 이도 역시 이와 같다. 교화하는 언어는 중생을 따라서 건립한다 일반적으로 진실과 허망을 상대적으로 수립하는 것은 모두 중생들의 분별하는 의식과 그 표현인 언어를 따르는 교화문(敎化門)에 수습된다. 가령 자성을 단박에 본 사람이라면 뉘라서 이 일, 즉 교화문을 굳이 의논하랴.
요즈음 진여일심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자라면 그 모두는 빗나간 것이며 설사 우리의 마음 밖에서 깨달음의 결실[佛果]을 따로 추구하는 자라 해도 그들 모두가 올바른 수행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산자(寒山子)는 시로써 노래하기를,
남아대장부라면 男兒大丈夫 하는 일을 너절하게 하지 말라 作事莫莽망 곧장 철석같은 마음으로 뛰쳐나와서 徑挻鐵石心 보리의 길을 바로 취하라 直取菩提路 빗나간 길은 가지를 말라 邪道不用行 가면 갈수록 더욱 괴로우리니 行之轉辛苦 깨달음의 결실도 구할 필요없이 不用求佛果 인식의 주체인 심왕의 근본 주인을 알아차려라 識取心王主 라고 하였다. 이로써 알아야 할 것은, 단정적으로 구해야 할 법이 있고 수행해야 할 길이 따로 있다는 견해를 갖는다면 이 모두는 심왕 자체의 근본이념[心王自宗義]을 잃는다는 점이다.
가령 현상에 존재하는 사물마다 그것이 마음의 모습임을 보고 그들 인연을 따라서 본성을 알 수 있다면, 하나의 법이라 해도 마음 밖에서 안으로 상대적인 모습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한 법도 마음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한 법도 여러 가지 실재하는 물질의 요소가 화합해서 있지도 않으며, 한 법도 원인 없이 자연으로 성립 하지 않으리라.
이와 같다면 하나의 티끌이라 해도 그 모습을 실재로 여기고 집착으로 안주 하겠다는 견해를 갖지 않게 되는데, 어떻게 현상의 모든 세계가 시간을 따라서 현재의 사물은 과거로 흘러가고 과거의 사물은 현재로 흘러온다[萬法去來]라고 상대적인 모습에서 관찰하겠는가.
이야말로 철저하게 근본이념을 밝힌 것이며, 정상의 끝까지 꿰뚫어서 자성을 본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마음마다 도에 합하고 생각마다 근본이념을 위배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간적으로 움직임을 따라서 흘러가고 고요함을 따라서 안주함이 동시적이며, 시간적으로 예와 지금이 하나의 모습으로 관통하게 된다 세계와 마음은 두 모습이 아니다 마음 속에 그 그림자로 떠오른 세계는 다함이 없고, 그들 세계에는 세계에 걸림이 없는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요컨대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모습인 허구적인 언어의 집착을 잊어야만 이러한 둘이 아닌 이치에 합하게 된다.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은 공과 유는 서로 장애함이 없고, 진제와 속제는 하나의 모습으로 융합소통 한다는 점이다.
실재하는 자성이란 없는 근본이념[無性之宗〓空?眞諦]과 자성이 없는 데서 생멸의 인연을 따라서 나왔으므로 사물 그 자체는 성공(性空)인 이치[緣生之理〓有?俗諦]는 마치 신통으로 변화하는 것과도 동일하여 그 단정적인 변화의 방향을 정할 순 없다. 이처럼 공과 유가 두 모습이 아닌 세계는 협소한 공간에 거처한다 해도 항상 여유롭게 관대하며, 깊숙이 거처할수록 더욱 얕게 드러난다.
혹은 아래로 범부의 세계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항상 위로 불과(佛果)를 맡고 있고, 혹은 중도에 노닐면서도 공, 유의 양쪽에 동시 상즉한다. 따라서 중생은 항상 본각법신(本覺法身〓佛身)에 거처하고, 열반은 오직 인연을 따라서 생기하였으므로, 그 자성이 공적한 성공의 생사[緣生性空生死]만을 의지할 뿐이다. 이처럼 인식으로는 사고하기 어려운 오묘한 근본이념은 범부의 허망한 감정으로 알 대상은 아니라고 말할 만하다. 가령 이러한 근본이념을 깨닫지 못한다면 주관적으로 분별하는 견해의 흔적, 즉 그 집착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우리라.
이런 경우를 두고 방거사(龐居士)는 게송으로 노래하기를,
지난 날 속제인 유에 집착해 있을 땐 항상 집착이 있는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여 그에 대한 분별을 갖가지로 내어 보고 듣는 데도 시비 많았네 훗날 진제인 무 속에 앉았더니 다시 일체의 유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기만당하여 한결같이 마음만을 관찰하며 앉아 있었더니 아는 거라곤 없이 캄캄하기만 하였네 유, 무를 함께 옳다 여기고 집착하였으니 어느 곳인들 무위이랴 유, 무가 동일한 자체여서 모든 차별적인 모습 끝까지 다 여의었네 마음은 허공과도 동일하기 때문에 허공처럼 의지할 대상 없다오 가령 유, 무로 차별함이 없는 진여의 이치를 의논한다면 오직 만법의 어버이인 심왕만 알고 있을 뿐
昔日在有時 常被有人欺 種種生分別 見聞多是非 後向無中坐 又被無人欺 一向着心坐 冥冥無所知 有無俱是執 何處是無爲 有無同一體 諸相盡皆離 心同虛空故 虛空無所依 若論無相理 唯有父王知
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은 유,무로 차별하는 모든 법에서 구경각(究竟覺)을 구하고 싶다면 유, 무의 차별상을 떠난 마음만이 그 경지를 증득할 수 있으며, 가령 이와는 반대로 일심으로 귀의하지 못했다면 하는 일마다 모두 장애를 이루리라. 유, 무를 초월한 근본이념 질문해 보자. <일반적으로 유, 무의 차별적인 모습을 섭렵하기만 하면 모두가 빗나간 망념[邪念]을 이루고, 유, 무를 관찰할 대상의 이치로 삼고 자신을 관찰하는 주체로 하여 주관과 객관이 상대적으로 열리면 이 모두는 분별망념으로 앎이 있는[有知] 경지에 떨어지나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분별하는 망념이 없이 유. 무를 초월한 근본이념의 세계를 알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답변해 주리라.
상서로운 풀에서 아름다운 운수 나오고 瑞草生嘉運 숲속의 꽃은 이른 봄에 맺히네 林花結早春 본각(本覺)의 세계에 깨달아 들어가면 유, 무를 떠난 근본이념인 본각(本覺)의 세계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완전하게 밝아 결정적인 확신으로 깨달아 들어가면 긴 세월동안 해야 할 수행공부를 초월하여 단박 성취하는 능력을 얻으리라.
그는 비록 생사의 세계에 있다 해도 그 자리에서 항상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며 항상 육진(六塵) 번뇌의 수고로운 세계에 거처한다 해도 길이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거처한다.
그는 현재 한 치의 장애물도 투시하지 못하는 육안(肉眼)을 갖춘 상태에서 실제의 이치를 관조하는 혜안(慧眼)을 얻으며, 범부의 마음을 변역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심의 지견(佛心知見)과 동일하게 된다.
이는 마치 싯달태자가 왕의 의표(儀表)를 갖추고, 가릉빈가새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모든 새들의 소리를 초월하며, 사자의 힘줄을 가지고 비파줄을 만들어서 퉁기면 그 나머지 다른 줄에서 나는 소리는 모두 단절하고, 선견약(先見藥)으로 병을 치료하면 여러 가지 병들이 가만히 사라지고, 나라전(那羅箭)을 익힌 화살의 힘이 무쇠북을 꿰뚫고 금강추(金剛鎚)의 위력으로 칠금산(七金山)을 부수는 것과도 흡사하다. 그에겐 번뇌의 진로(塵勞)가 끊기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사라지고, 보리의 오묘한 깨달음의 결실[佛果]이 수행을 빌리지 않아도 저절로 완전해진다. 내지는 원한과 친근함을 평등하게 보고, 시비의 쟁론을 시비없는 모습으로 조화하며, 차별적인 견해에서 나타나는 범부와 성인의 대립된 모습을 하나의 모습으로 일제히 통일하고, 자와 타의 상호 의존관계가 단절하며, 흘러가고 흘러오는 모습이 하나이며, 동질성과 이질성이 한 모습으로 일치하고, 시간의 연장과 짧음이 하나로 융합하며, 중도와 유, 무의 양쪽이 한 모습으로 혼융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경지는 구체적으로 이것만이라고 그 명칭을 붙이지 못하고, 인식으론 그 한량을 헤아리지 못하며, 언어로도 설명하지 못하고,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의식까지 단절한 무념(無念)의 능력을 갖추므로, 세간이나 출세간에서 그 누구도 그를 능가할 자란 없게 된다. 모든 세계의 운동은 자기 마음서 일어난다 일심진여를 떠나지 않은 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의표가 모든 모습으로 변화한 다. 그러므로 화살이 돌 호랑이를 꿰뚫었던 일은 인위적인 노력의 공부로 할 수 있 는 것은 아니며, 술에 취한 상태에서 삼군(三軍)에 보고했던 일이 어찌 술로써 조성 되었으랴.
죽순이 차가운 겨울 계곡에서 싹터 나왔던 일은 화창한 햇빛을 의지해서 나온 것이 아니며, 물고기가 얼어붙은 강물에서 뛰쳐나온 일에 어찌 투망을 끌어와야 하랴. 이 모두는 마음에 감동하여 그러한 신령한 감통(感通)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세계의 운동 작용이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난 능력이 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이 일을 확신하고 받아들여서 이러한 능력을 갖춘다면 장애되는 번뇌의 문을 광대하게 열어젖혀 신체ㆍ언어ㆍ의식으로 바다처럼 광대하게 하는 이들 세 가지 행위[身口意 三業]가 끝까지 다 마르리라 . [宗鏡]엔 어떤방법으로 깨달아 들어갈수 있나 질문해 보자. <마치 모든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은 근본이념 [宗鏡]엔 어떠한 방법으로 확신하고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답변해 주리라. 단지 진여일심은 무명망념(無明妄念)으로 요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세계 [諸法]가 마음 밖의 실체인 줄 잘못 알고 그 곳에 집착심으로 안주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하여 주관과 객관이 없는 진여일심의 경지를 증득하여 분별로 이해하는 마음 [智解心]이 없으면 이는 상대적인 믿음이 없는 가운데서의 확신이며, 대상으로 깨달아 들어가지 않는 들어감이다.
이 경지는, 사람은 실제로 주재함이 있다고 집착하는 인아(人我)와 사람이 의지 하고 사는 세계는 실제의 주재자가 있다고 집착하는 법아(法我), 이 둘의 잘못된 견해가 공적하여 인식의 주체인 마음과 그 대상인 세계가 둘 다 공적해지리라. 마음따라 성립한 법에서 세계의 명칭이
인식하는 주관적인 마음을 의지해서 그 인식의 대상인 객관의 세계가 성립하고 [因心立法], 그 성립된 법을 따라서 그 세계에 대한 명칭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네 성인인 성문·연각·보살·부처인 이들 사성의 정법(四聖淨法)에 거처 하면 그것을 진제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천상·아수라·인간·축생·아귀·지옥 세계 의 중생인 육도범부의 염법[六凡染法]에 거처하면 그것을 속제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는 흡사 동질성인 황금으로 그릇을 만들면 그 그릇의 모양새에 따라서 각각 다른 명칭이 붙는 것과 같다. 그 구체적인 하나의 예를 든다면 황금을 손가락에 끼면 반지라는 이름으로, 팔에 걸면 팔찌라는 명사로 부르는 것과 같다.
황금의 동질성은 반지와 팔찌의 개별적인 다른 모양, 즉 그들 이질성을 따라서 자체마저 변하진 않듯이, 우리의 진여일심도 중생들의 개별적인 상황의 변화를 따라서 그 자성마저 움직이진 않는다. 그런데도 상황의 구별에 따른 이질성에 붙여진 호칭을 실재인 양 굳게 집착하 기 때문에 이를 따라서 모든 세계의 차별상이 이루어진다. 진실한 황금 자체, 즉 그 어떤 상황에도 변치않는 동질성은, 차별적인 그릇의 형태, 즉 개체마다의 이질성을 따라서 옮겨가지 않는데도 그릇에 따라 달리 붙 여진 명사를 개별적으로 인식하여 그것이 실재인 양 집착했기 때문에 모든 그 릇들이 황금의 동질성으로 평등하지 않게 되었다.
가령 차별성의 세계마다 전체의 마음으로 지어지는 것이 마치 그릇마다 황금 으로 이루어지듯 했음을 알았다면, 명칭과 그에 수반하는 차별적인 모습들, 즉 현실의 이질성이 본질의 동질성을 차별적인 모습이 되도록 간여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질성에 따른 주관적인 언어명자(言語名字)의 분별시비가 어떻게 그 근본마저 미혹할 수 있으랴. 또 둥근 그릇과 모난 그릇에 붙여진 이름이 동일 하지 않고 광석에 섞여 있는 금과, 잡철을 제거한 순금을 언어적으로 설명하는 데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근원 자체를 추구해 본다면 그 동질성인 일심진여에선 현상 모든 세계의 차별적인 명사와 그에 따른 분별이 공적하다. 따라서 그 근본이념을 체득하고 상호관계성인 차별성으로 일어난 인연의 모습 에서 그들을 실재라고 잘못 집착하는 허망한 마음을 잊는다면, 부딪치는 길마다 명사에 따른 차별심이 의탁할 수 없으리라. 명칭은 자체를 의지하여 성립하고, 그 자체는 붙여진 명칭을 따라서 나온다. 평등성 자체에서 차별상이 공적하다면 차별적인 명칭은 따로 시행할 곳이 없고, 차별상에 따른 명칭이 임시적인 허구라면 자체가 일어났다 해도 실제로 일어날 바가 없다. 이처럼 명칭과 자체가 서로서로 공적하여 유일한 진여일심일 뿐, 그러한 경지엔 다시 따로 차별상이 실제로 존재함이란 없다 범부를 의지해서 성인의 명칭이 성립한다 범부라는 명칭을 의지해서 그 상대적인 임시의 언어적 개념으로 성인이라는 명칭이 성립하므로, 성인의 경지엔 성인이란 언어적 명칭이 본래 없으며, 속제를 따라서 그에 상대하는 개념으로 진제라는 명칭이 나타나므로, 진제의 경지엔 진제라는 명칭이 원래 성립하지 않는다.
이 모두는 세속의 차별적인 명자를 의지하여 상대적인 의존관계에서 나온다. 세속의 문자는 본래 공적하며 문자가 공적하다면 차별성인 문자에 대한 상대의 개념으로 나타난 공적이라는 명칭 또는 의탁할 곳이 없다.
가령 중생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상근기의 보살이라면 어찌 언어적 설명에 불과한 명칭의 모습을 빌려서 그 실제적 의미를 발현하랴.
그는 눈앞의 세계를 마주 대할 때마다 그 세계의 근본이념[宗]을 알므로 생멸하는 인연의 세계를 만나는 대로 마음마음이 일심중도(一心中道)와 하나의 모습으로 일치 한다. 생멸의 변화는 근본으로 귀의한다
옛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생멸로 변화하는 모든 세계는 그 근본으로 귀의하지 않음이 없다. 근본으로 여기고 귀의하는 곳은 차별상의 세계가 끊긴 무상(無相)이며, 그 차별상이 텅 빈 무상에선 차별상마다 하나의 모습으로 일치하지 않음이 없다.〉 따라서 하나의 모습으로 일치한 경지는 대상을 분별하는 망상이 끊긴 무심(無心)이다.
안으로의 무심과 밖으로의 무상이 아울러 고요하며, 분별반연할 대상의 세계와 그 주관적인 분별의 지혜가 함께 고요하다. 가령 이와 같이 무상과 무심이 하나의 경지로 일치한 열반의 도를 체득할 수 있다면 모든 상황의 변화에서 하나의 모습으로 서로 호응할 수 있으리라.
동산화상(洞山和尙)이 이 문제를 두고 게송으로 노래하였다. 나의 본 주소 어느 방향에 있을까 사람이 오를 수 없는 험한 길에 오르니 이르는 곳마다 고향이라네 그대 만일 출가하여 불자가 되었다면 이 길을 갈 수 있어야만 모든 변화와 일치할 수 있으리 吾家本住在何方
烏道無人到處鄕
君若出家爲釋子
能行此路萬相當 근본이념의 문호는 형용이 불가능하다
완전하게 두루 보편한 근본이념으로 출입하는 문호는 허망한 감정의 견해를 초월 하였으므로, 그러한 경지는 세간적인 비유로는 형용이 가능하지 않다. 하물며 완전하고 한결같은 거대한 바다가 파도 가운데 있다고 해도 바다가 파도를 따라서 작아지지 않았으며, 작은 파도가 거대한 바다 전체를 두르고 있다 해도 파도가 바다를 따라서 커지지 않았다.
거대한 바다가 동시에 모든 파도에 완전하게 보편하다 해도 원래의 바다 모습에선 차이가 나지 않으며, 작은 파도들이 같은 시간에 각자 거대한 바다를 두루 에워싼다고 해도 그들 파도는 하나의 모습이 아니다. 또 거대한 바다가 한 파도에 완전하게 보편할 때 전체의 바다가 모든 파도에 완전하게 보편하면서도 파도마다 서로 방해되지 않으며, 하나의 파도가 거대한 바다를 완전하게 두루 에워쌀 때도 모든 파도 역시 각자마다 완전하게 바다에 두루하여 서로가 서로를 장애하지 않는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라.
날으는 새의 흔적 허공에서 찾지 못하듯이
가령 허공에서 새가 날 땐 그 새가 의지하고 날았던 자취를 구하지 못한다. 자취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자취는 찾을수록 더욱 광대해지기만 한다. 요컨대 새가 날아간 방향을 의지해서 그 자취의 깊고 광대함을 설명해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할 점은 깨달음의 경지[佛地]는 요컨대 마음에서 나타난 차별상 을 의지하여 심오하고 광대한 깨달음의 경지를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에 증오해 들어갈 땐 번뇌가 고요히 사라진 그 세계 를 상대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여기고 주관적인 집착심으로 안주해선 안된다.
모든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에도 이런 식으로 안주해선 안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고요한 경지에서 집착심으로 안주하지 말고, 가르침에 따른 이익과 그 희열을 제시하여 부처님의 방편을 배우고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도록 해야만 한다. 부처님의 지혜란 바로 모든 존재하는 세계의 종류를 아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이다. 그 때문에 반야경(般若經)에선〈일체종지를 깨달음인 부처로 삼으면 만법의 종류 마다 모르는 것이 없으며, 그들 종자마다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야말로 망상의 분별로 앎이 없는 무지(無知)의 경지에서 일체의 세계를 아는 진실한 앎[眞如]이며, 주관적인 견해가 없이 일체를 보는 진실한 견해[眞見]인 것이다. 깨달음의 길과 현실적 행사 이 모두는 마음으로 성립한다 세간의 생사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길이란 그 이치가 마음을 따라서 성립되고, 세상에 거처하는 문인 그 현실적 행사도 마음으로부터 조성된다.
만일 마음뿐인 세간의 행사라면 하나의 존재가 일체의 존재에 하나의 모습으로 상즉하므로, 그 하나인 이치를 펴면 가이없는 현실적 행사가 되며, 가령 행사마다 마음뿐인 이치라면 일체의 세계가 하나의 세계에 상즉하여 일체를 둘둘 말아들여 그 차별적인 흔적이 없게 된다.
하나의 모습으로 말아들인 측면에서 굳이 그것을 하나의 모습이라고 설명하긴 하나 그 하나에서 차별적인 세계의 모습이 일어나므로 이 세계는 아직까지 하나가 아니며, 하나가 전체의 모습으로 펴지는 것으로 인해서 많은 세계라고 설명하나 이 하나의 세계는 그들 차별적인 세계를 따라서 아직까지 많아지지도 않았다 하나의 모습으로 실재함도 아니고 많은 모습으로 실재함도 아니어서[非一非多] 어느 한 쪽만의 실재가 아니므로 그것은 있다 해도 정말로 있지 않으며, 많은 모습 이면서도 하나이므로[多而一] 그것은 없다해도 실제로 없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一]와 많음[多]이 의존관계에서 서로서로가 근본인 하나의 이치가 되기도 하고, 지말인 차별상의 세계가 되기도 한다. 생사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길이란
세간의 생사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길이란 그 이치가 마음을 따라서 성립되고, 세상에 거처하는 문인 그 현실적 행사도 마음으로부터 조성된다.
만일 마음뿐인 세간의 행사라면 하나의 존재가 일체의 존재에 하나의 모습으로 상즉하므로, 그 하나인 이치를 펴면 가이없는 현실적 행사가 되며, 가령 행사마다 마음뿐인 이치라면 일체의 세계가 하나의 세계에 상즉하여 일체를 둘둘 말아들여 그 차별적인 흔적이 없게 된다.
하나의 모습으로 말아들인 측면에서 굳이 그것을 하나의 모습이라고 설명하긴 하 나 그 하나에서 차별적인 세계의 모습이 일어나므로 이 세계는 아직까지 하나가 아니며, 하나가 전체의 모습으로 펴지는 것으로 인해서 많은 세계라고 설명하나 이 하나의 세계는 그들 차별적인 세계를 따라서 아직까지 많아지지도 않았다.
하나의 모습으로 실재함도 아니고 많은 모습으로 실재함도 아니어서[非一非多] 어느 한 쪽만의 실재가 아니므로 그것은 있다 해도 정말로 있지 않으며, 많은 모습 이면서도 하나이므로[多而一] 그것은 없다해도 실제로 없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一]와 많음[多]이 의존관계에서 서로서로가 근본인 하나의 이치가 되기도 하고, 지말인 차별상의 세계가 되기도 한다. 중생들의 마음은 보배같이 빛을 발한다
일체의 신령한 정신을 머금고 있는 중생들의 마음은 마치 보배처럼 밝게 빛나면서 그 마음의 이치는 시간적인 전후가 없고, 그 밝음과 어두움은 공간적인 상황의 기미를 따라 알맞게 적응한다.
그 마음의 보배는 혹은 투쟁하는 것으로 인해서 피부 가운데 어둡게 숨어 있다가 밝은 거울을 마주하면 환하게 나타나고, 혹은 헤엄치는 것으로 인해 물 밑에 잠겨 있으면서 편안하고 느슨하게 그것을 얻기도 하며,
혹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상투 가운데 거처하면서 커다란 공로를 세우고 그에 따른 포상을 받기도 하고, 혹은 가난한 사람의 옷에 싸여 분명한 지혜를 원하는 상태에서 간직되기도 하는데, 거울과 같은 근본이념[宗鏡]의 분명한 문장을 이러한 상황에서 함께 증명한다.
이와같이 확신하는 자라면 수행의 여지가 남음이 없는 구경(究竟)에서 그 즉시 일념(一念)으로 일체세계의 실제 모습을 안다.
설사 이러한 이치에 대해 의심을 품고 물러나는 자가 비록 그것을 확신하여 받아 들이지 않는다 해도 그가 지닌 깨달음을 이루는 진여의 이치[成佛之理]는 조금도 이지러지지 않았다.
이를 비유해 본다면 어떤 사람이 진실한 황금인데도 그것을 감식하지 못하고 구리나 무쇠로 잘못 인식하는 것과 같다. 구리와 무쇠는 단지 그의 잘못된 인식에 따른 허구적인 명칭만 있을 뿐, 황금의 자성은 그 오해를 따라서 아직까지 잠시도 변하지 않았다.
이처럼 요즈음에도 자기의 주관적인 잘못된 견해를 고집하는 자는 마음의 근본 이치만은 옳다는 것을 모르고 도리어〈지금은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말들을 하나, 이도 역시 과거에 실제했던 미혹이 지금에야 비로소 깨달음이 된 것은 아 니다. 사변적인 지식으로는 반야를 추궁하지 못한다
무릇 한계 있는 인식의 분별로 대상의 경지를 아는 것은 상대방을 따라서 외부에서 배운 것인데, 이러한 분별적인 앎으로 바다처럼 광대한 반야를 끝까지 추궁하고 싶어하나 그 근원을 얻을 수가 없다.
이를 비유해 보면 마치 항하(恒河)강 가운데 한 되의 소금을 부은들 그 많은 물이 짤 리가 없으므로 그 물을 마시는 자가 짠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가령 안에서 관조(觀照)의 지혜가 밖으로 밝게 발현하여 모든 존재하는 모습들의 이치를 철저하게 사무친다면, 진여에서 평등한 사물마다의 이치를 관조하지 않음이 없으며, 관조한 진여의 이치로 현상의 사물마다 한 묶음으로 해괄하지 않음이 없다.
이 문제를 두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망념이 없는 세계[無念法] 가운데 안주하면서 진리의 표상으로 나타난 이 같은 황금색신(黃金色身)을 얻고 이 몸에 갖춘 서른두 가지 상호[三十二相]에서 커다란 지혜의 광명을 놓아 세계의 실제 모습을 남김없이 밝게 관조한다〉라고 하셨던 것이다. 범부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신통을 갖추지 못하는가
질문해 보자.
〈번뇌에 속박되어 있는 범부[縛地凡夫]도 그 마음의 지위가 모든 부처님과 일제히 가지런하다면 무엇 때문에 모든 부처님들처럼 신통의 작용을 갖추지 못하는가?〉
그 질문에 답변해 주리라.
범부라 해서 신통의 작용을 갖추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중생들이 그 작용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화엄종(華嚴宗)에선 이 문제를 두고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은 중생의 본체, 즉 본래 아는 본각(本覺)을 증득하여 중생의 작용으로, 즉 중생의 의식적인 느낌이 부딪쳐오는 대로 그 상황에 따르면서 알맞게 작용한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학인(學人)이 대안화상(大安和尙)에게 묻기를 〈무엇을 모든 부처님의 신통이라고 합니까?〉라고 하자, 대사는 말하였다.
〈너는 어느 곳에서 왔느냐?〉
〈강서(江西) 지방에서 왔습니다.〉
〈나를 속이는 말은 아니겠지.〉
〈끝내 잘못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학인이〈무엇을 신통이라고 합니까?〉라고 거듭 질문하자, 대사는 말하였다.
〈과연 그대가 허망한 말을 했다는 것을 여기에서 증험할 수 있군. 그대는 신통이 눈앞에 나타나서 매일같이 작용하는데도 모르다니…….〉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 속에 있는 진여 본체[體]와 그 자체가 지닌 공덕상[相]과 그 현실적인 응용[用]인 이 세 의미를 갖춘 일심삼대(一心三大)의 종자를 가지고,
진여 자체의 위대성[體大]으로 진여법신(眞如法身)을, 그것이 지닌 공덕의 위대성 [相大]으로 원만보신(圓滿報身)을, 그 현실적인 응용의 위대성[用大]으로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인 이들 삼신의 불과(三神佛果)를 만든다.
이치가 이러한데 어떻게 다시 신통을, 부처는 갖추었는데 중생은 갖추지 않았다고 말하겠는가. 마음이 고요하면 진여자성을 보리라
백장광어(百丈廣語)에서는 말하기를 〈마음은 사물에서 부딪쳐오는 느낌을 따라서 그에 알맞은 형태로, 모든 육취(六趣〓六道)의 세계로 변화하여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분별망념에서 일어나는 아(我)와 아소(我所)를 떠났다.
그런데도 소소한 중생의 작용에 소속해 있는 이것이 깨달음의 일을 행사하는 문 [佛事門〓敎化]에서 위대한 작용으로 수습된다.
위대한 진여법신[大身]은 구체적으로 이것만이라고 그 형상을 지적할 수 없는 데에 숨어 있고, 위대한 진여에서 유출하는 음성[大音]은 무어라고 지적할 수 없는 희이 (希夷)한 경지에 은닉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방거사(龐居士)는 이 문제를 시로 노래하기를,
많은 세상 사람들은 황금을 소중히 여기나 나만은 한 찰나의 고요함을 사랑한다오 황금이 많으면 사람의 마음을 혼란시키지만 찰나의 고요함에선 진여의 자성을 본다네 마음의 이치에 통하면 그 그림자인 모든 세계의 이치까지 통하여 중생계인 십팔계로 진행하는 망념의 자취 끊기리 단지 자기의 마음에 걸림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신령하게 통하지 못할까 근심하랴
世人多重金 我愛刹那靜 金多亂人心 靜見眞如性 心通法亦通 十八斷行종 但白心無碍 何愁神不通
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모두는 진여성이 현실로 작용하는 편에서 마음의 신통을 설명한 것이다.
혹자는 〈중생은 깨달음의 이치만을 갖추었고[衆生理具], 모든 부처님은 그 경지를 현실의 행사에서 완전하게 구현하였다[諸佛事圓]〉라고 말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중생은 깨달음의 종자인 본각에 있고[衆生在因], 모든 부처님은 그 본각을 수행을 통한 깨달음으로써 결실을 증명했다[諸佛證果]〉라고 말하는데, 이들 말은 현실적인 행사까지 겸한 것이다. 종경록(宗鏡錄) 종(終) [출처] 종경록(宗鏡錄) 영명연수(永明延壽) 찬(撰)|작성자 풀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