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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노아의 대 홍수
본문 : (창 7: 1 - 8: 19)
주요내용 : 성령충만론
자료출처:http://cafe.daum.net/agaser
요 약
베드로는 노아 홍수 사건을 성령세례의 사건에 비유한다. 즉 방주에 들어가자 홍수가 있었듯 성령세례는 경외의 천국 삶에 임한다. 또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이 열려 임했듯 성령세례는 내외적 형태로 임한다. 또 사십 주야 쏟아진 것처럼 성령세례가 임하면 죄악을 소멸하사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고 방주가 떠다니고 천하의 산이 덮이듯 성령세례로 충만하면 성령에 사로잡혀 살며 해결되지 않던 심령 문제도 치유된다. 그러나 십오 규빗이 더 오르듯 충만할지라도 자만하지 않고 부족하다는 심정으로 살 때 실족하지 않는다.
설 명
◎ 성령충만 하려면
☞ 노아의 홍수는 성령충만의 예표이다.
1. 방주
방주 - 예수, 여호와 경외신앙
2. 대 홍수
7일, 600세 - 분량과 최선
깊음의 샘, 하늘의 비 - 성령의 이중적 충만
40주야 - 옛 것을 멸하심
3. 창일함
15규빗 - 온전함을 입기를 갈망함
4. 아라랏산
'거룩한 땅' - 하늘에 속한 자
5. 산들의 봉우리
새 창조의 모습
6. 두 종류의 새
옛 사고와 새 사고
(본문)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 생략 -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24 물이 일 백 오 십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 <창7:1-8:19>
(강해)
이 시간 "노아 대 홍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과학자들도 이 지구에 간빙기라 해서 지구의 해수면이 높아진 때를 증거하고 있고, 현재도 노아 방주가 발견되어 노아 홍수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임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노아 홍수 사건은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적인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말씀 드리기 전에 먼저 베드로는 이 사건을 무엇이라 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벧전3:20-21에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베드로는 이 홍수 사건을 세례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해석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그는 물에서 구원 받았다고 하지 않고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 물은 이젠 전과 같이 죽이는 물이 아니라 살리는 물입니다.
그리고 그가 세례라고 말했을 때는 물세례와 아울러 성령세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육체를 씻는 그런 물이 아니라 선한 양심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이 홍수 사건을 성령충만 을 포함한 성령세례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겨우 여덟 명이라"는 문구를 통해 성령충만은 성화 구원을 이루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는 벧전 4:18에서도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예수 믿으면 구원인데 의인도 겨우 구원을 얻다니 이 구원은 과연 무슨 구원인가? 그러나 이 구원은 앞서 말씀한 대로 성화까지를 포함한 구원의 전반적인 것을 뜻합니다(벧전1:8). 그러니까 성화 구원을 받으려면 성령충만은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베드로의 관점에서 홍수 사건을 성령충만 사건의 관점에서 설명해 나가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죄악이 성령으로 소멸되는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아주 귀한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먼저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1. 언제 홍수가 있었습니까?
1절에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하셨고, 10절에는 "7일 후"라고 했고, 11절에는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 월 곧 그 달 십칠 일이라" 했습니다.
먼저 방주로 들어가 7일 동안 방주생활을 한 후에 비가 내렸습니다. 방주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들어가서 산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천국입니다. 즉 우리에게 천국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삶이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입니다. 즉 노아가 7일간 방주의 삶을 살자 홍수가 왔듯 이처럼 기도하고 찬양하는 경배의 삶을 살 때 성령이 임합니다.
그런데 7은 사역의 완전수입니다. 그리고 600세라 했는데 600은 사람수 6에 만수 10을 자승한 것을 곱한 것으로 인간의 최선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2월 17일은 유대 일반 민간력으로 이 때가 바로 종교력으로 보면 수장절 기간입니다. 수장절이란 우리 성도들이 지상의 수고로운 삶을 접고 천국의 알곡이 되어 살아가는 천국 삶의 예표입니다.
이 상의 사실을 종합하면 성도는 지상을 살지만 천국과 동일하게 늘 예배하는 삶이어야 하며, 그렇게 하되 인간의 최선을 다해 그 충만한 분량이 차도록 열심히 하나님을 경배할 때 성령의 대 홍수가 임한다는 교훈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막연히 천국의 영적 환경만 원하지 말고 먼저 믿음으로 천국의 삶부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은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진리입니다.
2. 이 홍수가 어떻게 임했습니까?
11절에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방향에서 홍수가 났는데 한 편에서는 땅 속에서 솟고 다른 한 편에서는 하늘에서 쏟아졌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적과 외적인 역사입니다. 이것을 두 종류의 성령 충만이라고도 부릅니다. 즉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역사하셔서 중생과 성화를 이루는 생명적인 역사로 나타나시고, 또 육체에 은사로 임하셔서 체험을 통해 인간의 주관과 사고를 바꾸어 가시는 역사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두 방향이 동시에 임했는데 그것이 가장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말씀을 강조하는 곳에서는 영혼의 분야가, 기도를 강조하는 곳에서는 은사적인 분야가 더 앞섭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것은 말씀과 기도의 바란스가 맞아서 은혜와 은사로서 함께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는 성령 충만의 원리를 보여줄 뿐 아니라 가장 이상적인 영적 생활이 무엇인지 교훈합니다.
3. 홍수가 얼마 동안 있었습니까?
12절에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했습니다.
40은 본래 죽음의 수입니다. 이스라엘도 40년 동안 1세대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정탐군들도 40일,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을 돌아다니다가 그만 기가 질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기간에 믿음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도 40년 다스리는 동안 거역하던 세력이 다 죽었습니다. 모세도 40년 동안 혈기와 내 방법이 죽었습니다. 엘리야도 40일, 모세도 40일, 예수님도 40일, 바울을 죽이고자 한 사람도 40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매를 쳐도 40에 하나 감한 매를 쳤습니다. 40을 치면 그건 죽으라는 것이기 때문에 매를 하나 감한 것입니다.
즉 40일간의 홍수는 성령충만의 결과가 무엇임을 가르쳐 줍니다. 즉 성령충만이 임하면 내가 죽어지고 마음속의 세속과 죄악이 죽어집니다. 그런데 이 죽음과 성령은 서로 보완적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면 내가 죽고 내가 죽으면 성령이 임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성전의 휘장이 갈라져 하나가 된 것같이 내 자아가 죽어질 때 성령께서 우리 인격 안에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 내가 죽어지는데 늘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벧후3:7을 보면 장차는 이 세계가 홍수가 아니라 불로 멸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역사 속에 이루어지겠지만 영적으로도 성령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불로 임하셔서 죄악을 소멸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야로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어두운 죄만이 아니라 우리가 자랑하는 인간적인 의까지도 소멸하심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죄악을 소멸하사 우리를 온전케 하심이 바로 40일 홍수의 영적 의미입니다.
4. 홍수가 얼마나 쏟아졌습니까?
18절에 "방주가 물위에 떠 다녔다" 했고, 19절에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다" 했으며, 20절에는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었다" 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최초의 방주가 건조하기 쉽도록 깊은 산 속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런데 물이 불어나자 산 속에 깊이 정박하여 꼼짝도 하지 않던 방주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닙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 받으면 우리들이 성령에 떠밀려 다닙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임하시면 사랑의 사람이 되고 기쁨으로 임하시면 기쁨이 넘칩니다. 전에는 성령이여 임하사 사랑할 마음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했으나 그런 마음이 생길 듯 말듯 했지만 이제는 내가 행하기 전에 벌써 성령이 앞서 주장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성령에 떠밀려 다니는 삶입니다.
그리고 천하의 높은 산들이 다 덮였습니다. 산의 의미가 여럿 있지만 부정적 의미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안팎의 여러 문제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고칠래야 고쳐질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성품입니다. 대체로 이런 마음의 상처들은 일생을 통해서 깊이 형성된 것이기에 스스로도 못 고칩니다. 그러나 성령이 더욱 충만해지면 그 성품들조차도 다 사라진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의심도, 원망도 치유되고, 교만과 미움도 치유되고, 부정의식이나 열등감도 치유되고, 남을 괴롭히던 성격도 치유됩니다.
그런데 또 홍수가 가장 높은 산보다 15규빗을 더 덮었다고 했습니다. 10은 전체를 가리키는 수로서 10규빗이면 죽기는 다 죽지만 혹시 다시 살아날 생물이 있을지 모르니 보충수 5인 5규빗을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충만 받아 아주 다 된 것 같아도 되었다는 생각 말고 항상 부족하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다 되었을 망정 다시 살아나 시험으로 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아이성 전투에서 조상 아브라함이 제단 쌓던 벧엘과 아이 사이에 복병을 3만을 매복시키되 오천을 더하여 시킨 것처럼 기도 많이 하거나 성령이 충만해도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 속에 살아야 함을 교훈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섰다하는 순간 넘어집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족함이 없다 하는 순간 영의 거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빌3:13-15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15규빗의 의미입니다.
5. 방주가 몇 일 동안 물에 떠 다녔습니까?
3절에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 일 후에 감하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150일간 노아의 방주는 물위에 떠다녔습니다. 여러분 여기 노아의 배가 침몰되지 않은 것은 배가 튼튼해서 일까요? 하나님께서 지키셔서 그랬을까요? 요즘에도 대형 화물선이 실종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방주는 항해용 배도 아니고 또 당시 그 격변 속에서 방주가 안전했던 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방주를 타고 떠다니면서 온갖 신비로운 경험을 다했을 것입니다.
시107:23-31에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했습니다.
북한에서 경비정을 타고 탈출한 김만철씨의 간증을 들어보니까 오던 중에 엔진이 고장나서 표류하던 중에 처남이 배 안에서 휩쓸리다 기절할 만큼 큰 폭풍이 불어 종교는 없었고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하늘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렸답니다. 그런데 배가 너무 조용해서 배 밖에 나와 보니까 거대한 파도 사이에 배가 정박되어 풍랑이 그칠 때까지 그대로 있더랍니다. 그래서 남한에 와서 먼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 보답하려고 기도원 짓고 전국에 간증하러 다닌답니다.
이처럼 노아에게는 신비로운 경험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경험이란 일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경험케 하사 신앙을 굳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50일 동안 그랬습니다. 150일은 15수보다 10배가 많은 수입니다. 그런데 여기 15의 의미는 성령의 입장에서 본 15입니다. 앞서 15는 내가 혹시 모자랄까봐 더하고 더했는데 여기서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혹시라도 모자랄까봐 여러 가지의 경험을 풍성하게 허락하심이 바로 150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는 하나님께서 넘칠 만큼 경험을 시키므로 착각해선 안됩니다. 내가 대단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의 일정한 교육 중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완악한 사람일수록 더 경험을 시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까지 가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요20:29-31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말씀에 잘 설 사람은 적게 경험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을 깨닫고 할 일은 신앙을 견고히 하는 일입니다.
6. 그래서 150일 후에 어디 머물렀습니까?
4절에 "칠월 곧 그 달 십 칠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했습니다.
여기 '아라랏'이란 '거룩한 땅'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방주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 안에서 저 거룩하고 높은 곳으로 옮기셨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현주소는 이 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경험했든 안 했든 먼저는 예수 복음에 견고히 서야 합니다. 많이 받았다고 흥분할 필요도 없고 안 받은 것 같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복음에 서면 결과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복음에 서게 하시기 위해서 많은 경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과 상태와 환경과 느낌 가운데서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높아지고 거룩하게 되었다 라고 복음에 견고히 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체험을 주시는 목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경험하고서 자기 느낌에 죄우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충만하게 느껴지면 안심하다가 그렇지 않으면 낙심합니다. 그러나 예수 복음에 선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체험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서도록 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곳에 섰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7. 그 다음 10월 1일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5절에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 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했습니다.
앞에서는 아라랏산이었지만 이제는 많은 산들입니다. 이 산들은 물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새 모습의 산들입니다. 창조과학자들의 말을 참고하면 홍수 이전에는 이 지구의 모습이 동산과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50일간의 창일한 해일과 격변 속에서 지구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한 가운데 예수 복음에 견고히 서면 세상과 죄는 점점 물러가고 이제 놀랍고 영광스런 새 창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물러가지 않는다면 겸손히 엎드리세요. 그래서 천지 창조도 성령께서 운행하시는 충만 속에 하나님의 가라사대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두 가지 즉 성령충만과 예수복음에 견고히 서면 비로소 옛 창조는 사라지고 새 창조로 변화됩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은 이 두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롬8:3-4에 그 두 종류가 다 나타납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까지는 복음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음에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성령충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예수 복음과 성령충만이라는 두 조건이 갖추어질 때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8. 그 다음 또 40일을 기다려 한 일이 있습니다.
6-12절에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했습니다.
노아는 물이 감한 것을 보고 40일을 더 기다려 물이 줄어든 상태를 알기 위하여 먼저 까마귀를 내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산봉우리들과 시체 등의 휴식처가 있었으므로 돌아오지 않고 이리 저리 방주 주위를 날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7일 후에 비둘기를 내어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아직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 왔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늘에 속한 영역에 살면서 어떤 사고로 세상을 접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까마귀의 사고냐 비둘기의 사고냐 입니다. 까마귀는 인간의 옛 사고요 비둘기는 복음 안에 새 사고입니다. 까마귀의 사고는 세상의 더러운 것에|흥미를 가지고 머무르려는 사고요, 비둘기의 사고는 세상에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해 예수 품에 돌아오는 믿음의 사고입니다.
즉 노아는 7일 간격으로 비둘기를 세 번에 걸쳐 내보내는데 첫 번째는 그냥 돌아오고, 두 번째는 저녁에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오고, 세 번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노아가 비둘기를 계속 보내듯 성령의 적용을 더 깊이 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첫 번째는 발을 붙이지 못했으니 십자가의 진리 적용을, 다음에 감람 새 잎을 물고 왔으니 부활의 적용을, 마지막은 아주 자연의 품안에 적응했으니 삶에서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대로 적용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이 대목에서 기독교 문화관의 분리형, 변혁형, 동일시형의 세 유형을 발견합니다. 성도는 세상 죄에 대하여는 분리 즉 죽은 자요, 세상을 성령으로 변혁시켜야 하는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는 산 자여야 하며, 삶의 현장을 떠나지 아니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임해야 하는 동일시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세 번의 3은 하나님의 완전수요, 7일의 7은 사역의 완전 수요, 노아가 물 감한 여부에 관심 가졌듯 하나님의 열심히 성령충만한 가운데 성경 66권을 늘 적용하여 내 속의 인간의 잔재가 다 물러가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한 번의 충만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 자기에게 적용하며 자기 완성을 향해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죽었고 살았다는 입장도 중요하지만 이젠 사랑함에도 자라고 지체 돌아봄에도 자라고 전도함에도 자라고 직무에 충성함에도 자라고 섬겨 기도함에도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교리서신을 보면 그 특징이 앞에서는 복음을 말씀하고 뒤에서는 구체적인 삶을 이야기합니다.
9. 그래서 13절 보면 아주 물이 걷힙니다.
13절 "육백 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물은 지면에서 완전히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땅이 완전히 마른 이월 이십 칠일까지 다시 기다립니다. 계산해 보면 물이 창일한 기간이 150일이요, 물이 물러간 기간이 150일요, 물기가 마르는 기간이 70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두 번 150일처럼 먼저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아야 하고, 또 은혜로서 하나님 말씀을 나의 삶에 온전히 적용하도록 해야 하며, 나머지 70일처럼 이젠 물기조차도 남지 않도록 하는 일이 남았는데 만약 그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수천 미터 산 아래로 미끄러지든지 아니면 깊은 수렁에 빠져 죽고 맙니다. 또 여기 70수의 의미는 사역의 완전수 7에 만수 10을 곱한 것으로 무엇인가를 완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이 자기를 완성하는 이 완전은 무엇이며, 또 이것을 구비하지 않으면 남도 나도 큰 시험에 빠질 수밖에는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은 사랑입니다. 우리 신앙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고전 13장에도 나타난 대로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그 무엇도 가치 없고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지식의 변화를 말씀한 다음에 사랑을 말씀합니다. 골3:12-14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나도 시험에 빠지고 남도 시험에 빠집니다. 사랑이 없다면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보다 못합니다. 아무리 귀한 영적 병기를 가지고도 사랑이 없을 때 도리어 큰 피해를 끼칩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70일을 기다린 후에야 방주에서 나왔듯 우리들도 사랑으로 완전히 무장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 되어 세상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죽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없이 밖에 나올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 충만한 가운데 말씀 안에서 온전해 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 믿음에 서십시다. 예배의 삶을 사십시다. 사랑으로 변화되십시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은혜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