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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인협회 만해축전 학술세미나>, 2012. 8. 12.
5․18민주화운동의 시학
―김남주의 「학살」 연작시를 중심으로
맹문재
1.
5ㆍ18민주화운동이 올해로 32주년이 되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5ㆍ18민주묘지에서 시민들을 비롯해 각 정당의 대표를 비롯한 정치인, 정부 인사, 5․18유공자, 유족, 관련 단체 회원 등이 참석해 기념행사를 가졌다. 전국 곳곳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려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렸다. 기념식 행사 외에도 5ㆍ18민주화운동을 기리는 학술대회, 음악회, 전국 휘호 대회, 추모 법회, 추모 예배, 사진 전시회, 마라톤 대회, 인식 조사, 기록상 제정 추진, 민주주의 집 마련 등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되었다. 기념사에서 국무총리는 5․18민주화운동이 시대의 혼란 속에서 민주화의 물꼬를 텄다고 평가했다. 진정 5․18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실현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5․18기념재단이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공공데이터센터에 의뢰해 5․18민주화운동 국민 인식을 발표한 결과는 관심을 끈다. 전국 성인 남녀 72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5.8%가 5․18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답변했고, 시민의식과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는 의견도 62.3%로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53.5%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대답했으며, 5․18기념재단에 대해서는 75.9%가 잘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5․18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많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상당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이 든다. 5․18민주화운동은 결코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기에 안타깝고도 씁쓸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5․18기념재단이 발표한 ‘민주화운동 피해자에 대한 심리학적 부검’의 연구 보고서 또한 관심을 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중에서 자살자의 경우 10명 중 8명은 직접적으로 고문이나 학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치명적인 부위를 중심으로 고문을 당해 외상뿐만 아니라 뇌손상까지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의료적 치료를 받지 못하고 통증을 잊기 위해 알코올에 많이 의존해 전체의 60%가 알코올 증독장애 증상을 보였다. 또한 공권력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정신 혼란을 가져오거나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성향을 보였다. 5․18민주화운동 이전에는 정신병리적 성향이 없었는데, 고문을 당한 후 누군가 쫓아온다고 하거나, 괴성을 지르거나,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하는 등의 증상을 보였다. 심지어 아내를 살해하거나 교도소에서 자살한 사례도 있었다. 2011년 12월 현재 5․18민주화운동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은 380명인데, 이 중에서 자살한 사람은 42명으로 10.4%의 비율이다. 일반인들의 자살률보다 350배가 높은 수치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치료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느덧 우리 사회는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잊고 있다. 유공자나 유족이나 관련 단체들을 제외하고는 점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5․18민주화운동의 소중함을 인정하면서도 기념행사를 텔레비전으로 바라보는 정도이다. 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는 대학 캠퍼스에서도 5·18민주화운동을 기리는 행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의 축제 기간에 빠지지 않았던 5·18민주화운동 관련 사진전이나 다큐멘터리 상연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붙였던 대자보 자리에는 아이돌 그룹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5·18민주화운동의 의의를 토론하는 자리도 거의 없고, 5·18민주화운동의 장소를 찾아가는 역사 기행도 많이 줄었다. 대학생들 역시 5·18민주화운동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더 이상 의미를 새기지 않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절실함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지만 씁쓸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5․18민주화운동은 미래의 민주주의를 위해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5·18민주화운동의 기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고 기념사조차 마련하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민주화를 향상시킨 국가의 공식 행사를 무시한 것은 실로 우려할 점이다. 5·18민주화운동은 그 기록물이 유엔 유네스코 세계기록물 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세계의 민주화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런데도 폄하되고 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은 32년이 지난 오늘에도 치유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김남주의 「학살」 연작시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의 의의를 새겨보고자 하는 것이다.
2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붉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떨지 않는 집이 없었다
밤 12시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버렸고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학살 1」 전문
화자는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에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한 장면을 여실하게 고발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과 전남 도민이 중심이 된 항쟁이었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신군부는 같은 해 12·12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언론과 국내의 정보기관을 통제하며 정권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학생들이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고, 국회도 계엄 해제와 개헌 등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1980년 5월 13일 서울에서 6개 대학 학생 2,500여 명이 집결해 계엄철폐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5월 14일 전국 37개 대학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5월 15일 30개 대학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와 같은 학생들의 시위에 자극받은 광주 지역 학생들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비상계엄 해제, 정치 일정의 단축,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5월 16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의사가 신군부에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보고 시위를 중단하고 시국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고, 광주 지역 학생들도 따랐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동을 방문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이 5월 16일 급거 귀국해 시국 관련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는데, 국민들의 기대와 달리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조치는 헌정을 파괴하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밀어붙인 것이다. 그리하여 5월 17일 11시 40분 경 신군부는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 금지령, 휴교령, 언론 보도 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를 발표하기 이전에 서울 지역 대학생 회장단을 연행해갔고,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민주인사와 정치인들을 체포했으며, 군대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자신들의 집권 계획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본격적으로 제거하고 나선 것이다.
5월 18일 새벽 신군부는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공수특전단을 파견했다. 공수부대원들은 학교를 급습해 남아 있는 학생들을 구타하며 학교 본부 건물에 감금했다. 광주 시내 주요 관공서와 거리에도 공부부대원들을 배치했다. 그리하여 전남대 학생들이 학교에 갔을 때 완전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은 정문에서 학생들의 출입을 저지하고 귀가할 것을 종용했다. 학생들이 거부하고 계엄군은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치자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군홧발로 짓밟는 등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붙잡은 학생들의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힌 채 꿇어앉히기도 했다. 신군부는 부마항쟁 때처럼 학생들을 강경하게 진압하면 시위가 가라앉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공수부대원들의 비인간적인 진압에 학생들이 극도로 흥분해 새로운 대결 양상을 가져왔다. 결국 신군부의 강경 진압을 목적으로 한 공수부대의 투입이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5월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원들은 광주 시내의 대학생과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시민들까지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군인들의 만행을 목격한 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감으로 거리에 나섰다. 공수부대원들은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자 5월 21일 새로운 작전을 위해 철수했다. 광주시 외곽도로를 봉쇄한 뒤 상황을 주시하다가 5월 27일 0시를 기해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위의 작품은 이와 같은 상황을 고발하고 있다. 화자는 “밤 12시”가 되자 경찰을 대체한 전투경찰마저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사전에 연락받은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고, 곧이어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이 들어서는 것도 보았다. 화자는 이와 같은 상황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계획적”이고 “노골적”인 것이었기에 치를 떤다. 실제로 공수부대원들이 저지른 만행은 끔찍하기가 이를 데 없어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붉은 심장이” 되었고,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 되었다. “처녀”와 “아이들”도 살해되었다. “한 집 건너 떨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로 광주 시내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산도 무서워 얼굴을 가렸고, 강도 호흡을 멈추었고, 하늘도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화자는 비유한다. 그리하여 화자는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 처참하지 않았으리”라고 외친다.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이 게르니카의 학살보다 처참하다고 고발한 것은 피해 정도를 떠나 그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게르니카의 학살은 1937년 스페인 제2공화국에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의 파시스트 국민군을 지원한 독일 나치 공군의 폭격에 의해, 즉 이민족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그에 비해 5·18민주화운동은 동족의 학살이었던 것이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29주년을 맞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사망자 중에서 14세~19세의 중고등학생이 수십 명이고 초등학생도 들어 있다. 사망의 원인으로는 총상이 전체의 70%를 넘는다. 계엄군이 민간인들을 과잉으로 진압했음이 여실한 것이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국민들에게 총을 쏘았다는 사실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과연 누구를 위해 학살을 저질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학살의 원흉이 지금
옥좌에 앉아 있다
학살에 치를 떨며 들고일어선 시민들은 지금
죽어 잿더미로 쌓여 있거나
감옥에서 철창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저편 아메리카에서는
학살의 원격 조종자들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당신은 묻겠는가 이게 사실이냐고
나라 국경 지킨다는 군인들이 지금
학살의 거리를 누비면서 어깨총을 하고 있다
옥좌의 안보를 위해
시민의 재산을 지킨다는 경찰들은 지금
주택가에 난입하여 학살의 흔적을 지우기에 광분하고 있다
옥좌의 질서를 위해
당신은 묻겠는가 이게 사실이냐고
검사라는 이름의 작자들은
권력의 담을 지켜주는 세퍼드가 되어 으르렁대고 있다
학살에 반대하여 들고일어선 시민들을 향해
판사라는 이름의 작자들은
학살의 만행을 정당화시키는 꼭두각시가 되어
유죄판결을 내리고 있다
불의에 항거하여 정의의 주먹을 치켜든 시민을 향해
당신은 묻겠는가 이게 사실이냐고
보아다오 파괴된 나의 도시를
보아다오 부서진 나의 집과 박살난 나의 창을
보아다오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보아다오 학살된 아이의 피묻은 눈동자를
장군들, 이민족의 앞잡이들
압제와 폭정의 화신 자유의 사형집행인들
보아다오 보아다오 보아다오
살해된 처녀의 머리카락 그 하나하나는
밧줄이 되어 너희들의 목을 감을 것이며
학살된 아이들의 눈동자
그 하나하나는 총알이 되고
너희들이 저질러놓은 범죄
그 하나하나에서는 탄환이 튀어나와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너희들의 심장에 닿을 것이다.
―「학살 3」 전문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폭력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5월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고, 날이 갈수록 늘어나 20만 명 이상 참여했다. 택시, 시내버스, 시외버스 등도 계엄군의 진입을 가로막았다. 시민들을 총의 개머리판으로 구타하거나 대검으로 찌르는 등의 만행을 자행한 계엄군은 20일 24시부터 집단 발포를 가했다. 이 만행으로 인해 광주 시내의 병원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민들은 21일 오후부터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화순과 나주 지역의 경찰서와 파출소에 있는 예비군 무기고를 열고 시민군을 결성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따라 계엄군은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광주 지역 시위를 ‘광주사태’라고 명명하고, 즉 불순분자와 폭도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규정하고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아울러 광주 외곽 도로망을 차단해 22일 이후 광주 지역은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당했다. 그렇지만 광주 시내는 시민군에 의해 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기관이 유지되었으며 금융기관이나 백화점에서 한 건의 사건사고도 없었다. 시민 대표를 선정해 계엄군과 협상하기 시작했고 자체적으로 무기도 회수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5월 27일 새벽 2만 5천 명이나 되는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진격해왔다. 그리고 전남 도청에서 항전하던 시민군을 마치 적군처럼 살상하면서 진압했다.
신군부는 곧바로 5·18민주화운동에 가담한 시민들을 색출해서 연행했다. 연행된 시민들은 이미 짜인 각본에 따라 온갖 고문과 구타와 비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며 내란음모 선동 등의 죄명으로 수사를 받았다. “학살의 원흉”은 “옥좌에 앉아 있”는 반면 “학살에 치를 떨며 들고 일어선 시민들은” “죽어 잿더미로 쌓여 있거나/감옥에서 철창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시민의 재산을 지킨다는 경찰들”도 “옥좌의 안보를 위해” 학살의 흔적을 지우는데 바쁘고, “검사라는 이름의 작자들”도 “권력의 담을 지켜주는 세퍼드가 되어 으르렁대고 있”고, “판사라는 이름의 작자들”도 “학살에 반대하여 들어 일어선 시민들”에게 “학살의 만행을 정당화시키는 꼭두각시가 되어/유죄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저편 아메리카”도 “회심의 미소를 짓고” 바라보고 있다. 실제로 5·18민주화운동은 그동안의 한미관계에 새로운 인식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을 미국이 묵인했다는 의심이 국민들 사이에 퍼지면서 한국전쟁 이후 유지해오던 우호적인 관계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1980년 7월 4일 신군부는 마침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서 발표했다. 서울의 대학생 시위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김대중을 중심으로 조종되었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한 것이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무런 연관이 없는 김대중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이 사건으로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4
출옥하고 다음다음날 아침 우리는
녀석의 무덤을 찾았다 무덤에는
녀석의 불같은 성격을 닮으려고 그랬는지
창끝처럼 억새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우리는 망초꽃과 패랭이를 다발로 묶어 무덤 위에 던지고
차고 온 소주병을 병째로 들이부었다
그러자 그것은 황갈색 꽃잎에서 이슬로 맺히더니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붉게 타오르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나더러 너는 시인이니까
녀석의 넋을 위로하는 시라도 한 수 읊어야 되지 않겠느냐였다
암울한 시대를 만나 총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살아남아 이렇게 꽃다발이나 던지고
추모시 운운하는 나를 두고 무어라 할까 무덤 속의 전사는
…… 그는
손가락에 침 발라 창에 구멍을 내고
경악의 눈으로
바리케이드의 학살을 엿보지 않았다
그 자신이 바로 바리케이드의 투사였으니
꽃다발을 들고 그는 이렇게
먼저 간 자의 무덤을 찾은 적도 없었다
그 자신 바로 무덤이었으니……
영광 있으라 격동의 시대에
민중의 해방을 위해 최초로 봉기한 자에게.
―「학살 4」 전문
화자는 “출옥하고 다음다음날 아침” 친구들과 함께 “녀석의 무덤을 찾”아갔다. 가지고 간 꽃다발을 무덤 위에 올려놓고 소주를 붓는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그것은 황갈색 꽃잎에서 이슬로 맺히더니/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붉게 타”올랐다. 그만큼 “그”는 올곧았고 불타는 정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리케이드의 학살을 엿보지 않았다/그 자신이 바로 바리케이드의 투사였”던 것이다.
함께 간 “친구들은 나더러 너는 시인이니까/녀석의 넋을 위로하는 시라도 한 수 읊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지만 화자는 응하지 않는다. “암울한 시대를 만나 총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살아남”았는데 어떻게 시를 쓸 수 있느냐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마치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나치 정권에 의해 세상을 뜬 친구들과 달리 운 좋게 살아남은 자신을 미워하면서 반성하는 심정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영광 있으라 격동의 시대에/민중의 해방을 위해 최초로 봉기한 자에게”라고 마음속으로 기원한다.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위법적으로 집권한 신군부 인사들에 대한 고소와 고발이 시작되었다. 1995년 7월 검찰은 신군부가 불법적으로 정국을 장악했고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것이 사실이지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불기소 처분했다. 그렇지만 1995년 12월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되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재수사에 나섰고, 국회도 5·18특별법을 제정해 공소시효를 정지시켰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에게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했다. 12월 징역형은 사면되었지만 추징금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대법원은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이루어진 정권은 어떤 경우라도 용인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실제로 5·18민주화운동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보여주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2011년 영국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 국제자문위원회를 통과했다. 5·18민주화운동 자료,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자료, 시민들의 성명서나 선언문 및 일기, 관련 사진,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 피해자들의 병원치료 기록, 피해자 보상자료 등이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그만큼 5·18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를 넘어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외세가 민족의 모순을 해결시켜주는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도 인식시켜주었다. 따라서 5·18민주화운동은 미완성의 항쟁이 아니라 우리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준 민중항쟁이다. 김남주를 위시한 1980년대의 시문학은 그와 같은 가치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비록 항쟁의 폭로나 증언에 지나친 목소리를 내거나 항쟁에 참여하지 못한 죄의식을 감상성으로 나타낸 점이 있지만, 언론조차 항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시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이 활발하게 계승되지 못하고 있다. 항쟁의 정신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역사나 지역적인 역사로 정지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현재와 함께해야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은 4․19혁명, 부마항쟁, 6월항쟁 등과 역사적 궤를 같이하는 중요한 역사이다. 상업적 자본의 횡행으로 사회의 모순이 점점 심화되어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이 시대에 다시금 시인들의 역할이 기대되는 것이다.
맹문재
저서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만인보의 시학』『여성시의 대문자』,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 편저로『박인환 전집』『김명순 전집-시·희곡』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