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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화) '계엄의 밤' 특전사 707 움직임… 김현태 대령 증언
지난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 당시 국회에 진입한 특전사 부대를 지휘한 김현태 제707특수임무단 단장(대령)이 기자회견을 열고 혼란스러웠던 당일의 상황을 상세히 증언했다. 김현태 단장은 특히 김용현 전 국방장관이 계엄 선포 후 국회 본회의장에 150명이 넘는 국회의원이 모이지 않도록 통제하거나, 의원들을 '끌어내라'라고 지시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김현태 단장에 따르면 707특임단은 12월 3일 오후 곽종근 특수전사령관으로부터 특수작전 항공단 UH-60 12대가 전개하면 탑승을 해보라는 지시를 받고 헬기별 8명씩 96명으로 편성해 테이저건과 공포탄, 방패 등 비살상무기를 휴대해 출동하는 훈련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김현태 단장은 당일 비상소집 훈련을 실시하겠다는 예령을 걸고 19시 50분쯤 비상소집 훈련을 실시했다.
김현태 단장에 따르면 21시쯤 자체 소집훈련이 완료됐고 지휘통제실에서 40여 분간 사후검토를 실시해 전개훈련을 펼치려 했으나 사령관으로부터 헬기를 대기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다 22시(취침시간)가 넘어 훈련이 제한될 것 같다는 판단에 안전통제 목적으로 사전에 전개한 부대원들의 복귀를 지시했고 퇴근 준비를 하는 와중에 TV뉴스로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와 비상계엄 선포를 확인하게 됐다.
707특임단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발표 약 9분 뒤인 22시 31분쯤 곽종근 사령관의 출동지시를 받았다. 당초 계엄 상황에 출동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해 크게 당황했지만, 김현태 단장은 "나와 부대원들 모두 계엄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출동 지시를 거부한다는 판단을 내릴 경황이 없었다"라고 토로했다. 곽종근 사령관은 △국회의사당으로 출동 △건물 봉쇄 △무기사용 금지라는 명령을 내렸고, 김현태 단장은 건물 출입문만 잠그자는 생각으로 국회로 출동한다.
이륙 직전인 22시 43분, 김현태 단장은 티맵을 켜 국회 일대 지도를 확인한 뒤 건물 차단 구역을 각 부대원에 부여하고, 23시 22분 헬기를 타고 국회로 향했다. 23시 49분쯤 김현태 단장이 탑승한 1번 헬기가 국회 운동장에 도착했다. 김현태 단장은 "속보로 건물(본청)로 이동하며 문만 잠그고 문 앞을 지키자고 생각했는데 막상 본청에 도착하니 거센 저항에 직면했고, 출입문도 유리로 돼 있어 차단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때부터 상황은 빠르게 혼란스러워졌다. 군 병력의 국회 진입 시도에 거친 몸싸움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곽종근 사령관은 4일 0시 30분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내린 "국회의원이 150명이 안 되도록 막아라"라는 지시를 김현태 단장에게 하달했다. 150명은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안을 표결에 부칠 수 있는 최소 숫자로, 김용현 전 장관이 국회를 무력화해 계엄 해제를 막을 의지가 분명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현태 단장은 곽종근 사령관이 "국회의원이 모이고 있다는데 150명을 넘으면 안 된다. 막아라. 안 되면 들어가서 끌어낼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에 김현태 단장은 "전혀 안 될 것 같다"라고 답했고 곽종근 사령관은 국회 본청과 의원회관을 봉쇄하라는 지시와 함께 "무리하지 말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707특임단 일부 인원이 창문을 깨고 국회 본청 안으로 진입했다.
김현태 단장은 15명의 부대원과 창문을 통해 국회에 진입했지만 국회 본청을 '사수'하려는 국회의원 보좌관 등과 물리적 마찰이 있었다. 국회 사수 인원들이 소화기를 뿌린 장면이 이때 나온 것이다. 김현태 단장은 '건물 확보는 어렵다'라고 판단해 곽종근 사령관에 이를 보고했다. 그러다 12월 4일 새벽 1시 1분께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김현태 단장은 사령관에게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사실을 보고한 뒤 1시 8분쯤 철수를 지시했다. 707특임단은 국회 외부 주차장에 집결해 대기하다 버스가 도착한 새벽 2시 38분쯤 국회 일대를 떠나 새벽 4시 19분 주둔지로 복귀했다는 게 김현태 단장의 설명이다. 아래는 김현태 단장의 증언으로 재구성한 707특임단의 '계엄의 밤' 행적이다.
12월 3일
▷19시 30분 비상소집 훈련, 50분에 실시 ▷21시 자체 소집훈련 완료 ▷22시쯤 소집 해제 ▷22시 23분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및 비상계엄 선포 ▷22시 31분 곽종근 특수전사령관의 국회 출동지시 ▷23시 49분 김현태 단장 및 707특임단, 헬기로 국회 도착
12월 4일
▷0시 30분 "국회의원 150명 안 되게 막아라" 지시 하달 ▷1시 1분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 가결 ▷1시 8분 707특임단 철수 지시 ▷1시 44분 707특임단 국회 외곽 주차장 집결 ▷2시 38분 707특임단 주둔지로 출발 ▷4시 19분 707특임단 주둔지 복귀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당시 국회에 진입했던 특전사 707 특수임무단 김현태 단장이 상부로부터 계엄을 해제시킬 수 있는 국회의원 정족수인 150명이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12월 9일 서울 용산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김현태 707 특임단장(대령)은 체포하거나 구금하라는 정치인 명단을 받은 것이 있냐는 질문에 "정치인 관련해서는 일체 없었고 저에게 (작전) 중간에 말한 뉘앙스는 '국회의원들 모이고 있단다, 150명 넘으면 안된단다 막아라'라는 것"이었다며 "안되면 들어가서 끌어낼 수 있겠냐고 물었는데 제가 진입이 안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현태 단장은 곽종근 특전사령관이 해당 지시를 내렸으나 "김용현 전 장관이 지시한 것을 사령관이 그대로 지시한 것"이라며 "제가 중간 지휘관으로 사령관과 소통하면서 현장 상황 보고했고 사령관은 현장 지휘관 의견 받아서 무리한 행동 하지 말고 국민과 부대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김현태 단장은 "사령관도 지휘통제실에서 전화를 통해 받은 지시를 1차적으로 뱉어내는 것 같았다"며 "사령관이 지시를 했겠지만 그 내용들이 현장에 있는 저나 다른 지휘관들에게 전달됐고, 현장(의 어려운) 상황을 사령관에게 다시 전달했을 때 사령관은 하지 말라고 정정 지시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150명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지시는 언제 받았냐는 질문에 "저도 정문에서 (국회 관계자들과) 몸싸움 중이었는데, (12월 3일 오후) 11시 40분 넘어서 헬기가 (국회 운동장에) 내린 것 같고 12시 다 되어 후문에 도착했다. 이후 12시 반 어간까지 몸싸움을 벌었는데 12시에서 12시 반 사이였던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국회를 처음 가보는 곳이라 (네비게이션 어플리케이션인) 티맵(T map)으로 미리 구조를 봤다. 안에서 길을 헤매고 있는데 지하 1층에서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이 (본회의장 쪽으로) 오고 있었지만 저희 부대원들에게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았고 길을 비켜드렸다"며 "제가 받은 최초 임무는 봉쇄였다"고 말했다.
이같은 지시가 나온 배경은 무엇으로 보냐는 질문에 김현태 단장은 "(계엄 해제 결의안) 가결을 우려했던 것 같다. 그래서 국회의원 150명 넘으면 안된다는 것"이라며 "제가 만약에 본회의장까지 들어갔다면 끌어내라는 지시가 있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 단계가 가기 전에 상황이 종료됐다"고 밝혔다. 그는 "제가 아는 범위에서 사령관과 이하 모든 사람들은 김용현 장관에게 이용당한 것"이라며 "어느 정도 먼저 조짐에 대한 정보를 받았을지언정 모두가 계엄선포는 생각도 못했고 상상도 못했다. 계엄이라는 말이 떨어진 순간 저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시키는 것 빨리 해야겠다고 생각해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김현태 단장은 "계엄을 TV로 보고 난 직후에 사령관으로부터 전화 받아 국회 출동하라고 했을 때 계엄 상황에서도 국회의원의 활동은 보장돼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며 "현장에서 (군인 출입을) 제지하려는 사람들에게 계엄사령부의 지시를 받고 왔고 계엄사령부에 항의하라고 말했다. 그 상황에서도 국회 활동이 보장된다는 법을 몰랐는데 이 역시 제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이나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은 적은 없었다면서, 계엄 당시 의원 체포조가 북파공작원(HID) 부대였다는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의 주장에 대해서는 "정보사령부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진입한 것은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답했다. 김현태 단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계엄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알지 못했고 특전사령관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현태 단장의 진술을 살펴보면 특전사령관도 최소한 당일에는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현태 단장은 "(곽종근 특전) 사령관도 (계엄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 같은데 (김용현) 전 장관이 계속 이야기한 것 같았다. 준비하라고"라며 "저는 국정원이나 다른 정보 가지고 말하는 줄 알았는데 당일은 뭔가 가능성이 높은 식으로 말을 하면서 나도 아무 일 없으면 좋겠다, 그런데 TV 보라고 하고 심각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래서 저녁 식사 이후 계속 TV를 모니터링했다"고 말했다.
그는 곽종근 사령관이 그 이야기를 언제 했냐는 질문에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해서 저랑 부대회관에서 참모 몇 명과 같이 먹었다. (오후) 6시 정도에 시작해서 40분 정도 밥 먹고 헤어졌다"며 "제가 (오늘) 비상소집하겠다고 보고드리긴 했다. 전날부터 훈련 계획 수립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현태 단장은 "훈련 내용은 사령관이 많이 강조하고 있던 것이고 특수전단항공단도 비행기를 준비하고 있었고 아무 일도 없으면 집에 가면 된다고 해서 세부계획 수립했고 헬기 내리려면 안전요원 필요해서 배치한 상태였다"며 "제가 오후 7시 50분에 비상을 걸었고 8시 50분에 군장검사 완료해서 9시에 지휘통제실에 모여 사후 강평했다"고 당일 저녁 행적을 전했다.
그는 "(오후) 10시가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없고 TV에 나오는 것도 없어서 저도 부대원들에게 퇴근 준비를 지시하고 사무실로 이동하는데 지휘통제실 인원들이 TV에서 뭔가 발표한다고 해서 같이 보고 이후 사령관 전화 받았다"고 말했다. 비상계엄 당일 훈련을 한 이유에 대해 그는 "사령관이 강조했었고 시간이 갈수록 강조하는 강도가 높아졌다"며 "2~3일 전에는 도대체 무슨 정보를 가지고 이런 말을 하실까, 아무것도 없는데. 저도 국무총리실에서 대테러 근무 3년 하기도 해서 사령관만큼 정보 루트는 있는데, 내가 아는 루트로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강조할까 싶은 (생각은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사령관은 저와 연초부터 서울 지역 동시다발 테러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경찰 능력이 초과되어 대테러 특공대 요청했을 때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었고 올해 처음으로 4-5월 노들섬에 헬기 전개 훈련도 했다"며 "최근에는 그와 유사한 내용으로 풍선 도발 등 여러 이유로 북한의 도발이 있을 거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김현태 단장은 "당일은 이와 관련된 훈련을 하자고 했다. 저희 내부적으로 판단한 것은 설사 북한에 의한 도발일지라도 국방부 대테러 훈련 상에 민간인 대상으로 군의 총기 사용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서 당시 훈련 내용은 비살상무기를 사용한 무력진압 작전이었다"며 "그래서 낮에 이미 부대원들은 훈련 관련된 군장검사를 마쳤고 휴대하는 무기는 개인별 테이저건 하나와 공포탄 휴대였다. 장착은 아니었고, 필요한 방패라든지 케이블 타이 등도 잘 챙기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었다"고 진술했다.
김현태 단장은 오늘 기자회견을 연 이유에 대해 "지난주 금요일(12월 6일)에 (국회) 국방위원회 출석 차 (특전)사령관, 3여단장과 같이 이동 중이었는데 국방부에서 취소됐다고 이동하지 말라고 했다"며 원래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본인이 아는 바를 진술할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12월 7일) 탄핵 투표에서 국민이 생각한 것처럼 투표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부결된 순간 국방위도 안열리겠구나, 국방위에 가서 말씀드릴 기회가 없을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며 기자회견이 아니면 본인의 입장을 이야기할 창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나왔다고 말했다.
비상계엄 전후로 김용현 전 장관에게 사과 등의 입장을 전달받은 바 있냐는 질문에 김현태 단장은 "없다. 그런거 받고 싶지도 않다"며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국회의사당으로 출동하라고, 정문 봉쇄하라고, 후문과 정문에서 몸싸움을 하라고, 창문 깨고 건물안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한 것은 저"라며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 부대원들은 이용당한 피해자다. 절대 707 부대와 부대원들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군 통수권 누가 행사?"… 대답 못한 한동훈
"누가 군 통수권을 대리 행사하느냐"는 질문에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대답하지 못했다. 12월 8일 오후 한동훈 대표는 서울 영등포구 당사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군 통수권 직무에서 배제된 것인가"라는 질문에 "외교를 포함해 (직무 배제된 것)"라고 답변했다. 이날 오전 한동훈 대표는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대국민 공동 담화에서 "대통령 퇴진 전까지 국무총리가 당과 긴밀히 협의해 민생과 국정을 차질 없이 챙길 것"이라며 "퇴진 전이라도 대통령은 외교를 포함한 국정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군 통수권도 정지됐음을 이날 오후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군 통수권을 누가 대리 행사하는지에 대해선 답변하지 않았다. 관련 질문에 한동훈 대표는 "(취재진과의 질의응답을) 여기까지 하겠다"면서 즉답을 회피했다.
◆ '탄핵'보다 '조기 퇴진'이 더 낫다는 한동훈
이날 한동훈 대표는 '탄핵'보다 '조기 퇴진'이 더 나은 방안이라 주장했다. 그는 "(비상계엄 선포가) 대통령이 조기 퇴진하고, (대통령의) 직무 집행을 정지해야 할 심각한 사안이란 점에는 국민이 모두 동의한다"며 "그 방법 중 하나가 탄핵"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제가 조기 퇴진을 말씀드리는 건 그것이 국민과 대한민국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며 "탄핵의 경우는 실제 (국회에서) 가결되더라도,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결정이 나올지 불확실성이 상당 기간 진행된다. 시기를 정하는 조기 퇴진과 그 이전 단계에서의 직무 배제는 분명한 예측 가능성을 드릴 수 있다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국무총리와 여당 대표가 대통령 대신 국정을 운영하는 것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지적에는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태 예시를 들며 반박했다. 한동훈 대표는 "총리와 함께 운영하겠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며 "총리가 국정 운영을 직접 챙기는 것이고, 비상 시국에 당이 조금 더 적극적이고, 세심하게 총리와 협의하겠다는 의미다. 당 대표가 국정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각에선 그런 게 잘못된 것인양 말씀하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상황에서 우원식 당시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들은 '대통령이 국정에 손 떼고 총리에게 전권을 맡겨라'라고 말씀했다"고 했다.
◆ 윤석열 탄핵 표결 불참 시사
이어 "그때 그 취지, 그 솔루션을 저도 말씀드리는 것"이라며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시 민주당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이 수용했기 때문에 그 조치를 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공직자의 사퇴 수리에 대한 권한은 행사할 수 있다고도 했다. 한동훈 대표는 "임명한 것에 대한 취지가 아니라, 사퇴한 것에 대한 것이지 않나. (이를) 적극적 직무 행사라 보기 어렵지 않겠나"라며 "앞으로 사퇴하는 일들은 있을 것 아닌가. 사퇴의 경우 수동적으로 처리하는 일은 있을 수 있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실질적인 퇴진 시기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한동훈 대표는 "그런 부분에 대해 저희가 오늘도, 내일도 여러 의견을 들어보려 한다"고 했다. 야권이 다음 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재발의하면 또다시 표결에 불참할 것인지 묻는 말에는 "첫 번째 드린 답변으로 갈음하겠다"고 했다. '탄핵'보다 '조기 퇴진'이 더 나으므로, 탄핵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해남 땅끝마을… 삼한시대 국제 무역항이었다?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무역은 경제 성장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의 무역은 과연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우리나라 삼한시대(삼국시대 이전 마한·진한·변한)에 대한 기록은 너무 적어서 중국 역사책에서 언급된 기록을 포함한다 해도 귀하다. 그래서 이 시대 유적은 역사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더 귀하고 의미심장한 자료이기도 하다.
해남군곡리패총(전남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 언뜻 선사시대 생활 유적을 연상시키는 이름이지만, 사실 격동적인 고대사의 현장이다.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로 정립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극히 드문 유적이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은 해남 바닷가에 자리 잡은 이 유적이 ‘삼한시대 국제 무역항’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아울러 마한(한반도 중서부 연맹체)의 마지막 세력이었던 신미국(新彌國)이 이 지역에 자리 잡고 백제에 끝까지 저항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여러 차례의 발굴에서 우리 고대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출토됐고, 최근 국가유산청의 9차 발굴 조사에서는 ‘배 모양 토기’가 발견됐는데, 이곳이 국제항이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로 해석돼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이곳 해남이 단순히 ‘땅끝’이 아니라, 또 다른 땅을 연결하는 바다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고대사 유적이다.
◆ 땅끝마을의 언덕에서
해남군곡리패총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다. 목포에서 오는 길은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 풍경에 남도의 정취가 한껏 느껴진다. 반면, 강진에서 내려오는 길은 미황사를 품은 달마산을 거치는데, 산세가 별천지다. 이후 만나는 방처마을의 남쪽, 해발 334m 가공산의 서쪽 자락에 해당하는 둥그스름한 구릉성 산지가 바로 유적이다. 조개 부스러기가 하얗게 흩어져 있는 입구를 지나 능선의 등성이로 올라서면 평평한 농경지 너머로 아련히 백포만의 바다가 보인다. 경지 정리 전에는 바닷물이 유적 부근까지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쥐 죽은 듯 조용하지만, 당시에는 시끌벅적한 파시(波市)가 서는 항구도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곳에 고대 도시가 형성됐던 것일까?
◆ 야산 위 흩어진 조개껍데기, 타임캡슐의 손잡이
40여 년 전 이곳은 마늘밭으로 뒤덮인 구릉이었다. 눈썰미가 남달랐던 향토 사학자 황도훈씨가 1983년 조개껍데기와 불 자국이 있는 토기편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을 보고는 ‘아, 여기도 창원 성산패총 유적(경남 창원시 성산구)과 똑같은 유적 아닐까?’라며 언론에 알렸다. 이후 목포대학교의 최성락 교수가 현장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발견된 조개껍데기들은 당시 사람들의 바다 먹거리와 바닷가 생활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하지만 이 조개껍데기들은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땅속에 묻힌 더 의미심장한 유물과 유적, 즉 고대 타임캡슐을 꺼낼 수 있도록 땅 위에 삐죽 튀어나온 뚜껑 손잡이 역할을 한 것이었다.
◆ 군곡리 패총, 고고학의 반전?
1986년에 최초 발굴이 시작돼 올해까지 9차례 진행됐고, 2003년엔 국가사적(제449호)으로 지정됐다. 처음엔 패총(貝塚), 즉 고대인들이 조개를 먹고 버린 ‘쓰레기장 유적’ 정도로 생각됐지만, 그 속에 감춰진 유적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기원전 4~3세기 초기 철기시대에서 5세기경 백제시대에 걸치는 사회문화변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고대사 교과서 같은 유적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평평한 능선 정상부근에서 대형 주거지와 고인돌,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의례가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물(말뼈 등)이 발견됐다.
특히 촘촘하게 중복 배치된 주거지와 특별한 장례법을 보여주는 돌무덤은 상당히 의미 있는 유적이다. 또 청동거울 파편, 시기가 늦은 층에서 출토된 복골(卜骨·점을 치는 데 쓰던 뼈 도구), 그리고 제작할 때 고도의 불 기술이 필요한 유리 구슬과 쇳물 슬러지 등도 발굴됐다. 마을의 핵심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방어용 환호(環濠)도 드러났고, 토기를 굽는 가마도 발굴됐다. 여기에 쓰레기장(패총)이 별도로 조성됐으니, 그야말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도시가 성장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올해 9차 발굴에서는 부뚜막 모양 토기와 배 모양의 토기가 함께 출토돼 고고학자들을 들뜨게 했다.
◆ 동아시아 물류 흐름의 거점
통일신라시대 왜승 엔닌(圓仁·794~864)이 일본으로 갈 때 흑산도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고, 또 장보고의 도움으로 장도에서 신라 배로 갈아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여정은 700~ 800년 전에도 비슷했을 것이다. 실제로 군곡리유적에서 중국 고대 왕망이 세운 신나라(新·8~23년) 화폐인 화천(貨泉·돈이 샘솟는다는 뜻)이 발견됐다. 이 화천은 고대 평양 부근의 낙랑 유적을 비롯해 김해회현리패총(봉황동 유적), 제주도 신지항, 그리고 멀리 일본 규슈 지역 바닷가 유적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연안 해로를 이용한 서남 해안 지역 교역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미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교역로가 한반도의 서남 해안을 따라서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각 지역 유적에서 발견되는 중국계·왜(倭)계 유물들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군곡리패총 앞 백포만은 서해에서 남해안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또 조석 간만의 차가 매우 큰 진도 명량해협을 지나기 위해서는 물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 꼭 경유해야 하는 항구가 바로 군곡리였다고 보는 것이다. 어쩌면 ‘군곡리 항’은 신라시대 서해를 제패했던 청해진의 전신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군곡리는 장보고의 장도 청해진이 위치해 있었던 완도와 바로 이웃해 있다.
◆ 해남의 마한인들, 어디서 왔나?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약 300년 동안은 아마도 한국동란을 제외한다면 한반도 역사상 가장 격동의 시간일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초 고조선이 망하고 위만조선이 한반도 서북 지역에 들어섰다. 이후 100년이 채 되지 않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 서북지역 주민들이 대거 남쪽으로 이동하게 됐다. 이런 충격 속에서 마진변(馬辰弁) 삼한 지역에 철기 등 북쪽의 새로운 문화가 전해지고 새로운 정치집단이 등장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라, 가야, 백제 등 고대국가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군곡리 유적이 시작된 시점이 이 격동의 시간과 겹친다는 점은 군곡리 사람들의 출현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부여 송국리 유적(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에서 출토된 요녕식 동검(비파형 동검)에서 보듯이 일찍이 오늘날 충남지역으로 이주한 고조선의 준왕 세력이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을 더욱 남쪽으로 밀어냈고, 훗날 무너진 위만조선의 이주민들도 바다를 통해 해남 강진 일대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언급된다. 결국 신미(新彌)국은 해남 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북방 이주민이 지역민과 함께 세운 나라인 것이다. 중국 진서(晉書) 사신 기록에서도 보이듯 신미국은 목지국이 백제에 의해 해체된 이후 4세기 중엽까지 가장 강력한 마한의 맹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신미국의 거점이자 무역항이 바로 군곡리이었을 것이다.
◆ 군곡리, 신미국 최후의 터?
침미다례(忱彌多禮). 일본서기에 '도륙하여 백제에 주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침미’와 ‘신미’는 같은 음을 가지고 있고 ‘다래’는 ‘다라’의 다른 표기로 나라를 의미하니 바로 ‘신미국’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일본서기는 역사적인 사실을 마치 왜가 주도한 것처럼 윤색하는 것이 다반사지만, 지명이나 인명의 경우는 그 글자 표현이 어떻든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의 기사로 미루어 보면, 백제와 왜가 연합 공격을 할 만큼 신미국의 세력은 컸고, 끝까지 백제에 복속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미국의 멸망은 결국 △백제가 호남 지역의 마한 세력을 완전히 병탄(竝呑)했고 △군곡리 시대도 끝이 났음을 의미한다. 한반도 고대 역사의 한 장이 끝나고 새로운 장이 시작된 사건이다. 무화과가 무르익은 지난여름 이곳을 찾았을 때, 반달 능선 정상부에 키가 큰 풀들 위로 나무 한 그루가 삐죽하니 나를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 군곡리 옛사람들도 멀리 개펄 끝에 서서 돛을 달고 들어오는 배를 망부석같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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