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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다른 사람 인생은 그 사람에게 맡겨야겠습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오늘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가장 잘 대변하는 사도가 있으니, 바로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왠지 모를 편안함과 안도감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는 수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좌충우돌, 갈팡질팡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으로부터 혹독한 질타도 많이 받았습니다.
네 복음서에는 베드로 사도와 관련된 기사가 상당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끝난 이후부터 베드로 사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 주지 않습니다. 나머지 행적을 밝혀 줄 수 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기에, 전승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토대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추정컨데 베드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코린토 등 여러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다녔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생애 마지막 시기를 로마에서 보내셨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자행된 대박해 때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는 엉뚱하게도 사도단 안에서 언제나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던 경쟁자이자 절친이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다시 말해서 요한 복음 사가의 운명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게 몹시 궁금했던가 봅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 알쏭달쏭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하셨던 것처럼, 요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호기심을 반기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종착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그 사람 운명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저마다 지닌 역량이 다르고, 부여받은 사명이 다릅니다. 궁극적인 도착점은 동일하지만, 목적지로 나아가는 길은 조금씩 다릅니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고,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하거나 눈치 보지 말고 당당히 우리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주변 사람들 의식하느라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피곤하게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보고, 다른 사람들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며 살다 보니, 내 삶에 나도 사라지고, 주님도 사라져버린 어색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 인생은 그 사람에게 맡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 인생도 주관하시고 안배하시니 대폭 신경을 꺼야겠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분산되는 에너지들을 대폭 줄여야겠습니다. 대신 내 삶을 좀 더 주도적으로, 좀 더 충만히 살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발씻김의 열매: 착한 목자의 탄생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먹여라." (요한 21,17)
찬미 예수님! 부활 제7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가장 마지막 장, 곧 예수님과 베드로의 지독했던 사랑과 배신의 서사시가 마침내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완성되는 가슴 벅찬 에필로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 허탈해하는 제자들을 티베리아스 호숫가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숯불을 피워 빵과 물고기를 구워놓고 그들을 기다리십니다. 식사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을 연거푸 물으시며 "내 양들을 먹여라"라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 숯불 앞의 신비를 온전히 풀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슬러 예수님의 수난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성목요일의 다락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기겁하며 거부했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 13,7)
베드로가 그날 밤 깨닫지 못했던 '발 씻김의 진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너희도 서로 겸손하게 봉사해라"라는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이 발 씻김은 곧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질 처절한 '파스카의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신 것은, "내가 십자가에서 흘릴 나의 피로, 세상의 욕망과 교만에 찌든 너희의 그 얄팍한 '자아'를 완벽하게 죽이고 씻어내어, 이제부터 이 영혼의 주인이 '나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겠다"라는 위대한 소유권 이전의 예식이었습니다.
이 기막힌 신비는 구약성경 탈출기 12장의 '파스카 어린양의 피' 규정에서 이미 완벽한 설계도로 주어졌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십니다. 문설주는 집을 떠받치고 출입을 통제하는 집의 가장 아랫부분, 즉 신체로 치면 '발'에 해당합니다.
왜 굳이 피를 그곳에 발라야 했을까요? 죽음의 천사가 지나갈 때, 문설주에 발린 그 처절한 피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집의 첫째 아들, 즉 이 집을 지배하던 교만한 자아(이집트의 맏아들)는 이 피와 함께 이미 죽었다! 이 집의 소유권은 이제 하느님께로 넘어갔다!" 피가 발린 집은 죽음이 건너뛰고(Passover), 참 생명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는 바로 그 파스카 어린양의 피를 제자들의 문설주(발)에 바르는 거룩한 행위였습니다. "너를 지배하던 네 낡은 자아는 이제 내 피로 죽었다. 이제 네 인생의 주인은 나다." 이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날 밤, 그 씻김을 끝까지 거부하며 자신의 낡은 자아를 펄펄 살려두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며, 자기 삶의 주인이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고 뻗대며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짜 자존심은 대사제의 뜰에 피워진 '첫 번째 숯불' 앞에서 여지없이 붕괴되었습니다.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도망쳤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집을 지킬 능력도 없는 얼마나 쓰레기 같고 무력한 빚쟁이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그리고 그런 비겁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아 집값을 지불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목격하며, 베드로의 그 질기디질긴 이기적인 '자아'는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고 완벽하게 씻겨 나갔습니다. 이제 영혼의 방이 비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똑같은 '두 번째 숯불'을 호숫가에 피워놓으셨습니다. 과거 배신의 트라우마가 서린 그 숯불 앞에서, 이제 옛 주인이 쫓겨나고 자아가 완전히 죽어버린 베드로에게 새 주인이신 예수님은 첫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베드로가 자신의 전문 지식과 고집(자아)을 완전히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찢어질 듯이 무거운 물고기들이 올라왔습니다. 그 숫자가 무려 '153마리'였습니다. 성 예로니모를 비롯한 교부들은 이 153이라는 숫자를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온 세상 물고기의 종류, 즉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상징한다고 풀이했습니다. 즉, 자아가 죽어 하느님이 주인이 되신 베드로는 이제 하느님의 그물을 던져 '온 세상의 하느님 자녀들'을 빠짐없이 낚아 올리는 거룩한 어부로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가장 소름 돋는 기막힌 반전이 시작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153마리의 물고기(하느님의 자녀들)를 끌고 예수님이 피워두신 숯불 앞의 식탁으로 모여듭니다.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 아침의 식탁이 구약성경의 어떤 장면과 완벽하게 겹쳐지는지 아십니까?
탈출기 24장을 보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과 파스카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려 하느님과 거룩한 계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약이 완수되자 하느님은 모세와 일흔 명의 원로들을 시나이산 꼭대기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그 거룩한 산정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며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엄청난 기쁨의 식탁을 누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 나서 먹고 마셨다." (탈출 24,11).
오늘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숯불 식탁이 바로 그 새로운 시나이산의 정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자아를 죽이는 새로운 세족례(계약)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아가 씻겨진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제 단순한 어부가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우주에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영적 동반자(원로)로 그 신분이 수직 상승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식탁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목숨을 다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굳이 세 번을 물으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대사제의 뜰 숯불 앞에서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그 뼈아픈 과거를, 똑같은 숯불 앞에서 세 번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완벽하게 치유하고 상계(Offset) 처리해 주신 것입니다. 이 회복의 고백이 끝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들을 먹여라." (요한 21,17).
이 짧은 명령을 그리스어 원문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떤 역할을 이양하고 계신지 그 장엄한 무게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첫 번째와 세 번째에는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Βόσκε, 보스케)"라고 하셨고, 두 번째에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Ποίμαινε, 포이마이네)"라고 하셨습니다.
'보스케(Βόσκε)'는 단순히 육신의 밥을 준다는 뜻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영혼을 온전히 양육하라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반면 '포이마이네(Ποίμαινε)'는 목자가 되어 앞장서서 인도하고, 늑대로부터 보호하며, 목숨을 걸고 책임지는 '전인격적인 돌봄'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이 "이제부터 이 양들은 네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철저하게 "내 양들(μου)"이라고 소유권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양들은 베드로의 소유가 아닙니다. 양들의 진짜 주인은 피를 흘려 그들을 사신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양 떼를 이끄시던 당신의 그 '착한 목자'의 역할을 이제 베드로에게 고스란히 이양하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인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내 양처럼 여기며 목숨 걸고 먹이고 보호해야 할 거룩한 '청지기'로 파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자로서 양들을 이끄셨던 것처럼, 이제 네가 하느님의 양 떼를 이끌라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죽고 하느님과 한 몸이 된 청지기 베드로는 양 떼에게 도대체 무엇을 먹이고 돌보아야 할까요? 푸른 풀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세상 사람들에게 먹여야 할 진짜 양식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양들을 맡기시며, 그들의 입에 영원한 빵인 '성체'를 먹이라고 하십니다. 성체는 단순히 배를 불리는 위로의 떡이 아닙니다. 파스카의 피로 우리의 문설주를 발라 자아를 쫓아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베드로가 양 떼에게 성체를 먹인다는 것은, 그 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에 짓밟히는 한낱 짐승 같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이 거룩한 빵을 먹는 여러분은 예수님의 피로 낡은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피를 물려받아 결국 하느님과 똑같이 완전해질 수 있는 신적인 본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학의 정수인 '신화(Deification)', 즉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기적입니다. 양 떼가 늑대의 위협이나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교회를 굳건히 지켜내는 유일한 힘은, 바로 내가 하느님의 밥상에 앉아 하느님의 피를 먹는 '우주의 상속자'라는 이 엄청난 자존감에서 나옵니다.
내가 세상의 실패자나 찌질한 죄인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과 한 식탁에 마주 앉아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이 폭발적인 자존감을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세상의 파라오들 앞에서 주눅 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이름을 부여받은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 두려움에 떨며 상처받고 흩어진 이웃들에게 "당신도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는 그 찬란한 이름표를 달아주며 먹이고 돌보는 참된 목자로 파견되십시오. 우리가 베드로처럼 내 자아를 죽이고 이 거룩한 식탁의 밥을 먹으며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 삶의 모든 실패와 숯불의 상처는 하느님과 영원한 계약을 맺는 시나이산의 눈부신 영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21,15-19: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와 나누신 대화로, 교회 사목의 본질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의미를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을 고백하게 하신다. 이는 과거의 약함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회복의 순간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세 번의 부인은 세 번의 사랑의 고백으로 씻겨졌다. 입은 죄를 지었지만, 같은 입이 다시 구원을 고백하였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23, 요한 21,15-17 의역) 우리의 상처와 죄도 주님 앞에서 사랑의 고백으로 회복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같은 말씀을 하신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15.17절) 이는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목자의 사명을 위임하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그분은 그에게 단순히 사랑을 고백하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로 양들을 맡기셨다. 사랑한다면, 사랑의 증거로 양 떼를 돌보아야 한다.”(Homiliae in Ioannem 88, 요한 21,15-17 의역)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고백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교회를 돌보는 봉사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가리라.”(18절)라고 하시며 그의 죽음을 예고하신다. 이는 십자가의 길이다. 성 예로니모는 이를 해설하며 이렇게 말한다. “베드로는 자신을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릴 자격이 없다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기를 원했다. 그는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냈다.”(Commentarius in Matthaeum 초기 베드로 순교에 대한 전승 의역) 순교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주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만을 특별히 임명하시어, 가시적이고 항구적이며 눈에 보이는 일치의 원리와 기초로 삼으셨다.”(18항 요약) 또한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교회의 목자로서의 임무를 주셨다. 이 임무는 교회의 일치와 선익을 위한 봉사이다.”(881항 의역) 교회의 목자직은 권위가 아니라, 봉사와 사랑에 뿌리내린 사명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만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구체적인 봉사와 희생으로 드러나야 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양들”, 곧 가정과 공동체,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을 돌보는 삶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이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말로만 그칠 수 없다. 그것은 봉사로, 희생으로, 때로는 고난과 순교로까지 이어진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 것처럼,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맞벌이가 증가하고, 사교육이 활발해지면서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오래간만에 함께하는 식탁에서도 대화보다 스마트폰, OTT 영상을 각자 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혼밥은 더 이상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2023년 캐나다 공중보건학자 카렌 라르손 연구진은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빈도가 높으면 아동, 청소년의 식사 질이 올라가고, 우울이나 불안 등의 정신 문제도 25% 감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음주나 흡연과 같은 행동이 감소하는 등 함께 식사하는 것이 건강지표와 큰 연관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스트레스 회복력도 높아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께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편안한 ‘혼자’를 선호하면서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함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듣고 받아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즉, 사랑을 통해서만 함께할 수 있고, 사랑을 통해서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신을 꾸짖거나 해명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내면에 남아 있는 깊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씻어주시고, 그가 사도로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주셨던 반석이라는 ‘베드로’가 아닌, 그의 옛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교회의 수장이라는 직분이나 화려한 겉모습을 다 내려놓고, 가장 연약하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 시몬’으로서 하느님 앞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에서 사랑의 마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진실한 사랑 고백 위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본질은 의무감이나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대화의 마지막은 “나를 따라라.”(요한 21,19)입니다. 이는 베드로를 처음 부르셨을 때의 말씀과 같습니다. 아마 처음의 베드로는 자기 열정만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뼈아픈 실패를 겪고, 무조건적인 용서를 경험하고,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 후 진정한 따름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따름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재주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습니다. 또 실패하고 배신했다고 해서 당신의 부르심을 철회하시지도 않습니다. 철저히 사랑만을 이야기하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계속해서 질문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얻게 됩니다.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젊음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상태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쉽게 빚을 수 없는 예술작품이다(엘리너 루스벨트)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5.22.금.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베드로의 가능성과
사랑을 바라보시며
다시 양들을 맡기십니다.
양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맡겨진 생명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진정 돌보는
사람입니다.
끝까지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결국 사랑 받은 사람이
다시 사랑하게 되는
신비입니다.
공동체의 기초는
지배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상처를 아는 사람만이
상처 입은 이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실패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겸손함 안에서
비로소 다른 양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 살아날 수 있도록
사랑으로 기다려 주라는
부르심입니다.
잠시 멈추어
다른 존재의 고통을
바라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돌봄의 대상은
존귀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목자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양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로 섬깁니다.
누군가를 이기는 사람보다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이
더 깊은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돌보는 순간이
우리 또한 사랑으로
살아나는 순간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5.16.17)
'나도 아가페 사랑이 되자!'
오늘 복음(요한21,15-19)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질문하시면서, 사목직을 맡기시고, 장차 베드로에게 다가올 십자가 죽음을 언급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시면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7)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을 예수님께서 아신다.'라고 대답합니다. 당신께로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린양들을 잘 돌보라.'는 사목직을 베드로에게 맡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요한21,19ㄷ)
으뜸 사도의 길을 걸어갔던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약점이 많았던 사도입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신했던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베드로의 이 아픔을 치유해 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베드로는 성령강림 이후 성령을 받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할 때까지 끝까지 예수님처럼 착한 목자가 되어 예수님의 양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과 아들 예수님의 영광과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아가페 사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향해 있어야 할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오늘도 아가페 사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합시다!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본기도)
(~2마카1,36)
복음말씀
제1독서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5,13ㄴ-21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