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조_중일전쟁_PPT 발제문.zip
안녕하세요, 지금은 달서구의 모 중학교에서 실습을 하고 있는 사학과 09학번 성현승입니다.
발표의 머리와 말미에 있었던 저의 너무나도 부족한 발표를 들어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ㅠㅠ
PPT 업로드와 질문 답변이 늦어지게 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발표를 준비하면서 조원 분들이 이런 저런 책을 조사하면서 정리한 자료를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압축파일에 모아서 올릴까 합니다.
이른 아침에 경황이 없는 나머지 제 불찰로 더 깔끔하게 정돈된 PPT 최종 수정본을 가지고 발표를 하지 못하게 된 점,
중국현대사를 들으시는 학우 여러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늦었지만,
공산당 파트를 발표해주시고 적극적으로 발제 준비를 도와주셨던 국어국문학과 이동환 학우,
국민당 파트를 발표해주시고 여러가지 조사와 정리를 성심껏 해주셨던 사학과 김혜영 학우,
다른 전공 과목의 과제가 바쁨에도 PPT를 깔끔하고 예쁘게 제작주시고 국민당 파트 조사에 힘써주셨던
경제 장가애, 경영 오영주 학우,
시험이 코앞임에도 공산당 관련 발제를 열심히 해주신 법학부 박교형 학우,
공산당 사회경제 정책 파트를 정리하셔서 발제문에 도움을 주신 행정학과 신웅재 학우, 여러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자, 일단 이것으로 사죄와 감사의 말을 끝내기로 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발표 시간에 들어왔던 질문 중에 미흡했던 답변을 먼저 보충하자면,
중일전쟁의 여파는 전장이나 정치 지배가 미치는 범위에 한정되었습니다. 광대한 농촌지대나 서북, 즉 신강성, 청해성 등의 여러 성에는 전쟁의 영향이 별로 없었다고 히메다 미쓰요시 저, 김순호 역, 20세기 중국사, 서울:도서출판 돌베게, 1995, p.152에서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참고되었으면 좋겠군요.
다음으로, 방공협정으로 맺어진 일본과 독일인데, 독일의 지원에 일본의 외교적 항의가 없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입니다.
공상희가 독일에서 구입 또는 차관으로 들여온 각종 무기와 군수물자와 중국에 파견된 독일군 군사고문단이 중일전쟁 초기 일본군을 괴롭혔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지원에 일본이 독일에게 어떠한 외교적 클레임을 제기했는지 그 명확한 사실에 관해서는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므로, 현재 저의 입장으로서는 확답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1937년에 맺어진 독-일간의 방공협정은 엄밀하고도 완전한 의미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위한 군사 협정은 아닙니다. 변훈 학우께서 주신 논문에는 한자로 적혀있지는 않지만, 방공협정은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한자로 防共協定이라 표기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Anti-Comintern Pact가 되니깐요. 이 방공협정은 말그대로 코민테른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적, 외교적 협조를 공고히하는 외교적 약속일 뿐이지, 소련과 코민테른을 제외하고 기타 국가들을 대상으로 협정 체결국 간의 동일한 외교적 입장이나 공동 군사 행동을 강제할 만한 효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1936년의 방공협정은 소련과 코민테른 동향에 관한 첩보(사실로 아직 확인, 검증되지 않은 수집된 데이터) 및 정보를 독일과 일본 양국 사이에 원활하게 공유 및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1936년의 방공협정은 1940년 추축동맹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판이자 계기가 되긴 하지만, 추축동맹과 같이 독일과 일본의 긴밀한 관계는 아직 외교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933년 일본은 만주국 문제로, 독일은 재무장을 위한 베르사유 조약 폐기로 국제연맹에서 자진탈퇴하는 등 식민지 경쟁에서 낙오한 파시즘 체제의 후발공업국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던 일본과 독일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추축동맹을 결성하게 되지만, 외교 관계라는 것은 단순히 동질성에 이끌려 하는 것은 아니지요. 방공협정 안에는 독일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숨겨져 있었으며, 독일과 중국의 관계도 이에 따라 변화하게 됩니다.
NSDAP(나치당)의 국가사회주의(또는 민족사회주의)는 여러가지 극단적 사상이 혼합된 정치 이데올로기이지만, 극우적 성격에 걸맞게 공산주의(볼셰비즘)에 대한 반대와 적개심이 그 한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NSADP과 SA(나치스 돌격대)가 독일 공산당과 격렬한 시가전을 펼치면서 그 사이에 보수적인 군부와 자본가의 지원을 얻어내어 성장한 것처럼 말이죠. 히틀러는 볼셰비즘에 대해 히스테릭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이후 독일국방군과 무장친위대가 돌파한 뒤에 러시아 점령지에서 유대인과 공산당을 무참히 살해한 아인자츠그루펜은 이러한 반공주의의 끝을 보여줍니다. 물론 1939년 폴란드 전역을 개시하기 이전에, 스탈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가운데 몰로토프와 리펜트로프가 폴란드 분할 점령 계획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요. 아무튼 나치 독일은 소련에 대항하여 첩보 및 정보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를 포섭하기 시작합니다. 독일 해군Kriegsmarine에 복무하면서 1920년대 독일과 일본과의 해군 기술 교류를 통해 일본에 관해 알고 있었던 카나리스Canaris가 방첩대Abwehr의 대장으로 임명되면서 소련과 코민테른에 대한 견제를 위해서 정보 수집intelligence 및 방첩counterespionage 공조를 위한 국제적인 체제 결성에 힘쓰게 됩니다. 카나리스는 일본의 정보 수집 역량에 긍정적이었으므로 일본과의 방공 협정에 대해 상신했였고, 결국 방공협정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일본이 히틀러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은 바로 일본 또한 반공에 대해 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29년 세계대공황 이전 1920년대는 일본이 경제적으로는 호황을 만끽하던 시대였던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다이쇼大正 데모크러시'라고 하여 민주주의적 자유 의식이 확산되고 의회 정치가 활성화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시대 조류를 타고 성장한 것이 바로 1922년에 설립된 일본의 공산당입니다. 다이쇼 데모크러시의 분위기를 타고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공산당은 이윽고 군대 내에 세포 조직을 만들어 일본의 군대를 '자본가와 지주의 계급적 이익의 대변자이자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하는 기관'(요시다 유카타, 최혜주, 일본의 군대, 서울: 논형, 2005, p.184)으로 선전하면서 군부에 대한 사상 공세를 펼쳐나갑니다. 결국 일본 군부는 '사상 요주의 인물'을 양산하는 공산당에 대한 탄압 및 공산주의에 대항한 일군만민론의 사상교육을 실시하였죠. 공산당에 대한 일본 정부와 군부의 탄압은 세계대공황과 1936년 2. 26사건을 거치면서 군국주의에 의한 우경화가 심화되면서 더욱 거세지게 됩니다. 일본 내부에서의 공산당의 위험과 함께 대외적으로는 만주국을 차지한 일본으로서-노몬한 사건으로 소련의 기갑 전력에 호되게 당한 이후로 더욱이- 소련은 언제나 주요 가상 적국으로서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만주의 관동군이 상당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얄타 회담 등에서 미국이 소련의 대일 참전을 유도하여 만주의 관동군 병력을 묶어두고 미 해병대의 피해를 줄이면서 일본 본토를 점령하려는 의도(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상륙전에서 일본군의 옥쇄로 상당한 병력 피해를 입었던 쓰라린 경험으로 인한 영향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를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듯이 소련에 대한 일본의 견제는 나치 독일의 마음에 들만 했습니다.
나치 독일의 권력 구조 변동과 1937년에 맺어진 방공협정으로 인해 독일과 중국 간의 관계도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독일 내 친중국 인사의 경질로 일본과 손을 맞잡는데 긍정적인 인사들이 정책 결정을 책임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933년 1월 30일, 극적인 정치적 모략으로 수상에 오른 히틀러는 이후 착실하게 정부 내각과 군부를 장악해 나갑니다. 장검의 밤 사건을 통해 히틀러를 반대하는 보수 정치가와 함께 히틀러를 압박하는 돌격대SA의 수장인 룁을 제거하고 그 빈자리를 히믈러가 채웠던 나치 독일 초기의 권력 투쟁과 같이, 히틀러는 괴링과 괴벨스가 날조한 스캔들을 통해 블룸베르크-프리치 사건을 일으켜, 1938년 2월 2일 외무장관인 폰 노이라트와 국방군 최고사령관인 폰 블룸베르크, 육군 총사령관인 폰 프리치를 경질하고 외무장관에 폰 리벤트로프, 국방군 총참모장에 카이텔, 육군 총사령관에 브라우히치를 임명하게 됩니다. 그해 2월 4일에는 국방군Wehrmacht 최고사령관 자리에 히틀러가 앉게 되지요. 이는 퓨러프린치프(지도자원리)에 따른 글라이스샬퉁(획일화)-즉 외교와 군사 라인을 히틀러가 독차지하여 전권을 직접 휘두르겠다는 심산으로 외교와 군사의 요직에 히틀러의 심복을 심어두게 된겁니다. 이러한 인사 결과는 곧 독일-중국 관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지요. 중국과 군사적으로 외교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등 친선 교류를 이어오던 독일 정부의 친중국 인사들-폰 노이라트, 폰 블룸베르크 등-이 경질되고 이후 추축 동맹 형성에 일조하는 친일 인사인 폰 리펜트로프와 (히틀러의 마리오네트와 다름 없는) 카이텔이 외교와 군사 정책을 담당하면서 일본의 대륙 침략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독일의 대중국 정책은 변화하게 됩니다. 독일이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되면서, 독일은 중국 주재 독일 대사 오스카 트라우트만Oskar Trautmann과 함께 독일 군사 고문단-폰 팔켄하우젠을 비롯한-이 본국으로 소환당하게 됩니다. 1936년의 방공협정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일본과 독일 간의 협조 체제를 약속하는 것이었으므로 1938년 초까지 중국에 대한 독일의 지원이 중단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방공협정으로 인해 양국 간에 운명공동체적인 군사동맹이 구축되었다면 상하이-오송 전투에서 조밀한 토치카 진지와 독일식으로 재편된 군대 조직으로 일본군의 상당한 피해를 입힌-또한 중국군의 선전을 이끌어낸- 팔켄하우젠Falkenhausen이 중일전쟁 초기에 있을리가 없었겠지요.
자료와 시간의 부족으로 제가 답변드릴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인 듯 싶습니다. 혹시나 중국과 독일 간의 관계를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영어 위키피디아의 'Sino-German Cooperation until 1941(http://en.wikipedia.org/wiki/Sino-German_cooperation_until_1941)'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겁니다. 구범진 교수께서 번역하신 레이 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라는 책을 읽어보시면 간간이 독일과 중국 간의 관계에 관해서 서술되어있으므로 일독을 권합니다.
아, 그리고 제가 말한 1936년의 방공협정에 관한 내용은 Christian W. Spang and Rolf-Harald Wippch(eds.), Japanese-German Relations, 1895-1945: War, diplomacy and public opinion, London: Routledge, 2006.을 참조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시면 방공협정에 관한 독일과 일본 사이의 관계 변화를 잘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답변 감사합니다 당시 중,독,일,소 간에 관계에 대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네요^^
댓글이 조금 늦었지만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교생실습 잘하고 오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