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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와 공감 원문보기 글쓴이: 호시탐탐(好詩探貪)
b판시선 006
조삼현 시집
어느 수인에게 보내는 편지
표사
입가에 미소를 머금다가,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슬픔을 느끼다가, 살려고 애쓰는 몸부림이 애처로워 혀를 차다가, 절묘한 비유에 마음속으로 감탄사를 터뜨리다가…… 시집 한 권을 다 읽게 될 것입니다. 특히 사람이건 식물이건 곤충이건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한 조삼현 시인의 깊은 연민의 정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재소자들과 함께한 긴 세월 동안 시인은 모든 생명체가 궁극적으로는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모양입니다. 살아 있는 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존재들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깊은 사색은 기운을 잃고 있는 우리 시단에서 작지만 밝은 불씨가 될 것입니다. ㅡ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자아분열의 자극적인 언어가 난무하는 작금의 시단에 조삼현 시인의 시들은 시의 중요한 가치를 생각하게 해 준다. 그것은 바로 성찰이다. 그의 시들은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성찰하고 우리의 문명을 성찰한다. 그런데 조삼현 시인은 그 성찰을 머리와 지식으로 하지 않고, 따뜻한 가슴과 그것을 가지고 살아온 체험의 구체성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하며 잊고 지내고 있는 인간적 가치를 되살리고 상투적 일상에 매몰된 우리의 의식을 일깨운다. 이 시집을 통해 조삼현 시인이 찾아낸 빛나는 감각적 언어들은 우리 삶의 진지한 한 국면들을 구체적 형상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그렇게 해서 상투적인 말들은 언어의 본래적 힘을 되찾는다. 이 시에서는 읽히는 언어의 찰진 재미들이 유희에 끝나지 않고 성찰이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황정산(시인, 대전대 교수, 문학평론가)
조삼현 시인
1957년 전남 영암 출생
2008년 월간 『우리시』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현재 서울남부구치소 재직 중이며 《시와 공감》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ㅣ시인의 말ㅣ
청미래 덩굴 아래
자벌레 한 마리
α와 Ω를
폈다 접었다
온몸 반성문을 퇴고하며
기어가고 있다
ㅣ차 례ㅣ
시인의 말5
제1부 소리의 방
맥문동 13
소리의 방 14
음계의 나라 16
돼지꿈 17
구멍들 18
안녕하세요 줌마 20
다가구주택 22
괴물 24
발바닥 신전26
민들레 28
도봉산에서 30
대설경보 32
거대한 자궁 34
지평선 36
제2부 어느 수인에게 보내는 편지
노역 39
노역 2 40
노역 3 42
동행 44
죄와 벌 46
죄와 벌 2 48
죄와 벌 3 50
죄와 벌 4 52
죄와 벌 5 54
죄와 벌 6 56
바람의 경작 58
립스틱 뻐꾸기 60
꽃들은 62
손잡이가 되다 64
조리원 K 66
제3부 낮달의 사인
매미 69
낮달의 사인 70
맑은생태탕 72
택배 74
핸드폰이 올지도 몰라 76
양파를 깔 때 눈물이 나는 이유 78
슬하 80
걸레김밥 82
안락사에 대한 보고서83
곤반부리 84
명치끝 이야기 86
중년에 대하여 88
입맞춤 90
입동 92
제4부 길에 대한 명상
길에 대한 명상 95
사랑의 발원 96
詩, 개화98
직소퍼즐100
비밀의 방 102
봄 무 104
입춘단장 106
달팽이의 길 107
육교 위에서 108
월출산에서 110
외연도 112
길을 찾다 114
국경 밖 딸에게 116
만추117
해설ㅣ신현락119
맥문동
그늘은 태양의 벌레 먹은 자국이다
빛의 무덤이다
사람만이 촛불을 켠다, 그럴까?
보라, 보라!
보랏빛 맥문동꽃
가느다란 대궁에 오순도순
성냥알처럼 핀
그늘꽃
빛의 이면엔 그늘이 있다는 듯
배후가 환해야 세상이 따뜻하다는 듯
소리의 방
새 한 마리 휘익 부리로 바람의 사선을 가르며
늙은 오동나무 귓속으로 들어간다
동굴처럼 어둡고 게르처럼 아늑한,
오동나무는 겹겹이 여미고 싶은 나이테의 욕망 대신 몸속에
소리의 방 하나 들였던 것이다 늘 비워 두어 새들과
한뎃잠 뒤척이는 풀벌레며 다람쥐
제 상처에 깃든 것들을 비좁고 넉넉한 품으로 감싸 안았다
천둥소리 바람소리 눈보라 드나들며 몸 데워 가게 하였다
어떤 날은 집 단장을 하는지 새가, 옹이에 부리 다친 새가
물렁뼈를 쪼아대어 수심이 깊어지기도 하였지만
온갖 소리들이 오래 머물다간 방은 늘 이명 왕왕거려
귀앓이를 하기도 하였지만, 귀 멀수록 환해지는 오감이어서
오동은 나무의 결속에 더불어 살아온 이웃들의 소리를 귀담았다
오동나무, 맑고 푸른 경전을 뜯는다
오동나무가 풀어낸 거문고, 장구, 가야금 중중모리는
소리의 방에 녹음된 오래된 미래를 공명하는 것이다
구멍들
귓속에서 자꾸만 모래가 씹혔다
언어가 슬어놓은 알의 포상기태들
퉤퉤 뱉으려고 하지만 울퉁
불퉁한 분절음이 이명처럼 갉아댔다
오래된 귀엔 소리의 여과기가 있는 걸까
가스레인지 후드 필터를 갈 때 우연히
늙은 수리공의 귓속에 털이 나 있는 것을 보았다
귀는 말을 먹는 입이다
입속에서 자꾸만 부메랑이 뛰쳐나왔다
입이 던진 부메랑에 누군가가 베이고
초목草木, 금수禽獸가 쓰러졌다
똥 누는 횟수보다 양치하는 횟수가 더 많은
이유를 생각하다, 내 입을 으깨버릴까 봐
늙은 독수리가 낡고 굽어
사냥할 수 없는 부리를 벼랑에 들이박아 새부리를 돋게 하듯
입은 언어의 배설구다*
항문은 내 혼신魂神의 부댓자루를 묶고 있는
끈이다, 밀교의 은밀 창고다
아무데나 귀와 입을 흘리고 다니지 말라고
꼭지를 닫았다, 내압을 조였다
변기에 앉을 때 무릎을 꺾는 것은 신성
의식을 치르기 때문이다
죽을 때 비로소 괄약근을 놓는
항문은 몸을 포괄하는 둥근 괄호다
* 사무엘 베케트의 ‘머리의 항문인 입’ 변용
월출산에서
그렇지만 삶은
고통을 담금질하여 더욱 오롯해지는가
바람폭포 지나, 구름다리 건너 층층
수천 돌계단과 공중사다리
숨 헉헉 차올라온 여기 통천문*
하늘 가는 문이라면, 생각건대
운무에 눈썹 다 스미도록 바위에 걸터앉아
생각건대, 그렇다면 나 지금
미리 와서 본 사후세계 어디쯤
천당과 지옥문에 한 발씩 척 올려보다가
누구의 몸 껴입고 사는가 육신과 영혼 사이
빛과 어둠 살펴보다가
꼬집어도 살펴도 보이는 건 허虛, 껍데기뿐이어서
느닷없는 천둥소리 참 고마워라
되돌아본 뒤안길 사뭇 먼 길 왔구나
우리 사는 하루하루가
통천문 오르는 칸 칸 돌계단이라면, 나를
얼마나 더 태질하여야 삼백예순다섯
날을 채울까 산정에 오를까
천왕봉 가는 길은 이제부터 가파르다
* 通天門. 영암 월출산에 있는 바위 문
낮달의 사인死因
내가 어머니를 죽게 했어요
욕조 찬물에 담가 물고문을 한 것이지요
남들은 저 양반 죽기 전에 이승의 때
다 벗었으니 좋은 데 가셨겠다 했지만
내 생각은 오직 그러지 말 걸 그랬어요
당신의 몸 깊숙이 밴 지린내며
치매의 흔적들 지우지 말 걸 그랬어요
낮달처럼 야윈 젖이며 앙상한 손마디
아, 이 눈부시게 슬픈 문이 나를 세상에 보냈구나
당신의 여미고 싶은 곳을, 이젠
부끄러움도 놓아버린 생의 헐거워진 근력을
구석구석 고문했던 것이지요, 나는
어머니 좋아? 하고
게슴츠레 눈 풀린 당신은 처음, 마지막
生의 오르가슴인 양 흐뭇해했지만
우리 서로 믿지 말 걸 그랬어요
삼복더위를 믿지 말 걸 그랬어요
어머니 치가 떨리시나요
왜 이렇게 부들부들 떨고 계세요
고향 집 뒤란 플라스틱 욕조 노천탕에서
어머니 시원해? 오냐 시원타 했지만
용서 참 쉽군요
내 죄를 덮으려 사흘을 더 사셨죠
낮달이 원하는 물의 체온을 그땐 몰랐어요
노역 3
-어느 수인에게 보내는 편지
一心이나 일편단심 문신 속엔
깊이를 알 수 없는 저수지가 출렁거리지
먹물 몇 방울의 수심이 저리 깊을까, 물귀신처럼
집요를 물고 늘어져 놓지 않겠다는
외통수의 경구 一心
일편단심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상처를 다스리는 맹독처럼 극단이 사랑이다, 너는
천 길 물속보다 깊은 얕은샘물체
자기최면의 경구에 빠져버렸어
생각의 행보가 사람을 끌고 다닌다면
너를 주관하는 독재자는 꽝꽝 언 저수지 물밑
맹금류의 호흡법으로 부활을 꿈꾸지
크리스마스가 싸락눈으로 붐비던 날 생각이
한 생각을 끌고 저수지 속으로 들어간 뒤 물은
꽝꽝 얼었고 저수지는 입구와 출구를 닫아버렸어
너는 아직도 출구를 찾지 않지만 출구는
아파트 현관문을 생각하면 유추할 수 있지
걸고, 돌리고, 버튼을 누르는 삼중 잠금장치 철대문
두문불출 종일 현관문을 살피다보면 감옥과 출옥이
뫼비우스 띠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너는 겨울 저수지에서 썰매를 타본 적 있니?
아무리 얼어도 어느 한 곳은 꼭
얼지 않고 열어둔 곳 있지
물이 죽지 않으려고, 살아 숨을 쉬려는 물의 문門이지
너는 안에서 밖을 가둬버린 거야, 똑똑
밖을 두드리는 햇살의 노크에 장단을 맞춰봐
시간의 끝자락은 늘 처음이니까!
죄와 벌
-K씨의 탄원
간절한 마음으로 어루만지면
돌멩이가 부처 되는 것처럼
내 으깨진 손바닥으로 또 두드리면
문이시여 열리겠습니까?
여기 문이 있습니다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이 문은
나와 함께 삭아가는 시간의 흔적을 굳게
걸어버린 거대한 철문입니다
일생 내 이름 목 놓아 부르다 야위어가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제 샐비어꽃빛 입술에 어둠 나앉고
깊게 잠긴 볼엔 검버섯이 묵화처럼 피었습니다
내 손을 놓고선 죽어도 못 죽을, 훌훌
떠나지 못할 당신은 수평선 너머
천 리 남쪽 외딴섬에 계십니다
내가 생의 불씨마저 놓아버린 뒤 벼랑 끝
짐승 되어 울부짖던 그때부터였던가요
당신의 겨울은 구들에 불을 지피지 않습니다
뼛속 파고드는 냉기를 여태
당신의 체온으로 데운다지요
여기 문이 있습니다
부디 바라옵고 원하는 것은,
이 문 두드리는 것은,
나를 신神으로 섬긴 당신을, 내가 당신을
단 하루라도 신으로 섬기려는
종신수終身囚입니다
죄와 벌 2
소녀는 설핏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하였다
하얀 치아에서 내림단조 하모니카 소리가 날 것만 같다
금요일 시험 마치고, 폐광촌 예밀에서
버스 세 번 갈아타고 왔다는 소녀는
오 년 만에 아비의 얼굴을 본다고 하였다
쇠창살 사이로 만들어 보인 두 손 모음 작은 하트
아비도 따라서 시늉을 한다
고비, 두릅, 곰취, 누룩치, 산도라지 바꿔 영치금을 넣어주던
곱사등이할매는 마침내
산그늘 묏등 한 채 얻어 등을 폈다, 하였다
어미 닭이 날개 속에 병아리를 품는 것 같은 서로의 눈빛 한참
흐르고
가슴속에 눌러둔 말
목젖으로 꼭꼭 누르는 말
니 엄마는?
……………………………………………………
……………………………………………………
적막만큼 서러운 것 있을까
안간힘으로 견디는 비명은 소리가 나지 않을까
긴 시간 말없이 유리창에 맞댄 손 떼지 못한 부녀는
죄와 벌 4
-홀리데이*
탕! 단 한 발의 총소리가 멎고……
내 몸속에 죄수의 피가 흘러요
그를 관통한 총알이 나를 뚫었거든요
나는 교도관이고 수십 년 동안
그의 부록을 독해하는 중이에요
그는 민가에 잠입한 탈옥수
세상을 인질 잡고 흔들어댔죠
원하는 게 뭔가요? 경찰관이 물었을 때
유전무죄 무전유죄 외쳤고
팝송 홀리데이가 듣고 싶다 했고
제 머리통에 권총을 쏘았지요
흉악범과 홀리데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그도 인형극을 보고 미소를 짓거나**
성일聖日처럼 평온한 세상을 꿈꾼 것일까요
내 몸속에 죄수의 피가 흘러요 holiday
holiday 새김질하면 몸이 달아올라요, 이런 날은
시집이나 경전 대신 그의 부록을 켜죠
더러운 내 핏속에도 생기가 돌기 때문이에요
내 귀가 따라 부르는 노래는
높은음자리와 낮은음자리가 하모니를 이루는 것
나의 노래가 새들에게로 가 발화하는 것
새들의 노래가 우리들의 폐허에
신성 꽃이 되어 피어나는 것
아주 쓰러지지는 않았으므로
새벽이 올 때까지 눈물로,
눈물의 힘으로
* 실재 사건을 극화한 양윤호 감독의 영화
** 비지스의 <holiday>에서 인용
입맞춤
기다리는 것 말고는 처방 없다는
말기 암 든 친구의 아내
마흔여섯 살 입술이 초승달처럼 시리네요
몸은 어둑해도 기억은 형형하여
우리 함께한 시간의 태엽을 돌려보는 것인데
젊은 날, 웃자고, 유치원 다니는 그 집 아이와
우리 딸 아이 정혼도 하고
오대산 자락 어느 허름한 민박집에서 손뼉 치며
노래 돌려 부르며 깔깔 웃던
모닥불 추억 쪼여도 보는 것인데
그녀나 나나 이제 마지막으로 본다는 것을
서로 아는 이 슬픈 문병의 시간을……
세상에는 기적이 있는 법이라고 나는 위로하고
그녀는 내 시가 참 좋다 공치사를 하다
순간, 눈 딱 마주쳐 머쓱하여
서로 외면하던 네 개의 눈, 차가운 스파크
날 풀리는 내년 봄날 매화잔치 가자
악수하고 돌아서는 병실 문
이승과 저승 문턱에서 서로 속아도 주는
약속, 슬픈 입맞춤
사랑의 발원
술 거나해, 여자가 더
빗살현호색으로 보이는 색등色燈
호프집 화장실 문 앞
여자는 팔 벌려 누워있고
남자는 엎드려
수작을 피우려는 자세다
저 농염한 상형은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죄
아담과 이브의
알몸 체위인가
진하게 키스하는 모습
사람 인人자처럼 수밀도
달콤한
비밀의 사원
포개면
사과 한 알의 원죄, 인류의 기원*
여자가 엎드리면 남자가 되고
남자가 누우면 여자가 되는
역설의 평등
화장실, 한쪽 문엔 M
또 한쪽 문엔 W
*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 변용
만추
푸른 설법 다 마친 큰스님
열반에 드셨나
고추잠자리가
성냥 화악 그어
제 몸 불사르자
온 산이 통째 다비식이다
초판 1쇄 발행 2015년 2월 10일
지은이 조삼현
펴낸이 조기조
펴낸곳 도서출판 b
편 집 김장미 백은주
표 지 테크네
인 쇄 주)상지사P&B
등록 2003년 2월 24일 제12-348호
주소 151-899 서울시 관악구 난곡로 288 남진빌딩 401호
전화 02-6293-7070(대) 팩시밀리 02-6293-8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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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91706-90-3 03810
값_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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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책은 교환해 드립니다.
첫댓글 첫 시집 축하드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