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문학관 - <청산댁>
1. 소설가 조정래는 『태백산맥』 이전부터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 중에서도 <청산댁>은 여성의 시각으로 마주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길지 않은 글 속에 담은 수작이다. 한 여인이 겪게 되는 남편의 일본 징용과 한국전 징병 그리고 자식의 월남전 참전까지,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했던 역사의 격류 속에서 묵묵히 견디고 살아가야 했던 우리의 지난한 삶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1981년 TV 문학관은 이 작품을 영상화했다.
2. 부잣집 종으로 일하던 여인은 같은 남자 종과 살림을 차렸지만, 주인의 회유에 의해 남편은 징용을 가게 되고 그 사이에 주인집에서 쫓겨나고 아들은 불구자가 되고 만다. 다행히 해방이 되자 남편은 돌아오지만 잠깐 동안 누렸던 행복은 한국 전쟁으로 다시 무너져 버린다. 다시 징병된 남편은 이제는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여인은 장애자 아들과 새로 태어난 아들과 함께 고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과부의 삶은 힘들게 농사일을 하고 억척스럽게 돈을 버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험담과 남정네들의 유혹까지 견뎌야하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청산댁’으로 불리게 된 여인은 오직 자식들을 위해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나간다.
3. 둘째 아들의 성공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꿨던 청산댁에게 비극은 또다시 반복된다. 월남에 파병된 둘째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것이다. 아들 또한 아들을 남기고 또 다시 한국사의 모순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청산댁은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마을 당상나무에게 터뜨리지만, 이제 남은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온 청산댁은 며느리에게 손자의 돌잔치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그때 아들이 가장 좋아하던 음식도 같이 준비하자고 말하면서. <청산댁>은 철저하게 한국사의 비극을 여인의 시각에서 여인의 고통에서 그려나간다. 그것은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거대한 힘에 의한 무너짐이기도 했지만, 또한 어떤 고난 속에서도 무너질 수 없는, 살아남은 자들을 지켜야 했던 한국 여성들의 삶에 대한 처절한 칭송이기도 하다. 폐허가 된 세계는 방치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 곳에서 새로운 희망과 삶을 유지하고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우리의 어머니들이 기꺼이 담당하고 자식을 돌보며 대한민국을 생존시켰던 것이다. 청산댁은 자신의 불구아들과 손자 그리고 며느리와 함께 또다시 살아야 하는 것이다.
4. 1980년대는 유독 역사의 비극에서 파생한 수많은 사례들이 소설로 영상으로 탄생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과 해방 후 한국 전쟁 그리고 월남 전쟁까지 전쟁으로 점철된 한국의 현대사는 수많은 남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고 후방의 삶은 여성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여성들은 가족들을 돌봐야 했고, 남성들을 기다리며 일상을 유지해야만 했다. 묵묵히 희생한 여성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혼돈 속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바로 우리를 길러낸 어머니의 초상이다.
5. 80년대 재현된 한국의 현대사는 결코 끝나버린 역사의 과거만은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힘이며 족쇄이기도 하다. 우리는 한때 역사의 진보를 믿기도 했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파멸적인 전쟁이 반복되고 있고, 이기심에 사로잡힌 파벌싸움에 몰두하며 서로를 증오하는 비극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산댁>은 우리에게 역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로운 삶이 강력한 외부의 힘에 의해 언제든지 붕괴되고 파괴될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자각시켜 준다. 개인적 삶의 연약함,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힘에 대한 두려움을 경고한다. 개인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권력자들의 의도에 따라 그저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장기판의 졸과 같은 존재인가? 여전히 역사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인가? <청산댁>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개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 그러면서 역사의 수동적 존재가 아닌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에 대한 문제도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여전히 역사와 시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첫댓글 - 한반도 역사에서 여인들의 한숨소리는 최근에야 사라진 것을 기억한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가난한 삶의 여정을 그대로 껴앉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우리들의 할머니이며 어머니요, 누이들이었다. 이것은 우리 뿐만아니라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고, 아직도 그 아픔을 되풀이하는 나라들도 있다. 이런 것을 보면 경제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기도 하고.......